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64화 (64/237)

64화

그리고 돌고 돌아 유진의 차례.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했다.

“윤빈과 영서 역할을 맡은 박유진입니다! 이렇게 멋진 배우님들과 함께 연기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많이 배울게요!”

“휘유!”

“귀엽다! 잘생겼다!”

“내년 백룡영화제 수상 예약자!”

마치 주인공이 유진인 듯.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거들며 유진을 응원했다.

“윤재하 역할의 한권주입니다.”

그에 비해 드라이하기 짝이 없는 한권주.

그를 끝으로 소개가 끝나고.

“그럼 리딩 시작합니다. 지문은 제가 읽겠습니다.”

권성택 감독이 대본을 집어 들었다.

“장면 1. 인적이 드문 들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와 정차한다. 이후 약 10분 후, 외제차 한 대가 들어와 승용차 옆에 멈춰선다. 외제차의 차창이 내려가고, 이준태가 찡긋 윙크를 날린다.”

그러자 들뜬 분위기가 단숨에 리딩 현장에까지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날린 거 봤어. 허. 어이가 없네.”

유진을 계속 귀여워하던 나은주.

리딩에 들어가자 바로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그쪽에 붙으라 이거야?”

위압감 있으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

그녀가 소화하고 있는 한세주 역할은 백산파의 장부를 쥐고 있는 인물.

“아따, 누님. 우리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리고 윤재하의 부하이자.

조직의 행동대장 이준태를 맡고 있는 고석태.

“그냥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쪽저쪽이 어딨습니까? 우리 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 아님까! 허허!”

평소 고석태의 분위기와 잘 맞는 캐릭터.

그래서 그런지 대사를 치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맛깔났다.

이죽대는 그의 얼굴에선 벌써 캐릭터가 완성되었다는 인상이 느껴질 정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본론만 말해. 장부 넘기면,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럼요, 그럼요. 그렇고 말고.”

“뭘로 보증할 건데?”

“뭐, 누님을 위해 각서라도 써드립니까?”

“그런 거 말고. 장부에 버금가는 보증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설마 이걸 그냥 넘기라는 거 아니지? 윤재하가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을 보낸 거야?”

독기 넘치는 한세주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는 이준태.

“후아, 이거 참 내. 생각 잘 하십쇼, 누님. 지금 형님 지시만 내리면 우리 쪽 애들이 백산파 그냥 털어버릴 수 있다고. 근데 응? 우리 형님께서 그 뭐시냐, 자애를 베풀어서 백산파 애들 좀 거두시겠다는데. 이 대의를 위해서 우리 누님께서 쪼끔 힘 좀 보태 달라, 그 말이지.”

순간 이준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걱정 하덜덜 마십쇼. 제가 누굽니까! 형님한텐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다 곧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치 모든게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가벼움과 싸늘함이 공존하는 모습은,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알았어.”

한세주는 제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소속을 바꾸는, 일종의 박쥐형 캐릭터였다.

리딩에서 느껴지기론 나은주는 한세주를 제법 자존심이 있고 도도하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박쥐 노릇을 하는 캐릭터로 해석한 모양.

‘러프한 리딩인데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모두 이름값 높은 배우들답게.

높은 집중력과 훌륭한 대사처리, 캐릭터 메이킹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대사를 듣는 것뿐인데.

마치 캐릭터들의 표정과 행동이 상상이 간다고 해야할까?

‘역시 톱배우들이야.’

이렇게 조연들이 대사가 많은 것과 달리.

주인곤 윤재하는 과묵한 행동파 캐릭터이다보니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 종료다. 연장 챙겨서 트럭에 실어.”

한권주가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과연 대한민국 조직을 통합한 우두머리라는 게 느껴질 정도.

‘역시 한권주야. 권성택 감독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을 만해.’

그리고 마침내 유진의 차례가 다가왔다.

“서재에서 홀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는 윤재하. 그때, 슬그머니 아들 윤빈이 들어온다. 악몽을 꾸고서 조금 겁을 먹은 상태.”

권성택이 지문을 읽은 뒤.

유진은 입을 열었다.

“아빠.”

하지만 첫 대사를 말하는 순간부터.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묻는 아들, 윤빈이었다.

“아빠. 나 있잖아요, 무서운 꿈 꿨는데요. 아니, 무섭진 않은데. 그냥. 막 심장이 콩닥거려서.”

악몽을 꿔서 아버지에게 달려온, 칭얼대는 아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역할과 캐릭터다.

때문에 유진도 굳이 힘을 줘서 연기하고 있지 않은 상황.

“······?”

그런데.

그 흐름이 끊겨버렸다.

