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175화 (175/237)

175화

UB엔터 안에 위치한 녹음실 A.

그곳에선 두 남자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박유진 좀 어때요?”

제법 통통한 체형에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그는 작곡가로서 베디베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빅터의 각종 히트곡을 작곡한 UB엔터 소속 작곡가.

“어떻긴? 곡 뽑힌 이후론 계속 안무연습만 하고 있지. 무서울 정도라니까.”

조실장이 믹스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 진짜요? 하긴. 걔가 노래 연습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이번에 박유진 본 녹음도 네가 봐준 거지?”

“네. 음정도 그렇고, 박자도 그렇고. 무서울 정도로 잘 맞추던데요? 아이돌 연습생, 이런 애들 보다 훨씬 나아요.”

그의 편하고 순박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녹음실에선 호랑이 디렉터로 통했다.

덕분에 결과물이 좋게 나오긴 하지만, 가수들의 멘탈이 탈탈 털리곤 한다고.

“진짜 재능 많더라고요. 가사도 잘 붙이고. 무엇보다 되게 싹싹해서 호감이던데요?”

“진짜 요즘 애들 같지 않지?”

“네. 원래 그 나이대에 그 정도 위치면 자만하기 마련인데, 전혀 그런 면모가 안 보여요.”

유진과 짧게 호흡을 맞춘 베디베어이지만.

그 시간 동안 느낀 호감은 꽤 큰 모양이었다.

수많은 아이돌, 그리고 아이돌 연습생을 상대해봤던 경험 탓이리라.

“그런데 정말 그런 애가 춤을 잘 못 춰요?”

“너 우리 콘서트 직캠 영상 안봤냐? 넙튜브에서 벌써 조회수 300만이 넘었던데.”

“아니, 안 믿겨서 그렇죠. 뭔가 이미지만 봐선 춤도 엄청 잘 출 거 같고, 아이돌도 가능해보이는데.”

“그래서 더 재밌는 거지. 뭐, 거기에 춤까지 잘 추면 너무 인간미가 넘치긴 해.”

“그런데 설마 실장님이 나서서 이렇게까지 푸시할 줄은 몰랐는데요?”

끔찍할 정도로 빅터를 아끼고, 빅터만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다른 소속사 아역배우를 위해 힘을 쓴다니.

분명 보통 일은 아닌 것.

“앞으로의 관계설정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관계설정이라면, 실장님은 박유진 영입을 노리는 건가요?”

그 말에 조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박유진은 돈만 보고 움직이는 타입은 아닌 거 같아. 그 중소 매니지먼트랑 계약한 것도 그렇고, 작품 선택하는 것도 변칙적이지. 대형기대작만 픽하지 않아. 돈만 보고 움직였다면 안전한 선택만 했을 텐데 말이야.”

“그럼 왜 박유진을 밀어주는 거예요?”

“박유진이랑 우리 애들, 빅터의 관계는 여태까진 제법 사적인 친분의 영역이었으니까. 이렇게 연결고리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또 굳이 빅터가 아니더라도, 우리 회사 소속 다른 연예인이랑 엮을 수 있으면 베스트고.”

조실장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유진은 반드시 올라가는 주식이야. 우량주라고.”

“우량주도 우량주 나름이지. 덩치가 너무 커진 거 아니에요? 지금 매입하기엔 너무 비싼 거 같은데.”

“뭘 모르네.”

종이컵을 모두 비운 조실장.

베디베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박유진은 항상 현재가 제일 저점이야. 계속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지. 사지 않는 게 멍청한 짓이라고. 설령 이번 싱글이 그리 흥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투자해봄직하단 소리야.”

*

얼마 뒤.

팬사인회 겸 쇼케이스의 행사장으로 쓰일 무대.

리허설 중인 그곳엔 ‘작은 별’의 MR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무대 위.

유진은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아야야.”

턴을 하던 도중, 유진이 허벅지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유진아!”

그를 지켜보던 차동석은 쏜살같이 유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많이 아파? 어디 다쳤어?”

“아뇨, 아니에요. 그냥 이쪽 근육을 많이 써서 그런가, 조금 땡겨서요.”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으나, 차동석의 표정은 심각했다.

“일단 의료진한테 한 번 검사 받아보자.”

“어? 그 정도는 아닌데.”

“너 그 나이 때 무리하면 큰일 나. 게다가 곧 쇼케이스 시작하잖아. 팬들한테 아픈 모습 보여줄 거야?”

“네. 그럼 조금만 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볼게요.”

“안 돼. 쇼케이스 전까진 무조건 휴식이야. 알겠어?”

답지 않게 강경하게 나오는 차동석.

그만큼 유진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쇼케이스 때 여러 비상사태를 대비해 의료진이 대기 중이었는데.

