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흐음.”
이순철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본을 몇 번이고 살폈다.
바로 <환혹>의 대본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작품이야.’
대본은 물론이고.
이미 원작도 서점에서 구입한 후 정독해보았다.
이번에 메가폰을 잡는다는 감독도 일본에서 인정받은 인물이고.
참여하는 일본 배우들도 모두 구설수가 없고, 연기력 역시 호평 받는 배우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아마 해외진출의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고령인 이순철로선 연기 인생이 얼마나 남았나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환혹>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라. 그게 무슨 뜻이지?’
결코 그 조언을 무시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유진이 해줬던 그 말은 계속 이순철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때, 멀리서 열심히 뛰어오는 이순철의 손녀.
입에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쑥쑥 크고 있는 제 손녀.
가장 큰 걱정이라곤 엄마 몰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걸 들킬까 정도일 터다.
“우리 손녀. 이리와 봐.”
“응? 왜?”
“이 할애비가 이번에 새로운 작품 대본을 받았거든. 이거 할까, 말까?”
그리 말하며 이순철은 <환혹>의 대본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녀가 대본을 받아들곤 대충 휙휙 넘겼다.
“이거 하지 마.”
손녀가 단번에 대답했다.
“왜?”
“제목이 어려워.”
그리 말하곤, 대본을 돌려준 뒤 가버리는 손녀.
어린애들은 저렇게 별 것 아닌 이유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어쩌면 유진도 그럴지 모르고.
‘아니, 모르겠어. 그 아이만큼은.’
수십 년간 사람을 연구하고, 연기해낸 이순철.
그런 그조차 유진의 속내는 쉬이 파악할 수 없었다.
그건 유진이 어린아이로서의 천진함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그 어떤 어른보다 날카롭고 영악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
아직도 <데드맨> 오디션을 지켜보며 느꼈던 전율은 잊혀지질 않았다.
‘그런 아이가, 내게 허투루 하지 말라 조언했을 리 없어.’
“더 좋은 작품이라.”
유진은 분명 그리 말했다.
마치 <환혹>보다 더 좋은 작품이 있을 것처럼.
고민만큼 깊어지는 이순철의 미간 주름.
잠시 후, 이순철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순철은 기다렸다는 듯 그 전화를 받았다.
“어. 뭐 좀 알아냈나?”
“예, 선생님. 부탁하신 사안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바로 소속사 직원에게 <환혹>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던 것.
특히 일본 쪽 인맥이 특출 난 직원이었다.
“일본에 있는 출판계 사람을 통해 전해들었습니다, 실은 그 <환혹>이라는 작품에 대해 묘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묘한 얘기?”
“네. 이런 저런 작품들과 엮여 이야기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다만 공론화의 단계는 아니고, 아직 수면 아래 묻혀있습니다.”
이야기의 유사성.
그 말을 듣자 이순철은 미약하게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본 이야기 같다. <환혹> 대본을 두고 유진이는 내게 분명 그리 말했다.’
이 사실을 유진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이 겹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순철에겐 이 모든 게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로 다가왔다.
“하지만 현지에서도 워낙 인기가 좋은 작품이다 보니 그냥 사소한 논란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영화 <환혹> 측에서 답변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조율할 게 많을테니, 서둘러 출연 계약을 서두르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그들 입장에선 이순철은 외국 배우다.
아무래도 자국 배우보단 신경써야할 점이 많을 터.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해.”
“시한을 이번 목요일로 못 박았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이순철.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못 기다리겠다고 하면, 그냥 거절하겠다고 전해줘.”
*
충무로에 위치하고 있는 독립영화 중심 배급사, 위니필름의 사무실.
그곳으로 한 명의 낯선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연극 <주변인>의 대본을 쓴 극본가이자.
극을 연출한 연출가 신대종이었다.
곧 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향하는 신대종.
회의실 문이 열리자 미리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본인 감독 아이자와, 그리고 위니필름의 진승호였다.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히 악수를 나눈 후.
