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러닝 개런티.
영화 제작 이후, 흥행에 따라 출연료가 지급되는 형태다.
영화 제작사로서는 배우 출연료를 아껴서 영화 제작에 더 보탤 수 있고.
배우로서는 영화의 흥행이 보장되어 있다면 본래 출연료보다 더 큰 돈을 거머쥘 수 있는 방식.
하지만.
어디까지나 흥행이 보장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권성택이 침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전액 러닝 개런티. 이 의견엔 박유진 배우도 동의한 겁니까? 아니, 애초에 개념은 알고 있는 겁니까?”
보통 러닝 개런티는 부수적 옵션이다.
출연료를 조금 깎는 대신 러닝 개런티 옵션이 붙는 형태.
하지만.
전액 러닝 개런티로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출연료를 영화에 투자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배우가 먼저 제안한 겁니다.”
“배우가 먼저?”
차동석의 대답에 권성택은 흠칫 놀라 유진을 바라보았다.
러닝 개런티의 개념은 알고 있느냐 물으려다 참았다.
유진이 보통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노파심에 한마디 하고 싶구나. 내가 부끄럽게도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매번 성공만 했던 건 아니다.”
이 영화판에서 ‘절대’란 없다.
거장 권성택도 부침을 겪던 시기가 있었고.
모든 작품이 흥행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이번 <데드맨>도 마찬가지.
죽음의 의인화라는 새로운 시도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감독을 해온 권성택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대중들의 마음이니까.
“부디 내 이름값만 보고 내린 선택은 아니길 바란다.”
진지하게 조언하는 권성택.
그러자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자신 있어요!”
유진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보내주신 대본도 다 읽어봤어요. 이 영화 무지 잘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출연료로 더 좋은 영화 만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설마 9살짜리 배우가 이런 말을 할 줄 알다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으로선 고마우면서도 대견했다.
사실 감독 입장으로선 배우가 전액 개런티로 출연해준다면 고마울 뿐이다.
더군다나 유진은 1인 2역이라는, 쉽지 않은 연기를 보여줘야하고.
“유진이 아버지 분 되신다고 했죠. 괜찮으십니까?”
권성택의 시선이 박태종에게로 옮겨갔다.
“네. 전 아들의 선택을 믿습니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요.”
거장 권성택을 마주했다는 사실.
그 때문에 덜덜 떠는 박태종이지만, 확실히 자기 의사를 전달했다.
“그럼 그렇게 수정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권성택이 모자를 벗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유진 측도 화들짝 놀라 맞인사를 했고.
그런 와중.
고개를 숙인 유진은 씨익 미소 지었다.
‘이 영화? 잘 되고말고. 내년에 유일한 천만영화가 될 텐데.’
내년 개봉 영화들은 모두 지지부진한 성적을 기록한다.
<데드맨>에겐 별다른 적수가 없는 셈.
즉, 유진은 확실한 성공에 투자한 셈이다.
계약에 관한 합의를 모두 마치고 도장을 찍은 뒤.
권성택은 유진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영화 홍보 열심히 해야겠네. 그래야 너한테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넵. 저도 제대로 홍보해볼게요!”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유진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지만.
*
일본 방송국 JTV.
그곳에서 방영되는 토크쇼 <톡 토크>는 매주 각종 다양한 화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자, 그럼 오늘의 주목할만한 화제! 한국을 뒤흔든 초특급 아역배우입니다.”
MC의 말에 패널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초특급 아역배우요?”
“대체 어느 정도기에?”
“벌써 밝히면 재미가 없죠. 자, 그럼 먼저 이 드라마를 아시는 분! 손을 들어주세요.”
곧 스크린에 드라마 <호구>의 로고가 튀어나왔다.
패널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한국 드라마가 있었나요?”
“<호구>? 제목이 특이한데.”
“저! 저 봤습니다.”
그때.
한 젊은 게스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가슴팍에 달고 있는 이름표에 ‘마유미’라 쓰여있는 여성이었다.
“검도를 소재로 한 6부작 드라마입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공모전 당선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마유미 씨는 한국 드라마 팬으로 유명하죠? 어떤가요? 이 드라마 재미있던가요?”
MC의 물음에 마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재밌었어요! 한국, 일본 가리지 않고 이런 수작은 오랜만이었거든요. 한국에서 검도가 등장한다는 것도 반가웠고요. 이런 웰메이드 드라마가 바로 한국 드라마의 묘미죠.”
검도가 소재인 덕분인지.
