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66화 (66/237)

66화

뜻밖의 전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진이지만.

곧 전화를 받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여보세요. 진무 삼촌!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유진아. 잘 지내?”

“넵! 물론이죠. 진무 삼촌도 잘 지내시죠?”

“······음. 그럭저럭 잘 지내는 중이지. 어, 음, 그! 권성택 감독님 신작 들어간다지? 늦었지만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어, 음. 그래, 아! 너 광고 찍은 것도 봤다. 잘 나왔던데.”

아무래도 하진무는 유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나 부탁이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말을 빙빙 돌리는 느낌.

‘연기 꼰대라 불리는 하진무 삼촌이 내게 부탁이라. 상상이 잘 안 가는데.’

그런 하진무가 어린아이인 자신에게 부탁할 정도라니.

분명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얘기할 거리도 다 떨어져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도.

유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진무가 먼저 말할 수 있게.

“저, 유진아. 삼촌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역시나.

“넵. 물론이죠! 나중에 갚아주시기만 하면 돼요!”

송미연에게도, 이순철에게도 그랬지만.

유진은 기꺼이 빚을 질 줄 알았다.

그래야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 사이도 더 돈독해지고 말이다.

“갚아? 아, 그럼. 당연하지. 내가 나중에 몇 배로 갚아주고 말고.”

“와. 감사합니다!”

물론, 몇 배로 갚아준다면 더더욱 고마울 일이고.

“근데 너 혹시 연극, 좋아하니?”

“네? 연극이요?”

“그게, 그러니까.”

하진무는 유진에게 제 사정을 설명했다.

몇 주 뒤에 열릴 서울연극제.

거기서 이틀간 공연을 올리는데,

주요 배역에 참여하기로 한 하진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타를 찾고 있는 것.

‘잠깐. 서울연극제? 거기다 하진무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참여하지 못했던 연극이라면.’

그런데 그 얘기를 듣는 내내.

유진은 어떤 위화감이 들었다.

흐릿하게 한 작품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

‘설마, 그 작품?’

짐작가는 바가 있으나.

유진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혹시 그 연극 이름이 어떻게 돼요?”

“<주변인>이라고. 이번에 새로 올리는 창작 연극인데.”

작품명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찔 떤 유진.

그러나 곧 태연하게 모르는 척했다.

“아아. 그렇구나.”

왜냐면 <주변인>이라는 작품.

유진도 알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 작품의 초연에 참여할 기회가 나한테 찾아온 건가?’

회귀하기 전.

유진이 <주변인> 20주년 공연 오디션에 응시했었으니까.

*

회귀 전 유진은 수없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순간들을 모두 기억했다.

<주변인> 20주년 공연 오디션 역시 마찬가지다.

유진은 그때 주인공, 그리고 민주 역할에 지원했다.

‘연기 잘 봤습니다.’

당시 오디션이 끝난 뒤.

지금보다 20년 늙은 신대종은 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늙은 모습이지만.

연출가로서 가지고 있는 총명한 눈동자는 지금이나 나중이나 그대로다.

‘연기력도 자연스럽고, 캐릭터도 꽤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보통 오디션이 끝나면 별다른 코멘트를 해주지 않는다.

그냥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정도.

그러나 유진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유독 코멘트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매력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신대종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유진에게 그리 말했었다.

‘<주변인>은 2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공연을 거쳤습니다. 박유진 배우만의 민주를 보길 원했으나, 색다른 면모를 보지 못했습니다.’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하지만, 매력없는 배우.

그 때문에 많은 관계자들이 유진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조언해주려 애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더 좋은 자리에서 만나길 기원합니다.’

연기는 잘 하지만 매력은 없다.

당시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유진.

그러나 이젠 그 누구보다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잘하는 건 기본이야. 한 발 더 나아가 남들과 차별화되고, 시선을 끌어야만 해.’

그리고.

신대종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해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와는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서.

"연극이라."

차동석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며 중얼거리자.

유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9살의 꼬마로 돌아왔다.

