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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10화 (10/237)

10화

‘출연경력 전무. 아역전문 학원을 거치지 않은 상태.’

송미연 작가가 들고 있는 건 아역배우 박유진의 프로필이었다.

아까 전 차동석에게 전달받은 것.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바로 캐스팅했을 텐데.’

그 정도로 비주얼이 좋았다.

하지만 프로필의 텅텅 빈 경력란이 걸렸다.

그래서 최소한 기초적 연기력 정도는 확인하려는 것.

유진이 오디션을 볼 장면.

그건 키즈모델 캐릭터, 작품 내 ‘주원’이라는 캐릭터의 첫 등장장면이다.

다만 대본 첫줄부터 쉽지 않은 지문이 등장한다.

<예쁘고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주원>

매우 추상적인 지문이다.

예쁘고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대체 뭘 요구하는 것인가?

‘나라고 이렇게 쓰고 싶던 게 아니야.’

그 지문을 직접 쓴 송미연 작가.

되도록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문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주원 역할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처음 집필할 때만 해도 이렇게 관심이 커질 줄은 몰랐으니까.’

애당초 등장시킬 생각이 없던 캐릭터다.

일종의 맥거핀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던 것.

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고 있다.

주원이라는 캐릭터가 언제 등장할지 기다리는 맛으로 드라마 본다!

이런 반응까지 있을 정도니.

그렇게 급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추상적 지문이 등장했던 것.

‘아이들에겐 특히 더 어려운 요구겠지.’

그래서 여태 오디션을 본 아이들은 과한 표정을 지었다.

볼을 부풀린다던가, 윙크를 한다던가.

누구는 꽃받침을 하기도 했다.

‘그건 너무 과해. 어린이 드라마도 아니고.’

눈앞의 아역배우, 박유진은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송미연은 기대와 우려를 반반씩 가지며 오디션을 지켜보았다.

상황은 간단하다.

장하연의 집으로 놀러온 주인공 일행.

그때 문을 열어준 것은 장하연의 아들, 주원이다.

“어? 안녕하세요.”

그러나 유진은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그저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는데, 그것만으로도 폭발력은 굉장했다.

‘그래, 저거라고!’

송미연 작가가 속으로 외쳤다.

이미 비주얼이 세팅되어 있으니 과할 필요가 없다.

등장하며 자연스레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알고 있는 거야, 쟤도. 자기 얼굴이 잘났다는 걸.’

송미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진의 독백연기가 시작되었다.

“전 주원이라고 해요. 아줌마는 누구세요?”

대사를 치는데 긴장한 티가 전혀 없다.

게다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몸은 제법 움츠러든 상태,

낯선 어른들을 보고서 품는 미약한 경계심까지 표현해내고 있는 것.

“네. 제가 엄마 아들 이주원 맞아요.”

그런데 유진이 대사를 치면 칠수록.

송미연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유진의 대사처리가 다소 독특했기 때문.

‘발음이 또박또박해졌고, 톤이 한층 낮아진 느낌이야.’

예쁘게 꾸민 비주얼과는 다소 상충하는 느낌.

‘대사를 왜 저렇게 치지? 설마 긴장한 건가?’

역시 경력이 없는 애라 그런가.

송미연 작가가 기대감을 지워나가려던 때.

“엄마 피곤해서 자고 있어요. 깨우면 안 돼요.”

“엄마 저 사진 찍는데 따라왔거든요. 그래서 피곤하대요.”

송미연 작가는 눈치챘다.

유진의 연기가 일관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걸.

본래 저 대사, 저 장면은 한없이 밝다.

키즈모델로서 일하고 돌아온 건 주원이다.

그런데 오히려 매니저 역할을 하던 어머니 장하연이 피곤해 잠든 상황.

그걸 순수한 아이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 일종의 개그씬.

그러나 유진의 대사톤은 가볍지 않고 묵직했다.

그 탓에 주인공 일행에게 피곤한 엄마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같다.

이로 인해 발생한 효과.

‘주원이라는 캐릭터가 천진하고 해맑은 게 아니라, 의젓함이 느껴져.’

그제야 송미연은 유진이 구축한 ‘주원’이라는 캐릭터를 눈치챘다.

“엄마를 닮아서 그래요.”

주원은 어렸을 적부터 키즈모델로 오래 활동했다는 설정이다.

