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50화 (50/237)

50화

햇볕이 잘 드는 거실.

유진은 종이를 들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바로 권성택이 준 오디션 대본.

바로 윤빈과 죽음의 대본이었다.

“설마 두 가지 역할 다 오디션 기회를 주다니.”

잘 나가는 배우들도 권성택한테 오디션 보는 게 영광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유진은 순식간에 두 번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물론 그만큼 준비도 두 배로 해야하지만.

유진에겐 오히려 더 다채롭고 재밌게 느껴졌다.

‘영서 역할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좋아.’

유진의 당돌한 요청에 권성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실히 준비해야해. 죽음 그 자체인 영서가 9살짜리 아이여야만 하는 이유. 오디션 때 내게 그 이유를 납득시켜야만 할 거야.’

제법 위압감이 있는 말투.

기회를 줄테니 증명해봐라.

증명하지 못한다면 바로 아웃이다.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어중이떠중이 같은 연기를 보여준다면.

앞으로 권성택 영화엔 발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유진이 이 역할에 도전할 수 있는 이유.

관념의 의인화라는 특이한 설정 때문이다.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유진은 다시 한 번 영서 캐릭터의 오디션 대본을 살펴보았다.

[영서는 죽음 그 자체. 그 외견은 인간의 것이지만, 그 움직임은 도무지 인간 같지가 않다.

영서가 윤재하(주인공)를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은 실로 초월적 존재가 한낱 인간을 바라보는 표정.

영서가 공포에 빠진 윤재하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유혹하듯, 혹은 위협하듯.]

대본에서 지문이란 직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읽는 배우가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권성택의 지문은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법한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추상적 표현의 끝이었다.

만약 초보 작가나 감독이 이런 대본을 썼다면 욕을 오지게 먹었겠지만.

‘권성택이니까. 이것조차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감독이지.’

천만영화를 달성하는 <데드맨>이니 만큼.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서 : 왜 그리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어? 이리와. 내가 편안하게 해줄게. 걱정마. 아프지 않을 거야.]

심지어 대사는 한 줄 뿐.

그 외에는 모두 추상적 지문으로 영서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었다.

“재미있네.”

그게 오히려 유진에겐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감독이 배우에게 해석의 여지를 던져준 것이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표현해봐라.

대본은 유진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승우 배우가 해석한 영서는 싸늘함 그 자체였지.’

<데드맨>에서 영서 역할을 맡게 되는 배우.

원래대로라면 진승우라는 배우다.

사생활과 관련해 여러 추문이 많지만.

연기력 하나로 인정받은 배우.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분위기였어. 평단과 대중들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았지.’

즉, 유진은 진승우라는 배우와 영서 역할을 두고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

하지만 유진은 위축되기는커녕.

“얼른 오디션 보면 좋겠네.”

오히려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나이에 진승우와 배역을 놓고 오디션 경쟁을 한다니.

그 자체로 흥분되고 짜릿했다.

하지만.

역시 영서라는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죽음을 의인화시킨 존재인 영서. 그가 어린아이의 모습이어야 하는 이유. 그에 대한 설득력을 찾아야만 해.’

그러나 대본을 붙잡고 고심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유진은 일단 영서의 오디션 대본을 미뤄두고, 윤빈의 대본으로 넘어갔다.

“영서 캐릭터랑은 정 반대네.”

모든 게 추상적인 영서 역할과는 달리.

캐릭터의 성격부터 기능까지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윤재하는 윤빈을 아끼지만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제대로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윤빈.

그 때문에 전형적인 소심한 아이가 되었다.

또한 극중 역할은 주인공인 윤재하의 정신적 붕괴를 일으키는 트리거다.

윤빈의 죽음 이후 윤재하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캐릭터성도, 쓰임새도.

어느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역 캐릭터.

“이쪽은 배우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없네.”

감독의 의도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진으로선 차라리 영서와 윤빈.

두 역할이 합쳐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음? 잠깐만.”

순간.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유진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영서가 어린아이의 모습이어야만 하는 이유. 그걸 설득해보라고 했지.”

한 번 불이 붙기 시작한 생각은 점차 디테일을 만들어갔고.

그것은 곧 구체적 캐릭터 메이킹으로 이어졌다.

“찾았다.”

만족스럽다는 듯.

유진은 볼펜을 들고 대본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윤빈=영서’

*

성아오츠카 한국지부.

마케팅팀 팀장 성혜연은 팀원에게 재차 물었다.

“결국 이지혜 배우의 결심은 안 변한 건가요?”

