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서울의 한 회의실.
그곳에는 네 명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양독립영화제 장편 경쟁작 본선 심사위원들.
현재 누구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줄 것인가.
그에 대한 토론을 나누는 중이다.
“예심을 통과해 본선에 올라온 게 총 7개의 작품. 다들 어떻게 보셨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유도 예술극장의 프로그래머, 이현이었다.
“모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 흐름을 이어받은 것은 영화평론가 서지영.
“개인적으로 <밤의 까마귀>를 대상 후보작으로 놓고 싶군요. 상징성이 뛰어난 작품이고 작품의 주제의식이 매우 명확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가 조화롭지 못하던데요. 연출도 다소 투박하고요.”
영화감독 채안수가 바로 반박의견을 냈다.
“저는 <해변의 남자>가 좋았어요. 인간이 가진 어쩔 수 없는 고독을 매우 드라이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표현해낸 영화죠.”
“흠. 제게 그 영화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이어붙인 거란 느낌이었는데 말입니다.”
곧장 시작되는 논쟁.
독립영화제의 심사위원들답게.
저마다의 예술관이 확고했고, 그만큼 취향도 다 달랐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작 선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플레이>. 이 영화가 압도적이라고 봅니다.”
서지영과 채안수의 논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영화배우 김지유가 제 의견을 표출했다.
“마치 악 그 자체를 형상화한 영화 같았어요. 마주하는 순간 매우 불쾌하지만 동시에 우릴 유혹하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내내 양가감정을 느꼈습니다.”
“동의합니다. 지극히 논쟁적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영화였습니다. 확실히 신인 감독다운 패기가 느껴지더군요. 금기를 넘어서려는 듯한 그 아슬아슬함. 우리 한양독립영화제의 취지인 파격과 실험에 가장 걸맞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 의견에 이현이 동조했다.
그러나 곧 서지영과 채안수가 반박했다.
“악에 대한 미화가 지나친 작품이에요.”
“맞습니다. 연쇄살인마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다니. 개인적으론 상업성을 노린 것 같아 다소 불쾌했습니다.”
논쟁을 벌이던 서지영과 채안수였으나.
<리플레이>에 대해 지적할 땐 힘을 합쳤다.
그 이후 몇 시간이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네 명의 심사위원의 의견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결국 투표를 통해 대상을 선정하기로 했다.
잠시 후.
“투표 결과, <해변의 남자>는 1표, <밤의 까마귀> 1표, <리플레이>가 2표를 획득했습니다. 결과에 따라 장편 부문 대상은 <리플레이>에 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겨우 정해진 수상작.
의견이 갈린 서지영과 채안수는 서로를 불만스레 흘겨보았다.
때문에 이현은 얼른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럼 이제 ‘새로운 발견’ 수상자를 정할 차례군요.”
‘새로운 발견’ 상.
독립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 배우 중.
가장 좋은 연기를 펼친 배우에게 주는 상이다.
독립영화제에서의 신인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
“······.”
어쩐지 심사위원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 대상 수상작을 정할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
외부인이 본다면 마땅한 배우가 없어 이러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사실 그들의 입가는 들썩이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프로그래머 이현 쪽이었다.
“얼굴들을 보니, 아무래도 저희 4명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봅니다. 영화 <리플레이>에 등장하는 그 배우. 맞죠?”
“······크흠.”
대답 대신 나오는 헛기침 소리들.
티 내지는 않지만 긍정의 뜻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전원일치이니 말입니다.”
그러자 심사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영화제의 수준에 직결된 문제입니다.”
“아역에게 ‘새로운 발견’상을 주다니. 전례가 없는 일로 알고 있어요.”
“임팩트는 확실히 있었지만,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들 모두 이름은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똑같은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만큼 영화 <리플레이>에서 해당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여러분. 한양독립영화제가 어떤 행사입니까? 비주류를 즐기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파격을 권장하는 영화제 아닙니까?”
이현은 마음을 굳힌 듯.
꽤 확고한 얼굴이었다.
“우리 심사위원들도 모험을 한 번 해봅시다.”
*
몇 주가 흘렀다.
<호구>를 위해 마련된 한 연습실.
“으아! 힘들다.”
이지혜가 숨을 고르며 엎어졌다.
“지치면 안 돼요, 누나!”
이지혜에게 목검을 든 유진이 다가왔다.
