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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63화 (63/237)

63화

“이야. 역시 애 하나만 있어도 촬영장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

달리고 있는 버스 안.

한권주 옆자리의 고석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기 쎈 나은주가 저러는 처음 본다.”

뒷자리를 흘끗거리는 고석태.

그 말대로.

나은주는 유진의 옆에서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주 누나. 누나는 단합대회 많이 가봤죠? 전 처음이거든요. 조금 떨려요.”

“그래? 이제 앞으로 많이 다니겠네. 수학여행이랑 다를 거 없을 거야.”

“앗. 저 작년에 수학여행 못 갔어요. 그때 하필 촬영이 있어서. 그때 못간 만큼, 이번에 재밌게 놀려구요.”

“응. 분명 재밌을 거야.”

조잘대는 유진과.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은주.

그야말로 누나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기싸움이니 뭐니, 걱정하던 게 우스울 정도네. 하긴. 애 앞에서 어른들끼리 기싸움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나은주.

한권주가 연예계 대표 냉미남상이라면.

나은주는 대표 냉미녀상이었다.

누구에게든 무뚝뚝한 한권주에 비해.

나은주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다정한 스타일.

하지만 그 ‘좋아하는 사람’의 범주가 넓진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제법 까칠한 편.

그런데 유진은 만난지 몇 시간 만에 나은주의 호감을 산 것이다.

“누나. 혹시 저 아침바람 광고 나온 거 봤어요?”

“응. 예쁘게 나왔던데. 마트랑 편의점에 네 포스터가 쫙 깔렸더라. 인터넷에도 광고 뜨고.”

나은주가 말한 것처럼.

[청량함이 태어나면 분명 박유진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와 눈웃음 짓는 거 뭐야 유진아 ㅠㅠㅠ

얘는 역변 절대 없을 듯...시간이 갈수록 잘생겨지네

어휴 울 마누라 또 이 광고 보고 둘째 갖자고 하겠네... 딸 하나인데 요즘 아들 갖고 싶다고 난리임

ㄴ 힘내세요 아저씨 ㅋㅋ

ㄴ 유진이가 대한민국 출산율 올리는 중ㅋㅋ

진짜 여태 나온 아침바람 광고중 탑이다 우리 할머니도 TV로 보고 저 애기 누구냐고 나한테 물어보심ㅋㅋ 너무 예쁘다고]

광고가 공개된 이후 반응이 뜨거웠다.

대개 젊은 배우, 아이돌 등 청춘스타들의 전유물이었던 이온음료 광고.

성아오츠카는 그 불문율을 깨고 아역배우 유진을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그러자 오히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 넓게 이목을 끌고 있는 상황.

덕분에 아침바람 쪽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중이라고.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근데 누나가 찍은 광고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요.”

그 말에 나은주가 흠칫 놀랐다.

약 10년 전, 나은주 역시 아침바람 광고를 찍은 적이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아니? 너 태어나기도 전의 일인데.”

“당연히 찾아봤죠! 광고 찍기 전에 누나 광고 참고 많이 했는 걸요.”

“아, 그래?”

“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누나!”

“감사는 무슨. 네가 잘한 거야.”

얼굴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은주는 슬쩍 손을 뻗어 유진의 볼을 슥슥 쓰다듬었다.

속으론 매우 흡족한 모양.

그렇게 떠들고 있는 쪽이 있는가 하면.

“······.”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한권주.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끔 유진이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역시 봐주고 뭐고 할 것도 없네. 혼자서도 저렇게 잘 하는데.’

잠시 후.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정차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동안.

한권주는 계속 창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아들. 혜성이가 휴게소 음식을 좋아했었는데.’

한권주가 바쁜 탓에 이곳저곳을 다니진 못했으나.

아예 추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며칠은 시간을 내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곤 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알감자를 사주면 어찌나 좋아했는지.’

빵빵한 볼로 알감자를 오물거리던 모습.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하필 그때부터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지.’

출연했던 작품이 연달아 히트를 치며 인기배우의 반열에 올렸다.

일은 점점 잘 풀려서 돈도 많이 버는데.

정작 가족들에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그게 줄곧 한권주를 괴롭혔다.

‘그래서 결국 혜성이가 아플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어.’

