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정기열은 실전에 꽤 익숙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레슨을 받았고.
숱한 오디션을 거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때문에 현장에서 과도하게 긴장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주현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절대 실수를 해선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으니.
그로 인해 정기열이 터득한 진리.
‘그래. 나만 잘하면 돼.’
스스로의 몫만 잘 해내면 된다.
연기도, 음악도 모두 어른들이 도와주었으니.
그러나.
정기열은 생애 처음 맛보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지만 그거마······죄, 죄송해요.”
“네. S의 대사부터 다시 가보겠습니다.”
바로 타인의 실수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 예상 녹음시간은 휴식시간 포함 5시간 정도.
그런데 30분 분량을 녹음하는데 벌써 3시간을 훌쩍 넘겼다.
남은 분량이 1시간 가량인데, 이 정도 속도라면 2시간으론 어림도 없다.
‘이대로라면 목에도 별로 안 좋은데.’
아무리 휴식을 병행하고 있다곤 해도.
몇 시간 동안의 녹음은 아직 10살 내외의 아역배우들에겐 강행군이나 다름없었다.
계속된 NG로 녹음실 내의 분위기도 매우 다운된 상황.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주먹을 꽉 쥐는 정기열.
뮤지컬 애니메이션 .
정기열에겐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배역이고, 블라인드 오디션을 통해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뽑혔으니.
게다가 무려 타이틀롤이다.
정기열은 주인공 X로 이 작품에 임하고 있다.
여러모로 는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는 작품.
정기열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했다.
‘여태까지 내가 맡았던 캐릭터들과는 달라.’
아역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다소 한정적이었다.
지켜줘야할 대상으로서 감성을 호소하거나, 귀여움담당으로 등장하는 게 대다수.
아역이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경험은 결코 흔치 않다.
그걸 정기열도 알고 있었다.
‘X는 달라. 서사도 확실하고, 분량도 많고, 감정을 쌓아가는 것도 확실히 보여.’
그렇기에 더욱 큰 집중력을 요했다.
“발음이 꼬였네요. 다시.”
“목소리가 갈라졌네요. 다시.”
“K의 대사부터 다시 가겠습니다.”
다시, 다시, 다시.
애써 집중력을 끌어올려보려 해도.
현장 분위기 자체가 늘어지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대본에 집중해, 정기열. 대본만 보라고.’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선 정기열도 지쳐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결국 지지부진한 진도 속 찾아온 휴식.
정기열은 벌써부터 지친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냥 혼자 녹음하는 게 편해.’
그런 생각이 울컥 치미기 시작했을 때.
-기열놈 : 야
-기열놈 : 도와줘
정기열은 저도 모르게 유진에게 톡을 보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립심이 강한 정기열이지만.
유진을 만난 이후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토로할 줄 알게 된 것.
‘그래도 바쁜 녀석한테 괜히 마음쓰게 만드는 거 같은데.’
유진이 스케줄 때문에 단체녹음에 참여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정기열은 톡을 보내고 만 것.
그런데.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유진이, 정말 왔다.
녹음실 안으로 들어오며 유진은 대뜸 큰소리로 사과했다.
그러자 다소 침체되어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환기되고.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집중되었다.
“너, 너 앞에 스케줄 있다며?”
“얼른 끝내고 왔지. 네가 도와달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유진.
그게 정기열에겐 오히려 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럼 얼른 와서 준비해. 대본 꺼내고. 감독님께 말씀 드려서 너랑 나랑 붙는 장면부터 녹음하자.”
유진이 파트너라면 실수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 되면 자연스레 감각이 올라오고, 분위기도 다소 환기되리라.
정기열은 그리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여기서 한 번 지켜볼게. 너희 어떻게 하는지.”
“뭐?”
곧장 더빙에 투입해 자신을 도와줘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켜본다니?
“아니, 왜? 야. 지금 완전 답답한 상황이란 말이야. 이럴 때가······.”
따져묻고 싶었으나.
유진은 이미 녹음실 뒤편에 자리잡은 뒤였다.
‘역시 저 녀석 생각은 알 수가 없네.’
정기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의외네요.”
컨트롤룸에서 녹음실 안을 바라보고 있는 곽용재.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진이라면 곧장 들어가서 더빙이 뭔지 보여주고, 서열정리를 할 줄 알았는데.”