“네. 당분간은 휴식을 취할 생각이라네요.”

이들이 어째서 모여있는가?

바로 성아오츠카의 대표 이온음료인 ‘아침바람’ 광고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조건은 물론이고, 촬영 때도 이지혜 배우를 최대한 배려하겠다고 분명히 전달했는데도요?”

그만큼 성아오츠카 쪽에선 이지혜를 광고모델로 탐내고 있었다.

이지혜 특유의 풋풋한 비주얼과 이미지가 아침바람 제품 브랜드에 부합하니까.

무엇보다.

최근 아역배우 혹사 스캔들로 대부분의 대형 기획사들이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지혜는 꽤 매력적인 모델이었다.

최근 화제성에 비해 광고비가 그리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이지혜를 광고 모델로 내세움과 동시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성아오츠카의 기업 이미지도 좋아질 터.

“네. 하지만 배우 본인의 의지가 매우 확고합니다. 출연 예정인 예능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 광고 촬영만큼 쏠쏠한 게 없다.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대비해, 벌어들이는 돈은 어마어마하니까.

하지만 이지혜는 들어오는 광고도 거절할 만큼 지쳐있다고 한다.

쉬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애매하게 일을 가려 받았다간 괜히 마음만 어지러워질 것 같다고.

“허. 정말 그 회사 대표란 인간이 어지간히 쓰레기였던 모양이네요.”

성혜연이 분개하며 혀를 찼다.

아역배우 학대 스캔들이 사회적 공분으로 이어지자, 정치권까지 나섰다.

때문에 나대준 대표는 곧 공식적으로 조사를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지혜 배우 쪽은 포기하죠.”

여기서 더 매달렸다간 오히려 역풍이 불 수도 있고.

결국엔 광고모델이야 다른 사람을 세우면 그만이니까.

“그럼 다른 후보군 중에서 누가 좋을 것 같은지 말해보세요.”

이후 이어진 회의에서 여러 안건이 나왔다.

하지만 이렇다할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그 결과 지지부진 시간만 흐르는 가운데.

“팀장님. 혹시 박유진은 어떨까요?”

팀원 중 한 명이 슬쩍 손을 들며 말했다.

“박유진?”

“네. 요즘 이미지도 좋고, 이지혜 배우를 통해 노리던 이미지 상승 효과도 챙길 수 있고요.”

유진은 이지혜 건으로 호감 이미지도 최상이고.

맡는 작품은 족족 대박을 터뜨리며 화제성도 확실한 상태.

그러나.

“박유진은 우유 광고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나이가 너무 어려요.”

“이온음료 광고를 맡기기엔 좀······차라리 아이돌 쪽은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이번에 여자 연예인 중에 모델 뽑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다른 팀원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연일 화제몰이를 하는 역대급 아역배우라곤 해도.

본래 고려하던 후보군에서 동떨어진,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으니까.

“계속 말해보세요.”

하지만 성혜연만큼은 달랐다.

지지부진한 회의 속, 분위기를 환기시킬 아이디어가 필요했으니.

“아니, 그게. 제가 박유진 배우 넙튜브를 즐겨보는데, 거기 저희 제품이 나와서요.”

“넙튜브에?”

“네. 짧게 나오긴 했는데, 나름 반응이 폭발적이고 그래서.”

“어디 한 번 보여주세요.”

곧 팀원이 노트북을 가져왔고.

성혜연에게 유진의 넙튜브 채널을 보여주었다.

[배우 박유진의 스프링노트

동영상 – 12개, 구독자 – 60,612명]

“구독자가 6만명?”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치에 성혜연이 흠칫 놀랐다.

올라온 동영상은 12개 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다.

“이 영상입니다.”

곧 팀원이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어제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상.

[휴일에 아버지와 함께 배드민턴!

조회수 - 30,689]

제목 그대로 박유진이 아버지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는 동영상이었다.

‘올라온지 24시간도 안 됐는데 3만명이나 봤다고? 이게 뭐라고?’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던 성혜연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보게 되었다.

[아빠 또 서브 실수했다!]

[아아, 유진아. 아빠 한 번만 봐줘.]

[에이, 아까도 봐줬잖아요.]

[진짜, 이번 딱 한 번만. 응?]

그냥 두 부자가 배드민턴을 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자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는 영상.

깔끔하면서도 센스 있는 편집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영상 말미.

나무그늘 아래, 이마가 땀에 젖은 유진.

곧 아버지가 사온 아침바람을 마시는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와.”

성혜원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마케팅팀에 속해있으면서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아주 지겹게 봤는데도.