유진의 이마도 땀으로 번들거리는 중.
그러나 이지혜와는 달리 아직 쌩쌩해 보였다.
“누나. 우리 30분만 더하고 쉬어요.”
“3분도 더 못할 거 같아. 죽을 거 같아.”
“그런 나쁜 말 쓰지 말아요.”
“후우, 후. 내 상태가 나쁘니까 나쁜 말을 쓰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유진과 이지혜는 함께 검도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더더군다나.
단기간 내에 엄청난 실력향상을 이룰 순 없는 운동이 바로 검도다.
현실적인 여건으론 기본기와 올바른 자세 정도를 익히는 게 최선.
하지만 유진과 이지혜는 주5일 씩 매일 검도 수업을 받았다.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검도를 익히기 위한 노력.
게다가 검도 수업 덕분에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체력이 국력이라는데. 누나는 너무 약골인 것 같아요.”
“하아. 넌 어쩜 그리 체력이 좋아?”
“누나보다 어리니까요!”
“······사실대로 말해. 너 9살 아니지?”
“누나는 고1 아니죠? 체력이 꼭 할머니 같아.”
“지금 누나한테 까부는 거야?”
“에이! 제가 언제요?”
<날개>의 광팬인 탓에 유진 앞에선 긴장하던 이지혜.
이제 그저 유진을 귀여운 동생으로 대할 수 있었다.
유진이 워낙 넉살 좋게 다가와 주기도 했고.
덕분에 이지혜도 본래의 쾌활한 성격이 나오는 중이다.
“자, 쉬는 시간 끝. 이제 다시 연습 가자!”
둘에게 검도를 가르쳐주는 트레이너가 소리쳤다.
“얼른 가요, 누나!”
유진은 넘치는 에너지로 방방 뛰었다.
“아아. 이러다 진짜 죽겠다.”
이지혜는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섰고.
하지만.
그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분명 검도를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도나 죽도의 파지법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발구름을 익히느라 발바닥에선 물집이 계속 생겨났다.
이지혜가 최초 우려하던 대로.
바쁜 스케줄 속에서 검도 연습은 이지혜의 체력을 고갈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 5회씩 나오는 건.
‘재미있으니까.’
검도를 배우는 이 시간만큼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갓 아역배우가 되었던 시절.
어떤 작품이든 신나게, 행복하게 준비하던 그때처럼.
그리고 그렇게까지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누나, 기합 더 세게! 복식호흡 알잖아요. 빡 질러요!”
이 9살짜리 때문일 터.
유진은 이지혜에게 배우로서 긴장감을 선사해주면서도.
한참 어린 동생으로서 항상 웃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검도 수업이 끝난 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유진이 말했다.
“나중에 누나랑 대련해보면 재미있을 텐데.”
“그래도 내가 너 정도는 이겨.”
이지혜의 도발에 유진이 눈동자가 달라졌다.
“어? 그 말 후회할걸요?”
“너랑 내 키 차이를 봐. 내가 손만 쭉 뻗어서 머리만 쳐도 넌 그냥 속수무책일걸?”
“누나가 그럴 체력이 될까요?”
승부욕에 불이 붙었는지.
서로 자신이 이긴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
“그럼 이렇게 해요. 나중에 대련하면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정말? 후회 안 해?”
“정말요!”
유진의 제안에 이지혜는 고민하는 척했고.
“좋아. 네가 먼저 제안한 거니까 무르기 없다?”
“누나도 그때 가서 모르는 척하면 안 돼요.”
‘날아가 불러달라고 해야겠다.’
벌써 이긴 것처럼 소원을 정해놓는 이지혜.
아직 팬심을 완전히 버리진 못한 이지혜였다.
“생각보다 잘 지내네.”
“그러네. 검도도 검도지만, 둘이 남매 역할이니까. 친해지면 본 촬영 들어갈 때 훨씬 편하겠지.”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
바로 차동석과 장미소였다.
거기에 웬 캠코더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님. 저희가 찍을게요. 이리 주세요.”
그 주인공은 바로 박태종.
오늘 종일 유진의 검도 연습을 찍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한때는 꿈이 카메라 감독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배달일을 하게 됐지만, 그래도 믿고 맡겨주세요.”
답지 않게 자신감을 표출하는 박태종.
본래라면 배달일을 하고 있어야 하지만.
