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급 한정식집.
미닫이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순철이 자네. 먼저 와 있었어?”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이순철.
“어어, 권성택이. 불러낸 사람이 늦으면 어째? 어서 와서 앉아.”
권성택은 곧 이순철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앉자마자 이순철은 자연스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잠시 후 짠, 하고 부딪치는 술잔.
“자네랑 한 잔 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이야. 한창 네 작품만 주구장창 하던 때는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그렇게 진탕 마셔도 다음날 되면 멀쩡하던게 자네지. 연기는 기똥차게 하고. 요즘에도 그래?”
“이젠 나도 나이가 들어서 말이야. 술은 멀리 하고 살려고 노력 중이지.”
이순철이 원로배우라는 위상을 가졌다면.
권성택은 ‘거장’이라 불리는, 잔뼈 굵은 영화감독이었다.
그리고 이순철은 권성택의 작품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였다.
지금도 권성택의 페르소나라고 불릴 정도.
“그런데,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이순철이 물었다.
오늘 만남을 주선한 쪽은 바로 권성택 쪽이었던 것.
“뭐, 별 건 아니고. 새로 작품 하나 만들려는데. 자네가 좀 봐줬으면 해서.”
권성택은 느긋한 움직임으로 가방을 뒤져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곳엔 영화의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가 적혀 있었다.
“허.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였나? 딱딱하기는.”
“겸사겸사지. 자네와 오랜만에 얘기도 하고 싶고, 작품에 대한 감상도 들어보고 싶고.”
말로는 투덜대던 이순철이지만.
곧 안경까지 꺼내 집중하여 읽기 시작했다.
잔뼈가 굵은 손이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겼다.
권성택이 준비 중인 작품의 제목은 <데드맨>.
8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느와르 영화다.
전국의 범죄조직을 하나로 통일, 그 보스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주인공.
그러나 어느 날부터 제 주위를 떠도는 ‘죽음’을 보게 된다.
죽음은 끝없이 주인공을 곁을 맴돌며 주인공을 위협하고, 조롱하고, 유혹한다.
그로 인해 주인공이 점점 무너져내리고, 조직 내에서 쿠데타의 위협까지 받게 된다는 이야기.
권성택이 홀로 술잔을 다섯 번쯤 비웠을 때.
이순철이 안경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허. 특이하군. 죽음이라는 관념의 의인화라.”
“이 나이가 되니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군.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지.”
“아무튼 흥미로워. 한국형 느와르 영화라는 대중성을 따르면서도, 죽음이라는 관념이 의인화되어 등장인물로서 등장하는 실험적 도전이라. 자네답게 적당히 싼티나면서, 적당히 멋진 척하는 영화가 되겠어.”
이순철의 대답에 클클 웃는 권성택.
웃음에 쉰소리가 섞여있었다.
이순철의 말대로, 권성택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감독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걸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가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다.
“대본은?”
“이미 완성했지.”
“그럼 이 죽음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지는 정했고?”
“아직. 솔직히 누구도 떠오르지 않고,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은 형태가 없으니 말이야.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뽑을 생각이지만······자네가 한다면 그냥 맡길 수도 있는데.”
권성택이 슬쩍 물었다.
그러자 이순철은 대답 대신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알아,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자네 조만간 은퇴한다고 했지?”
농담이라며 웃는 권성택.
그러나 이순철이 곧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야. 아쉽게도 이미 스케줄이 꽉 차서. 내년까진 일정을 비우기가 어려워.”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슬슬 은퇴하고 손주나 보겠다 하던 사람이?”
얼마 전, 이순철이 권성택에게만 털어놓은 진심.
사실 이순철은 슬슬 연기를 은퇴하고,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손녀는 그의 삶에 가장 큰 기쁨으로 자리잡았고.
슬슬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줄 때가 되었다 느꼈으니.
“아직 내가 이 바닥에서 해야할 일이 있더군. 그게 배우로서든, 어른으로서든 말이지.”
하지만.
어떤 아역배우 한 명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배우로서, 어른으로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그래서 그 인터뷰를 한 거야? 아역배우 혹사 근절에 대해서. 자네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덕분에 요즘 아주 난리던데.”
“그래, 맞아. 그 불꽃이 썩어빠진 놈들을 깨끗이 태워버렸으면 좋겠거든.”
그리고 그 불꽃을 최초로 피운 것 역시.
그 어린 소년이었다.
“아무튼 은퇴 생각을 접었다니 기뻐. 자네는 아직 20년은 너끈하지. 안 그래?”
껄껄 웃는 두 사람.
곧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권성택이. 이 죽음 역할, 오디션으로 뽑을 거라고?”