유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곽용재와 이선화조차 깜빡 속일 정도의 변성 실력.
그야말로 공채 성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거 같은 실력자니까.
그런데 곧장 녹음실에 들어간 유진은 녹음을 주도하는 대신.
뒤쪽에 서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진이가 그럴 성격이야?”
“아뇨. 지금 너무 긴장감이 떨어져 있으니까요.”
곽용재의 말에 이선화가
얼러도 보고, 조금 엄하게도 해봤다.
그러나 위축된 아이들은 도통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역시 단체녹음이 자충수였던 걸까?”
이선화가 달력을 흘끗거리며 말했다.
여차하면 개별녹음으로 돌린 뒤.
스케줄을 다시 잡을 생각도 하고 있는 것.
“아무튼, 유진이는 일단 지켜보려는 거 같아. 현장의 분위기나, 아이들의 상태 같은걸.”
“진짜 그럴까요? 그런 건 진짜 베테랑 성우들이나 하는 건데.”
“유진이잖아. 넌 가끔 유진이를 고평가하는 건지 저평가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능력은 확실히 고평가하죠. 그런데 경력이 아무래도. 유진이가 단체녹음 경험은 없잖아요. <날개> 녹음 때도 개별녹음 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또 NG가 났다.
“죄, 죄송합니다.”
특히 오늘따라 실수가 잦은 S의 성우, 황지윤.
그녀의 경우 계속 유진 쪽을 흘끗대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유진 때문에 적잖이 신경 쓰이는 모양.
“오히려 유진이가 녹음실 들어가고 실수가 더 늘어난 거 같은데?”
“그렇겠죠. 긴장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스타가 옆에 있는 기분일 텐데.”
유진은 아역배우들 사이에선 롤모델 그 자체에, 우러러 봐야하는 스타다.
그 앞에서 실수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을 터.
[S# 24
어두운 밤, 놀이터.
S : (사탕 물고, 껄렁하게) 아이, 씨.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너 확 발로 차버린다?]
그러나 이 가벼운 대사 한 줄도.
“죄송합니다. 그, 진짜 죄송해요.”
황지윤은 같은 부분을 또 다시 실수하고 말았다.
그녀가 맡은 S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자아이 역할.
특히 사탕을 물고 있는 장면이 많아서 그 점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무는 황지윤.
곧 그 눈망울이 울 것처럼 촉촉해졌다.
그때.
“너 이름이 지윤이지?”
유진이 황지윤에게 다가갔다.
“어? 어. 내 이름을 알아?”
일면식도 없는 유진이 무명 아역배우인 자신을 알고 있다.
그 사실에 황지윤은 꽤 놀란 모양.
“그럼. 당연하지. 같이 작업할 사이인데.”
유진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근데 지윤아. 방금 네가 대사한 이 부분 말인데. 느낌 되게 좋았어. 대사를 웅얼거리듯 표현하는 거. 그거 S가 사탕 물고 있는 걸 표현하려고 그러는 거지?”
“응. 응. 그래. 맞아!”
자신의 연기의도를 알아봐주자 황지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표현력이 대단한데? 근데 그런 상태에서 발음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는 거 같아. 어차피 사탕을 물고 있는 상태니까, 우선 네 느낌대로 해보는 게 어떨까?”
“응? 어, 어. 한 번 해볼게.”
유진의 조언을 들은 황지윤.
“아이, 씨.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너 확 발로 채버린다?”
끝에 발음이 한 번 씹히긴 했으나.
껄렁거리는 S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연기였다.
그러자.
“오.”
컨트롤룸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태까지 들었던 것 중 가장 훌륭한 연기였으니.
“!”
그를 연기한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기쁨에 황지윤의 얼굴이 환해졌다.
유진을 향해 웃어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
‘좋아. 그대로 계속해!’
하지만 유진은 으스대는 대신 입모양으로 그리 말할 뿐.
이 흐름을 계속 이끌어가고자 했다.
“아, 근데 끝에 발음 하나 조금 씹혔는데.”
곽용재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이에 끊고 다시 가려는데.
“아니. 흐름 끊지 말자.”
이선화가 막아섰다.
“네? 하지만.”
“저 애 표정을 봐.”
그 말에 곽용재는 뒤늦게 황지윤의 표정을 봤다.