또한 엄마 장하연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언급이 있고.

하지만 그 설정은 오디션 대본에 적혀있지 않다.

드라마를 모두 챙겨봤어야 눈치 챌 수 있었을 것.

‘그 설정을 토대로, 마냥 귀엽고 천진한 아이가 아니라 똘똘하고 의젓한 캐릭터로 만들었다?’

얼굴은 매우 귀여운 아이가 의젓하게 군다.

그 갭이 독특한 시너지를 발휘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귀여운 외모 덕에 어려서부터 모델 일을 했다.

그로 인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즉 유진이 캐릭터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것도 작품의 설정을 토대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오디션 대본이 간 건 어제였어. 게다가 이 짧은 장면에서 캐릭터성을 확실히 보여주다니. 진짜 연기 경력이 없는 거 맞아?’

이 모든 것이 불과 하루 만에 이뤄졌다는 사실.

8살짜리가 작가도 생각 못한 부분을 건드려, 새로운 캐릭터성을 창조해냈다.

성인 배우들도 쉽사리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까지! 감사합니다아!”

연기가 끝난 뒤.

다시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돌아와 꾸벅 인사하는 유진.

“박유진 배우님. 혹시 우리 드라마 다 봤어요?”

“넵! 다 봤어요!”

그 대답을 듣고 송미연은 확신했다.

유진이 드라마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캐릭터성을 진화시켰다고.

그리하여.

“계약합시다.”

송미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고.

“당장! 당장 계약하자고요!”

그렇게 외친 것이다.

“좋습니다. 아니, 진짜 대박입니다. 당장 계약하죠!”

그건 송미연 작가뿐이 아니었다.

정CP와 고PD 역시 적잖이 흥분한 상태.

골칫거리가 해결된 것으로도 모자라.

꽤 멋있는 그림을 뽑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

그러나.

“흠.”

이런 분위기 속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한 사람.

바로 차동석이었다.

그는 작가와 PD, CP가 보이는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곧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잠시 후.

스태프들이 내부회의에 들어간 터라.

잠시 대기 중인 유진과 차동석.

“저분들이 저 엄청 조아하는 것 같아요. 그쵸, 아조씨?”

유진은 헤헤 웃으며 차동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 아조씨 표정 무서워졌다!”

유진의 말대로.

차동석의 표정이 제법 음흉해졌다.

“나만 믿어라, 꼬맹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클클 웃는 차동석.

“아무래도 너한테 목숨 건 것처럼 보이는데. 이참에 뽑아먹을 건 다 뽑아먹어야겠다.”

유진은 저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차동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협상 테이블 위 악마가 된다는 사실을.

*

연기하는 것이 유진의 영역이라면.

협상하는 것은 전적으로 차동석의 몫이었다.

“좀 더 검토해보겠습니다.”

“네?”

계약서 작성을 위해 붙은 정CP.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표정이랄까?

아까 그건 내부회의랄 것도 없었다.

PD와 CP, 작가의 만장일치.

특히 송미연 작가가 유진 캐스팅을 강하게 어필했다.

이제 계약을 끝마친 뒤, 며칠 후 촬영만 마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상황.

“아니, 검토라뇨. 그게 무슨. 오디션을 보러 오신 것 아닙니까? 저희는 합격을 드렸고요. 여기서 문제될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계약을 검토해보겠다니?

오디션까지 봐놓고 저런 태도를 보이니.

정CP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계약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차동석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다급한 것은 <유별난 친구들> 제작진 쪽이다.

유진의 연기까지 보고나니 아주 안달이 난 상태.

다음주 방영이라 서둘러 촬영에 임해야한다.

여기서 계약이 어그러졌다간 그야말로 패닉.

즉, 협상의 주도권은 이쪽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하다니. 우리 꼬맹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군.’

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

그건 바로 포커페이스다.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을 상대방이 들고 있다고 해서 티를 내선 안 된다.

그럼 협상의 주도권이 상대방에게 넘어가기 때문.

물론 당장 계약을 맺는다고 해서 유진과 주역 매니지먼트에게도 손해볼 건 없다.

케이블 채널이라곤 해도 송미연 작가의 드라마.

거기다 시청자들의 관심도가 쏠린, 아역치곤 꽤 중요한 역할이다.

“저희 꼬맹이······아니, 저희 배우의 회당 출연료가 30만원이더군요.”

30만원.

