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110화 (110/237)

110화

주역 매니지먼트 소속 배우 이지혜.

그녀의 집으로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선미야?”

“응, 지혜 언니.”

바로 키즈모델 김선미.

유진의 팬미팅 준비를 하며 나은주를 포함, 세 사람은 꽤 친해졌고.

그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잠시 쇼핑하고 온다고 했어.”

“그렇구나. 은주 언니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요즘 엄청 바쁘더라?”

“응. 톡방에도 잘 안 나타나시고.”

나은주, 이지혜, 김선미가 소속된 톡방.

유진이 속해있는 죽음조 톡방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팬미팅 때의 짧은 인연을 생각하면 꽤 교류하는 편이었다.

최근엔 나은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좀 뜸하긴 하지만.

“하긴, <데드맨>이 좀 흥했어야지. 은주 언니도 은주 언니지만, 유진이도 진짜 대단하지?”

“그, 그러네.”

“요즘 잘 지내? <연년생>도 끝난지 좀 됐지?”

“응. 아, 저 언니 TV 나오는 거 봤어.”

“진짜? 뭐 봤는데?”

“이번에 나온 드라마.”

“아아. <단순한 연애>? 어때. 재밌지?”

이지혜는 최근 성공적인 브라운관 복귀에 성공했다.

최근 출연한 12부짜리 로맨틱 코미디물 <단순한 연애>.

그곳의 남주인공의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것.

완벽해 보이는 오빠에게 유일하게 팩트폭행을 꽂을 수 있는 인물.

등장할 때마다 빵빵 터지는 캐릭터라, 극의 감초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별을 보러 떠나요>를 통해 얻게 된 예능적 이미지의 연장선임과 동시에.

성인이 되기 직전의 나이에 맡을 만한 적절한 배역이었다.

“그거 알아? 나 거기 캐스팅된 거, <연년생> 때문이다?”

“어? 진짜?”

“응. 피디님이 넙튜브에서 나 <연년생> 나온 거 보고 캐스팅하셨대.”

로코물에 출연하기 전.

유진의 팬미팅, 그리고 웹드라마 <연년생>으로 복귀를 선택한 건 탁월했다.

<연년생>은 조회수도 잘 나오고 있고.

웹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관심으로 방송업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던 작품이니까.

“그렇구나. 대단하다, 언니.”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숙이는 김선미.

그를 바라보던 이지혜가 넌지시 물었다.

“선미. 혹시 뭐 하고 싶은 얘기 있어?”

그 말에 김선미가 흠칫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긴장한 것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는데 모를 수가.

“언니. 언니는 왜 그 소속사 들어갔어?”

“소속사? 어디 말하는 거야? 전 소속사?”

“아니. 지금 언니가 있는 곳. 주역 뭐시기 거기.”

“아아. 나? 나는 유진이 따라서 왔지.”

여러모로 혹사당하고 있던 이지혜.

그런 이지혜를 도와주고, 힘을 불어넣어준 것이 바로 유진이었다.

그 아이를 따라 이적한 주역 매니지먼트.

이지혜는 이 결정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거기 좋아?”

“좋지.”

“뭐가 좋은데?”

“음, 좋은 사람들 뿐이라는 거? 거기다 일도 잘하시거든. 많은 도움을 주셔,”

<별을 보러 떠나요>에 고정으로 출연하며 점점 예능계에서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는 도중.

이지혜는 점차 다른 예능에도 패널, 게스트 등으로 출연하며 범위를 넓혀갔다.

이는 차동석의 도움이 매우 컸다.

방송계의 인맥을 이용, 이지혜의 출연을 적극적으로 타진한 것.

그것도 너무 가볍게 이미지가 소비될 곳은 제하고.

이지혜의 매력을 자연스레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에 적극적으로 꽂아주었다.

이지혜를 배려함과 동시에, 확실히 서포트해주는 것.

“난 행복해.”

행복하게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이적한 이지혜.

그 바람대로 그녀는 지금 행복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언니. 나도 거기 들어갈까 봐,”

김선미가 이리저리 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그 놀라운 발언에 이지혜가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

“뭐? 그럼 어머니는? 어머니가 이 얘길 들으셔야 할 텐데.”

“엄마한텐 아직 비밀이야.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언니가 처음이야.”

“근데 너 키즈모델하고 있지 않아? 에이전시도 있을 텐데.”

“엄마한테 들었는데, 곧 끝난다고 해서. 재계약할지 말지 나한테 물어봤어.”

“으음. 혹시 키즈모델 하기 싫어?”

그러자 김선미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연기가 더 재밌어.”

이지혜는 잠시 가만히 김선미를 바라보았다.

저 자그마한 아이가 혼자 제 미래를 열심히 궁리하고 있다니.

