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강남에 위치한 한 피트니스 센터.
이곳은 유명 연예인들만 특별 관리하는 곳이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인맥이 넓어지기도 하고, 여러 정보가 오고가는 등.
피트니스 센터라기보단 사교의 장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방해받지 않고 운동하려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
묵묵히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남자.
한권주처럼.
날카로운 냉미남 이미지로, 차도남 캐릭터와 악역 등을 전문적으로 맡은 배우.
마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오히려 중후해진 비주얼 덕에 더 인기를 끌고 있다.
“후우.”
숨이 찬지, 곧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한권주.
곧 복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아들]
주소록 맨 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
한권주의 손이 그곳으로 향하려다 말았다.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
그때.
우웅-!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 권성택 감독님
단합대회 참여해라
핑계대지 말고]
단합대회라는 단어에 찌푸려지는 한권주의 미간.
그는 이번에 <데드맨>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이런 자리에 주인공이 빠져서는 안 될 노릇.
자의 반 타의 반, 참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 권주야. 오랜만이다?”
그런 한권주를 알아보며 인사하는 건, 인중이 유달리 긴 남자.
한권주와 동갑인 동료 배우 고석태였다.
“너도 문자 받았냐?”
그 역시 <데드맨>에 출연할 예정으로, 주인공의 부하 역할이다.
역할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감초, 신 스틸러로 활약하는 배우.
“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신지. 단합대회라니 말이야. 요즘 이런 거 잘 안 하잖아?”
고석태의 말대로.
예전에야 영화나 드라마 촬영 전, 단결을 위해 여러 행사를 진행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사장되는 분위기.
스타들이 시간을 비우기도 어렵고.
영화 한편 찍는데 무슨 단합대회까지 하냐는 불만들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거장 권성택의 영화다.
그런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배우는 아마 충무로에 없을 터.
“나야 모르지.”
“내 생각엔, 아무래도 배우들 기싸움하지 말라고 선전포고하신 것 같다. 이번 영화 출연진이 좀 화려하냐? 조연에만 나은주에 성주열, 장무하······아주 충무로 올스타들 납셨지. 거기에 너와 나까지 화룡점정이고. 크크.”
권성택 감독의 영화답게.
이번 <데드맨>의 출연진은 화려했다.
어딜 가도 주인공을 꿰찰만한 이름값 있는 배우들.
이런 배우들이 모이면 어느 정도 기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비슷한 급이고, 경쟁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권성택도 굳이 단합대회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그 아역배우겠고.”
그 말에 한권주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를 발견하지 못한 고석태는 말을 이어갔다.
“설마 진승우를 제치고 아역배우가 영서 역을 따내다니. 이름이 박유진이랬나? 진짜 재밌지 않냐? 진승우 녀석 충격 좀 받았는지, 요즘 별 사고도 안 치더라.”
아무리 권성택 감독의 오디션이 비공개라 하더라도.
이 업계의 소문은 빛보다 빠른 법.
특히 톱배우들 사이에서 권성택 감독 오디션을 누가 보느냐, 누가 뽑혔느냐는 큰 관심사였다.
“이번 영화 홍보도 박유진 걔가 먼저 터뜨려버렸잖아? 감독님께서 홍보를 꽤 요란하게 하셨더라. 감독님답지 않게 말이야. 바로 앞 순서에 감독님이 공로상 받았고, 수상소감 때 신작 제작 중이라 말씀하셨지. 바로 그다음 축하 무대 나온 박유진이 터뜨렸고. 이거 예정된 빌드업이었겠지?”
“관심없어.”
한권주는 무심한 척 답했으나.
눈동자는 제 휴대폰 속 [내 아들]에게 향했다.
유진 얘기를 들으며, 제 아들을 떠올린 것.
“아. 그런데 권주야. 요즘 아들은 잘 지내냐?”
“나 이혼했다.”
한권주의 대답에 약 3초 정도 흐르는 정적.
고석태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이내 곧 물었다.
“언제?”
“1년 전에.”
“아, 그래? 미안하다. 난 왜 지금 알았지?”
“내가 지금 말했으니까. 자랑거리도 아니잖아, 이혼이.”
“아, 음. 그렇구만. 그럼 아들은 어쩌고?”