덕분에 곧장 조치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알겠어요, 사장님.”

그리 대답했지만, 유진은 여전히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

의료진의 검진 결과,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너무 잦은 연습이 원인인 모양.

“흠흠, 흐응흥흥.”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유진은 입으로 이번 싱글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마치 머릿속으로 춤을 복기해보는 것처럼.

“어휴. 너를 누가 말리겠냐.”

그를 보며 차동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죽도록 연습해본 것도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 빅터 컴백콘 때는 진짜 묻어가기 좋았는데.”

춤을 출 때 유진은 자신만의 흥이 있었고.

그에 도취되느라 춤이 기묘해지곤 했다.

회귀 전에도 춤만큼은 연습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를 교정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따랐다.

“괜찮아. 팬들은 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줘도 좋아할 거야. 너도 알잖아?”

“누군가는 저를 보기 위해 화보집 100장도 샀다면서요. 그런데 제가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번 쇼케이스 겸 팬사인회의 추첨은 유진의 15살 화보집 판매와 연계했다.

화보집을 구매하면 추첨을 통해 100명에게 쇼케이스 겸 팬사인회 입장권을 주는 것.

덕분에 이번 유진의 화보집은 역대급 판매량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으니까.

유진의 말대로 100개를 한꺼번에 구매한 팬도 있을 정도라고.

그야말로 웬만한 아이돌 덕질 부럽지 않은 수준.

“UB엔터 도움도 많이 받았고. 여러모로 그냥 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배우가 그냥 인기빨로 노래 낸다, 이런 소리 듣고 싶지도 않고요.”

그럼 팬들이 더 가슴 아파할 테니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내야죠.”

유진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번 ‘작은 별’을 준비하며, 지난 7년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진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유진에게 막중해진 감정이 있으니.

그건 책임감이었다.

자신의 노래가, 연기가, 혹은 존재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곧 새로운 원동력으로 치환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팬이 생길 테니까요.”

대중들의 시선을 빼앗는 배우가 되겠다 다짐했던 그 순간을 넘어.

이젠 그들의 삶에 위로가 되려 하는 것이다.

“근데 뭔가 좀 부족하단 느낌 안 들어요?”

“뭐가? 네가 신경써달라는 건 다 했는데.”

여러모로 이번 쇼케이스는 유진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었다.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들 중 음향도 최우선으로 고려했고.

팬들이 최대한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게 조치했다.

그뿐이랴.

조명이며 유진이 입을 의상, 동선까지.

유진은 모든 것을 각별히 신경 썼다.

“사장님. 혹시 백댄서 다 뽑았어요?”

“아직. 백댄서 넣기로 한지가 하루 밖에 안 됐잖아? 우선 아는 인맥 통해서 빠르게 팀으로 구해보려고.”

그런데.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 쇼케이스 때 백댄서 빼는 게 좋겠어요.”

“뭐?!”

그러자 차동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얌마. 너 무슨 자신감이야? 백댄서마저 없으면 어쩌려고?”

유진이 빅터콘에서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군무였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것에 비해 늘어나지 않는 유진의 춤 실력.

그를 가리기 위해선 백댄서의 존재가 필수적이라 차동석은 생각했던 것.

그러나 유진은 무슨 생각인지.

혼자 무대에 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대신 배경에 LED 스크린 좀 설치해주세요.”

갑자기 생뚱맞은 요구까지.

“LED? 무슨 배경 띄우려고 그래? 아니, 근데 백댄서를 없앨 필요는 없잖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번 쇼케이스, 오로지 ‘저’에 집중해보고 싶어요.”

*

그날 저녁.

UB엔터 연습실에선.

“어때요. 저 잘했죠?”

“노답.”

신랄한 평가에 유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완전 잘한 거 같은데.”

“완전 망한 거야.”

유진에게 독설을 내뱉고 있는 사람.

그녀는 UB엔터의 여자 아이돌 레드블랙의 히트곡 안무를 다수 만든 세라킴이었다.

즉, UB엔터 입장에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메이킹 수단을 모두 유진에게 제공한 셈이다.

“진짜 그렇게 못했어요? 전 삘이 딱 꽂혔는데.”

“그게 네 최대의 문제야. 자기가 잘한 줄 안다는 거.”

“으음. 역시 단점이라는 건 쉽게 개선할 수 없는 건가 봐요.”

“당연하지. 안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왜 고생을 하겠어?”

세라킴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괜찮아요! 다 방법이 있을 테니까.”

유진은 무한 긍정주의로 무장한 모양이었다.

매번 헤헤 웃으며 넘어가버리니 말이다.

하아.

세라킴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괜히 내가 한다고 나서서는.”

사실 세라킴은 유진의 팬 중 한 명이었다.

