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49화
제이미 리가 운영하는 멜랑꼴리 스튜디오.
그곳에선 한창 촬영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굿! 오케이!”
다음 컨셉으로 넘어가기 전.
잠시 결과물을 모니터링하는 제이미.
곧 제 옆으로 다가온 유진을 보며 흠칫 놀랐다.
“너, 오랜만에 보니 키가 많이 컸네.”
“요즘 검도를 해서 그런가? 키 컸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
제이미는 사진작가답게 유진의 신체 스펙을 스캔했다.
“와. 근데 사진들 진짜 느낌 좋아요.”
“그럼. 누가 찍은 건데. 유진이 너, 다른 녀석한테 사진 맡기면 안 된다. 알았어?”
“음, 글쎄요?”
“뭐야? 너 작년에 나랑 약속했잖아! 사진 찍을 일 있으면 이 삼촌한테 맡긴다고.”
“농담이에요, 농담!”
여전히 농담이 통하지 않는 제이미였다.
“역시 작가님 사진이 최고! 팬들이 좋아해줄 것 같아요.”
모니터에 떠오른 각종 컨셉 사진들.
마치 작년에 찍었던 프로필 사진을 연상케 했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컨셉도 더 많고,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점이랄까.
“팬카페 생겼다고? 이름이 뭐랬지?”
“‘대박유진’이요!”
“뭔가 어감이 귀엽네.”
“그 운영진 분들 공지사항 보니까, 대배우 박유진의 준말이래요.”
유진이 오랜만에 멜랑꼴리 스튜디오를 찾아온 이유.
바로 화보집 제작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일종의 팬서비스 차원이랄까?
[아역배우 박유진 팬카페 – 대박유진
회원수 : 3,023명]
생전 처음 팬카페가 생긴 유진.
개설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3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가입했다.
[삼촌팬인데 이 나이먹고 아역배우 팬 된 건 처음입니다.]
[넙튜브 보고 입덕했습니다 ㅎㅎㅎ 뭐든 열심히 하고 너무 귀여워요!!]
[여기 유친 입덕은 없나요? 그때부터 전 유진이라는 개미지옥에 빠졌습니다 ㅠㅠ]
[초등학생인데 날개 보고 완전 팬됐어요 데박!! 목소리 너무 조아요]
[공익광고 때부터 관심 가지고 있었는데 별떠 보고 인성에 완전 반했습니다... 아기천사 박유진 사랑해 ㅠㅠㅠㅠ]
[한양독립영화제 수상소감 보고 푹 빠졌습니다. 행복하자 유진아!]
[리플레이 보고 충격 받아서 필모 정주행... 무덤까지 따라갑니다]
팬카페에는 실시간으로 가입인사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유진에게 입덕한 경로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유진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유별난 친구들>부터.
최근 방영된 예능 <별을 보러 떠나요>까지.
그만큼 유진이 보여준 매력이 다양하다는 증거였다.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
사실 며칠 전.
유진은 인증이 될만한 셀카 사진과 함께 팬카페에 글을 작성했다.
[제 팬카페가 생기다니 아직도 안 믿기고 떨려요!
더 멋진 연기로 보답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겨요.
음, 막상 글을 쓰려니 어떤 말로도 제 감정이 표현이 안 되네요.
그냥 무지무지 사랑해요 여러분!!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여전히 성장 중인 유진이가]
그곳에 달린 수백개의 댓글.
[외쳐 갓유진!!!
사진 너무 귀여워요 ㅠㅠㅠ 이렇게 글 올려주고 사진까지!! 너무 고마워요!!
나 왜 주책이야 이 글 보고 눈물나...나도 사랑해...ㅠㅠㅠ
유진아 1일1셀카 안 올려주면 무슨무슨 법 때문에 잡혀간대 조심해;;
넙튜브도 하면서 팬들하고 소통도 해주는 유진이...그저 빛...
역시 대배우 박유진!! 꽃길만 걷자!!]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댓글을 읽는 것만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중.
[와 근데 유별난 친구들 때랑 비교하면 유진이 완전 컸다...
9살이니까 진짜 쑥쑥 크네 더 잘생겨짐 ㄹㅇ
오늘의 유진이와 내일의 유진이는 또 달라져 있겠지?
진짜 하루하루 더 멋있어지는 유진이! 누나가 항상 응원해!
유진이 화보집 좀 제발 누가 내줘요 ㅠㅠㅠ 얼마가 돼도 살게요 ㅠㅠ
ㄴ 2222ㅠㅠㅠ
ㄴ 33333
ㄴ 44444]
화보집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하루 커가는 나이의 유진.
