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내 말에 그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지팡이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허, 허허. 나이가 드니 귀가 안 좋아졌나. 헛것이 들리는구나.”
“잘 들은 거 가튼디. 빡빡이.”
“이놈!”
“머. 소리치면 다냐? 나도 소리칠 쑤 이꺼든!”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소리 질렀지만,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대머리가 무서울 게 뭐가 있나? 내가 알고 있는 대머리는 마감 스트레스가 심해 탈모가 온 작가들이다. 하루 열두 시간씩 의자에 앉아있어서 생존 근육밖에 남아있지 않은 부류니 딱히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허허……. 정말 신기한 놈일세. 이런 놈은 또 처음 보는군.”
그는 수염을 만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소리를 치는 게냐?”
난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이놈이 다가올 때부터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마기다.
인간계에서 이 정도의 마기를 품고 있는 부류는 단 하나.
“장로자나.”
장로.
그렇지 않아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너 1장로지? 영지에 내려와 이따는?”
“오호라. 마냥 어리숙한 아이는 아니라는 뜻이로구나.”
그는 씨익 웃으며 지팡이로 내 정수리를 툭 쳤다.
“한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버릇없이 군다는 말이냐?”
“머가 버릇업써. 나 암것도 안 했는데. 대머리를 대머리라 하지 구럼 머라 해.”
“나는 탈모지, 대머리가 아니란다. 구분을 제대로 했으면 하는군.”
난 으쓱 어깨를 올렸다. 장로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리아트 놈이 순순히 너를 내보냈을 리가 없고. 몰래 성을 빠져나온 것이냐?”
“말 안 해 주껀데.”
“몰래 나왔군.”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바깥은 어린 호문쿨루스들에게 꽤 위험한 곳이니 말이다.”
그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나는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쉽게 물러가 줄 생각이 없었다.
“시른데. 안 가껀데.”
그래서 장로의 바지를 주욱 잡아당겼다.
“아까 나 보구 월척이라 해짜나. 그건 너가 낚싯대를 두고 이썼던 거 아냐? 난 그 낚싯대를 잡은 거구.”
“날 만나기 위해 나왔다는 뜻이냐?”
“웅.”
사실 아니다.
오늘은 영지 관리가 잘 됐나 살피고 빙벽의 조사를 하기 위해 나온 거다.
1장로는 나중에 만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내가 돌아갈 필요가 있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놈과 대화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구러니까 얘기 쫌 해. 나 궁금한 거 많아꺼든.”
“하?”
장로는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럼 먼저 상대를 존중하는 법을 익혀야겠군. 새파랗게 어린 것이 기어오르는 꼴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니.”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 안에 담겨있는 기운은 절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는 아까 전보다 더더욱 짙은 마기를 내보였다. 마치 나를 억누르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이런 건 5장로를 만날 때에도 겪어봤다. 그놈도 나를 이렇게 누르려 했었지. 내가 기운을 흩뜨리니 놀랐었고.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다.
마기가 조금 더 짙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새파랗게 어린 마왕한테눈 복쫑하면서 내가 반말하는 게 실타는 거야? 그건 쫌 이상한데?”
“네놈!”
장로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네까짓 게 감히 마왕님께 빗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주변 땅이 진동할 만큼 마기가 담긴 고함이었다.
일반적인 호문쿨루스, 아니 중급 마족까지는 이 고함을 듣고 주저앉았으리라.
나 역시 뒷목에서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왜냐고?
‘이놈은 이런 걸 좋아해.’
전생에서 난 이놈을 먼발치에서 본 적 있다. 내가 최상급 정령술사였을 때, 갑자기 폭주해 날뛰던 바다의 정령을 가라앉히고자 서부 해안가에 간 적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이놈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정령술사 다섯을 죽였지.
‘제 마음에 안 든다고 죽였어.’
인자한 노인처럼 허허 웃으며 정령술사의 목을 긋던 이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살아남은 것은 나와 내 직속 후배 한 명뿐이다.
나는 조사를 위해 바다에 나가 있다가 뒤늦게 와 살았던 거고, 후배는…….
‘끝까지 개겼는데, 그 기개가 좋다고 살려 줬어.’
제게 주눅 들지 않는 인간을 높게 쳤던 거다. 겁먹는 놈들은 잔인하게 죽인 거고.
그러니까 뭐다?
‘나도 개긴다.’
쥐새끼 주제에 발톱을 세우는 걸 재미있어하겠지.