대사를 받아쳐야할 한권주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뭐지?’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권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발견할 수 있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한권주의 표정이, 순간 무너져 내린 것을.

*

권성택이 알고 있는 한.

한권주는 연기를 해보며 한 번도 카타르시스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배우요? 그냥 한번 해보라고 해서 해봤습니다.’

애초에 배우를 시작한 것도 마스크가 좋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권했기 때문.

그렇게 타성에 이끌려 시작했고.

예상치 못한 성공을 누렸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딱히 없습니다. 피드백이 좋게 오면 기분 좋긴 하지만요.’

감독이나 작가, 혹은 대중들이 제 연기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줄 때.

그럴 때만 이따금 짜릿함을 느끼곤 한다고.

그 때문인지 연출과 작가의 피드백을 매우 잘 흡수하고, 별다른 이견도 내지 않는다.

그만큼 한권주는 작중 역할에 대해 거리감을 갖는 편.

덕분에 연기를 하면서 크게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았다.

배역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깔끔하고.

항상 기대한 만큼 연기로 보여준다.

‘그래서 내가 한권주의 연기를 좋아하지.’

이번 <데드맨>도 다르지 않았다.

조직의 리더, 과묵한 남자.

그런 드라이함이 한권주의 연기와 잘 맞물리는 것.

그래서 권성택은 한권주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그러나.

‘이 녀석 왜 이래?’

오늘 리딩에서 한권주는 이상했다.

아무리 러프한 리딩이라곤 하지만.

천하의 한권주라면 분명 진지하게 임할 터.

그런데 유진과 붙는 장면에서, 그 집중력이 완전히 깨진 모습이었다.

딴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멍한 얼굴.

‘설마 유진이를 보며 아들 얼굴이라도 떠오른 건가?’

어찌 되었든 흐름이 깨진 상황.

‘한권주 답지 않군. 아무튼, 한 번 끊고 다시 가야겠어.’

그렇게 권성택이 개입하려던 찰나.

“막, 막 꿈에 괴물이 나왔어요.”

갑자기 유진이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엄청 크고 무서운 괴물이요. 그게 막 저한테 달려오는데. 너무 무서워서 막, 막 도망쳤어요. 괴물이 막 계속 저를 쫓아왔어요. 근데요, 그때 아빠가 나왔어요. 아빠가 그 괴물한테서 저를 지켜줬어요. 그니까, 그래서, 아빠가 꿈에 나와서······이리로 왔어요.”

생소한 대사에 다른 배우들이 대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극본을 직접 쓴 권성택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드리브?’

유진이 즉석에서 애드리브를 치고 있다는 것을.

‘악몽을 꾼 윤빈이 횡설수설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악몽을 꾼 뒤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어. 거기다 이어질 두 부자 사이의 비극을 암시하는 것 같은 내용이야.’

유진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적어도 권성택에겐 그렇게 들렸다.

무엇보다 이 애드리브가 훌륭한 점은.

한권주가 다시 극에 빠져들 수 있게 시간을 벌었다는 점이다.

“······왜 안 자고 있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권주.

뒤늦게 윤재하로서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아빠. 그니까요. 제가 꿈을 꿨는데······.”

“어서 가서 자라.”

“아빠. 그치만.”

“어서.”

덕분에 리딩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던 다른 배우들도 집중하기 시작했고.

‘내가 러프한 리딩이라고 공언했는데도 배우들의 집중력이 높은 상황. 박유진, 저 애는 이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던 거다.’

권성택 감독의 시선이 점점 유진에게 고정되었다.

‘리딩 도중 흐름이 끊겼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 마가 떴음에도 그 공백조차 극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순발력과 센스.’

아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서 역할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리딩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은 유진이다.

‘역시 내가 한권주에게 괜한 소리를 했군. 이 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1시간쯤 더 리딩이 이어진 후.

극이 무거워지고, 그만큼 리딩의 분위기도 가라앉으려하는 그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길어졌다간 밤을 샐 것 같네.”

권성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본 촬영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여러모로 기대되는군. 본 촬영에서 한권주와 박유진이 붙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우려보단 기대가 앞서는 권성택이었다.

*

서울의 한 대학병원.

1인실 병실에 유진과 <리플레이>에 출연했던 연기꼰대 하진무가 누워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하진무는 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그들은 바로 대학로 연극 극단 ‘등불’ 소속 연출자와 배우들.

하진무 역시 오래전부터 ‘등불’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나.”

대머리에 수염을 기른 연극 연출자.

신대종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하진무를 바라보았다.

“그 이틀을 위해서 여태 몇 달을 준비해왔는데.”

몇 주 뒤에 열리는 서울연극제.