“엄마랑 같이 살고 싶대.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여주는 아빠보단, 엄마 옆에 남고 싶었겠지.”
무뚝뚝하게 설명하는 한권주.
타인이 보기에 지금 한권주는, 이혼과 아이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권주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네 아들이 한 7살 먹었을 때인가? 한창 예쁠 나이인데. 아쉽겠네. 그래도 시간 내서 자주 만나. 그게 아들한테도 좋을 거야.”
“신경 꺼.”
더 말하고 싶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다.
“쓰읍. 그래. 힘내고. 난 이만 간다. 운동 열심히 해라.”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황급히 자리를 뜨는 고석태.
한권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자주 만나라고?”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막상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곁에 있어 줘야 할 때 있어 주지 못했는데.
자신이 필요할 때 아이를 찾는 건 너무 비겁해 보였으니.
“후우.”
복잡한 생각과 함께 휴대폰을 집어넣은 한권주.
그는 다시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
[단독! 거장 권성택 감독 신작 <데드맨> 캐스팅 확정······한권주, 고석태, 나은주, 성주열, 장무하, 박유진 출연]
[별들의 향연······<데드맨> 초호화 캐스팅, 벌써부터 흥행 예약?]
<데드맨>의 캐스팅 확정 기사가 뜬 이후.
인터넷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한권주 ㅠㅠㅠㅠㅠ 드디어 신작 ㅠㅠㅠ 내 영원한 실장님 ㅠㅠ
고석태 진짜 믿고 보는 배우인데 거기에 나은주 성주열 ㄷㄷ
와 일단 출연배우만 봐도 500만은 기본 깔고 가는 거 아님?]
출연 배우들이 무척이나 화려했으니까.
모두 이름을 대면 모두 알만한 흥행작에 출연했던 배우들.
그들의 연기력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을 정도다.
[와 근데 저 라인업에 박유진이 껴있네
역시 박유진 그냥 아역이라니까 ㅋㅋ 뭘 자꾸 올려치기하냐
마치 호나우지뉴 카카 램파드 제라드 송우진만큼 위화감이 드는 라인업이네
ㄴ 송우진이 누구임?
ㄴ 원댓글러) 나 ㅎ 3년 전까지 송파고의 즐라탄이라고 불림
ㄴㄴ ㅁㅊㅋㅋㅋ
분량이 중요하냐? 리플레이 때도 박유진 한 10분 나왔나 그랬는데도 상받았는데
ㄴ 이제와서 갑자기 왜 태세전환임?
ㄴ 그런 듣보 독립영화제에서 상탄거 누가 인정해줌?]
그래서일까.
백룡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출연사실을 알리며 영화를 홍보했던 유진.
그에 대한 반감 여론이 소수 생겼다.
이름값이 너무 비교된다는 이유 때문.
그러나.
그 후속타로 터진 기사.
[아역배우 박유진, <데드맨>에서 1인 2역 연기 선보인다! 영화팬들의 관심집중]
[내년 백룡영화제 노린다던 배우 박유진, <데드맨>에서 핵심 캐릭터 소화할 예정!]
유진이 주조연급으로 비중이 상당히 높고.
심지어 1인 2역을 소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진아!!! ㅠㅠㅠㅠ 넌 진짜 대박이야...사랑해...
1인 2역??? 아역이 1인 2역이라고??? 상상이 안 가네
분량 실종 아역이라던 까들 다 버로우 해라 ㅋㅋㅋ
애한테 열폭하는 놈들은 인터넷 끊고 사회활동 좀 해라...
근데 저 좋은 배우들 다 제치고 박유진이 주조연이라고??
권성택 배우 고르는 눈 좋기로 유명한데 1인 2역 ㅋㅋ 와 대박 벌써 기대된다]
얼마 없던 부정적 여론조차 잠재워버렸다.
오히려 그동안 분량과 비중 문제로 끌리던 어그로.
그걸 긍정적 관심으로 전환시킨 것.
그리고 그 효과는 숫자로 확실히 나타났다.
[배우 박유진의 스프링노트
동영상 – 20개, 구독자 – 101,222명]
유진의 넙튜브 구독자가 마침내 10만을 돌파한 것.