<호구>는 방영 이후 일본에서도 꽤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일본의 한국 드라마 매니아들 사이에 차츰차츰 유명해진 것.
“여태 인기를 끌었던 한국 드라마들은 대부분 최소 12부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놀라워요. 6부작인데도 흡인력이 대단하거든요.”
곧 패널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리액션이 터져나왔고.
마유미는 더욱 텐션이 올라 말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드라마엔 한류 스타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나마 이순철 배우 정도가 한국 드라마 팬들에겐 익숙할지 모르죠.”
“그럼 주인공이 대체 누구죠?”
“아역배우 2명이었습니다.”
그러자 술렁대기 시작하는 스튜디오.
“그런데 어린이 드라마도 아니고, 아역배우 두 명이 주인공이라니. 유치하지 않을까요?”
한 중년 여성 패널이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냈다.
그러자 마유미가 곧장 반박했다.
“아뇨. 전혀 유치하지 않아요. 오히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동적 성장 스토리를 다루고 있거든요. 거기다 주연들의 연기도 아주 좋아요.”
그때 MC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두 주인공의 모습을 한 번 보시죠.”
그와 동시에 전환되는 스크린.
바로 유진과 이지혜의 사진이 나타났다.
“오, 두 사람 비주얼이 상당한데요?”
“특히 저 어린 남자애 쪽. 와, 저런 얼굴은 처음 봤어요. 눈을 뗄 수가 없네요.”
비주얼에 대한 호평이 가득한 가운데.
“어? 저 아이!”
그때.
아까 그 중년 여성 패널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번 빅터 신곡 뮤직비디오에 나온 아이인데?”
그러자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스튜디오.
일본에서도 빅터의 인기는 대단했으니까.
“저 아이가 주연이라는 건가요? 세상에! 뮤직비디오에서 비주얼과 연기, 모두 엄청났거든요!”
유진을 알아보자마자 금세 태세전환을 완료했다.
아무래도 빅터의 팬인 모양.
“네, 맞습니다. 저 배우의 이름은 박유진입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한국의 초특급 아역배우죠.”
MC가 만족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말씀해주셨듯, 최근 빅터의 신곡 ‘첫사랑’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을 비롯, 전세계 팬들이 ‘대체 이 어린아이는 누구냐?’ 하고 궁금해할 정도죠.”
곧 스크린엔 ‘첫사랑’ 뮤비에 달린 외국팬들의 댓글이 나타났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 심지어 불어까지.
다양한 국적의 팬들이 유진의 연기와 외모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엔 한국에서 이 짧은 동영상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요. 한 번 보시죠.”
MC의 신호에 따라 스크린에 나오는 유진의 얼굴.
바로 <호구>의 시청률 상승을 견인한.
유진의 역대급 비주얼 움짤이었다.
“와.”
“대단해.”
“지금 당장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겠어요.”
“난 방금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방금 좀 설렜습니다!”
일본답게.
특유의 과장된 리액션으로 감탄하는 패널들.
심지어 아까 태클을 걸었던 중년 여성 패널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봐도 너무 좋은 장면이에요.”
<호구>를 좋아한다는 마유미조차 입가를 가리며 좋아할 정도.
MC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한국에는 ‘유진앓이’라며 박유진의 인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아역배우론 이례적인 신드롬이죠. 거기에 최근 한국에서 터진 아역배우 혹사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게 바로 이 박유진입니다. 실제로 정부기관의 아동학대 근절 캠페인 홍보대사라고 하는군요.”
이후 설명을 보충하는 각종 자료화면이 나왔다.
유진이 거둔 각종 성공과 영향력.
미담까지 더해지자 모두가 유진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인성까지 갖췄다 이거군요! 정말 대단한 아이네요.”
“저도 집에 가서 저 드라마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일본에서 작품활동 하는 것도 보고 싶네요.”
“전 대환영입니다!”
그렇게.
일본에서도 유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중이었다.
*
며칠 후, 다시 한국.
잡지 촬영을 마치고 온 유진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일본이요?”
유진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장미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터넷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한 토크쇼, 박유진 집중 조명! “한국을 뒤흔든 초특급 아역배우”]
[일본 토크쇼에도 소개된 아역배우 박유진! 일본진출의 신호탄 되나?]
[아역배우 박유진, 일본진출 추진 중? 소속사 “사실무근”이라지만······.]
“아무래도 일본 방송에서 널 언급한 모양이야. 그래서 오늘 종일 전화가 왔어. 일본 진출하는 거냐고 몇 번을 묻더라.”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장미소.