난 이 발톱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글쎄. 내가 마왕님만큼 댈지 안댈지 지금은 모르디.”
“뭐?”
“너가 날 도와주면 댈 쑤도 이꼬, 아닐 쑤도 이꼬.”
난 씨익 웃으며 그에게 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안 구래?”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참…… 희한한 놈이 태어났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마기가 거둬졌다.
이로써 난 이놈의 가치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따라와라. 음흉하게 웃지 말고.”
“기엽게 웃은 건뎅.”
“음흉하다.”
“쳇.”
내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데, 너무하네.
난 입을 삐죽삐죽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
1장로, 노딜 다이몬.
전대 마왕의 곁을 지킨 노고를 인정받아 다이몬 성을 하사받은 그는 명실상부한 마계의 2인자였다.
인간계로 내려와 마기가 약해졌다고 해도, 그는 웬만한 대마법사만큼의 마법은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마족들처럼 마왕성에서 힘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대륙으로 나와 곳곳을 돌아다니며 봉인을 풀 방법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마왕의 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지로 돌아온 그였지만 영지 관리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성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마족들은 ‘다이몬’을 경외시하니까. 저가 성에 들어가봤자 저를 무서워하는 놈들만 있을 텐데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한데…….
“오. 이거 머야?”
제집처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어린 호문쿨루스.
“쿠키인가? 마싯어!”
찬장에서 과자를 꺼내 오독오독 먹고 있다.
얘, 뭐지?
뭔데 나를 안 무서워하지?
아무리 호문쿨루스라 한들 피에 새겨진 ‘다이몬’의 두려움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본래라면 아까 전 거리에서 대화할 때에 이놈의 무릎이 무너졌어야 함이 맞다.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저를 두려워해야 함이 맞단 말이다. 다이몬이니까. 다이몬의 힘이 노딜에게 흐르고 있으니까.
‘신기한 놈이군.’
노딜은 기가 찬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에는 안 들어오구 밖에서 혼자 이러케 마싯는 거 먹고 이썻던 거야?”
세키나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쿠키를 다시 오독 깨물었다.
“근데 참 신기해. 마족은 음식을 안 머거도 대는데 이런 게 여기 왜 이쓸까?”
떠보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세키나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아까 전 노딜을 따라 거리를 걷고 여기까지 오는 데에 주변 인간들의 반응이 어땠는가? 내 눈치가 보여 가까이 오진 않았던 것 같지만, 눈인사를 하며 노딜을 향해 웃고 있었다.
인간이 마족을 향해 웃는다고?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의심이 들었던 중, 노딜의 집으로 와 찬장에 있는 과자와 같은 것들을 보니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노딜은 인간과 교류하고 있다고.
‘그런데, 왜?’
마족은 인간을 혐오한다.
이건 불변하는 사실이다.
한데 왜 인간과 교류를 하는 거지?
세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궁…….”
“으아! 노딜 님!”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인간이었다.
“헉!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막 들어와 버렸네요.”
찻잔을 쥐고 있던 노딜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평온함을 유지하고 인간을 돌아보았다.
“됐다. 무슨 일인가?”
“저, 그게…….”
인간은 힐끗거리며 세키나를 쳐다보았다. 세키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고, 노딜은 엷은 한숨을 뱉으며 대꾸했다.
“말하도록. 저놈은 상관없으니.”
“아, 네.”
노딜의 말을 들은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푹 고개를 숙였다.
“서부 상단에서 연락이 왔는데…… 포대당 은화 한 닢으로 넘겨주기로 했던 밀의 가격이 올랐다고요. 해서 돈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이는 그는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노딜은 다시 세키나를 돌아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서랍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가져가도록.”
툭, 던져진 꾸러미 안에는 금화가 가득하다.
“세상에…….”
인간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훌쩍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도움만 받아서 죄송합니다.”
노딜의 아주 잠깐 미소를 머금었다가 이내 휘발시켰다. 하지만 그 찰나를 세키나는 놓치지 않았다.
“손님이 있으니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은 노딜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하고, 세키나를 향해서도 꾸벅꾸벅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세키나가 노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인간한테 돈도 죠?”
“그래.”
노딜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상히 대꾸했다.
“왜 인간이랑 어울리눈 건데?”
노딜은 태연히 대꾸했다.
“인간을 좋아하니까.”
“…….”
세키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 좋아하는 놈이 그렇게 살육하고 다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