"괜찮겠어? <데드맨> 촬영이랑 병행하려면 힘들 텐데."

"넵! 저 이번 <주변인>은 꼭 하고 싶거든요. 꼭이요, 꼭!"

열의를 불태우는 유진.

<주변인>에 참여한다고 해서 <데드맨>에 소홀해지는 건 아니었다.

‘둘 다 완벽하게 해내면 그만이야.’

<주변인>의 경우 연극제에서 이틀 공연만 하면 끝난다.

그 공연만 잘 해내면, 이후 <데드맨> 촬영에만 집중하면 될 거고.

무엇보다.

이번 <주변인> 섭외는 유진에게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원래라면 진무 삼촌 대타로 다른 배우가 들어갔지. 그런데 진무 삼촌이 내게 직접 연락을 했어.’

물론 하진무가 유진에게 직접적으로 제의하진 않았다.

그저 이런 작품이 있고, 자신이 다쳐서 대타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게 운을 띄웠을 뿐.

‘<리플레이> 때문이겠지. 그때 내 연기가 진무 삼촌에게 꽤 인상적으로 남았던 거고.’

그 연기 꼰대 하진무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 초연에 참여한다는 건 큰 의미가 있어.’

<주변인>은 소극장 창작 연극으론 이례적으로 흥행했고.

추후 중극장 등 더 넓은 극장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20주년 공연을 할 정도로 롱런하는 작품이었다.

뮤지컬, 연극에서 초연배우로 참여한다는 것.

그건 곧 그 극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 다시 공연이 올라오고 캐스팅이 바뀔 경우.

초연 배우의 연기가 가이드라인이 되는 셈.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데.”

하진무를 통해 메일로 전달받은 대본.

그를 꼼꼼히 검토해보던 차동석이 쓰읍, 하고 입을 다셨다.

“네가 맡기엔 아무래도 역할이 너무 강하고 감정 소모가 심해. 게다가 네가 범인 역을 맡았다간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들 거야.”

모든 사건의 범인이 10살 내외의 어린아이라니.

분명 충격적이겠으나, 그 충격의 정도가 심할 터였다.

물론 이미 <리플레이>를 통해 섬뜩한 연기를 보여준 유진이지만.

직접적인 장면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역보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영화의 경우 끊어서 촬영하는 게 가능하다.

때문에 아역의 멘탈 보호에 비교적 용이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연극은 무대에서 끊김 없이, 한 템포로 끝까지 간다.

‘민주를 정말 이런 캐릭터로 그려낸다면, 당연히 여러 문제가 생기겠지.’

가뜩이나 혹사 논란이 터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

9살 유진이 범죄자 역할을 맡았다간 역풍이 불 수 있다.

화제성은 고사하고, 오히려 연극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것.

유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이 네가 욕심을 내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여러 파장을 고려해서 곤란한 일이야. 그쪽에서도 내일 번개 오디션을 진행할 거라고 하니까, 어떻게든 대타를 찾아낼 거고.”

즉, 연극 <주변인>에 대한 관심을 접자는 이야기였다.

차동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

곧 씨익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저한테 다 방법이 있거든요!”

“방법?”

대본을 비틀고, 새롭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유진의 특기 아니었나.

“그러니까요, 어떻게 할거냐면······.”

유진은 곧 차동석의 귓가에 제 계획을 속삭여주었다.

그러자 듣는 내내 눈이 휘둥그레지는 차동석.

“이야. 넌, 넌 진짜······”

20주년 공연 오디션에서 색다른 캐릭터를 보여주지 못해 탈락했던 유진.

이제 초연 무대에서부터 색다른 민주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진짜, 넌 천재야.”

*

다음날.

150석 규모의 소극장 라인시어터.

그곳에선 <주변인> 민주 역할 선발을 위한 번개 오디션이 열리는 중이었다.

대학로에서 활동 중인 기획사들에게 오디션 대본을 뿌렸고.

사정 설명 이후 오디션 참여자를 모집했다.

준비시간이 단 하루만인 오디션치곤 지원자가 많았다.