웹드라마를 준비 중인 상황에서 큰 호재였다.
“이렇게 어그로 끌릴 때 웹드라마를 공개하는 게 좋은데.”
김상헌의 말에 손호철이 동의했다.
“여러모로 서둘러야겠네요. 불쑥 업로드하는 것보다, 미리 티저라도 만들어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대감을 주면 좋으니까요.”
“좋은 아이디어네. 그럼 우선 사장님께 허락받고, 티저부터 만들어보자고.”
한편, 차동석 쪽은.
“단합대회라.”
<데드맨> 단합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워낙 좋은 배우들이 많아서, 유진이의 인맥을 넓힐 기회야.”
거장 권성택의 영화답게.
<데드맨>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즉, 유진에겐 이 유명 배우들과 인연을 쌓을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기에 눌려서,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어.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배우들 기 싸움에 휘말려들 수도 있어.”
장미소가 우려를 내비쳤다.
스포츠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능력치가 뛰어난 스타플레이어들을 모아 팀을 꾸려도, 제대로 시너지를 내기 쉽지 않다.
호흡을 맞추기보단 스스로 해결하려 하니까.
배우 결국 연예인이다.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
특히 최근 ‘씬 스틸러’라는 단어가 생겨나며.
분량이 적은 조연들도 최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려 애쓰는 중이다.
유진이 아직 9살이라지만, 권성택 감독 작품에서 중책을 맡았다.
다른 배우들이 유진을 경쟁자라 여길 수 있다.
“특히 한권주 쪽이 걱정되는데.”
“유진이랑 붙는 장면이 많아서 호흡이 중요할 텐데. 워낙 소문도 그렇고, 무관심하고 냉정하다는 얘기가 많아서.”
차동석과 장미소 모두 연예계 종사자.
배우에 대해 도는 소문은 비교적 정확하다.
‘한권주 배우에 대해선 예전부터 워낙 얘기가 많이 돌았지.’
가뜩이나 차가운 이미지인데.
이혼이라는 가정사까지 더해졌으니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그러나 유진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왜냐면 훗날.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한권주가 한 방송에 출연하는 걸 알고 있으니.
약 20년 후, <눈맞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권주.
이혼 후 잘 만나지 못했던 아들을 다시 만나, 속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다는 사연.
‘아들이 한 번 크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촬영 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새벽 늦게 끝난 뒤에야 확인했고, 제가 병원에 갔을 때 아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하더군요.’
‘스스로가 너무 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때문에 이혼 이후, 아들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미안해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한권주.
그러나 결국 아들은 한권주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이혼 이후, 자신을 찾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다는 이유.
‘미안하다. 내 아들. 미안하다······.’
차마 죄책감에 아들을 찾지 못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던 아들.
젊어선 냉미남 이미지였던 배우가.
환갑에 가까워져 뒤늦게 아들을 찾고.
만남에 실패하자 후회의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
여러모로 유진의 마음속에 안타깝게 남아있었다.
“걱정마세요.”
유진은 평소처럼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배우님들이랑 잘 지낼 수 있어요!”
설령 배우들이 기싸움을 벌인다고 해도.
유진이 어디 가서 기를 펴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
단합대회 당일.
합류하기 전, 차를 타고 이동 중인 한권주.
잠시 갈증을 느낀 그는 창밖의 편의점을 발견했다.
“잠깐 편의점 좀.”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제가 사올까요?”
“아니. 넌 여기 있어.”
바람 좀 쐴 겸, 직접 다녀올 생각이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편의점에 들어서는 한권주.
다행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꺄아!”
그때.
갑자기 여고생 무리가 익룡 소리를 냈다.
한권주는 흠칫 놀랐다.
설마 자신을 알아본 건가 싶어서.
하지만, 여고생들은 한권주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미쳤다.”
“와, 진짜 너무 예뻐.”
“이거 포스터만 안 파나?”
“진짜. 방 안에 붙여놓고 싶다.”
바로 유진이 광고모델을 맡은 아침바람.
그 포스터가 붙어있었으니까.
“눈웃음 녹네, 녹아.”
“진짜 이런 남동생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냥 볼 때마다 용돈 5만원씩 쥐여줄 것 같아.”
“진짜. 알바해서라도 용돈 줘야지!”
