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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53화 (53/237)

53화

“고생 많았어요, 민용석 씨.”

<호구>의 마지막 회가 방영된 다음날.

송미연은 민용석과 카페에서 만났다.

“자신이 쓴 첫 드라마가 어제부로 끝났는데. 기분이 어때요?”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는 민용석.

여러 감정이 스치는 얼굴이었다.

“사전제작이라 촬영 자체는 진즉에 끝났는데, 마지막 화까지 방영되고 나서야 실감이 드네요. 정말 끝났다는 게.”

사실 사전제작 드라마에서 촬영에 들어간 이후.

작가가 할 일이 딱히 없다.

강하게 그립을 쥐고 싶어 하는 스타작가들이야 이것저것 요구할 수도 있겠으나.

민용석은 초짜 작가인데다 그런 성미도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민용석은 매번 촬영 현장에 나갔다.

“진짜 신기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누군가 분석하고, 연기하고, 상상했던 대로. 혹은 상상 그 이상으로 표현하는 모습이요.”

그걸 지켜보는 건 무척이나 짜릿한 일이었다.

그간의 고생을 모두 씻어내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캐스팅 안 돼서 PD님이랑 얘기하던 때가 아직도 엊그제 같습니다. 박유진 배우에 이지혜 배우, 거기에 이순철 선생님까지.”

“그 배우들이 참여한 이유가 뭐겠어요? 초짜 작가를 위한 알량한 동정심?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민용석 씨의 대본이 좋았던 거야.”

송미연답게 까칠한 말투였지만.

결국 민용석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선배 작가로서 너무 저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6화 내내 평도 엄청 좋았잖아요? 어제 막방 끝나고도 기사 엄청 나오던데.”

송미연의 말대로.

[세상에게 버림 받은 한 남매의 눈물 겨운 성장기······드라마 <호구>, 호평일색으로 마무리!]

[막장도, 자극도, 스타 배우도 없는데······드라마 <호구>, 착한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아역 투톱 드라마 <호구>가 보여준 대한민국 드라마의 다양성, 그리고 힘]

[명품 드라마 <호구>를 빛낸 두 주인공, 박유진과 이지혜! 전문가들 “아역배우 양성과 보호에 더욱 힘써야”]

<호구>의 마지막회 방영 이후 평가는 무척 좋았다.

불륜, 복수, 악인, 범죄.

최근 막장으로 점철된 한국 드라마 계에서 보기 드문 따뜻한 스토리였고.

사전제작 드라마의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다.

SBW 드라마PD 중 누구도 맡기 싫어하던, 계륵 취급을 받던 <호구>가.

그야말로 봉황이 되어 날아오른 것이다.

“화제성도 좋고, 시청률도 잘 나오고. 엄청 성공적이네요. 그것도 공모전 당선작인데.”

공모전 당선작은 신인 작가의 등용문 정도로 여겨질 뿐.

대대적 투자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인기를 끌기 쉽지 않다.

<호구>처럼 높은 화제성과 시청률을 기록한 건 전례가 없는 일.

“그래서. 막방 시청률은 전달받았어요?”

“아직이요.”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민용석.

“역시 동시간대 1위는 힘들겠죠?”

같은 시간대 MBS에서 방영 중인 경쟁작.

꽤 탄탄한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드라마였다.

그것도 <호구>와 정반대로 온갖 자극적 소재가 나오는 막장 드라마.

<호구>가 1화 시작 이후 계속 시청률이 오르긴 했지만.

방영된 기간 내내 순위가 뒤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욕심은 안 내요. 이미 꿈같은 일이 많이 벌어졌으니까요. 3화는 또 박유진 배우 덕분에 엄청 화제가 되기도 했고.”

“맞아요. 그 화수만 유독 다시보기 결제율이 높다면서요?”

3화에서 유진이 비주얼로 역대급 움짤을 생성해낸 덕분.

시청률이 확 뛴 것도 3화가 기점이었다.

“뭐, 5화 시청률 보니 차이도 별로 안 나던데. 한 번 노려볼 만하지 않겠어요?”

“아뇨, 그건 진짜 꿈같은 일을 너머 기적이 아닐까요.”

그때, 민용석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

송미연은 단번에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눈치챘다.

“PD한테 온 거죠? 그 전화.”

민용석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타이밍에 PD에게 걸려온 전화라면, 할 얘기는 딱 하나.

시청률 집계가 나온 것.

“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뒤.