방송국에서 드라마 출연 아역배우에게 주는 최저금액.

“저는 PD님께서 저희 배우를 강력히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물론입니다. 저런 아역배우는 처음입니다. 진심으로 원한다고요!”

“흐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아역 전문 에이전시가 아니라 좀 만만히 보신 게 아닌가 싶은데.”

빙빙 돌려 말하고 있지만.

차동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출연료가 너무 적다는 것.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 방송국 내부규정에 따른 계약서입니다. 그에 따라 산정한 아역 출연료인데······.”

“또한 아역배우 보호를 위한 조항이 다수 빠져있더군요. 방영날짜가 급박하다는 이유로, 저희 배우가 혹사당할까 심히 우려가 됩니다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차동석.

이는 차동석이 DV 엔터에 있던 시절부터 자주 쓰던 전법.

상대방을 계속 코너로 몰아넣어 정신없게 만든 뒤.

협상 주도권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다.

“호, 혹사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조항을 빼먹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계약서 준비에 착오가 있던 모양입니다. 지금 전 스태프들이 완전 비상상황이라서요.”

덕분에 진땀을 흘리며 수습하려는 정CP.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차동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희 배우는 곧 영화 오디션을 비롯해, 여러 스케줄을 소화할 예정입니다. 다만 저희 주역 매니지먼트의 신조가 ‘배우 보호를 1순위로 하자’여서 말이죠.”

사실 유진의 스케줄은 텅 비어있다.

이제 막 프로필을 돌린 참이니까.

유진이 스스로 물어온 영화 <리플레이> 오디션을 빼곤 확정된 게 없다.

즉, 일종의 블러핑.

‘하지만 먹힐 수 밖에 없는 블러핑이지.’

정CP는 이미 유진의 비주얼과 연기력을 확인한 상황.

차동석의 허세가 허세로 들리지 않을 터였다.

기획사에겐 배우도 일종의 상품이다.

그리고 그걸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것이 바로 기획사가 해야 할 일.

“하지만 저희 배우에게도 이번 기회는 무척 소중합니다. 꼬맹이······아니, 박유진 배우가 <유별난 친구들> 드라마를 모두 챙겨볼 정도로 좋아하니까요. 또 작가님, PD님 모두 훌륭하신 분이라.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적당히 당근을 제시한다.

냉정히 따지면 주역 매니지먼트는 완전 중소 기획사.

유진도 프로필상으로는 경력 한 줄 없는 생초짜 배우다.

PD, 작가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는 상황.

협상한다고 너무 간을 보다간 안 좋은 이미지가 박힐 터였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먼저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차동석은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다음 날.

온플러스 드라마국의 회의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일까.

다들 얼굴이 한결 가벼워진 모습.

특히, 정CP와 고PD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서 결국 출연료 40만원으로 타협봤다.”

“CP님답지 않으시네요. 무명들 출연료 잘 깎으시면서.”

“제이미한테 소개받은 건데 어떻게 그러냐? 게다가 그 차동석이라는 양반, 보통이 아니더만.”

“듣자하니 DV 엔터 때 아역팀 팀장이었다던데요. 그때 별명이 협상괴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경력도 없고, 영세 기획사인 줄 알고 좀 만만히 봤다가 된통 당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CP의 얼굴은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었어.”

“동감입니다. 작가님도 오케이해서 다행이었어요.”

“그 양반이 제일 좋아하던데? 오디션 보는 내내 아주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만.”

그때. 고PD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고PD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작가님. 네. 지금요? 아,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진 뒤.

정CP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송미연 작가야? 설마 이제 와서 배우 마음에 안 든다, 뭐 그런 거 아니지?”

“아뇨. 어제 오디션 끝나고 대본 수정을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지금 메일로 쐈대요.”

“무슨 일이래냐? 그 양반 대본 수정 절대 안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

“그러니까요. 저도 엄청 놀랐다니까요?”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노트북을 꺼낸 고PD.

정CP가 의자를 끌고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왔다.

“뭐 쓸데없는 거 안 넣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잠시 후.

“······대본이 훨씬 재미있어졌는데요?”

수정된 대본을 모두 확인한 고PD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갑자기 무슨 일이냐?”

옆에서 함께 읽은 정CP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그 원인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 알겠다. 아역 분량이 꽤 는 것 같지 않아요?”

그게 바로 고PD가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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