UB엔터 측에서 유진의 댄스곡 안무를 맡겠냐 물었을 때 덥석 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저 웃음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

물론 유진이 춤을 잘 못 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 천재 소년으로 유명하다보니, 자신이 알려주면 금방 익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안무소화력이 절망적일 줄이야!

“역시 스승이 문제인가? 은호랑 민혁이 데려와서 혼 좀 내야 하나.”

“혼나러 올 시간이 있을까요? 컴백 준비한다고 엄청 바빠졌던데.”

안무는 세라킴이 짜긴 했지만.

유진에게 춤을 가르쳐주던 건 은호와 민혁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컴백 시즌이 다가오며 무척이나 바빠졌다.

물론 은호와 민혁은 유진을 가르치고 싶어 했으나.

회사 눈치가 보이는지 섣불리 나서진 못했다.

그렇기에 세라킴이 직접 지도하기 시작한 것.

두 사람의 지도 아래, 유진의 춤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은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그래도 유진이 너, 안무 소화 능력 자체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문제는 댄스 브레이크 쪽이야.”

유진의 댄스곡.

그 상징성을 위해 댄스 브레이크를 넣은 게 화근이었던 모양.

“근데 그때만 되면 너 무슨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춤을 춰. 제발 순서에 맞게, 리듬을 타라고.”

“으음. 아무래도 가사가 없이 춤만 춰야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제 삘이 나오나봐요.”

“그런 걸 쿠세(버릇)라고 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넌 그냥 쿠세 덩어리야.”

세라킴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흑역사 확정이야.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첫째, 브레이크 타임을 없앤다. 둘째, 안무를 비교적 쉽게 수정한다. 자, 네가 선택해.”

아마 회귀하기 전 유진이었다면.

방법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열심히 했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노력한 게 중요한 것 아니냐며.

그러나 이제 유진은 알고 있다.

벽에 가로막혔을 때, 꼭 벽을 뛰어넘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그럼 안무를 수정하는 쪽으로 가죠.”

“댄스 브레이크는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 이거네?”

“에이, 댄스곡에 댄스 브레이크가 없으면 쓰나요.”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사실.

유진의 자신감, 그 원천은 따로 있었다.

“그럼요 안무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부탁? 뭔데?”

“쌤은 제 팬이라고 하셨죠?”

“그치. 뭐, 요즘에 네 팬 아닌 사람 찾기가 더 힘들겠지만.”

“그럼 제가 나온 작품 다 보셨겠네요?”

“당연하지.”

“그럼요. 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안무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뭐?”

세라킴이 질색을 하며 되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냔 표정.

“쇼케이스까지 시간이 많지 않은데? 나야 안무 금방 짜는 스타일이긴 한데, 그걸 네가 익히기까지 너무 촉박해. 지금 안무도 제대로 못 소화하면서 무슨······.”

그러자.

갑자기 유진은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들었다.

“아아. 제가 우리 안무쌤한테 선물을 드리려 했는데.”

“갑자기 무슨 선물 타령이야?”

“너무 멋진 안무도 짜주시고, 이제 제 춤도 봐주시니까요. 으음, 예를 들면 화보 전집 같은 거 드릴까 했죠.”

“화, 화보집 전집?”

세라킴이 혹하는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매해 성장하는 자신을 기념하며 화보집을 발매하고 있다.

그러나 한정판의 개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신 재판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늦덕들에겐 지난 화보들은 그야말로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희귀템.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는 데다, 그마저도 모두 순식간에 팔리니까 말이다.

“그럼, 너 9살 때 화보집도 있는 거야?”

그리고.

세라킴은 바로 그 늦덕이었다.

그것도 바로 올해 입덕한 늦덕 중의 늦덕.

필모그래피는 모두 정주행 가능하지만.

유진의 굿즈는 가진 게 없는 비운의 세대.

“전집이니까 당연히 있죠.”

그 말에 세라킴의 눈동자는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유진이 9살 때 처음 낸 화보집!

그건 그야말로 고인물 팬의 상징이자.

대박이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최고의 굿즈였으니까.

“아이, 이러면 안 되는데. 갑자기 안무 수정하고 그러면 개판 될 수도 있는데.”

그리 말하고 있지만.

세라킴은 어느새 입꼬리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박. 유. 진. 배우님 부탁이니까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감사합니다, 쌤!”

“그런데 정말 숙지할 수 있겠어? 네 춤 실력으로? 물론 네 실력을 생각해서 쉽게 만들긴 할 건데.”

“걱정 마세요. 그리고 쉽게 만들어주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팍팍! MSG 좀 쳐주세요.”

유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 춤은 못 추지만, 연기는 잘하거든요!”

유진이 괜히 ‘자신의 필모그래피’로 안무를 만들어달라고 한 게 아니니까.

단점을 도무지 개선할 수 없다면.

장점으로 단점을 덮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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