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성아오츠카 회의실.
오랜만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게.
최근 자사의 대표 이온음료인 ‘아침바람’의 인터넷 언급량이 급증했기 때문.
“아침바람 패러디 광고 영상 조회수도 엄청 높고요.”
“홈페이지에 올라온 박유진 광고모델 추천 건수가 천 개가 넘습니다.”
“여태 이런 적이 있었나요?”
이렇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광고모델을 추천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유진의 넙튜브가 불러온 나비효과가 어마어마했다는 뜻.
성아오츠카로서도 이 사태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언급량이 많다는 건 곧 홍보가 된다는 뜻이니까.
여태 유진 덕분에 돈 안 푼 안 쓰고 홍보효과를 누린 셈.
“이 정도면 박유진을 안 쓰면 이상한 수준이 되었어요.”
“기대감이 한껏 높을 때, 최대한 빨리 도장 찍고 기사 내보내죠.”
얼마 전까지 유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던 팀원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보다 유진을 강력하게 밀고 있었다.
“이미 파워레몬에이드 쪽에서도 접촉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놓칠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박유진을 광고모델로 쓰라고 등을 떠미는 상황.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고, 이 화제성을 안고 갈 수 있다.
성아 오츠카로서도 나쁠 게 전혀 없는 일.
묵묵히 팀원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성혜연 팀장.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윗분들이 죽어도 박유진의 넙튜브 독점노출을 고집하고 계세요.”
이에 계약금을 대폭 늘려서 박유진 측에 제의했으나.
그쪽에서도 넙튜브에 관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때문에 계약은 진전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중.
“아니, 그 회사도 이상합니다. 독점노출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 번 얻어걸렸다고 콧대가 높아진 거겠죠.”
광고 회사들이 보기에, 아직 넙튜브는 그리 중요한 매체가 아니었다.
때문에 박유진 측이 괜히 몽니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
넙튜브 독점노출이 뭐가 그리 어려워? 라고 여기는 것.
“하지만 이렇게 기대하는 여론이 생기면, 틀어졌을 때 욕을 먹는 건 우리 회사가 될 겁니다.”
안 그래도 최근 네티즌들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언론 플레이 중인 성아오츠카다.
이러다가 박유진 쪽과 계약이 완전결렬 되면, 성아오츠카만 타격을 입을 것이다.
상대는 고작 9살이니까.
“일단 쉬었다 가죠.”
성혜연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잠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팀장님!”
가장 먼저 박유진을 광고 모델로 추천했던 팀원.
그가 성혜연에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 박유진 쪽에 연락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넙튜브에 독점노출을 하니 마니로 시간을 보내는 건 큰 손해예요.”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그게 말이죠.”
팀원은 구체적인 대답 대신.
성혜연을 모니터 앞으로 데려갔다.
“이런.”
잠시 후.
탄식을 내뱉는 성혜연.
“역시, 첫 미팅 때 어떻게든 도장을 찍게 했어야 하는데.”
[빅터 ‘첫사랑’ 공식 MV 공개 이후 폭발적 반응! 박유진&재오 콤비, 또 통했다!]
유진의 가치가 또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
MBS의 미디어센터 공개홀.
그곳에선 MBS의 생방송 가요순위 프로그램인 <뮤직큐>가 진행 중이었다.
모든 무대를 끝마치고 1위 발표만을 앞둔 상황.
“과연 오늘의 1위는 누가 될까요?”
“3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원스냐, 컴백 일주일 만에 1위 후보에 오른 빅터냐! 도무지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네요.”
“얼른 결과를 보고 싶네요! 네, 문자 투표 집계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럼 결과 보여주세요!”
화면에 나타나는 각종 평가 점수.
음반 점수며 전문가 점수, 문자투표 등.
모든 항목에서 빅터가 압도적인 점수를 기록했다.
“네, 생방송 뮤직큐! 이번 주 1위의 주인공은! 축하드립니다. 빅터의 ‘첫사랑!’입니다!”
대표로 재오가 트로피를 받아들었고.
빅터의 멤버들은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후 앵콜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빅터 멤버들.
대기실에 들어오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와, 대박!”
“진짜 설마 이 곡으로 1위할 줄은 몰랐는데!”
이미 음악방송 1등은 물론, 연말시상식 대상 수상도 해봤던 빅터다.
새삼 이렇게 흥분하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인가.
“와. ‘첫사랑’이 1등을 하네.”
“그러니까! ‘체이서’가 더 잘 나갈 줄 알았는데.”
바로 자신들의 예측과 달리.
발라드곡인 ‘첫사랑’에 대한 반응이 훨씬 뜨거웠기 때문.
“내가 딱 곡 듣자마자 알았어. ‘첫사랑’이 대박날 거라고. 노래가 엄청 좋잖아?”
“무슨 소리야! 발라드 하기 싫다고 마지막까지 거절했던 놈이.”
“근데 솔직히 발라드 타이틀로 한다고 했을 때 팬덤 반응도 그리 좋진 않았잖아.”
컨셉 변화를 위해 발라드 곡인 ‘첫사랑’을 타이틀로 내세우면서도.