민용석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휴대폰을 들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멍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본 송미연이 분위기를 파악하곤, 곧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겠지만, 꽤 기대했으리란 거 잘 알아요. 그래도 이미 엄청 대단한 거고, 대본 달라는 제작사랑 방송국이 줄을 설 테니까 좋은 글, 재밌는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해요. 알았어요?”

나름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송미연.

“교수님.”

“나 교수 아니라니까.”

그런 그가 송미연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큭, 크흡. 우리가 동시간대 1위래요!”

욕심내지 않았다더니.

그 어느 때보다 욕심이 났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이게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 글이 좋아서 잘 된 거고······그리고 나 교수 아니라니까?”

본래의 미래에서 내용에 비해 낮은 시청률로 착한 드라마라 불렸던 <호구>.

이 시점을 기준으로.

착한 드라마의 정의가 바뀌기 시작했다.

*

얼마 뒤,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차동석과 유진이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장미소가 그들을 반겼다.

“어서 와. 촬영은 잘하고 왔어?”

“네. 오랜만에 <호구> 사람들 만나고 와서 좋았어요!”

<호구>가 예상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에 SBW 측은 다급하게 <호구> 관련 토크쇼를 기획했다.

유진은 방금까지 그 촬영을 하다 온 것.

“지혜는 집에 잘 데려다주고 왔어. 아, 자기야. 오늘 유진이가 완전 휘젓고 왔어. 그냥 분량 뽑는 기계라니까?”

“넙튜브로 다져진 관록이죠!”

“뭐? 관록? 하하하! 진짜 얘 가끔 보면 나보다 더 아저씨 같다니까.”

껄껄 웃는 차동석.

유진은 곧 장미소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실장님! 우리 화보집 새로 공지 올렸잖아요. 반응이 어때요?”

직원들을 충원하기 앞서.

장미소는 실장이란 직책을 갖게 되었다.

이제 업무도 세분화했으니, 좀 더 효율적인 체계로 회사가 돌아갈 것이다.

“걱정 마. 팬들이 엄청 좋아하고 있어.”

화보집에 대한 상상 이상의 성원에.

이에 유진의 화보집 사양을 최대한 업그레이드했고.

감사의 뜻으로 B컷은 물론, 새로운 컨셉샷도 추가했다.

주역 매니지먼트가 감당하기에 일이 생각보다 엄청 커져 버렸고, 여러모로 죽을 맛이긴 했으나.

회사 차원에서 내는 유진의 첫 굿즈다.

팬들에게 긍정적인 첫인상을 남겨주어야만 한다는 장미소의 판단이 있었다.

[와 화보집 업그레이드라니 ㅁㅊㄷ

나 여기에 뼈를 묻겠습니다...

내가 대박이라는 사실이 너무 뿌듯하다

아이돌 덕질 하다 넘어왔는데... 이렇게 팬들 위해주는 건 처음 봄 ㅠㅠ

ㄴ ㄹㅇ 팬들을 돈으로만 보는 곳이 널렸는데

ㄴ 무료 업그레이드라니 ㅠㅠㅠ 진짜 내가 보는 게 현실인가 싶을 정도예요

주역매니지 최고!!

역시 이지혜가 넘어온 이유가 있음 ㅇㅇ]

‘대박이’는 유진이 지어준 팬들의 애칭이었다.

팬카페 이름인 ‘대박유진’에서 자신은 유진을 담당할 테니 대박은 팬들이 담당하라면서 지어주었다.

아무튼 장미소의 판단이 적중.

화보집 업그레이드 소식에 팬들은 환호했다.

덕분에 초반 사이트가 터졌던 것도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생각해봤는데, 매년 이렇게 화보집 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약간 컬렉션처럼. 유진아, 네 생각은 어때?”

“완전 좋아요!”

유진의 어린 시절을 공유하고, 함께 추억한다.

그 취지에 더없이 잘 맞는 기획이었다.

“내 예상인데, 매년 판매량이 더 늘어날 것 같아.”

차동석이 중얼거렸다.

유진의 성장세를 보면 차동석의 말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차동석은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네? 누구요?”

그런데 갑자기 높아지는 차동석의 목소리.

“아, 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동석은 곧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며 몸을 틀었다.

“저, 유진아. 진승우 배우가 널 만나고 싶다는데?”

“진승우 배우가? 유진이를? 왜?”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데.”

장미소도, 차동석도 꽤 당황한 얼굴.

유진과 일면식도 없는 진승우가 대뜸 찾아온다니 놀랄 수밖에.

연예잡지 히스패치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

논란에 비례해 연기력이 좋아진다 하여 ‘악마의 재능’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닌가.