‘또 유진이가 누군가를 바꾸고 있나보네.’

이지혜는 얼마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럼 언니가 도와줄게.”

*

한편.

다시 한국대학교.

“저기를 이용하자고요?”

김경식이 되묻자 유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경식이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유연 씨. 지금 조명 컨트롤 하는 기계가 망가져서, 저기엔 조명이 하나도 안 들어와요.”

“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기가 지금 전등이 나가서 유일하게 빛이 안 들어오는 곳이잖아요. 그걸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이용해본다?”

“네. 저 어두컴컴한 건물 뒤편을 지나갈 때 수진이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혼자 걷는데, 갑자기 꺼지는 거예요. 그래도 수진이는 당황하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가고요. 그러다 밝은 곳으로 나와 보니 바로 옆에 단이 있는 거죠.”

조명이 일시에 꺼지고 켜지는 연출 대신.

수진의 동선과 행동에 집중해보자는 것.

“동선 생각하면 유유연이 뒷문 쪽으로 하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수진이 사람들을 피해다닌다는 인상도 줄 수 있으니까. 꽤 괜찮은데요?”

조연출이 의견을 보탰다.

“으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데.”

유유연의 말만 들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지.

김경식이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원작이랑 안 맞지 않으려나? 단 첫 등장 묘사가 분명······.”

“단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곤 빛과 함께 나타났다. 마치 그림자처럼.”

뜬금없는 유진의 말.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라앺 원작에 있는 단 첫 등장장면 묘사예요.”

“원작 문장을 다 외우고 있다고?”

한 스탭이 묻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 완전 팬이거든요. 그리고 문장이 뭔가 멋있어서 외우고 있기도 했고. 유연 누나. 이거 맞죠?”

“유진이가 말한 게 맞아요.”

자타공인 라앺 찐팬인 유유연이 보증해주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스탭에게 지시.

갖고 다니는 원작에서 문장을 체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저, 정말이네.”

재차 확인해본 결과.

유진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해당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튼.

문장 자체가 조금 추상적이라, 연출의 범위 자체는 제약이 없다.

빛과 어둠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킨다면 말이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켜지는 순간 확 등장하는 것보다. 수진이의 동선에 맞게 자연스레 어둠 속에서 섞이는 거. 그리고 밝은 곳에서 딱 등장하고. 이거 괜찮지 않을까요?”

조연출이 재차 의견을 개진했다.

“맞아요. 일단 저대로 한 번 가보죠.”

촬영감독도 그에 찬성을 보탰다.

“어차피 달리 방법도 없고. 일단 뭐라도 찍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요?”

“으음.”

김경식은 대답 대신 이번 촬영의 스토리보드를 검토했다.

설마 즉석에서 장면과 연출을 바꿔야만 한다니.

이 정도면 쪽대본을 넘어선 쪽연출이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아까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야 한다고.

아까 열심히 회의도 해봤지만 결국 결론에 도달하질 못했으니.

결국 김경식은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카감님. 혹시 어떻게 찍을지 의견 있으십니까?”

“뭐 달리 방법도 없고. 그냥 수진 뒷모습 잡는다고 생각하면 트레킹 샷으로 찍으면 될 거 같은데.”

“달리(Dolly) 없이 그냥요?”

“핸드헬드로 찍어야죠, 뭐.”

달리(Dolly)는 카메라를 장착한 채 이동하면서 촬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동차를 뜻한다.

핸드헬드는 카메라맨이 어깨나 옆구리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찍는 것을 말한다.

“그럼 카감님 믿고 가겠습니다. 그럼 조감님. 너무 어두우면 아예 카메라에 안 담길 테니까 조명 좀 잘 봐주시고. 지금 유연 씨 데리고 테스트 좀 해주세요.”

“옙.”

그렇게 속전속결로 촬영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이, 액션.”

김경식의 사인이 떨어지고.

유유연은 단숨에 수진에 이입했다.

생기 넘치던 그녀의 얼굴은 단숨에 피곤에 찌들었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무원 공부를 하다가 하교하는 수진.

터덜터덜 걸어가는 발걸음엔 힘이 하나도 없다.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고, 사람이 많은 캠퍼스 중심이 아닌.

그를 피해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만 움직이는 수진.

‘일부러 어두운 곳으로 향해 가는 것만 같아. 수진의 그 어두운 심정이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생각보다 상황 설정도 맞아떨어지고, 캐릭터의 내면과도 잘 어울렸다.

그렇기에 굳이 불빛이 없는 건물 뒤편으로 하교하는 것도 개연성이 생긴다.

어두컴컴한 건물 뒤편에 도달한 수진.

곧 익숙한 듯 곧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켜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빛을 싫어하는 수진이, 스스로 빛을 켜고 움직이는 모습. 이것도 꽤 상징적으로 보일 수 있겠어.’

