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MBS 사옥 앞 카페.
방송국 앞이다보니 업계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그 구석자리에 위치한 두 사람.
“이야. 너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남자 쪽은 최근 <별을 보러 떠나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있는 예능PD 김오태.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건 30대의 여성.
“네. 선배 얼굴 많이 상하셨네요. 저 없는 동안 프로그램 다 대박치셨다면서요?”
“너는 얼굴이 더 편 거 같다? 외국물 먹어서 그런가?”
“진짜요? 그럴 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하다 왔는데.”
"대체 얼마나 있다 온 거야? 네 얼굴 까먹는 줄 알았다."
"2년은 확실히 더 넘었죠? 저도 출국일이 언제였나 가물가물하네요."
“이야. 다큐를 2년 넘게 찍은 거야? 진짜 대박이네.”
"창사 50주년 특집 다큐였으니까요. 완전 빡셌죠. 미국, 캐나다, 러시아······다닌 나라만 15개가 넘을 걸요."
김오태와 선후배 사이로, 10년 넘게 알고 지낸 다큐멘터리 감독.
MBS 시상교양국에 소속되어 있는 장은영이었다.
목에 걸고 있는 커다란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래서. 소감이 어때? 다큐 대박 났잖아."
"글쎄요. 그런 거 느낄 새도 없이 이제 곧바로 신작 들어가야 해서요."
"오자마자 굴리다니. MBS도 진짜 너무하네. 얼마 전에 스케줄 빡세게 굴리다 망할 뻔했으면서."
“신년 특집으로 다큐 준비 중인 게 있었는데, 선배 중 한 명이 병걸려서 휴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타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년 동안 해외에서 굴렸으면 좀 쉬게 해주든가. 귀국해서도 계속 편집하고 조율하고 그랬 거 아니야?"
"선배도 아시잖아요, 다큐 쪽은 언제나 사람이 부족한 거. 그리고 괜찮아요. 휴가보다 일하는 게 좋아서요. 휴가를 아예 안 갔던 것도 아니고요."
"너도 참 너다. 하긴, 뭐. 젊어서 일하는 거지. 나처럼 나이 먹으면 일하고 싶어도 몸이 힘들어."
"이번엔 그리 안 빡세요. 아이템 간단하고, 촬영 기간도 짧고. 해외 나갈 일도 없고요.”
“그건 다행이네. 어휴, 하긴. 내가 누굴 챙기냐. 나도 휴가 못 간지 꽤 됐는데.”
“예능은 한 번 히트치면 사골까지 우려먹으니까요. 좋은 거 아니에요? 그만큼 잘 나간다는 건데.”
“그것도 그렇긴 한데, 가끔은 박수 칠 때 떠나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
예능PD로서, 다큐PD로서.
각자 서로의 애환을 털어놓는 두 사람.
곧 김오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들어가는 다큐 내용이 뭐라고?"
“아역배우요. 요즘 부모들 사이에서 자식들 아역배우로 키우려는 연기붐이 일고 있어서, 그 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데요.”
"아하. 그래서 나를 찾아왔구만?"
예능 <별을 보러 떠나요>는 키즈모델, 아역배우와 그 부모님이 함께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
지금 MBS에서 아역배우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건 아마 김오태일 것이다.
이지혜 등 고정 출연진도 있으나, 이따금 게스트를 섭외하기도 하니까.
“그럼 아역배우들 상대로 인터뷰도 따겠네?”
“네. 아예 아역배우 한 명 잡고 며칠 간 붙을 거 같아요. 근데 선배가 아역배우 쪽은 잘 안다고 들어서.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누가 있겠어? 당연히 박유진이지.”
“박유진이요?”
낯선 이름을 들은 듯 장은영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김오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너 박유진 몰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긴 한데요.”
"너 라앺 안 봐?"
"라앺이요?"
"드라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말이야. 지금 우리 방송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드라마."
"아아. 그거! 지금 방송국 건물에 도배된 그거 맞죠?“
MBS 사옥 곳곳엔 라앺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만큼 기대작이고, 또 기대작인만큼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넌 진짜 다큐 말고는 관심이 없구나."
“제목이 좀 헷갈려서요. 요즘 엄청 인기 많다는 건 들었어요.”
“아무튼 포스터 봤으면 그 꼬마 얼굴도 봤을 거 아니야? 그 잘생긴 남자애. 걔가 박유진이야. 요즘 엄청 핫하거든.”
”아, 그래요?“
확실히 애가 잘생기긴 했던데. 장은영은 혼자 그리 중얼거렸다.
최근 2년 넘게 한국에 없었고.
귀국한 이후에도 일에 치여산 장은영.
그래서인지 유진의 활약상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거기 소속사 사장 형이랑 좀 돈독하거든. 별 일 없으면 해줄 거 같은데. 어때, 내가 다리 놔줘?"
“음, 추천 감사드려요. 근데 그건 좀 나중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큐를 찍는데 가장 중요한 것.
그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다큐감독 장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그 박유진에 대해 좀 조사해보고 싶어요.”
*
얼마 뒤, 드라마 라앺 촬영장.