얼굴에 깃든 환한 표정.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다.
“분위기 좋잖아. 어차피 그 부분은 이따가 거기만 다시 따면 되고.”
이어지는 대사들도 그 텐션을 이어받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긍정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다른 아역배우들도 조금씩 기를 펴기 시작했다.
“그래. 애초에 오디션 때를 생각해봐. 저 애들은 더빙을 못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건 바로 더빙이 처음인 아역배우들에게 자신감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이미 소속사 등에서 레슨을 받아온 아이들 아닌가.
멘탈과 집중력만 잡아주면 제 실력을 발휘할 터.
그걸 유진은 정확히 캐치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유진이의 칭찬은 최고의 동기부여가 될 거야.”
롤모델이자 슈퍼스타나 다름없는 유진이 그리 치켜세워주니.
다들 칭찬을 받고 싶어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혹여 실수를 하더라도.
“잘했어. 그런데 그 부분 대사 치는 타이밍이 조금 빨랐네. 속으로 2초만 세고 들어가보는 건 어때?”
유진이 부드럽고도 정확하게 피드백을 제시해주었다.
그야말로 작중에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Y처럼.
더빙에 임한 아역배우들을 이끌고있는 것.
“역시 아이들 마음은 아이가 더 잘 아는 건가. 유진이 출연료 2배로 줘야겠다.”
이선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태클 걸기 좋아하는 곽용재도 그 순간만큼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한 사람인가?”
이선화와 곽용재는 동시에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로 주인공 X, 정기열 말이다.
*
‘누구나 완벽하게 연기할 수는 없는 법이야.’
실패를 거듭하면 실패에 좀먹힌다.
유진은 그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특히 어린애들이 있는 환경에선 더더욱. NG를 내면 위축되기 마련이고.’
초등학교를 다니며, 유진은 아이들의 심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놀림거리가 되니 말 다 했다.
그만큼 아이들 사이에선 실수하는 게 눈치 보이고, 두려운 것.
‘학교에서 앞으로 나와 문제를 푸는 것만 해도 그래. 틀리면 마치 죄인같은 취급을 받잖아.’
경력이 있는 아역배우들이라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이고, 유진을 제외하면 모두 더빙은 처음.
카메라가 아닌 마이크를 앞에 두고 실전 연기를 하려니 많이 어색할 것이다.
소속사에서 시켜준 더빙 연습과는 또 다른 영역이니까.
‘더빙이 은근 제약이 많기도 하고 말이야.’
화면 속 캐릭터와의 입길이를 맞춰야 하고, 오디오도 물리면 안 된다.
대본을 넘기는 소리조차 들어가면 안 돼서, 더빙할 땐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선 결과보다 분위기가 중요해. 누구라도 해낼 수 있다는 분위기.’
회귀 전엔 그 누구보다 실패해본 유진이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실사 연기든, 더빙이든.
현장 분위기라는 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배우끼리 자기 연기하기에만 급급했다간 어떤 참사가 나는지.
‘이제 다른 아역배우들은 대부분 자신감을 되찾았어. 남은 건 이제 한 사람.’
유진의 시선이 정기열에게로 향했다.
“그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씬넘버 34. 놀이터 장면. 준비되면 사인 주세요.”
곽용재가 말했다.
곧 이어질 장면은 X와 Y가 티키타카를 나누는 씬.
“기열아. 우리 잘 해보자.”
정기열을 향해 불끈 주먹을 쥐어보이는 유진.
그런데.
정작 정기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기열아. 왜 그래?”
“역시 네가 주인공을 맡았어야 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오니까 다 달라졌잖아. 다른 사람들도 실수 안 하고, 분위기도 좋아지고. 네가 주인공 같다, 야.”
정기열은 자신의 연기만 하기 급급했으나.
유진은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니.
그게 정기열에겐 주인공답게 보였던 모양.
“그래. 그럼 넘겨.”
“뭐?”
“내가 X 할게.”
그 말에 정기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유진이 그리 말할 줄 몰랐으니까.
“왜 그래? 갑자기 못 주겠어? 아까워?”
“아니, 그게 아니라.”
“기열아.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네가 힘들게 오디션으로 따낸 역할이잖아.”
조금 강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게 정기열에겐 가장 효과적일 터였다.