하지만.

“으음.”

반나절 동안 이어진 오디션.

잠시 찾아온 휴식시간.

'등불'의 연극 연출가 신대종.

당연히 이번 번개 오디션의 심사위원이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역시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구만."

오디션 참여자가 많다는 것.

그게 꼭 좋은 배우가 많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주변인>은 소극장, 거기에 새로 올리는 창작 연극.

그마저도 연극제에서 2회 공연 이후 어찌될지 모른다.

실력 있거나 유명한 배우들이 아닌.

기획사에서 다소 입지가 애매한, 단역 배우들이 몰린 것.

"진무가 눈을 너무 높여놨나."

하진무는 극단 '등불'과의 인연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페이도 여러모로 극단 쪽을 배려했고.

어쨌든.

연습 과정에서 하진무의 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

당연히 오디션 참가자들의 연기가 성에 찰 리 없었다.

"작품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역할인데."

민주는 모든 비밀을 품고, 극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

관객들을 흡인하고, 묵직한 한 방을 날려줘야만 한다.

“지금 현장접수도 받고 있는 거 맞죠? 소식이 없네.”

신대종의 물음에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아직까지 지원자가 없어서요."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장 접수까지 받기 시작했다.

배우에게 대본을 건넨 후, 30분 뒤에 오디션을 보는 방식.

그러나 부담감 때문인지 아직까지 접수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흐음.”

신대종은 오디션이 별 성과 없이 끝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

"이대로 오디션 어그러져도 박유진한텐 컨택 안 넣는 쪽으로 정해진 거. 맞죠?"

그 말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두 신대종을 바라보았다.

"네. 아무리 생각해도 무대 경험이 없는 애한테 중책을 맡길 수는 없어요."

"이 역할을 소화하기엔 너무 어리고요. 개막했을 때 반응도 걱정돼요."

"현실적으로 몸값이 너무 높아서. 아마 협상하다 깨질 것 같은데요?"

유진의 섭외를 추진했던 신대종이지만.

여러 이유로 극단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박유진 쪽도 우리 작품을 할 이유가 없어요. 권성택 감독 작품 준비하기도 바쁠 텐데, 굳이 연극을 할 리가요."

"그러니까 일단 오디션에서 누구라도 한 명 뽑아놔야 해요."

타당한 지적이었다.

우선 유진이 이 섭외에 응할 가능성이 매우 적고.

설사 응한다 해도, 박유진에 대한 극단 내 의심 어린 시선들이 존재한다.

신대종도 연출자로서 이 모든 걸 감수하고 박유진만 고집할 수는 없는 상황.

‘진무가 내놓은 박유진이라는 아이디어. 그게 꼭 금기를 깨는 것 같아서 팍 꽂혔던 건데.’

지금이나 20년 후나.

늘 새로운 것에 목마른 신대종이었다.

그러나 민주 역에 박유진이라는 카드는 독이 든 성배.

잘못 다뤘다간 역풍이 크게 불 수 있다.

"그래요. 그럼 오디션에서 어떻게든 한 명 뽑아봅시다."

이대로 연극 자체를 엎기엔 너무 아까웠으니.

어떻게든 이번 연극제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연출님! 방금 현장접수한 참가자가 있다는데요."

그때.

한 스태프가 극장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래요? 준비되면 들여보내세요."

"그게.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지금 들어와도 되냐는데요?"

"음?"

대본을 받자마자 오디션을 보겠다니.

보자마자 대본을 모두 외워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설마 장난으로 지원한 건 아니겠지."

벌써 기대감이 팍 식었다.

신대종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들여보내요."

빨리 내쫓아버릴 심산이었다.

곧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지원자.

오늘 오디션 지원자 중 가장 몸집이 왜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전체적으로 작았다.

거기에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화려한 비주얼.

무대 위로 오르는 당당한 걸음걸이.

그 주인공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9살.

"안녕하세요! 박유진입니다!"

특유의 90도 인사까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특히 신대종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박유진이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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