유진이 보여주는 비주얼은 극강이라 할만 했다.

그 자체로 광고의 한 장면이라 해도 좋을 정도.

“댓글 반응 좀 보여줘요.”

영상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와 마지막에 음료수 마시는거 뭐야? 유진이 혼자 광고 찍네;;

유진이가 마신 음료 이름이 뭔가요?? 잘 안보여서 ㅠ

ㄴ 아침바람입니다

진짜 너무 멋있고 귀엽고...혼자 다한다 ㅠㅠㅠ

오, 유진! 매우 귀엽다. 마시는 음료 무엇? 나도 마시고파.

이 영상 보고 아침바람 한 잔 사왔습니다... 유진이처럼 마시려고 머리 감고서 마셔봤는데 거울 속에 웬 아침이슬을 마시는 곰 한 마리가 서 있네요

ㄴ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무슨ㅋㅋㅋㅋ

ㄴ ㅋㅋㅋㅋㅋㅋ 뭔데 ㅋㅋㅋㅋ 유진이도 댓글러도 귀여움ㅋㅋ]

“이미 이 영상 자체로 의도치 않게 홍보가 되고 있더라구요.”

이미 넙튜브 자동검색어로 ‘박유진 음료수’, ‘박유진 아침바람’이 뜰 정도.

이게 영상 업로드 24시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흠.”

댓글 반응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던 성혜연.

그녀는 곧 팀원들에게 말했다.

“우선 한 번 지켜보죠. 일단은 박유진 쪽 넙튜브, 예의주시하도록 해요.”

그렇게.

유진이 아침바람의 광고모델 후보군에 새로 올라갔다.

*

며칠 뒤, 차동석과 장미소의 집.

퇴근을 했음에도 그들은 계속 일 얘기 중이었다.

“오빠. 유진이 화보집 어떻게 되어가?”

“어. 이제 곧 예약판매 공지 올라갈 예정이야. <호구> 첫방 끝나고 1시간 뒤로 맞춰놨으니까.”

“미리 예고는 해뒀지?”

“샘플이랑 제품 사양, 가격은 미리 공지했어.”

판매 관련 전반을 외주업체에 맡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무한정 판매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주역 매니지먼트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맥시멈 수량을 미리 설정해놓았다.

그 이상 구매하면 품절이 뜨도록.

“일단 제이미 조언대로 두 배로 늘리라고 해서 늘리긴 했는데. 이게 다 팔릴까? 팬카페 회원 전용 판매라, 엄청 잘 나갈 것 같진 않은데.”

“뭐 어때. 어차피 예약주문이라 재고가 남는 것도 아닌데.”

아역배우의 화보집.

거기에 팬카페를 가입해야만 한다는 번거로움.

이 때문에 이들은 판매량을 그리 높게 잡고 있지 않았다.

“유진이가 잘 나가긴 해도, 지갑을 여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니까.”

유명해진 것과 구매력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아직 유진을 보고 지갑을 여는 팬들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의 영역.

“그리고 유진이의 9살을 기념하려고 찍은 거잖아? 추억 남기려고. 많이 팔리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장미소가 이번 화보집을 오케이한 이유.

그건 장기적으로 유진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팬들과 추억으로 나눈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즉, 별로 상업성을 고려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만약 그랬다면 훨씬 공격적으로 투자했을 것이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어떻게 됐으려나?”

지금쯤이면 <호구>의 방영이 끝나고 화보집 예약판매가 시작됐을 것이다.

마침 차동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이번 화보집 판매를 맡긴 외주 업체의 번호였다.

“사,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슨 일인데요?”

“그게, 갑자기 판매사이트가 터져버려서······.”

“네? 아니, 갑자기 사이트가 왜 터집니까?”

“그게. 예측하신 인원보다 훨씬 많은 접속자가 몰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훨씬 많은 접속자가 몰렸다.

그 말에 쎄함을 느낀 차동석.

“······잠깐만.”

황급히 컴퓨터를 켜고 유진의 팬카페인 ‘대박유진’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차동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기야. 우리 어떻게 하지?”

[아역배우 박유진 팬카페 – 대박유진

회원수 : 10,325명]

팬카페의 회원수가 1만을 돌파했고.

[화보집 구매페이지 왜 안열려요 ㅠㅠㅠ

아니 품절이라뇨??? 겨우 뚫고 들어갔더니

쾅쾅쾅!!! 문열어!!!

셧업앤테잌마머니!!

화보집 양도 구합니다... 제발요...]

팬카페 게시판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모두 유진의 화보집 구입을 위해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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