세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았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신대종을 향해 진승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번 미팅은 말 그대로 미팅일 뿐이니까요. 아이자와 감독의 제안, 그리고 그에 대한 극단 등불 측의 허심탄회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즉, 당장 도장을 찍고 헤어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
잠시 후, 신대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연락을 받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이제 막 2회의 공연을 끝냈을 뿐인데요. 그런데 영상화라니. 그것도 일본에서 말이죠."
신대종은 솔직히 말했다.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게 얼떨떨하다는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감독님께서도 일본에서 꽤 성공한 감독님이시던데. 왜 하필 저희 연극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승호 역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역시도 놀랐습니다. 다만 아이자와 감독님이 독특한 구석이 있으신 분이라서요."
아이자와는 일본에서 추리, 미스테리 영화를 만들었고.
마니아층도 형성되며 일본 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감독이었다.
다만 일본 영화계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자주 하는 감독이다보니.
일본의 주류 영화계에서 배척당한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사랑을 받지만.
일본 영화계에서는 배척을 받는, 묘한 위치인 것이다.
"흠. 제가 굳이 끼어들어 얘길 거드는 것보단, 두 분이 직접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군요."
"반갑습니다. 아이자와입니다."
아이자와는 조금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여러분의 연극은 놀랍고 흥미로운 미스테리로 가득합니다. 이번 연극제에서 단 한 번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그 연극은 저를 완벽히 사로잡았습니다."
이후 아이자와는 <주변인>에 대한 감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연출에 대한 해석,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다양한 디테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초대석을 제공한 건 첫 번째 공연 때 뿐이야. 한 번 보고 이 정도로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고?'
연극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자신의 연극을 인상 깊게 봐준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히 느껴질 정도였다.
'영상화니 계약이니, 그런 무거운 얘기보다 그냥 한 명의 팬을 만나는 기분이네.'
덕분에 신대종의 긴장도 점차 풀려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이자와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익숙지 않은 한국어로 어떻게든 제 감상과 진심을 전하려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해서, 이 연극. 꼭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이 극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정수를 해치는 일. 그건 없을 겁니다. 결코."
신대종은 가만히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진정성만 보장된다면, 등불로서도 결코 나쁠 게 없는 선택이다.
아니, 다신 없을 좋은 기회다.
이렇게 좋은 감독이, 해외에서 연극 영화화 판권을 사주겠다는 얘기니까.
‘최종 결정은 극단 사람들과 의논해볼 문제지만, 아마 모두 좋아할 거야.’
진승호에게 연락을 받은 직후.
아이자와의 필모그래피를 쭉 확인해본 신대종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 작품에 깊게 새겨진 주제의식.
여러모로 신대종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이런 감독이라면 연극 <주변인>과는 또 다른, 영화 <주변인>을 만들어줄 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신대종은 굳이 티내지 않았다.
대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영화화 계약 이후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 여기선 제가 한 말씀 드리죠. 추후 영상화가 진행된다면, 한국 배급은 저희 위니필름에서 맡을 것입니다."
진승호가 말했다.
즉, 진승호로서도 이번 일을 사업의 일환으로 여기고 있는 것.
그 역시 직접 관람한 <주변인>과 아이자와의 조합을 고평가 하고 있었다.
"캐스팅 같은 사안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마음 같아선 이번에 무대에 오르셨던 모든 분들을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습니다."
아이자와의 답변.
등불 측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극판에서 활동하는 등불 배우들은 티켓 파워가 부족하니까.
게다가 일본 영화라면 일본어로 진행될 테니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을 터.
"하지만 박유진. 그 배우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이자와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이번 영화화 과정에서 캐스팅 1순위는 박유진 배우입니다."
*
한편,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협찬 제안이 아주 쏟아지네, 쏟아져.”
메일함을 보며 차동석이 싱글벙글 웃었다.
“아동복, 가방, 신발······심지어 명품 액세서리도 있어. 그것도 꽤 고가 라인업들이야.”