“주인공은 그렇게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리고 내가 한 건 주인공으로서 한 행동이 아니야. 그냥 더빙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한 거지.”
“그럼 주인공으로서 해야하는 행동은 뭔데?”
“주인공이 왜 주인공이겠어? 극의 중심이잖아. 모든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영향을 끼치고, 주인공을 위해 존재해.”
그건 정기열도 알고 있을 터다.
그래서 혼자라도 잘 해내려 그리 노력한 것일 테고.
“반대로 생각하면,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호흡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는 거고.”
그러나.
정기열은 정확히 거기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독백하는 자리가 아니야. 누구보다 많은 캐릭터와 호흡하는 역할이야.”
회귀 전, 두 사람은 그걸 몰랐다.
그렇기에 주연급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조연을 전전했다.
타고난 비주얼과 연기력을 갖췄던 유진도.
천재라 불리는 김주현, 그 아들로 태어난 정기열도 말이다.
“내가 맡은 Y도 마찬가지야. 기열아. 오디션 때 말했지? 내가 널 받쳐주겠다고.”
유진이 정기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주위를 잘 둘러봐. 알았지?”
*
주인공은 독백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 말이 정기열에겐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여태 했던 게 독백이란 소리인가?’
나만 잘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연기해왔던 정기열이다.
그런데 새삼 다른 사람을 신경 쓰라니.
‘주인공이니까 혼자 잘하면 그만 아니었어?’
“자. 곧 들어갑니다. 사인 주세요.”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컨트롤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S# 34
놀이터.
Y의 비밀을 알게된 X.
도움만 받던 X가 처음으로 Y에게 다가간다.]
대본을 흘끗거리며 정기열은 버릇처럼 화면에 집중하려 했다.
잠시 후.
“아, 너구나. 미안. 형이 저번엔 너무 심했지? 용서해줘. 다 잊어버려.”
성숙한 유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온다.
정기열은 그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래, 느껴져. 저 목소리 안에 들어있는 Y의 슬픔, 아픔. 그리고 그걸 숨기고 싶다는 것까지. 그게 안타깝게 가슴에 전해져 와.’
그렇다면 그 감정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형.”
정기열의 연기도 그에 맞춰졌다.
자연스레 목소리에 연민과 조심스러움이 담긴 것.
“있잖아, 형. 나한테 솔직하게 다 말해줘.”
“아냐. 난 괜찮아.”
“이번만큼은 형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하잖아!”
유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사를 치면.
“형······.”
정기열이 그 텐션을 이어받아, 울먹이며 대사를 친다.
성숙한 유진의 목소리.
그리고 비교적 어리숙한 정기열의 목소리.
그 두 개가 절묘한 합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유진과 정기열, 두 사람의 케미.
그게 제대로 발동이 걸린 것.
“네가 뭘 아는데. 아무도 몰라. 나에 대한 건 아무도 모른다고! 그냥 평소처럼 형 대접해줘. 그러면 안 돼?”
“혀, 형이 그랬잖아. 아프면 기대라고. 근데 형은 왜 나한테 안 기대?”
“내가 동생한테 어떻게 기대. 너처럼 작고 약한 애한테!”
X를 깔보는 Y의 말.
X는 충격을 받는다.
Y의 저 말은, X를 생각해주며 감싸던 모습이.
실은 그저 얕보는 것이었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난 형처럼 크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아.”
뚝뚝 흘러내리는 X의 눈물.
하지만 X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도 난 의자는 될 수 있어.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의자.”
하지만.
그럼에도 X는 Y에게 손을 내민다.
서툴지만, 두렵지만.
처음으로 누구에게 의지가 되고 싶어서.
X가 처음으로 주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이거구나.’
그를 연기하는 정기열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여태 연기하고, 노래하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카타르시스였다.
‘유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절로 감정이 격해져. Y가 가지고 있는 아픔, 그걸 숨기려고 하는 마음. 그게 모두 전해지니까.’
정기열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도 정기열을 흘끗 바라보고 있었던 것.
‘주변 공기가 달라. 모두가 우리에게 집중하고 있어.’
녹음실 안의 다른 아역배우들도.
컨트롤룸의 이선화와 곽용재도.
모두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이게 바로, 누군가와 호흡하며 연기한다는 감각이구나.’
정기열이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
유진이 싱긋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