꽤 많은 기자가 집요하게 캐물었던 모양.
“고생했어, 자기야. 하긴. 화보집 주문한 사람 중에 일본인도 더러 있다고 하던데. 대체 어쩌다 일본인들이 유진이의 팬이 된 거지?”
“이번에 <호구>랑 ‘첫사랑’ 뮤직비디오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아.”
한국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호구>.
일본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빅터.
그 두 가지가 시너지를 발휘한 모양.
‘빅터 뮤비의 아역’, ‘<호구>의 주인후’로 알려진 것이다.
“일본이라. 나쁘지 않지.”
차동석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한류 열풍이 거센 시기였고.
아이돌들은 필수코스처럼 일본에서 앨범을 냈다.
비주얼이 특화된 배우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작품을 찍는 게 흔해진 상황.
“하지만 벌써? 라는 생각은 드는 게 사실이야.”
물론 한류열풍으로 인해 일본에 곧잘 진출하곤 있다지만.
외국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승부해야하니까.
거기다 유진은 아직 어리다.
혹시나 부담으로 다가올까 우려되는 것.
[박유진 보유국 위풍당당 대 한 민 국
느이는 유진이 없지? 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유진이가 전세계 투어 한 번 돌면 세계평화 이룰 수 있다
니뽄 코이츠야로들ww 보는 눈은 있는wwww
ㄴ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아 씹덕체 치트키 쓰지 말라고 ㅋㅋ
일본진출! 가자 유진아! 가서 한국도 알리고 국위선양하면 좋을 듯~^^]
인터넷 반응 역시 비슷했다.
대체적으로 유진을 응원하고 있지만.
[안 돼. 가지마라 유진아. 가서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이모는 결사반대다!
아직 한국 활동에 집중하는 게... 언어가 전혀 안 될 텐데
뭐지 이 감정... 유진이가 일본 가서 씹어먹었으면 좋겠다가도 그냥 한국에서 계속 활동해줬으면 ㅠㅠㅠ]
걱정하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9살인 유진이 타국으로 건너가 고생하는 걸 우려하고 있는 것.
“유진아. 네 생각은 어때?”
차동석의 물음에 유진이 곧장 대답했다.
“음, 당분간은 <데드맨>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유진도 일본진출에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닐 뿐.
작품 컨택이 온 것도 아닌데 벌써 설레발을 떨 필요는 없다.
굳이 강제로 타진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소리.
‘억지로 진출할 필요는 없어.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레 작품으로든 뭐든 기회가 올 거야.’
유진의 대답에 차동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권성택 감독님은 촬영 때 다른 쪽 기웃거리는 거 싫어하신다고 들었으니까. 그래도 일본진출 관련해서 계속 언급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 적당히 간 좀 보자.”
“동감이야, 오빠.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장미소가 말을 이어갔다.
“백룡영화제에서 공식적으로 유진이를 초청했어.”
한양독립영화제가 독립영화의 축제라면.
백룡영화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성 있는 영화제 중 하나다.
작년 한 해 동안 상영된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
“백룡이 왜? 유진이 후보에도 없잖아?”
백룡영화제에는 신인상도, 신인감독상도 없다.
인기상처럼 나눠먹기를 위한 시상도 하지 않는다.
철저히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평가해 상을 주는 곳.
그래서일까.
영화제 중 가장 권위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박혀있었다.
“축하무대로 초청받은 거야. 아무래도 <날개>가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돼서 그런가봐. ‘날아가’를 라이브로 불러줄 수 있겠냐 하더라고.”
비록 후보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유진의 축하무대는 여러 상징성이 있을 터였다.
‘비록 축하무대라 할지라도, 아역배우로서 백룡영화제에 참석하는 건 큰 의미가 있어.’
굳이 유진을 초청해 무대에 세운다는 건.
백룡에서도 그만큼 유진을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어쩌면 후보에 넣지 못한 대신, 성의를 표시한 것일 수도 있다.
“듣기로는 권성택 감독님이 공로상을 받을 예정이야. 그 공로상 수상 이후에 바로 유진이 축하무대가 시작될 예정이고.”
“전 좋아요!”
장미소의 말에 번쩍 손을 드는 유진.
“축하무대 끝나고 잠깐 마이크 더 잡아도 돼요?”
판이 깔렸다.
유진은 백룡영화제를 기꺼이 제 홍보의 장으로 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