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225화 (225/237)

[외전] 5화

고급 한정식집.

그곳에 앉아있는 유진은 맞은편의 상대에게 말했다.

“이렇게 비싼 곳 안 와도 되는데. 순대국밥 집이면 된다니까?”

“군대 다녀온 놈한테 좋은 거 먹이고 싶다고. 형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야.”

맞은편에 앉아있는 것은 재오.

그는 유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짜식. 고생 많았다. 그 꼬맹이가 군대를 다 다녀오고.”

“하하, 고마워. 근데 형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서 더 잘 알지.”

연예인으로선 비교적 일찍 입대한 유진.

그리고 재오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미뤄서 다녀왔다.

“술 한잔 할래?”

“아니. 나 술은 잘 못하거든.”

“의외네. 너라면 한 궤짝은 비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술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지만.

그만큼 실수를 야기할 수 있다.

정상의 자리에 있다가 음주운전으로 훅 간 스타들이 어디 한둘인가.

물론 유진이 술을 마신다고 해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진 않겠으나.

애초에 그럴 싹을 잘라버리는 게 마음 편한 일이다.

“내가 너 처음 봤을 때가 8살이었지? 시간 진짜 빠르다.”

“그러게. 형도 벌써 마흔이 다 되어가네.”

“그런 말 하지 마라. 슬프다.”

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20대 청춘이었던 재오.

그러나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비주얼은 점점 중후한 멋을 더해가는 중.

“근데 형. 빅터 공식해체 했다며? 뉴스 봤어.”

“응. 너한테도 가끔 말했잖아. 곧 해체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긴 한데. 굳이 해체까지 할 필요 있었어? 완전체 활동은 하지 않더라도, 그냥 놔두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 대답에 재오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대로 끝을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팬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즉.

아이돌로서의 활동은 이제 완전히 종료하고.

배우로서 전념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래서. 소감은 어때? 빅터로서 활동할 날은 이제 없는 거잖아.”

“음. 시원섭섭하지. 처음 UB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이돌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본래 배우를 꿈꿔왔던 재오다.

그를 위해 UB엔터 연습생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러다 의도치 않게 아이돌의 길을 걷게 된 것.

즉, 좋아서 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의미없던 게 아니야. 오히려 지금은 무엇보다 소중하지.”

하지만.

빅터로서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 또한 사실.

그 덕분에 재오는 수많은 경험을 쌓았고, 인맥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연기를 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어주었고.

“돌이켜보면 좋은 일만 생각나. 내가 멤버들을 너무 모질게 대하진 않았나, 싶기도 하고. 춤도, 노래도 제일 못하는 놈이 나이 많다고 리더라는 자리를 맡았으니까. 얕보이지 않으려 더 기강을 잡았던 거기도 해.”

“그런 것치곤 기강이 안 잡혔던 거 같은데?”

“······그래. 기어오르는 놈들이 많긴 했지. 유이치 같은 놈처럼 말이야.”

그리 말하곤 있지만.

재오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무튼, 말 안 듣고 제멋대로인 동생들도 얻었으니까.”

비록 앞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이들의 유대감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불화설 등 안 좋은 문제로 해체한 게 아니라.

서로의 앞날에 행복을 빌어주며 헤어진 것이니까.

“어딜 가도 잘할 녀석들이지만, 가끔 불안해. 열심히 좀 해야할 텐데.”

순전히 노력으로 빅터에서 살아남은 재오다.

그의 눈에 타인의 ‘연습과 노력’은 절대량이 부족해보일 수밖에.

“이제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거잖아. 모두 저마다의 방식대로 헤쳐나가겠지.”

민혁과 은호는 함께 팀을 꾸려 활동할 계획이고.

유이치는 잠시 일본에 돌아가, 그쪽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네. 하긴, 이제 나는 빅터라는 그룹의 리더가 아니니까.”

그리 중얼거리는 재오의 얼굴은, 말 그대로 시원섭섭해보였다.

“진짜, 그냥 네가 형 해라. 애초에 네가 스승님이었잖아.”

“그럴까? 이제 재오라고 부를게. 여, 재오야. 거기 앞에 있는 나물 좀 덜어다오.”

“······옛날엔 거절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젠 엄청 뻔뻔해졌다. 박유진.”

“농담이야. 그리고, 이제 나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유진.

이제 어린이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없어졌다.

순진한 척하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기 등등.

뭐.

그래도 능글맞은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재오 형, 온플러스 쪽 새 작품 들어간다며?”

그 말에 재오가 입을 떡 벌렸다.

“와, 소문 진짜 빠르네. 우리 회사 내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 몇 없는데. 역시 너희 사장님 때문이겠지?”

