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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71)화 (72/149)

71화

캘빈은 마주 앉아 있는 유리엘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리엘은 촉망받는 신관답게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가슴까지 오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반묶음 한 채 샛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가만히 숨을 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캘빈은 끊임없이 읊조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방에 다른 이와 함께 있다니. 복면을 뚫고 더러움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그는 르카이츠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에게 먹칠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티려 했다.

‘나가고 싶다. 더러워. 가고 싶다. 더러워.’

그러나 그의 지독한 결벽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캘빈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때였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유리엘의 입술이 벌어진 건.

“고양이를 키우시나 봅니다.”

캘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유리엘은 살짝 뺨을 붉히며 두 손을 맞잡았다.

“북부성 신전에도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는데, 어느새 여섯 마리가 되었지요. 개중 두 마리는 새끼를 배고 있습니다. 이제 봄이 되면 새끼를 낳…… 아, 이런 얘, 얘기 시, 싫으시지요……. 죄, 죄송합니다…….”

캘빈은 유리엘이 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만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아니, 아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신관도 자신과 같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거다.

“새끼가 총 몇 마리입니까?”

“자, 잘은 모르지만 열 마리는 넘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새끼들을 저희 영지 신전에 데리고 오실 겁니까?”

캘빈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될까요……? 저,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유리엘의 수줍은 대답에 캘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고양이 더하기 고양이 더하기 고양이.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 아이들은 또 얼마나 귀엽고 예쁠까? 젤리는 무슨 색일까? 털의 감촉은 어떨까?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방금 전까지 이 공간이 더러워서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간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캘빈은 꾸벅 묵례를 했다.

“캘빈 모두아라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 유리엘 아, 아가토라고 합니다…….”

유리엘은 삽시간에 녹록해진 캘빈의 눈가를 보며 살짝 의아해했지만, 이내 편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낮게 웃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네!”

“이제 돌아가신다고요.”

“네, 네!”

“성으로 모시지 않은 이유는 신관님께서 저희를 불편해하실까 싶어 그런 겁니다. 부디 서운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아, 아닙니다! 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리엘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신전 부지를 찾고 계셨다고 했지요.”

캘빈은 가지고 왔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 유리엘에게로 쭉 밀었다.

“저희가 몇 군데 후보를 추려보았습니다.”

“이, 이건…….”

“개인적으로 세 번째 후보를 추천 드립니다. 거주지구와도 가까운 곳이라 신도를 모으기 더 편하실 겁니다.”

이 신관이 변절하게 만들어야 한다. 신을 배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채찍을 주었으니, 이제 당근을 내밀 때가 되었다.

“백작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캘빈은 그 어떤 때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엘의 눈가가 살짝 떨린다.

“가, 감사합니다…….”

당근을 받아든 유리엘을 보며 캘빈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례를 저질렀던 놈은 용서해 주십시오.”

“네, 네?”

무례를 저지른 놈이라면 아마 자신을 공격한 이를 말하는 걸 테다. 월계수 관 형태의 이어 커프를 차고 있는 유리엘의 귀가 쫑긋 섰다.

“그놈이, 좀, 정신이 안 좋습니다. 아픈 놈이에요.”

“……아!”

졸지에 정신이 아픈 이가 되어 버린 아서였지만, 알 바인가. 어차피 그놈은 사고 친 자식이니 내가 뭘 하든 입 닥치고 있어야 했다. 캘빈은 씨익 웃었다.

“원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또 그날 유독 병증이 도져서요.”

“그, 그렇군요!”

“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예의 바른 그 말에, 유리엘은 협곡에서의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안정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계속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신을 의심하고 교황님을 원망할 만큼 마음이 아팠는데.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다니.

이들의 호의 덕분일까? 이들의 친절 덕분일까?

-당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건 저예요.

문득 그 말을 떠올린 유리엘은 쓰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저,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그, 그리고 영애를 위협했던 걸 다,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흔들어 놓았으면 됐겠지.

할 말도 끝났으니 슬슬 자리를 떠나도 괜찮았다.

하지만 캘빈은 지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더러움도 잊고 있는 바로 지금.

“그런데 고양이는 무슨 무늬인가요?”

조금 더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니까.

이건 다 친목 도모를 위해서다.

결코 내 사리사욕 채우는 게 아니야.

***

“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뎨송합니다!”

어느새 깨어난 인간들은 무릎을 꿇고 열심히 머리를 바닥에 쿵쿵 박고 있었다.

그 괴기한 모습에 쌍둥이와 드한은 살짝 겁에 질렸지만, 그걸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키나는 멀쩡했다.

“아니, 잘몬한 거 알겠눈데. 구니까 쟤를 왜 끌고 갈라 했냐구.”

“그건 대장이 압니다!”

“대장은 아까 도망갔습니다! 저희는 모릅니다!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아…….”

세키나는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며 송곳을 움켜쥐었다.

“너네 눈 한쪽 정도는 업써도 대지 않나?”

“으아악!”

“한쪽만 빼 보쟈. 어케 대는지.”

“자, 잠깐만요!”

저 아기는 진짜 한다면 하는 애다. 실제로 손등이 뚫려서 울고 있는 놈이 있지 않은가. 자기는 저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저, 저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깨 너머로 주워들었던 말을 빽 내질렀다.

“그, 저 사람이……!”

“내가 암살 길드 부길드장 출신이라 그래.”

그런 남자의 말을 가로챈 건 어느새 깨어난 한이었다.

“하암. 잘 잤다.”

한은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쌍둥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너네 꼴이 왜 그래? 싸웠냐?”

쌍둥이는 씨익 웃으며 으쓱였다.

“싸웠다!”

“널 지켰다.”

“하?”

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 꼬맹이들이 뭘 할 줄 안다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도망쳐서 경비대를 부르지, 뭘 싸워.”

“아아! 머리 만지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흐뭇해하는 미소를 짓고 있다.

세키나는 그런 한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 됐고.”

한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날 끌고 가려 했던 놈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말린 거고.

아이들은 저놈들을 고문해서 정보를 얻으려 한 거겠지.

그러니까,

“아가야. 이놈들 다 오빠한테 넘겨주면 안 될까? 오빠가 처리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자신이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런 험악한 광경은 어린아이들에게 결코 보여주면 안 되는 유의 일이었으니까.

세키나는 그런 말을 하는 한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어쩐지 굉장히 낯설고 또 섬뜩해, 한은 살짝 주춤거렸다.

절대 저 아이가 들고 있는 송곳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진짜로.

“너…….”

이때, 세키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한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돼서.

“오빠라 하기엔 나이가 넘 만치 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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