그만큼 여러 곳에서 유진의 홍보를 탐내고 있다는 것.
별의별 업체에서 연락이 온 터라, 이걸 다 걸러내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턱대고 다 받을 필요는 없지.”
차동석의 옆자리에 있는 장미소가 말했다.
“협찬도 엄선해서 받아야 해. 그래야 홍보효과가 확실히 나올 거야.”
그들은 물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노를 젓기 보단.
그 흐름을 제대로 읽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작정이었다.
유진은 벨레가 협찬해준 옷들을 꾸준히 입고 다녔다.
그만큼 유진이 함부로 협찬하는 게 아니라.
정말 평상시에 자주 쓰는, 믿고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유진의 스윗터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아. 그러고보니 <환혹> 쪽은 어때?"
"얼마 전에 기사 떴어."
유진이 <환혹>으로부터 들어온 컨택을 최종거절하고서 얼마 뒤.
[배우 박유진, 일본 최고의 기대작 <환혹> 캐스팅 제의 고사]
[일본 진출은 아직? 확인 요청에도 박유진 소속사측 '묵묵부답']
곧장 기사가 터졌다.
<환혹>의 원작 자체가 큰 인기다보니 대중들의 관심도 높았다.
유진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다는 사실.
거기다 유진이 그걸 거절했다는 것.
두 가지 모두 큰 화제가 되었다.
"반응들은 어때?"
"그렇게 부정적인 의견은 없어. 유진이가 아직 어리니까, 다들 해외진출을 꺼린다고 지레짐작하는 모양이야."
보통 신인이 대형작품을 까면 부정적 여론이 나오기 마련이다.
눈이 높다느니, 주제를 모른다느니, 벌써부터 작품 가려서 하냐느니.
그러나 유진은 아직 10살이라는 나이 덕분에 알아서들 납득한 것.
"그럼 뭐 우리가 나서서 입장발표할 건 없네."
일본진출 최고의 기회로 보이는 <환혹>을 거절했음에도.
차동석도, 장미소도 그리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 10살인 유진에게 일본 진출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고.
유진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기로 한 것.
유진의 선택은 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깔려있기도 했고.
"유진아. 확인차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너 일본 진출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
"넵!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일본이든 어디든 상관없어요."
"쓰읍. 그런데 이런 식이면 앞으로 대본 들어올 기회는 적어지겠는데."
다만 한 가지 우려라면.
'유진이 아직 어려서 해외진출을 꺼린다'라는 여론이 지금은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해외 제작사 측에서 유진을 캐스팅 명단조차 올려놓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거든”
장미소의 말에 차동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있는 소식?"
“연극 <주변인>, 영화화 판권 계약 준비 중이라더라.”
“어? 진짜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유진.
답지 않게 크게 놀란 눈치였다.
본래 <주변인>은 20주년 공연을 하면서도 영화화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연극제에서 2회 공연을 했을 뿐인데 영화화 계약이라니.
‘그렇다는 건.’
가능성은 하나.
유진을 필두로 대대적 변화를 거친 <주변인>.
그 변화가 이끌어낸 성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점이 있어.”
장미소가 답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판권을 구입하는 게, 바로 일본인 감독이 이끄는 스튜디오라는 거야. 유진이, 네가 조사를 부탁했던 그 아이자와 료라는 감독.”
더욱 놀라운 뉴스였다.
커튼콜 때 객석에 있는 관객들을 살펴봤던 유진.
진승호의 옆자리, 한 외국인이 앉아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설마 그게 진짜 아이자와 감독이었어? 그 감독이 주변인을?’
본래대로라면 영화감독 아이자와는 내년에 개봉할 영화 <방황하는 화살>을 준비해야할 터였다.
그런데 <주변인>의 영화화라니.
'이거, 엄청 재미있겠는데?
알고 있던 미래와 달라진 것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유진은 큰 흥미를 느꼈다.
“사장님, 실장님! 저 그 감독님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컨택이 오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유진이 직접 움직이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