이제 이 업계에서 차동석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나를 데리고 있다는 게 강력한 무기겠지만, 꼭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워낙 성격이 좋고 싹싹한데다.

비즈니스적으로 깔끔하고, 인맥이 넓으며 관리도 잘 한다.

때문에 누구라도 그와 친분을 쌓고 싶어하는 것.

‘생각해보면 진짜 신기하네.’

공익광고 한 편에 발연기의 대명사로 불렸던 재오.

주역 매니지먼트가 폭삭 망하고, 다시 DV 엔터로 돌아가 늦은 나이까지 매니저로 굴러야 했던 차동석.

그런 두 사람의 인생도 완전히 달라진 것.

‘한 명은 아이돌 출신 유명 배우에, 한 명은 연예계에 막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소속사 사장이라.’

유진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능력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으리라.

유유연이 말하지 않았던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갑자기 뭐 그렇게 흐뭇하게 웃어? 너 되게 아재 같은 표정이었어.”

“아냐, 아무것도. 그래서 어떤 작품인데?”

“이번에 온플러스에서 힘을 빡 주려나 봐. 원톱을 정해놓고 가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여럿이라던데.”

“그럼 형이 그중 하나인 거고?”

“그치. 미팅 때 주인공들엔 급 높은 배우들로 채워넣을 거라고 대놓고 말했어. 자기들 사활을 걸었다고 말이야.”

“음, 그러면 이상한데.”

“뭐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대본이 안 왔지?”

사실 군생활 내내 유진에게 대본은 끊이지 않고 날아왔고.

전역 직후론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온플러스 쪽에서 날아온 대본은 하나도 없었다.

급 높은 배우들로만 채워 넣겠다면서, 어째서?

“글쎄다. 짐작이 가긴 해. 너랑 썩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라서.”

재오가 떡갈비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내용인데 그래?”

“음. 이거 하나만 말해줄게. 이 영화엔 착한 놈이 없어.”

우적, 고기가 씹혔다.

“빌런만 등장하거든. 즉, 주인공이 전원 빌런이라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뒤.

유진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거, 오히려 좋은데?”

*

“한권주 씨와 함께 작업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PD님.”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바로 고PD와 한권주였다.

이미 온플러스와 한권주 소속사, 구구액터스와 얘기는 끝난 상태.

이후 계약서를 쓰고, 한권주가 직접 계약서에 서명하여 출연 사실이 확정된 것이다.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하시는 만큼, 불편함 없으시도록 힘을 다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배역은 픽스된 겁니까?”

“말씀드린 대로, 재오 씨가 도장을 찍었습니다. 나머지 배역은 아직 협의 중입니다. 하지만 재오 씨와 한권주 씨가 도장을 찍었으니, 이제 훨씬 수월해지겠죠.”

고PD는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하나 장담드리겠습니다. 출연진 라인업은 무척 화려할 겁니다.”

“화려하다라.”

그 말을 곱씹어보던 한권주.

곧 고PD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시죠.”

“혹시 유진이에게도 컨택이 간 겁니까?”

유진.

그 이름에 고PD의 눈동자가 커졌다.

“유진, 이라 하심은. 박유진 배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PD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애당초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한권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침 전역도 했고. 이렇게까지 판을 크게 벌리신다면 유진이만한 선택지가 없을 텐데요.”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판데모니움>의 장르가 장르다 보니. 내부적으론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판데모니움>.

이번에 온플러스에서 야심차게 준비하는 드라마다.

그 뜻은 악마들의 전당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악인들이 총집합하는 내용.

그들끼리의 협력, 암투, 배신 등.

온갖 자극적 키워드가 모두 들어간 작품이다.

<볼프강>으로서, 그리고 아이들의 영웅이자 모범으로서.

너무도 선한 이미지가 각인된 유진과는 언뜻 안 어울린다고 볼 수 있으리라.

“흠.”

뭔가 할 말은 많아 보이지만.

한권주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과묵한 그의 성격 때문이겠지.

애당초 본인이 박유진도 아닌데,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권주가 출연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돌아간 이후.

“근데 진짜 왜 박유진한테는 대본 안 보내셨어요?”

둘만 남은 상황.

후배가 고PD에게 물었다.

“박유진이 이런 장르 작품을 받겠냐.”

그러자 고PD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냔 얼굴로 되받아쳤다.

“예?”

“걔 히어로야, 히어로. 대한민국의 수호신, 아이들의 희망, 뭐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는 혼자 다 독차지했지. 심지어 그 군대에서도 표창을 싹 쓸어왔다고.”