“박유진 배우! 지금 표정이랑 감정이랑 다 좋았는데, 이번엔 힘 한 번만 뺀 버전 가보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한창 드라마 촬영에 매진하고 있는 상태.
첫 촬영 때와 비교하면 촬영장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첫 촬영 때는 무리한 스케줄로 하품이 끊이질 않고, 텐션도 낮았다.
꾸벅꾸벅 조는 스탭 때문에 철렁해지는 순간도 있었고.
그러나 지금은.
“딱 여기 설 때쯤 포커스 맞춰줘! 그 다음엔 그냥 넘기면 돼.”
“넵!”
“동선 체크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저기 문에서부터 걸어와서, 저 의자 뒤편으로 해서 이동하면 됩니다.”
“아, 유유연! 리허설 때 자꾸 웃지 말라고.”
“오빠도 웃었으면서. 아, 근데 얼굴만 봐도 웃겨 진짜.”
“유진이랑 찍을 땐 한 번도 안 웃었잖아, 너.”
“유진이는 잘 생겼잖아.”
“그건 인정.”
스탭, 배우 할 것 없이. 모두에게서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넘치는 상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시청률, 넘쳐나는 인터넷 화제성.
덕분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밥차 왔으니 다들 밥 먹고 합시다!”
“엥? 우리가 매번 부르던 거기가 아니네요?”
“응. 누가 보내준 거야.”
“헐. 누가요? 우리 배우들이 쏜 건가? 유유연 배우? 정성진 배우?”
“땡. 가서 한 번 봐봐라.”
100명 내외의 배우, 스탭들의 따뜻한 식사를 책임져줄 밥차.
그리고 이 밥차를 보내준 건.
[유진과 함께하는 ‘죽음조’가 드라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를 응원합니다
죽음조의 염라대왕 박유진 대박나자]
다름 아닌 고석태, 나은주, 한권주였다.
유진의 라앺 촬영을 응원하며 보내준 것.
“헐. 옆에는 커피차도 있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대박유진이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의 대박을 기원합니다!
#더 찬란하게 빛날 유진이의 11살 축하해]
유진의 팬카페, ‘대박유진’이 커피차를 보내왔다.
유진의 11살을 기념하며 말이다.
“이야. 내가 살다살다 나은주, 한권주가 보내준 밥차도 먹어보네.”
“고석태 배우는 왜 빼냐?”
“저번에 영화 찍을 때 한 번 밥차 불러줬었거든.”
“밥차에 커피차에. 식사부터 디저트까지 완전 든든하구만!”
충무로의 톱스타 세 명이 아역배우 한 명을 위해 보내준 밥차.
거기에 팬들이 보내준 정성어린 커피차까지.
“유진아! 잘 먹었다고 꼭 전해줘.”
“넵! 형, 누나들이 엄청 좋아했다고 자랑 엄청 할게요.”
자연히 촬영장에서 유진의 체면이 한껏 올라갔다.
“우와. 지니 너 진짜 한권주 선배님이랑 친하구나.”
그걸 보며 유유연은 순수한 의미에서 감탄을 터뜨렸다.
같은 소속사 후배인 유유연조차 한권주를 어려워한다.
그런데 밥차를 받는다니 신기할 수밖에.
“그럼요. 제가 권주 삼촌 아들 연애문제도 상담 해줬는걸요.”
“헐, 진짜?”
“진짜죠! 덕분에 지금은 꽁냥꽁냥 잘 사귀고 있대요.”
유진은 자랑스레 가슴을 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식판에 밥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그 직후.
곧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한 남자.
“같이 먹어도 될까?”
저승사자 단 역의 정성진이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당근이죠! 얼른 앉아요 형.”
제 옆의 의자를 두드리며 말하는 유진.
자리잡은 정성진을 향해 유진이 친근하게 말했다.
“이번에 성진이 형이 알려준 발성법 연습 중인데 되게 어렵네요.”
“성악 배운 사람 아니면 힘들 거야.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면 금방 익숙해질걸?”
“저 나중에 뮤지컬도 꼭 해보고 싶거든요. 이번에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진에게 복잡한 마음을 갖고 있던 정성진.
그러나 촬영장에서 유진의 연기를 보고선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장 내년에 있을 백룡에 욕심을 내느니.
장기적으로 유진과 친분을 쌓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고, 이득이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 이후론 유진에게 성악 쪽 발성법도 알려주는 등, 급속도로 친해지고 있었다.
“같이 작품 하면 재밌겠네.”
정성진이 그리 대답한 직후.
꼬르륵-
유진의 배꼽시계가 울렸다.
“아, 배고프다. 저 일단 너무 배고파서 밥 좀 먹을게요!”
유진은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숟가락을 들었다.
방금까지 촬영했던 터라 많이 허기진 모양.
와구와구 밥을 밀어넣는 모습은 흡사 전투를 나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 성진 오빠.”
그러는 사이 유유연이 정성진에게 말을 붙였다.
“저, 실은 2년 전에 오빠 뮤지컬 하는 거 봤는데. 그 신당역 바로 앞에 있는 공연장에서 한 거요.”
“아, <데스핑거>? 그거 보러왔어?”