여고생들이 사라진 후.
한권주는 말없이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아침바람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왔다.
“네. 950원입니다.”
잠시 후, 차로 돌아온 한권주.
그의 손에 들린 아침바람을 발견한 매니저가 물었다.
“음? 형, 원래 그거 마셨어요?”
“아니. 그냥, 한번 마셔보고 싶어서.”
“이야. 요즘 그거 광고 잘 뽑혔다고 하더라고요. 이온음료 광고에 아역배우라니. 진짜 의외였는데.”
매니저가 떠드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아침바람을 한 모금 마시는 한권주.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특히 너랑 유진이. 두 사람은 좀 친해질 필요가 있어.’
불현듯 떠오르는 권성택 감독의 목소리.
얼마 전.
권성택이 한권주를 따로 불러내어 말했던 것.
‘영화에서 제일 많이 붙는 게 너희 둘이다. 영화 핵심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너희 둘이고. 또 다른 배우들이 괜히 쓸데없이 유진이 견제하나 잘 봐줘라. 의외로 배우란 놈들이 유치하더라고.’
권성택은 그리 말하며 진승우가 유진의 회사를 불쑥 찾아간 일을 말해주었다.
‘진승우 그 자식이라 벌인 일 같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긴 하지.’
즉, 한권주더러 일종의 보호자 역할을 하란 소리였다.
‘너도 부모 아니냐. 물론 그 애 알아서 잘 할 것 같지만, 영화 내용도 과격해서 걱정이다. 네가 잘 좀 봐줘라.’
“허.”
권성택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 하권주.
“지금 내 자식도 못 보는 상황인데.”
자조적으로 말하긴 했으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박유진이라는 아이가 딱 제 아들 또래였으니.
‘그러게 왜 그런 어린애를 캐스팅하셔서.’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진을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배우들 다 이미 도착한 상황이랍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이라네요.”
상황을 전달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박유진, 걔도 도착했대?”
“네.”
“그럼 좀 빨리 가자.”
혼자 덩그러니 있을 유진이 내심 걱정되기 시작했다.
권성택 말마따나, 그 역시 한 명의 부모였으니까.
그런데 현장에 도착했을 땐.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
“유진아, 사탕 먹을래?”
“혹시 누룽지 사탕 있나요? 홍삼맛도 괜찮은데!”
“아하하! 얘 입맛 취향 왜 이래? 완전 아저씨 같아.”
“준비성이 없네. 나는 미리 옛날 과자들을 준비해왔지요.”
“와! 감사합니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 넙튜브 채널 영상 다 챙겨봤거든. 거기에 네 과자 취향 다 나와있잖아. 근데 아버지는 안 오셨어? 나 너희 아버지 완전 팬이거든. 너무 재밌고 귀여우셔서.”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오셨어요. 제가 은주 누나가 아빠 팬이라고 꼭 전해드릴게요!”
유진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톱스타 배우들.
그 대단한 배우들이 기싸움은 커녕, 다들 하하호호 웃으며 유진을 귀여워하고 있었으니까.
“뭐야, 쟤.”
이름값 높은 배우들과의 첫만남.
유진은 그 틈바구니에 어색함 없이 녹아들었다.
아니, 오히려 유진을 중심으로 배우들이 모여든 것처럼 보였다.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모양새 같은데.”
그러자 한권주의 머릿속에 권성택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재생되었다.
‘물론 이렇게 얘기했지만, 그 아이 보통내기는 아니다. 네가 보호자 노릇을 해야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네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쉰소리를 내며 클클 웃던 권성택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것도 아니면, 진승우 녀석처럼 너도 잡아먹힐 수도 있고.’
권성택의 경고 아닌 경고와 달리.
유진의 얼굴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진무구하고, 붙임성 좋은 어린아이일 뿐.
‘저게 진짜 모습인지, 단순히 연기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순진함을 통해 저 잘난 배우들을 끌어모으고, 제 편으로 만들고 있다.
사방이 적인 이 연예계 바닥에서 말이다.
어느 쪽이든, 이 바닥에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능력이었다.
“허. 궁금해지네, 이번 촬영.”
깨끗이 비운 아침바람 캔을 들고, 한권주가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