보험 용도로 본래 빅터에 어울리게 강렬한 힙합 곡, ‘체이서’를 더블 타이틀로 정했다.
갑작스런 컨셉 변화에 대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우려가 무색하게 ‘첫사랑’은 줄곧 차트 1위를 유지 중이었다.
그들이 노렸던 새로운 컨셉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
빅터라는 아이돌 그룹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졌다는 방증이었다.
한편.
다른 멤버들이 신난 와중, 재오는 혼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형, 뭐해?”
금발머리의 민혁이 다가와 물었다.
“뮤비 반응 보고 있어.”
‘첫사랑’ 뮤직비디오는 공개 이후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돌 그룹 빅터의 변신! 애절한 발라드곡 ‘첫사랑’ 음원차트 강타!]
[뮤직비디오 조회수 최단기간 100만 돌파!]
우선 노래 자체가 기존 빅터의 이미지와는 매우 달라 이목을 끌었고.
거기에 유진과 재오 콤비가 등장하니 기대감이 생긴 것.
[우리 재오 오빠 공익광고 때보다 연기 엄청 늘었다 ㅠㅠㅠㅠ 그때도 잘했는데 지금은 더 잘함
머글인 내 친구가 뮤비 보고 재오 오빠 연기 잘한다고 칭찬 엄청 해줘서 뿌듯했음 ㅠㅠ
ㄹㅇㄹㅇ 우리 재오 노력파에 악바린 거 빅토리가 다 아니까 더 뿌듯하고 고맙다]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은 바로 연기력에 대한 평가였다.
뮤비 댓글에 재오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팬들이 많았고.
[빅터 재오, 뮤직비디오에서 깊은 감정 연기 선보여······앞으로의 연기진출 가능성은?]
[공익광고 때보다 진일보한 재오의 연기력!]
아예 이런 기사가 나오기까지.
‘유진이만 악착 같이 따라가자고 생각했는데.’
감기까지 걸려가며 노력한 게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결국 따라잡진 못했지만.’
[우리 빅터 오빠들도 훈훈하고 유진이도 너무 귀엽 ㅠㅠㅠㅠ
하 눈이 즐겁다 진짜... 화면에 다 잘생이들 밖에 없네
아 박유진 왜 자꾸 꼽사리 끼는데 ㅡㅡ 진짜 극혐
ㄴ 9살짜리한테 열폭하는 수준봐라 진짜
ㄴ 이게 사람새끼임? 방구석 찐따
ㄴ 신고 ㄱㄱ
ㄴ PDF 캡쳐해서 주역 매니지먼트에 보냈습니다
아니 애기들이 꽁냥대는 거에 이리 설렐 일...?
와 유진이 눈웃음 ㅠㅠㅠㅠ 미쳤다 ㅠㅠㅠ
하... 심장이 아파...부정맥 생길 것 같애...
이거 보고 내 첫사랑 기억 조작당함 ㅋㅋ 내 첫사랑...아름다웠을지도?
이 뮤비를 보는 사람들 특) 빅터 때문에 봤다가 유진이 때문에 재탕함
ㄴ 동감ㅋㅋㅋㅋ
ㄴ 유진이 나오는 구간마다 캡쳐하기 바쁘다
어떻게 멜로 연기까지 잘 하냐...누나 마음에 불을 지르는구나 아주]
그 증거로.
일반 커뮤니티에선 유진에 대한 얘기가 조금 더 많았다.
재오가 보기에도 유진이 풋풋한 첫사랑을 매력적으로 담아냈으니.
[첫사랑 들을 때마다 뮤비에 나온 유진이 얼굴 생각남
해맑게 웃는 장면에서 가사는 ‘이제 너를 보낸다’라니... 새벽에 갑자기 감성돋네 ㅠㅠㅠ
음원 듣다가 다시 뮤비 한 번 보러간다...
솔직히 100만 조회수 중에 내가 36번 정도는 보탬ㅋㅋ
ㄴ 난 20번ㅋㅋㅋㅋ
ㄴ 회전문이냐고... 출구는 없고 다시 입구로 돌아옴...]
그리고 그건 ‘첫사랑’의 감성적 가사와 시너지를 일으켰고.
대중들로 하여금 몇 번이고 뮤직비디오를 재탕하게 만들었다.
‘유진이를 뮤비에 쓰자고 하길 잘했네.’
사실 재오가 유진에게 뮤비 출연을 권한 건 상부상조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은 유진과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며 연기력 향상을 꿰하고.
유진에겐 뮤비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우리 뮤비에 출연하면 유진이한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유진이 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더블 타이틀곡인 ‘체이서’.
그보다 2배 이상 높은 조회수를 기록 중인 ‘첫사랑’ 뮤비를 보며 그 생각이 점점 깊어져갔다.
“유진이한테 전화나 해볼까.”
문득 중얼거리는 재오.
곧장 실행에 옮겼다.
“어, 재오 형? 저 DMB로 보고 있었는데. 1위 축하해요, 형!”