밝은 빛을 피해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수진이지만.

아주 컴컴한 어둠 속에서는 그녀에게도 빛이 필요하다.

그런데.

“······?”

배터리도 제법 남았는데 갑자기 꺼져버리는 휴대폰.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하지만.

수진은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갈 뿐.

‘여기서 발걸음 소리가 하나 더 겹치면 긴장감이 살겠지.’

시청자들에겐 공포영화에 가까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될 터.

다소 심드렁했던 김경식이지만.

화면을 보면 볼수록 어떻게 연출하면 좋을지 영감이 샘솟고 있었다.

곧 학교 뒷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둠에서 빠져나온 수진의 옆에는.

“······.”

갓을 쓰고 도포차림을 한, 창백하고 잘생긴 남자가 한 명.

“누구세요?”

수진은 놀라지도 않고 묻는다.

이런 일에 놀라기엔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있는 상태였으니까.

“저승사자입니다.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

갑자기 짠, 하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자연스레 섞여 있다가, 빛으로 나온 순간 그 얼굴을 드러내는 것.

“수진 씨. 당신은 오늘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승사자 단의 첫 등장장면이다.

그 말에 수진이 이해 못하겠다는 것처럼 단을 바라보고.

“컷!”

김경신의 컷 사인이 떨어졌다.

“좋았습니다! 지금 이 분위기로. 카감님, 유연 씨랑 조금만 더 거리감을 주시면 좋겠어요. 조명 조금만 더 세게 주시고.”

즉석에서 콘티를 짜 보여줄 정도로.

열의를 가지고 촬영에 임하기 시작하는 김경식.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찍을 것은 전등을 이용한, 어찌보면 다소 뻔했던 연출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찍은 장면은?

확실히 주요 남주 중 한 명인 단의 첫 등장으로 임팩트를 주면서도.

수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리테이크를 거친 후.

“컷! 수고하셨습니다!”

김경식의 사인에 스탭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동시에 오늘 하루 쌓인 피로를 호소하며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때요? 어땠어요?”

유유연과 유진, 그리고 단 역할의 배우 정성진이 김경식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이야. 유연 씨의 아이디어 굉장히 좋았어요. 설마 이렇게 잘 뽑힐 줄은 몰랐는데.”

즉석에서 짜낸 아이디어로 찍은 장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

그런데.

“아뇨. 이건 유진이가 생각한 거예요.”

유유연이 격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 유진이가?”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향했다.

“네. 저 외부전등이 나간 건물 뒤편을 활용해보자는 것도. 수진이의 시선을 따라가자는 것도, 빛 어둠 빛 순서로 동선을 짠 것도, 휴대폰 라이트를 이용하다 꺼지는 것도. 모두 유진이의 아이디어였어요.”

*

유진이 캐릭터로서 ‘염라’를 구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그건 바로 원작 반영이다.

그러나 장면 연출 정도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

특히 라앺의 장면 묘사는 다소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으니까.

때문에 드라마에서 예상치 못한 연출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에 유진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여주는 방향의 연출을 말이다.

‘유연 누나가 내 생각을 잘 전달해줘서 다행이야.’

유진이 굳이 유유연의 입을 빌린 이유.

오늘 촬영 분량도 없는 자신이 대안을 떠들어봤자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주인공이자 라앺 찐팬이라는 것이 입증된 유연의 말이라면?

‘말의 무게감 자체가 다르지.’

김경식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하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장면이 됐어.’

아이디어의 제공자는 유진이지만.

장면을 멋들어지게 뽑아낸 것은 스탭들, 그리고 배우들의 몫이었다.

‘역시 이 작품, 잘 될 수밖에 없어.’

참여진의 능력이 모두 훌륭하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도 그렇게 드라마가 흥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스케줄이 빡셀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빡센 정도를 넘어서 혹독한데.’

오늘 종일 동행하며 느낀 것이다.

그냥 지켜보는 유진조차 피로할 정도니 말 다했다.

FD 주승효는 열이 펄펄 끓어도 티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보단 여유를 만들어야해.’

유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야야.”

스태프들 쪽을 흘끗거리던 구경꾼.

그가 확성스피커가 되어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들었는데. 건물 쪽에서 안전사고 날 뻔했다나봐.”

“진짜? 사고? 왜?”

“뭐 감전 어쩌고······막 그러던데.”

“헐. 진짜? 다친 사람은 없대?”

“박유진이 그거 막았다는데.”

“10살짜리가? 그걸 어떻게?”

“몰라. 뭐 문제 생기기 전에 사람을 불렀다나봐.”

“와. 대박. 대체 뭐야? 신기라도 있나?”

구경꾼들 사이에서 유진의 활약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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