박유진이 받고 말고와는 별개로.

그에 불어닥칠 후폭풍이 두려웠다.

박유진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존재였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히어로 그 자체.

성인이 되어서도 박유진이 맡은 역할은 <볼프강> 뿐.

그런 그에게 이런 피 튀기는 작품을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근데 박유진이 빌런을 안 해본 것도 아니잖아요. <볼프강> 3부작 내내 팬시도 맡았잖아요? 그리고 데뷔 초엔 싸이코패스 주인공 아역도 맡았고. 제목이 <리플레이>였나?”

“그때 박유진이랑 지금 박유진이 같아? 게다가 팬시는 어디까지나 사연 있는 악역이고, 볼프강의 아치에너미라는 상징성이 있잖아. 악인이라기 보단 매력적인 나쁜 놈 정도지. 게다가 히어로 영화 특성상 악행 수위가 그리 높지도 않고, 박유진이 볼프강까지 1인 2역으로 맡아서 팬시의 악행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느낌이잖아.”

후우.

고PD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 대본은? 나쁜 놈들끼리 피 튀기며 싸워. 그것도 아주 개싸움으로. 모략, 범죄, 마약, 살인. 난장판이지. 이런 영화에 그 히어로 박유진이 출연한다? 여러모로 난리가 나겠지.”

이번 <판데모니움>은 수위가 제법 높다.

여차하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도 각오하고 있을 정도.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의 경우 청불등급이 그리 타격이 강하지 않으니까.

“난리가 나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저희가 노리는 건 화제성이잖아요.”

“그래. 출연만 해준다면 그렇겠지. 근데 상식적으로 네가 박유진이면 받겠냐? 좋은 이미지 유지하고, 멋지고 좋은 역할만 맡아서 히어로로 평생 군림할 수 있는데?”

“그래도 대본 정도는 보내볼 수······.”

후배의 말에 고PD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새끼 이거.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이렇게 말하면 좀 알아듣고 넘어갈 것이지. 꼭 이렇게 말하게 만드네.”

“예?”

“우리 방송국 박유진한테 꽂을 돈 없어, 임마.”

그러자 후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하, 하지만. 이번에 원기옥 쏜다고 방송국에서 엄청 밀어준다면서요. 그런데 돈이 안 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너 드래곤볼 안 봤냐? 프리저는 원기옥 맞고 살아남았잖냐. 걔 몸값 할리우드 톱배우들 급이야. 영화 한 편만 출연해도 몇십, 아니. 몇백억을 벌 수도 있다고.”

<볼프강> 3편이 죄다 흥행에서 10억 달러를 돌파했고.

유진은 내내 볼프강과 팬시로 1인 2역을 맡았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박유진의 몸값이 폭등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옛날에 한국에서만 놀던 놈이 아니라고. 이제 걔 드라마에서 쓰려면 넷플러스 급은 되어야 할 거다. 재오랑 한권주? 둘 몸값 합쳐도 박유진보다 훨씬 싸게 먹혀. 박유진 쓰려면 편당 5억, 아니지. 어쩌면 10억을 미니멈으로 잡아야할지도 몰라.”

상상을 초월하는 단위.

후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넷플러스 탓에 경쟁에서 계속 밀리고 있는 온플러스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박유진의 출연료를 마련하겠나?

“진짜 할리우드 톱배우 급이네요.”

“급이 아니라, 톱배우 맞잖아. <볼프강>이 좀 대박 났냐? 그리고 박유진은 내가 잘 알아. 어려서부터 퍽 영악했지. <유별난 친구들> 촬영 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너무도 잘 아는 녀석이었어.”

10년이 훌쩍 지난 일임에도 아직 생생한 건.

그만큼 박유진은 데뷔 전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돈도 못 주고, 이미지에 도움도 안 돼. 그런데 박유진이 참여할 리가 있겠냐고. 그 녀석은 내가 다루기엔 너무 커버렸어. 괜히 박유진 출연시켰다가 팬들한테 욕먹고 싶지 않다. 박유진 팬덤이 좀 무서워야 말이지.”

그리 말하며 고PD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박유진과의 첫만남이 재생되었다.

“에휴.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몸집이 커져서는. 그래도 박유진 덕분에 송미연 작가가 정신 차리고, 작품도 꽤 대박 쳤는데.”

고PD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커피 다 마시면 들어와라. 또 회의해야하니까.”

*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리 말하더군.”

그 어마어마한 몸값의 소유자.

박유진은 한권주에게서 <판데모니움> 관련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PD님을 직접 만나봐야겠네요.”

고PD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유진이 자신의 작품에 아주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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