최근 유진의 벌어온 수익이 꽤 많았다.
덕분에 출근하는 일수를 줄이고, 그만큼 유진을 케어하기로 한 것.
“그리고 아빠로서 꼭 찍고 싶습니다. 유진이 어렸을 때부터 사진도 제대로 못 찍어줬는데. 이렇게라도 9살 유진이의 모습을 남길 수 있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또 울상이 되어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황하며 어떻게든 박태종을 달랬을 차동석이지만.
이젠 익숙해졌는지 그냥 울게 놔뒀다.
“캠코더로 찍는 저 영상. 편집해서 넙튜브에 올린다고 했지?”
“응. 유진이가 개인채널을 만들자고 해서. 왜 하필 넙튜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넙튜브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
기껏해야 해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용도랄까.
하지만 곧 시대의 흐름에 따라 TV를 뛰어넘을 터였다.
유진 입장에선 미리 준비해서 결코 나쁠 게 없는 것.
“국내 사이트 다 놔두고 왜 넙튜브일까?”
“본인이 꼭 넙튜브에서 하고 싶댔으니까. 그리고 <날개> 때문에 해외팬도 조금은 생겼잖아? 글로벌하면 좋지 뭐.”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장미소와 차동석.
자기들끼리 이유를 상상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거 좋은 것 같아. 넙튜브에 연습영상 업로드하는 거.”
“뭐가?”
“10부작도 안 되는 미니시리즈. 그를 위해 대역을 쓰지 않고, 검도를 배우며 열과 성을 다하는 아역배우. 그런 이미지 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동석의 말에 장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넙튜브 개인채널까지 와서 유진이 연습 영상을 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차라리 기사를 내는 게 낫지.”
“볼 사람? 당연히 많지. <유별난 친구들>때도 인터넷에서 비주얼이 화제가 된 거고, ‘날아가’도 라디오 라이브 다음에 인터넷 조회수가 폭발했잖아? 그리고 요즘 네티즌들 눈치 빨라. 이런 거 기사로 내면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의심부터 하더라.”
거기까지 듣자.
장미소는 차동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티낼 필요는 없고, 영상을 본 네티즌들이 알아서 이미지 메이킹 해줄 거다?”
“그래, 바로 그거지.”
차동석이 딱, 하고 손을 퉁겼다.
“안 그래도 요즘 꼬맹이가 갑자기 빵 떠서 벌써 안티가 붙었어. 거품이니 뭐니. 거기다 건방지다는 악성루머까지 퍼지고 있고. 그러니까 이렇게 작품 들어가기 전 연습하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킨다면?”
“기존에 부각 되지 않았던 노력가로서의 모습. 그걸로 또 대중들에게 호감을 쌓을 수 있겠네.”
그것만으로도 넙튜브 개인채널을 개설할 이유는 충분한 것.
차동석의 말을 들은 장미소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이제 슬슬 옛날 모습 나오네?”
오랜만에 칭찬을 들었기 때문일까.
차동석은 헤벌쭉 웃으며 좋아했다.
“이 정도야 껌이지. 흐흐.”
“하긴, 내가 오빠 능력보고 결혼한 거니까.”
“에이, 솔직히 얼굴도 좀 봤잖아!”
“글쎄?”
둘이 또 알콩달콩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저 왔어요! 응? 아빠 또 왜 울어요?”
샤워를 끝마친 뒤 깔끔한 모습으로 나온 유진.
캠코더를 붙잡고 우는 아버지와 마주해야만 했다.
“잠깐 나 전화 좀.”
전화가 왔는지.
휴대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차동석.
그리고 잠시 후.
“미쳤다, 미쳤어. 그냥 미쳤다고!”
갑자기 육중한 몸을 방방 뛰며 난리를 피워댔다.
“오빠, 무슨 일인데 그리 난리야?”
냉정하게 묻는 장미소.
그러자 차동석은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바, 방금 전화왔는데. <리플레이>가 한양독립영화제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대!”
“축하할 일이네. 근데 그렇게 놀랄 일이야?”
여전히 장미소는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좋은 일이긴 하지만, 아직 수상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차동석의 말에.
“당연히 놀랄 일이지! 유진이가 ‘새로운 발견’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고!”
장미소는 물론이고.
유진까지 깜짝 놀랐다.
“네? 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