참 우스운 일이었다.

통화 버튼 한 번이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버튼 한 번 누르는 게 왜이리 무섭고 힘이 드는지.

“안녕하세요!”

한권주가 한참 상념에 빠져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유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90도 인사를 하는 유진.

한권주로서는 한참 아들 생각을 하다 방해받은 기분이었다.

“그래.”

“저, 혹시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석태 삼촌한텐 허락 받았어요!”

고석태와는 또 언제 삼촌이라 부르는 사이가 된 건지.

어마어마한 친화력이었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곧장 자리를 옮겨온 유진.

‘알감자를 먹고 있네.’

유진의 손에 들린 알감자.

그걸 보니 절로 아들 생각이 떠올랐다.

“어? 하나 드실래요?”

한권주가 흘끗거리자 천진하게 묻는 유진.

“됐다.”

“맛있는데.”

“됐다니까.”

거듭되는 권유에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이러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싶었는데.

“넵.”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보니 자꾸 시선이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진은 곧 한권주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한권주 배우님이 제 아빠 역할이라니. 엄청 영광이에요! 저 배우님이 나오신 영화 다 봤거든요. <차가운 거리>랑, <다수의견>이랑, <보스의 연애>도 봤어요!”

“······.”

“아, 물론 아빠랑 같이 봤어요. 저희 아빠가 한권주 배우님 좋아해요! 엄청 잘 생겼다고. 자기도 배우님처럼 생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얘기도 많이 하구요.”

“······.”

버스가 휴게소를 떠나고 달리는 와중에도.

유진의 입은 쉬질 않았다.

그런 와중 한권주는 시선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고.

남들이 보기엔 한권주가 유진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하겠으나.

오히려 반대였다.

유진을 보면 자꾸 제 아들, 혜성이가 떠올랐다.

그래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단합대회라곤 해도, 엄연히 일의 연장선이었다.

한권주는 일하는 와중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 실패로 인한 이혼.

아들과의 서먹한 관계.

그 때문에 애초에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포기한 수준이고.

안 그래도 무뚝뚝했던 성격이 더욱 냉정해졌다.

‘어차피 혼자 놔둬도 잘 할 애니까. 이제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끼익-!

갑자기 버스가 급정차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거나, 잠자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니, 어떤 미친놈이 버스 앞에 끼어들기를 해서······.”

그렇게 혼란한 와중.

“가, 감사합니다.”

한권주는 제 품속.

잔뜩 움츠러든 유진을 바라보았다.

급정차하는 순간, 한권주가 저도 모르게 유진을 보호한 것.

물론 두 사람 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지만, 급정차로 인해 흔들림이 심했으니.

“······괜찮니.”

“넵. 배우님은요?”

“그래. 나도 괜찮아.”

제 품에 있는 한 아이의 따뜻한 온기.

그건 한권주에게 무척 그리운 감촉이었다.

*

단합대회 이틀차.

저녁식사 이후, 유진은 제 휴대폰에 새로 저장된 배우들의 이름을 체크했다.

주조연들의 번호는 거의 모두 받아냈다.

‘다행히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유진이 단합대회에서 세운 목표는 두 가지.

첫째는 톱스타 배우들을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연예계는 인맥으로 시작해 인맥으로 끝나는 곳이야.’

유진은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정글 같은 곳은 타인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더 높이 끌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적은 최소한으로.

아군은 최대한으로.

그게 연예계의 생존법칙.

‘하지만 이런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는 종종 유치한 일이 벌어지지.’

한 작품 아래, 모두가 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연과 조연으로 그룹이 나뉜다거나.

친한 사람들끼리 저들만의 파벌을 구축한다거나하는 일이 발생한다.

‘편이 나뉘면 나 역시 선택을 강요받아. 아군이 생기지만, 동시에 적도 생기지.’

이것이 아역배우의 장점.

존재만으로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 있다.

덕분에 배우들끼리 분위기가 날카로워질 일이 없이,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 있는 것.

유진은 그 점을 적극 활용했고.

차근차근 제 아군을 늘려갔다.

유진을 구심점으로 접점이 없던 배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서로의 애로사항을 나누고, 공감하며 관계가 깊어졌다.