전화를 받자마자 축하부터 건네는 유진.
재오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유진아. 다 네 덕분······”
그때.
“뭐야, 재오 형 누구랑 통화해?”
“방금 유진이라고 했는데?”
“유진이라고?”
재오가 유진과 통화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고.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빅터 멤버들.
“유진아! 콘서트 하면 꼭 게스트로 와줘!”
“회사 놀러와.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재오 형 말고 나도 연기 좀 가르쳐줘. 재오 형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재오 휴대폰 쟁탈전을 벌이며 제 할 말을 쏟아내는 멤버들.
그들도 뮤직비디오 촬영 때 유진을 만났다.
당시에도 한참 어린 유진을 무척이나 귀여워했고.
유진의 인맥이 재오에서 빅터 전체로 늘어난 것.
“아, 시끄러워 이놈들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재오.
“하하. 고마워요, 형들!”
반면 수화기 너머의 유진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 다음에 만나면 사인해줘. 우리 엄마가 네 팬이래!”
한 박자 늦게, 조금 서툰 한국어로 외치는 사람.
바로 일본인 혼혈 멤버인 유이치였다.
“너희 어머니 일본에 계시잖아? 그런데 유진이 팬이라고?”
재오가 물었다.
유이치의 부모님은 일본에 계시고, 유이치 혼자 한국에 와서 활동 중인 상황.
그런데 일본의 부모님이 유진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리 뮤직비디오. 그리고 <호구>? 그 드라마 보셨대. 요즘 한국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인기야.”
*
사무실에 있는 권성택.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 진승우에게 오디션 불합격 통보를 전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의외로 덤덤했지. 예상이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분명 진승우라면 뭐든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장난스레 빈정댈 수도 있고, 아예 정색하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다음에 더 잘하겠다고 했어. 그 진승우가.’
게다가 진승우는 여태 권성택 영화 오디션을 볼 때마다 뽑혔다.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것이 아역배우이고.
여러모로 이번 탈락은 진승우의 자존심에 금이 갔을 테지만.
‘부디 그 녀석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면 좋겠군.’
이 바닥에 ‘절대’란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권성택으로선 유진의 연기와 해석을 보고서 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승우의 연기 노선은 찾아보면 대체할 수 있는 배우가 있겠으나.
유진의 연기 노선은 오로지 박유진만 할 수 있는 연기였으니까.
‘그 증거로, 그 아이에겐 1인 2역을 맡길 수밖에 없어.’
유진을 영서로 캐스팅하려면 반드시 윤빈까지 맡겨야 했다.
캐릭터 해석이 이어지니까.
덕분에 유진은 권성택 감독 작품 사상 최초의 1인 2역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설마 이것까지 노린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일이 있겠느냐 싶다가도.
유진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철저히 활용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아무튼.
오디션을 기점으로 유진을 바라보는 권성택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차동석, 박태종과 함께 동행한 유진.
곧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디 놀이공원이라도 다녀왔니?”
그런 유진을 빤히 바라보던 권성택이 물었다.
그러자 유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볼에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말이야.”
“아, 아직 안 뗐었네. 넵! 아빠랑 같이 놀다 왔어요.”
제 볼에 붙은 스티커를 매만지며 웃는 유진.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오디션 때 그런 연기를 보여준 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감독 생활을 오래 해온 권성택이다.
연기하기 전과 후가 전혀 다른 배우들은 숱하게 봤다.
그러나 유진에게 받는 인상은 조금 결이 달랐다.
‘연기를 할 때면 어디선가 전혀 다른 영혼이 들어왔다가, 연기 후에 빠져나가는 느낌.’
빙의라고 느껴질 만큼 기묘한 감각.
그만큼 배우와 캐릭터가 완벽히 분리되었다고 느껴졌다.
‘확실히, 이미 아역배우 수준은 넘어선 거지.’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2배로 더 열심히 할게요!”
아무튼.
지금 유진은 평범하고 활기찬 9살 아이일 뿐이었다.
“그래. 그럼 곧장 계약 얘기로 들어가지.”
테이블에 자리한 뒤, 곧장 계약서를 내미는 권성택.
유진 측에서 역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출연료 부분.
상상 이상으로 큰 금액이 적혀있었다.
<리플레이> 출연료와 비교하면 열 배 이상 차이나는 수준.
“······와.”
그 큰 금액에 박태종이
물론 흠칫 놀라 스스로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아무튼.
유진을 아역이 아닌, 한 명의 라이징 스타로 본다는 권성택의 성의 표시.
물론 1인 2역을 맡아야 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그 금액을 본 차동석은 유진 쪽을 흘끗거렸다.
그러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믿으라는 것처럼.
그러자 차동석 역시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권성택을 향해 말했다.
“저, 감독님. 한 가지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 액수가 부족합니까?”
“아뇨. 액수가 아니라, 방식을 바꾸었으면 합니다.”
차동석의 말에 꿈틀거리는 권성택의 얼굴 주름.
“방식이라면?”
“이 영화 출연료, 전액 러닝 개런티로 받고 싶습니다.”
그 대답에 권성택이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