술잔을 깨끗이 비운 뒤 묻는 이순철.
“그래, 맞네.”
“흠. 내가 추천해주고 싶은 배우가 있는데. 오디션 기회나 한 번 줘볼 생각 있어?”
권성택의 작품 오디션은 극소수의 배우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며,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된다.
그만큼 권성택이 배우를 고르는 눈이 까다롭기 때문.
때문에 배우들은 오디션 기회라도 얻는 것조차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런 권성택이 페르소나로 여길 정도로 훌륭했던 이순철.
그런 이순철이 배우를 추천하겠다고 나선 것.
권성택의 눈가 주름이 움찔거렸다.
“자네가 배우 추천을? 별 일이군. 누구보다 연기 욕심이 그득해서, 남 추천할 바엔 내가 한다. 그게 이순철 아니었나?”
“늙어서까지 그러면 노망이 난 거지.”
“클클. 그래서, 누구야? 자네가 추천하겠다는 배우.”
그 말에 이순철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권성택 자네. 혹시 <리플레이>라는 독립영화 봤나?”
*
“배달이요!”
“네, 나가요!”
서울의 한 빌라.
박태종은 돈을 지불한 뒤, 짜장면과 탕수육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단칸방을 탈출한 유진과 박태종.
두 사람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방금까지 이사를 진행했고, 이제 막 끝낸 참이다.
“음식 왔습니다.”
“아이고. 잘 먹겠습니다, 아버님.”
차동석은 이사를 도와주러 기꺼이 찾아와주었다.
워낙 힘이 좋은 덕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리고 김상헌 씨, 라고 했죠? 출근 첫날부터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리고 상헌이 형!”
유진과 박태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제가 돕겠다고 한 건데요. 넙튜브에 쓸 영상도 많이 뽑았으니 만족합니다.”
주역 매니지먼트 넙튜브 편집자로 정식 채용된 김상헌.
이사 영상을 찍어 넙튜브에 올리겠다며, 굳이 돕겠다고 차동석을 따라왔다.
물론 힘이 그리 좋지 않아 도움보단 방해가 된 경우가 많았지만.
“후아.”
유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새 집을 둘러보았다.
햇볕이 잘 드는 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아직 완전히 짐을 다 풀진 않았으나.
단촐한 이삿짐에 비해 이 빌라는 무척 넓게 느껴졌다.
‘지난 생에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그 단칸방을 나왔지.’
‘날아가’ 음원 수입료가 아주 큰 역할을 해준 덕분에.
불과 1년만에 새 집을 구했다.
그것도 지난 생에 살던 곳보다 훨씬 괜찮은 곳으로.
게다가 아버지까지 유진의 옆에서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어? 유진아, 울어?”
“어? 네?”
그 말을 듣고서야 제 눈가를 만져보는 유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모양이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기쁨의 눈물.
“무슨 일이야, 유진아. 어? 어디 아파? 응?”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박태종.
유진을 힘껏 껴안으며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유진아. 괜찮아. 아빠가 있잖아.”
이럴 때는 눈물 없이 든든하고 단단한 아버지였다.
유진은 그 품을 잠시 한껏 만끽했다.
“왜 울어. 응?”
“좋아서요. 너무, 너무 좋아서요.”
지난 생에서 평생을 꿈꿔오던 일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 같았으니.
‘하지만 아직이야. 집을 산 것도 아니니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아직 유진이 노리는 곳은 더 높았다.
잠시 후.
눈물을 멈춘 유진이 곧 씩씩하게 말했다.
“자, 얼른 짜장면 먹어요! 다 불겠다.”
유진의 눈물을 처음 본 차동석과 김상헌.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인지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을 뻔했으나.
“어? 아저씨. 소스를 왜 부어요!”
“뭐? 탕수육은 부어먹는 게 진리지.”
“전 찍어먹는 게 좋단 말이에요. 으, 아저씨 실망이야.”
“저도 찍먹파입니다.”
“김상헌 씨까지 왜 이래? 탕수육은 원래 소스가 부어진 음식이라고!”
부먹 찍먹 논쟁 덕분에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짜장면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네 사람.
“그런데 여기, 전에 살던 곳에서 멀지 않네요?”
“유진이 학교 때문에요. 유진이가 전학가기 싫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굳이 다른 동네로 갈 이유도 없고요.”
유진으로선 미래의 스타 작가, 유신애가 있는 이상 전학을 갈 생각은 없었다.
“방이 3개니까 하나는 안방, 하나는 박유진 배우 방, 남은 하나는 옷방 정도로 쓰실 생각인가요?