덕분에 단합대회는 정말 ‘단합’대회로서의 기능에 충실할 수 있었다.

‘이러면 촬영 분위기도 좋아지고, 본촬영에 들어가서도 훨씬 결과가 잘 나올 거야.’

다만 아직 한 명.

한권주의 번호는 받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말도 편하게 못하고, 딱딱하게 배우님이라 부르고 있는 상황.

‘그래도 한권주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합대회 이틀을 겪으며.

한권주 곁에 내내 붙어있던 유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제 버스 급정차 때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주기도 했고.

심지어 오늘 점심을 먹을 땐 유진에게 생선살점을 발라주기까지 했다.

말투나 눈빛은 냉정하고 무뚝뚝해보이지만.

의외의 지점에서 자상한 행동을 하는 한권주.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의도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을 뿐이야.’

자신을 통해 한권주가 아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회귀자인 유진이라 해도 사람 마음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한권주가 그래도 날 싫어하진 않는다는 거야.’

어차피 한권주와 붙는 장면은 많다.

촬영 이후에도 친해질 기회는 많다.

“유진아. 곧 리딩 시작한대.”

그때.

나은주가 유진을 찾아왔다.

“넵, 가요!”

나은주가 손을 내밀었고, 유진은 그를 살며시 잡았다.

그러자 나은주의 얼굴에 다시 누나 미소가 폭발했다.

’첫 번째 목표는 완료했어. 그럼 다음은.‘

그리고 유진이 단합대회에서 세운 목표, 두 번째.

바로 이 톱스타 배우들에게 ‘배우 박유진’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장소는 리딩 현장이었다.

*

단합대회 숙소로 잡아놓은 건물.

강당에는 리딩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ㄷ자 테이블 세팅이 완료되었다.

곧 배우들이 자리를 채웠고.

가장 가운데에 앉은 것은 역시 권성택 감독.

“단합대회에서까지 무슨 리딩을 하냐. 그렇게 생각할 배우들이 있을 겁니다.”

그는 테이블에 앉은 배우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 리딩은 그냥 별 거 없습니다. 정식 리딩은 따로 있을 예정이고, 그냥 가볍게 한 번 보는 거니까 큰 부담은 갖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배우도 이 리딩을 가볍게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독님, 꽤 고약하시네.’

유진은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합대회 내내 활기차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지금은 진지한 눈빛으로 대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교묘한 화법이야. 가볍게 한 번 본다지만, 테이블 세팅이나 분위기는 영락없는 정식 리딩이야.’

가뜩이나 급 높은 배우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단합대회가 훈훈했다고 한들.

그 분위기에 취해 연기를 대충 했다간 서로 얕보이기 십상.

‘하지만 감독님이 먼저 선을 그었어. 이건 그냥 가볍게 보는 거라고. 너무 의미부여는 하지 말라는 거지.’

그걸 거장 권성택이 모를 리가 없다.

일부러 배우들 사이 긴장감을 부여한 것이리라.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말이다.

일종의 기강잡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새삼스럽지만, 한 바퀴 돌면서 자기소개 좀 하고 리딩 시작하도록 합시다. 오른쪽부터.”

첫 타자는 고석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고개를 숙였다.

“예. 이준태 역할의 고석태입니다. 멋있는 역할도 아니고 주인공 시다바리 역할이긴 하지만, 분량은 많습니다! 그럼 한 번 잘 까불어보겠습니다.”

“오빠. 말 좀 예쁘게 써요. 어린애도 있는데.”

“아. 미안합니다. 쏘리, 유진아. 삼촌이 이 모양이다.”

나은주의 태클에 바로 사과하는 고석태.

그 모습에 현장은 곧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세주 역의 나은주입니다. 이렇게 촬영이 기대되는 작품은 처음이네요.”

“김비서 역의 장무하입니다. 좋은 배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흑범파 보스 역할의 성주열임다!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록 이틀뿐이지만 같이 지내며 급속도로 가까워진 톱배우들.

서로 견제를 하기보단,

저 사람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어떻게 캐릭터를 해석했을까.

그런 건강한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리딩이라면 맘편히 임할 수 있겠어. 여러모로 공부도 될 것 같고.’

바로 유진이 원하던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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