냠냠, 쩝쩝.
“네. 와, 티켓 구하기 진짜 힘들더라고요. 근데 공연하는 거 보니까 왜 그리 인기 많은 지 알겠더라고요. 오빠 진짜 잘 하시던데요?”
“하하, 고마워. 근데 뭔가 부끄럽네.”
후루룩, 쩝쩝.
“에이, 뭐가 부끄러워요?”
“난 대놓고 칭찬 들으면 좀 낯간지럽다고 해야하나. 고마운데 부끄러운 거 있잖아.”
“아, 그럼 이제부터 은근히 칭찬해줘야 되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
스윽스윽, 후루룩-!
곧 두 사람의 얘기가 멈추고.
시선이 유진 쪽으로 향했다.
“음? 왜 그래요?”
시선을 느낀 유진이 눈을 끔뻑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헉. 혹시 제가 너무 쩝쩝대면서 먹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많이 먹는다.”
두 사람이 놀란 것은 유진의 먹는 양.
시작부터 고봉밥을 퍼왔는데, 벌써 깨끗이 비워버렸다.
지금 가져온 것은 리필해온 것.
“많이 먹어야 힘내서 연기하죠. 한국인의 체력은 밥에서 나오잖아요.”
그리 말하며 와구와구 밥을 흡입하는 유진.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볼이 빵빵해질 지경이다.
죽음조 사람들이 또 유진의 입맛 취향을 알고 메뉴를 정해주었다.
덕분에 유진은 한껏 행복해하며 식사를 즐기는 중.
“으아, 맛있다!”
육개장을 단숨에 비운 유진을 보며 유유연과 정성진은 소리없이 감탄했다.
“아, 잘 먹었습니다! 이제 디저트 먹어야겠다.”
“헐. 더 먹는다고? 너 그러다 살쪄.”
“엥? 원래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걱정 마요, 누나. 저 살 안 찌는 체질이에요.”
“와. 그 말은 지니라고 해도 넘어갈 수가 없는데. 넌 모든 배우를 적으로 돌린 거야.”
유유연이 제 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컵라면을 꺼내들었다.
“어? 디저트 먹는다며?”
“이게 디저트인데요?”
“언제부터 라면이 디저트가 된 거야?”
“저한텐 쌀밥 아니면 다 디저트거든요.”
“와. 너랑 이제 같이 밥 못 먹겠다. 식비 엄청 나올 듯.”
유진이 언제고 이렇게 많이 먹었던 것은 아니다.
워낙 쉴 틈없이 일해서 그런지 에너지가 필요할 뿐.
‘무엇보다 성장기니까 많이 먹어야지.’
회귀 전 어린 시절엔 깨작깨작 먹어서 그런지.
다소 몸이 얇고 왜소했다.
그 때문에 소화할 수 있는 배역이 더욱 한정적이었는지도.
‘이번엔 키도 좀 더 크고, 근육 좀 붙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컵라면을 후루룩 넘기는 유진을 보며.
유유연과 정성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특이하네.”
“그쵸? 진짜 지니는 볼 때마다 재밌다니까요.”
저 모습만 봐서는 ‘염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배우란 생각이 안 드는데.
또 카메라 앞에만 서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근데 진짜 맛있게 먹지 않아요?”
“그러게. 나도 갑자기 라면 땡긴다.”
후루룩!
면치기까지 하며 무아지경에 빠진 유진.
그를 보며 유유연의 입술이 실룩였다.
“지니. 너 먹는 거 동영상 찍어서 스윗터에 올려도 돼?”
“응? 라면 먹는 걸요?”
“응. 염라분장 하고서 라면 먹는 게 되게 묘해. 귀엽고 웃겨.”
“그래요? 상관없긴 해요.”
“못 생기게 나와도 괜찮아?”
“못생기게 나올 리가 없는데요?”
“와. 무슨 자신감이야? 근데 반박할 수가 없네.”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잘난 얼굴이었다.
아무튼.
유유연은 카메라 어플을 켜고, 동영상 촬영 모드로 전환했다.
“이야. 이게 무슨 그림이야.”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정성진.
곧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무슨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저렇게 라면을 맛있게 먹어.”
“저 방금 밥 다 먹었는데 침 고이려 해요.”
최근 분장 덕분인지 ‘역대급 아역 비주얼’이라고 불리며.
데뷔작이었던 <유별난 친구들>에서 세웠던 움짤 신드롬을 재차 갱신 중인 유진.
그런 모습으로 맛깔나게 라면 먹방을 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신기하고 귀여웠다.
“지니! 이거 바로 올린다? 한 번 확인시켜줄까?”
동영상 촬영을 끝낸 유유연이 물었다.
그러나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국물을 끝장내느라 바쁘거든.
“아뇨, 안 봐도 돼요. 그냥 올려요.”
분부대로 유유연은 곧장 스윗터에 접속했다.
[유유연의 스윗 : 우리 염라 라면 먹는 모습 보실분? ㅋㅋㅋ
참고로 식판 두 그릇째 해치운 상태
#라앺 #염라 #유지니 #대식가]
그리고 유유연이 올린 스윗은.
뜻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