그 순간을 포착해 팬들과 나누면 꽤 의미가 클 것 같았다.
이를 장미소에게 의논했고, 오케이 승인을 받았다.
이후 팬카페 가입자를 대상으로 소소하게 화보집을 판매할 계획.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잖아요.”
“허. 네가 그 말을 하니 기분이 이상하네.”
피식 웃은 제이미.
“아, 미소 씨 만나면 좀 전해줘. 화보집 예약물량 지금 예상보다 2배 잡으라고.”
“음? 왜요?”
순진무구한 유진의 물음에 제이미가 확신하듯 말했다.
“왜긴. 엄청 팔릴 테니까 하는 소리지.”
*
“와, 형. 연기 잘하네?”
민혁이 촬영 중인 재오를 보며 말했다.
이번 뮤비는 재오가 주인공인만큼 분량이 가장 많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촬영하고 있는 것.
현재 재오는 밀려오는 약한 파도를 맞으며 서 있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이 장면은 뮤직비디오의 클라이맥스.
어렸을 적 첫사랑과 뛰어놀던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장면이다.
“컷!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뮤직비디오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고.
곧 흠뻑 젖은 재오가 스탭들 쪽으로 걸어왔다.
스탭들은 황급히 수건과 난로로 재오의 몸을 덥혀주었다.
“여태 본 형 연기 중에 제일 잘하는 것 같은데?”
“진짜. 연기 트레이닝 받는다더니.”
“훠우. 역시 우리 리더님이시다!”
다른 빅터 멤버들도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재오의 연기를 칭찬했다.
재오의 연기는 아직도 힘이 좀 들어가 있는 모습이지만.
공익광고 촬영 때보다 훨씬 진일보했음은 분명했다.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다가도.
그 첫사랑이 실패한 현실에 슬퍼하는 복잡미묘한 연기.
그것을 얼굴 표정으로 제법 잘 표현해냈다.
“흠.”
멤버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뮤직비디오 감독과 함께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재오.
“좀 아쉬운데.”
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오히려 뮤직비디오 감독이 화들짝 놀라 만류했다.
“충분히 좋았어요, 재오 씨. 그리고 무리했다가 감기 걸릴텐데.”
아직은 바닷물이 차가울 날씨다.
게다가 재오는 이미 몇 번이나 입수한 상태다.
“한 번만 더 찍을게요. 그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재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감기 걸리면 아이돌 못하죠.”
다시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가는 재오를 보며.
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오 형이 독종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더 독해졌네. 심지어 감독님도 OK했는데 다시 간다고?’
민혁은 연기 욕심이 가득한 재오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가수를 꿈꿨던 민혁은 연기에 아무런 뜻도 없었으니까.
“부족해.”
재오가 다시 카메라 앵글 안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유진이가 그 정도 연기력을 보여줬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해.”
오랜만에 다가온 실전 연기의 기회.
거기에 유진의 연기를 보며 얻은 자극.
재오는 열정을 불태웠다.
빅터의 신곡 ‘첫사랑’.
그 뮤직비디오가 점점 퀄리티를 더해가는 중이었다.
*
얼마 후.
서울의 한 소갈비집.
미니시리즈 <호구>의 쫑파티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호구>의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부딪치는 잔들.
술이 담길 법도 한데 오늘은 사이다와 콜라였다.
투톱 주인공이 아역배우들이었기 때문.
“이야, 술 없이 쫑파티 하는 건 또 처음이네!”
“건전하니 좋잖아요? 뭔가 우리 드라마랑 딱 맞는 것 같아요.”
“여기 환타 좀 줘요! 환사 말고 취해버릴라니까!”
그럼에도 다른 쫑파티 못지 않게 텐션이 좋았다.
<호구>의 촬영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자, 그럼 작가님과 PD님! 한 마디씩 해주셔야죠!”
먼저 윤진영PD가 나섰다.
“그냥, 감사합니다. 모두 감사드려요. 입봉작에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어 작가 민용석의 차례.
쫑파티 시작부터 울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눈물 콧물 다 쏟아냈다.
“흑, 흐극! 우리, 우리 두 주인공 배우님들과 이순철 선생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제 작품에 참여해주시고······진짜, 공모전에 뽑히고도 캐스팅도 안 돼서 엄청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흑, 흐윽!”
“어? 작가님, 취한 거 아니죠? 우리 아빠가 술 마시면 꼭 이러는데!”
유진의 농담에 사람들이 빵 터졌다.
덕분에 회식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자, 이쯤에서 주인공들도 한마디 해야지!”
“옳소! 옳소!”