그곳에서 공개할 연극인 <주변인>을 준비해왔다.

‘등불’은 설립된지 10여년이 넘은 극단.

그동안 딱딱하고 재미없는 연극만 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때문에 이번에는 장르적 재미를 줄 수 있는, 스타일리쉬한 연극을 기획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보여주기도 전에 연극이 엎어지게 생겼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 잘못도 아니잖아. 괜찮아.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차가 문제지.”

바로 <주변인>의 주요 배역을 맡은 하진무가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것.

“그래서. 몸은 괜찮아?”

“다른데는 괜찮은데 발목이 좀 문제입니다. 전치 5주라고 하더라고요.”

“허. 5주라. 완전 나가리네.”

전치 5주면 공연 전까지 복귀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그냥 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이면 일정이라도 조정할 텐데, 연극제라 변경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새로 준비하는 연극인만큼.

연극제에서 선보여 평단과 대중들의 이목을 끌고.

반응이 괜찮으면 아예 극단 차원에서 공연을 올릴 생각이었다.

여러모로 이번 서울연극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거늘.

“그냥 범인 분량 빼고 가는 건 어떨까요?”

“그게 말이 돼? 극중 모든 키를 쥐고 있는 배역인데.”

연극 <주변인>의 기본 골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이 어느 날부터 자신을 스토킹하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 이후 그의 주변인들이 죽거나 사라지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그 스토커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부상을 당한 하진무가 바로 그 범인 역할이었다.

극중 모든 비밀과 메시지를 품고 있는 배역.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커버라도 미리 구해놓는 건데.”

대극장 연극이라면 이럴 때를 대비해 대타라도 구해놨겠지만.

소극장 쪽은 사람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사고를 당한 배우가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답답한 상황.

“솔직히 엎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여기에 들어간 시간과 비용만 해도 얼마인데. 역시 대타를 구하는 게 좋겠어요. 극단 사람들 중 작품 안 들어가는 배우 있을 거 아니예요.”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 대본부터 동선, 연기까지. 맞춰봐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연극제를 포기하고, 그냥 우리 극장에서 올려버리는 건 어떨까요?”

“진무 씨 전치 5주라니까요. 게다가 5주가 지나도 바로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대로 엎어버리면 그냥 시간 낭비, 돈 낭비한 거잖아요.”

극단 사람들끼리도 이견이 갈리는 상황.

“진무야. 네 생각은 어떠냐?”

신대종이 물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하진무에게 쏠렸다.

연기 꼰대라 불리는 하진무다.

어중간한 배우를 세우느니, 그냥 작품을 엎자고 말할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대타를 세우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답변을 내놓는 하진무.

“모두의 피와 땀, 그리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깃든 연극 아닙니까.”

<리플레이>의 성공 이후.

그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굴 대타로 세우느냐가 문제인데. 혹시 생각나는 배우 있어?”

그러나 그 물음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연극제.

이해력이 좋고 대본 암기가 빠르며, 배역을 임팩트 있게 연기할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 극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배우.

그런 배우가 과연 있을까?

하진무는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곧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박유진.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연기자를 묻는다면.

하진무는 주저없이 유진을 꼽을 것이다.

아직도 한양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하던 유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박유진?”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극단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권성택 감독 신작 들어간다는?”

“그 친구는 영화 준비로 바쁠텐데. 시간이 되겠어요?”

“아역답지 않게 연기력이 좋은 친구인 건 맞아요. 그리고 그 친구, 무대경험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극이 우스워보일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지금 그렇게 잘나가고 있는 와중, 소극장 연극을 하려고 할까? 솔직히 말하면, 나라도 안할 거야.”

그 웅성거림은 곧 부정적 얘기들로 변해갔다.

누군가는 유진이 너무 잘나서.

누군가는 유진이 너무 어려서.

각기 다른 이유로 우려를 표했다.

그때.

“아니, 그렇게 나쁜 생각은 아니야.”

연출인 신대종만 유일하게 다른 의견을 냈다.

“범인이 어린아이라면, 진상이 드러났을 때 그 충격이 더해질 수 있고. 그걸 연기하는 게 박유진 배우라면 임팩트도 훨씬 강할 거야. 그리고, 진무가 추천하는 배우라면 난 믿어볼래. 쟤가 언제 배우 추천한 적 있어?”

그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여럿.

연기꼰대 하진무가 무려 아역배우를 추천한 것이니까.

무엇보다 원래 배역을 맡은 사람이 하진무이기도 하고.

“물론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신대종이 극단 사람들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모두의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고. 일단 좀 더 고민해보자고.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내일까지 어떻게든 결론을 내는 쪽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