“아뇨! 전 아빠랑 같은 방 쓸거예요.”
김상헌의 물음에 유진이 대답했다.
“흠. 박유진 배우한테는 그런 로망 없나요? 전 어렸을 때 저만의 방을 갖고 싶었는데.”
“응? 전 별로 그런 거 없어요.”
혼자 방을 쓰는 건 지난 생에 충분히 했으니까.
“역시, 박유진 배우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하군요.”
눈을 빛내는 김상헌.
유진에 대한 흥미가 한층 더 깊어진 모양이다.
저렇게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의존적인 것 같진 않고.
오히려 독립적으로 일을 주도하고, 결정하기까지 한다.
확실히 보통의 9살에게선 보기 힘든 모습.
“역시 저런 면 때문에 넙튜브 영상이 인기를 끄는 거겠죠.”
김상헌의 말대로.
유진의 넙튜브도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배우 박유진의 스프링노트
동영상 – 8개, 구독자 – 50,256명]
이번 <별을 보러 떠나요>로 촉발된 아역배우 혹사 스캔들.
그로 인해 호감 이미지가 극도로 올라간 덕분인지 구독자는 빠르게 5만명을 돌파했다.
게다가 넙튜브에 업로드 된 동영상도 모두 호평을 받고 있었고.
“이번에 상헌 씨가 편집한 넙튜브 영상. 반응이 꽤 좋던데.”
차동석의 칭찬에 김상헌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실 아버님이 찍어주신 영상 자체가 워낙 재미있어서, 그 재미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편집한 것뿐입니다.”
유진과 박태종의 여전한 케미.
거기에 김상헌의 센스 있는 편집이 더해지니 호평이 더해졌다.
마치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까지 있었으니.
“······실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때.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박태종.
“저, 이제 배달일을 그만두려 합니다.”
박태종은 손을 뻗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넙튜브라는 거, 한 번 제대로 하고 싶어요. 유진이 곁에서 제대로 서포트하고 싶습니다. 팬들도 저희 부자의 모습을 좋아해주시니, 계속 유진이 곁에서 촬영을 담당하고 싶어요.”
그 말에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은 차동석.
환영의 의미로 손뼉을 쳤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옆에 계시면 앞으로 계약이나 일처리 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테고, 유진이도 좀 더 안정적으로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겠군요. 유진이, 네 생각은 어떠냐?”
“전 너무 좋아요!”
유진도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이제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할 위험은 사라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크게 덜어낸 느낌이었다.
“그럼 전 아버님을 옆에서 보조하고, 편집 방향과 컨텐츠를 논의하는 쪽으로 가면 되겠군요. 벌써 재밌을 것 같습니다.”
“네. 김상헌 씨라고 했죠? 촬영 기법 등에 대해서 좀 자세히 배우고 싶습니다. 혹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김상헌과 박태종이 의기투합했다.
“좋아, 좋아! 진짜 뭔가 착착 성장하는 기분입니다. 안 그래도 새로운 직원, 새로운 배우도 왔으니 회사를 좀 제대로 운영해볼까 합니다. 사람도 더 공격적으로 뽑고, 체계도 정비하고요. 물론! 유진이 담당 매니저는 제가 계속 맡을 생각입니다.”
아역이라는 타이틀을 떼도.
유진과 이지혜라는 걸출한 배우를 거느린 주역 매니지먼트다.
앞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서도 공격적 투자와 체계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도 왁자지껄 떠드는 네 남자.
보통 이런 때 일 얘기를 하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마련이지만.
줄곧 승승장구한 덕분에 텐션이 한껏 올랐다.
똑똑!
그러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음? 누구지?”
“저희가 너무 시끄러워서 옆집 사람이 찾아온 건 아닐까요?”
뒤늦게 걱정하는 박태종.
그는 조심스레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다행히 박태종 예상은 빗나갔다.
찾아온 손님이 집들이 선물을 들고 온 장미소였으니까.
“어? 자기야. 사무실 지킨다고 하지 않았어?”
“퇴근 시간 지났잖아. 그래서 온 거야.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겸사겸사 말씀 드릴 것도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온 장미소는 곧장 유진과 박태종에게 선물을 건넸다.
“이사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그리고 유진이도.”
“감사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고, 청소용품이랑 위생용품 세트예요. 간편하게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장미소다운 실용적인 선물이었다.
유진은 선물을 받아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할 게 있다니. 그게 뭐예요?”
그러자 장미소가 유진을 향해 미소지었다.
장미소답지 않게 흐뭇함이 깃든 미소였다.
“축하해, 유진아. 네 팬카페가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