그 말에 유진과 이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이 작품에 참여한 건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을 맡은 것도 좋지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무척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 말을 하며 이순철과 유진 쪽을 바라본 이지혜.
“앞으로 배우 생활해나가며 반드시 갚아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듯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곧 쏟아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
이지혜는 주역 매니지먼트에서 새로운 시작도 알렸으니.
그 앞날을 축복하는 의미였다.
이어 차례가 다가온 유진.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성과 함께 휘파람을 불었다.
“스타다, 스타!”
“대배우 박유진!”
“아기천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소리치는 사람들.
그에 부끄러워하거나 얌전뺄 만도 한데.
“감사합니다!”
유진은 기꺼이 그 반응들을 즐겼다.
“드라마 주연은 처음 해봤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으로 주인공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우님들, 스태프 형들, 누나들 모두 최고였어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리 말하곤 갑자기 씨익 미소짓는 유진.
“그리고! 제가 장담할게요. 우리 드라마 대박 날 거예요!”
“오, 유진이가 예언을 했다!”
“이거 진짜 대박 날 수밖에 없겠는데?”
“박유진! 박유진!”
짠!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건배 소리.
유진의 한 마디에 쫑파티는 더욱 달아올랐다.
그렇게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슬슬 파하는 분위기로 번져가고 있었다.
유진 역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고.
“유진아.”
그때, 누군가 유진을 불러세웠다.
이순철이 유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려고?”
“네. 아빠가 걱정할지도 몰라서요. 할아버지는요?”
“나는 잠시 요 앞 카페에 들를 생각이다. 거기선 쌍화탕도 파는데, 맛이 기가 막히지.”
그리 말하곤 이순철은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랑 같이 갈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쫑파티 내내 이순철은 유진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굳이 자리를 옮기자는 건.
‘여기서는 말 못 할 뭔가가 있으신 모양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넵! 저도 가서 쌍화탕 마시고 싶어요.”
“뭐? 허허! 그래, 이 할애비가 사주마.”
유진은 차동석에게 잠시 사정을 설명했고.
허락을 받은 뒤 이순철을 따라나섰다.
“여기 쌍화탕 두 잔만 주세요.”
종업원에게 주문을 한 뒤 의자에 앉는 두 사람.
그런데.
맞은편에 웬 낯선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왔군.”
그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유진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 권성택 감독님?”
“호오. 날 알아보는구나.”
일명 군밤 모자라 불리는 트루퍼햇을 쓰고 있는 권성택.
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거장 권성택이 왜 여기에?’
예상치 못한 낯선 거물의 등장.
유진은 무슨 상황인지 묻는 것처럼 이순철을 바라보았다.
“실은 권성택이가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서 잠시 자리를 마련했다. 널 만나게 해주고 싶었거든.”
“저를요?”
권성택의 페르소나라 불렸던 이순철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왜 나를? 혹시, 설마?’
그러는 사이 권성택은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사람인지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어떤가? 직접 만나 보니.”
이순철의 물음에 권성택이 턱을 쓰다듬었다.
“묘한 느낌의 아이로군. 어린아이의 얼굴이지만 눈빛이 깊어.”
“그래서. 한 번 기회를 줘볼 텐가?”
권성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클립으로 철한 종이뭉치를 유진에게 내밀었다.
‘영화 <데드맨>의 시놉시스와 오디션 대본?’
게다가 유진은 이 영화를 잘 알고 있었다.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 중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초대형 흥행작이니까.’
<데드맨>은 죽음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의인화시켜 ‘영서永逝’라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그런 판타지적 요소를 넣었으면서도.
동시에 80년대 한국 느와르라는 장르적 쾌감까지 더한 작품.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역할은 윤빈 역할이다.”
윤빈은 주인공의 아들.
극중 주인공은 아들인 윤빈을 잃은 후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즉, 주인공의 몰락과 비극의 트리거가 되는 역할.
영화 <데드맨>에서 아역배우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기도 하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거장 권성택의 작품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다니.
게다가 <데드맨>이라는 초특급 흥행작이다.
이건 유진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네.”
그러나.
이왕 상상치도 못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저, 이 영서 역할 오디션도 보고 싶어요!”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생각이었다.
유진의 대답에 꿈틀대는 권성택의 눈썹.
“네가 죽음을 의인화한 캐릭터를 표현해보겠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묻는 권성택의 말에도.
“넵!”
유진의 대답은 확고했다.
헛웃음을 내뱉는 권성택.
그는 곧 천천히 이순철 쪽을 바라보았다.
“순철이. 자네 말대로야.”
“그래. 내가 말했지?”
그런 와중.
이순철만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을 뿐이었다.
“당돌함으론 이 아이가 최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