아역배우 박유진과는 거리감이 너무 심한 사람이었다.

“언제 만나자고 해요?”

“지금. 우리 회사 근처라고 하는데?”

“네. 만날래요!”

하지만 유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정말 괜찮겠어?”

“넵.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유진으로선 대강 짐작이 갔다.

그가 왜 대뜸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이 사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한 훤칠한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멀끔한 차림으로 웃으며 걸어오는 진승우.

“배우 진승우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사과드립니다.”

그에 대해 돌고 있는 여러 소문과 달리.

매우 젠틀하게 예의를 표하는 진승우.

곧 그를 맞이하러 소파에 앉아있던 유진이 총총 걸어 나왔다.

그러자 진승우가 오, 하고 탄성을 냈다.

“이렇게 만나네요, 박유진 배우. 팬이에요.”

싱긋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진승우.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요즘 삼촌팬이 많이 생기네요. 기뻐요!”

그 말에 진승우가 작게 웃었다.

“형아팬이라고 해줘요. 아직 삼촌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형아팬이요?”

“하하. 농담입니다.”

저렇게 말했지만, 사실 진심일 것이다.

유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40에 가까운 나이로 9살짜리한테 형 소리를 듣고 싶다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네. 진짜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도 똑같았어.’

실은 회귀 전.

유진은 진승우와 같은 영화에 참여한 적이 있다.

물론 진승우는 주조연이었고 유진은 단역이었지만.

‘진승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함께 연기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그렇게 인사를 건넸더니.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주세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리 말하던 진승우다.

‘그리고 환갑에 가까운 나이까지 스캔들이 나던,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지.’

진승우는 회귀 전 유진과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있는 배우였다.

주목받지 않고, 자연스런 연기를 추구하는 유진과 달리.

진승우는 매번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걸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작품 잘 봤습니다. <리플레이>와 <호구>, 둘 다 인상 깊게 봤어요. 늦었지만 한양독립영화제에서 상 탄 거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진승우 배우님이 받았던 상이라 저도 영광이었어요.”

“오, 그걸 알고 있었어요? 박유진 배우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아무튼 고마워요.”

칭찬을 들어서 기분 좋은지, 진승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은 어린애 앞이라 최대한 젠틀한 척 연기를 하는 거겠지.’

아마 속으로는 멋대로 굴고 싶어 근질거릴 것이다.

곧 진승우는 차동석의 안내에 소파에 앉았고, 유진은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런데 이렇게 날이 좋은데. 왜 사무실에 있어요? 놀러 나가도 될 텐데.”

“곧 중요한 오디션이 있거든요. 그거 연습 중이었어요.”

“아, 오디션? <데드맨>의 영서 역할 말하는 건가요?”

그 말에 흠칫 놀라는 차동석과 장미소.

“저도 영서 역할 오디션 보거든요.”

설마 오디션 경쟁상대가 진승우인 줄은 몰랐던 것.

사생활이야 어떻든, 진승우라는 연기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으니.

아무리 유진이라도 힘들 거란 생각이 스치는 게 당연했다.

‘권성택 감독님이나 이순철 선생님이 알려주셨겠지.’

물론.

진승우의 오디션 참여를 미리 알고 있던 유진에겐 놀라울 일도 아니었지만.

‘그런데 숨길 법도 한데 굳이 나한테 알려주네. 나를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싶어서인가?’

그 의도가 어떻든.

유진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네. 윤빈이랑 영서, 두 개 역할이요.”

“오, 두 개씩이나! 대단하네요.”

과장된 리액션으로 호응해주는 진승우.

“어떻게. 오디션 준비는 잘 되어가요?”

유진은 일부러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역시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하하. 그렇겠죠. 9살에겐 너무 어려운 역할일 테니까. 저는 말이죠. 그렇게 꽉 막힌 것 같을 때, 일단 놀아요.”

“논다구요?”

“네. 사람들을 만나면서 얘기를 나누고, 이것 저곳 돌아다니고, 술도 먹고, 게임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거든요.”

끊임없는 스캔들에 휘말리는 진승우지만.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배우로서 영감을 얻기 위한 행위인 모양이다.

그 정도가 가끔 심해서 문제지.

“충고 감사합니다!”

유진의 대답에 음, 하고 잠시 고민하던 진승우.

“내 해석을 한번 말해줄게요. 내가 생각하는 죽음, 영서는 비정하고 싸늘해요. 자비란 없죠. 혹시 저승사자 알아요? 딱 그런 느낌. 장례식장에 자주 드나들 나이라 그런지, 그런 느낌이 자주 들더라고요,”

곧 거리낌 없이 자신의 캐릭터 해석을 내놓았다.

‘거짓말이 아니야. 진승우의 죽음은 정말 저승사자, 그 자체의 느낌이었어.’

그걸 오디션 경쟁자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함정이기도 하네.’

캐릭터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 유진이다.

그런데 만약 유진이 진승우의 해석을 참고하여 오디션을 준비한다면?

그건 진승우가 보여주는 영서의 열화판일 뿐이다.

스스로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배우라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고.

“어려운 게 당연해요. 박유진 배우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음. 어렵긴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죽음은 죄책감이에요.”

그래서.

유진은 반격에 나섰다.

“주인공이 왜 죽음을 보게 되는지, 죽음은 왜 주인공 곁을 계속 맴도는지. 저는 그게 죄책감이라고 생각했어요. 죽은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요.”

진승우는 결코 알지 못할 일이지만.

사실 유진도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죄책감 그 자체였어.’

회귀 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

그건 유진을 한평생 짓눌렀다.

그리고 그 경험이 캐릭터 메이킹에 도움을 주었고.

“······”

덫을 놓았다가 도리어 크게 한 방 먹은 표정의 진승우.

급기야 여태 쓰고 있던 젠틀한 가면이 깨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1초도 되지 않아 원상복구 되긴 했으나.

유진만큼은 진승우의 표정 변화를 또렷이 목격했다.

“어?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제 뺨을 매만지며 묻는 유진.

그 말을 듣고 진승우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아뇨. 훌륭하네요. 박유진 배우가 그 죄책감을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가 됩니다.”

“저도 진승우 배우님이 어떻게 연기하실지 너무 궁금해요!”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캐릭터 해석을 공유했으니, 서로의 패를 모두 보여준 셈이나 다름없다.

남은 건 오디션에서 서로의 해석을 누가 더 설득력 있게 보여주느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바쁘실 텐데 불쑥 찾아와서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오디션 때 다시 만나죠. 그럼 이만.”

진승우가 떠나간 뒤.

사무실은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후.

“······진승우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그러게. 뉴스로 볼 때는 그냥 난봉꾼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괜찮네.”

차동석과 장미소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릴 때.

유진은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진승우가 직접 찾아와 이렇게까지 떠본다는 건, 내가 견제가 되긴 하는 모양이네.’

덕분에 유진은 더욱 승기를 느끼고 있었다.

*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을 빠져나온 진승우.

멀지 않은 곳까지 걸어가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진승우의 매니저가 타고 있었다.

“형,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뭐 어떤데?”

“기분 나쁘게 웃고 있잖아요! 무슨 사고치고 온 거 아니죠? 네?”

“아니라고, 임마. 그냥 생각보다 재밌었을 뿐이야.”

젠틀 모드가 Off 된 진승우.

평소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체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데요?”

매니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진승우는 창문 너머 주역 매니지먼트 건물을 흘끗거렸다.

‘순진한 범생이인 줄 알았는데, 완전 뱀이었네.’

자신이 젠틀한 척 연기를 했다면.

유진은 순진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영서에 대한 유진의 해석을 듣고 나서, 진승우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자칫 잘못하면 잡아먹히겠어.”

위기감과 동시에 고양감을 느끼는 진승우.

배우로서 이런 감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네? 누구한테 잡아먹혀요?”

“아, 맞다. 이순철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승우 형?”

“뭐, 됐어. 다음에 물어보지 뭐.”

“아니, 혼자 뭐라고 그렇게 중얼거리시는 거예요?”

철저히 무시당하는 매니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소속사로 가요. 진짜 대표님이 형 얼굴 좀 꼭 보고 싶대요.”

그러나 진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 오디션 준비해야 하거든. 권성택 감독님 작품이라 당분간 거기 집중할 거야.”

“궈, 권성택 감독님 작품이라고요?!”

매니저도 권성택의 이름값을 알고 있었다.

권성택 감독과 진승우의 시너지가 얼마나 좋은지도.

진승우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평가가 좋은 게 권성택의 작품이었으니까.

“진짜 권성택 감독님이 은인이시네. 형 계속 찾아주시고. 그럼 어디로 갈까요? 형 집? 아니면 뭐 형 편하게 연습실 대여라도 할까요?”

“아니, 내가 자주 가는 펍 있지? 거기로 가.”

“네? 연습한다더니 펍을 왜 가요?”

“어제 거기서 술 먹다가 오디션 대본을 놓고 왔거든. 찾으러 가야 해.”

“아, 형. 진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데드맨>의 오디션 당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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