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세, 세키나 님. 왜,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세키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 주세요. 네?”
세키나는 그런 아서의 손등을 토닥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율리안한테 날 죽이라고 하는 쪽지가 갔대여.”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율리안이 무시하니까 율리안 친구가 주겄대여.”
“……세키나 님.”
“또 무시하니까 교수가 죽고, 선배가 죽고, 모두가 죽었대여. 그래서 그놈이 날 죽이려고 와써여.”
세키나는 르카이츠를 직시했다.
“이거. 먼지 알고 있져.”
르카이츠는 눈을 감고 길게 버텼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흑마법.”
하, 그의 잇새에서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놈이 기어코 흑마법에까지 손을 댄 건가. 하하. 우습군. 신의 대리라 자청했던 놈들이……!”
이건 예상외의 일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과거 천마 전쟁 때에는 마족이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흑마법이라는 고대의 마법이 낀 이상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패배할 것이다. 그만큼 흑마법은 악독하고 사악한 마법이었으니까.
어쩌면, 나의 힘도 그놈이 봉인한 것이 아닐까?
르카이츠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올랐다.
‘빌어먹을.’
완전히 놀아났군.
그는 혀끝에 맺힌 욕설을 짓씹으며 다시 세키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흑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
물론 세키나는 흑마법을 쓸 수 있지만, 알고 있지만, 그걸 지금 밝힐 생각은 없다. 그리고 웬만하면 흑마법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들었어여.”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누구에게 들었나?”
“말 몬 해여. 금언 마법 걸려 있어서여.”
르카이츠는 미간을 좁혔다.
금언 마법으로 맹세한 이야기는 배를 가른다고 해도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흑마법이라니요.”
넋을 놓고 있던 아서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됩니다. 정말…….”
그는 이마를 짚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드득,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율리안이.”
세키나는 그런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와달라 하고 시펐대여. 근데 마족은 어짜피 우리 신경 안 쓴다구, 또 인간이 죽어봤짜 잘 된 일이라구 낄낄거릴 거라구, 그래서 말 못 했대여.”
“그건……!”
“그러니까 다시 물어 볼게여, 보쓰.”
아서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세키나의 말이 더 빨랐다.
“참을 거예여?”
세키나의 푸른 눈동자에 르카이츠가 담겼다.
“우리가 죽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예여?”
그 인영은 어쩐지 흔들리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
오래전부터, 르카이츠는 마왕이었다.
처음 이 자리에 올랐을 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 세기가 넘어가는 때의 일이었으니까.
언제나 싸운 기억밖에 남아있질 않는다.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
제 자리를 탐내는 이들을 죽이고,
천마 전쟁을 치르고,
혼돈으로 범벅이 된 마계를 정리하고,
힘을 빼앗기고,
마물과 싸우고…….
눈을 감으면 피 튀기는 전장이 그려진다.
눈을 떠도 피 튀기는 전장이 보인다.
그는 언제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해도 괜찮았다.
그는 마계의 왕. 혼돈의 지배자. 유일무이한 절대자.
그렇기에 모든 것을 짊어져야 했다. 모든 것을 지켜야 했다. 지키고, 또 지키고, 언제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역시 지키고.
그렇게 오랜 시간 그는 싸워왔고, 지켜왔다.
-마왕님. 선대께 물려받은 것이 아닌, 마왕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것이 있었습니까?
그런 그에게 노딜이 돌멩이를 던졌다.
-이제는 진짜 마왕님의 것을 만들 때입니다.
수면에 파동이 생긴다.
파동이 일고, 일고, 또 일어서 가장자리까지 밀려온다.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해 싸워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선택에 의해 지켜 본 적이 있는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이제껏 무엇을 위하여 살았지?
***
르카이츠는 이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침전된 눈동자에는 정리된 생각이 담겨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굳게 닫혀있던 르카이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니.”
그는 세키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도 엄연한 마계의 일원이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의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
“그 대답을 기다려써여.”
세키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마왕님…….”
아서는 옆에서 눈물을 짜내고 있지만, 지금 이런 거에 감동할 때가 아니다. 더 감동할만한 거리가 남아있으니까.
후우. 세키나는 심호흡을 했다.
“저, 그동안 거짓말한 게 이써여.”
르카이츠의 고개가 까딱였다.
“이거 숨겨따고 혼내지 말기.”
“…….”
아서가 끼어들었다.
“일단 들어볼게요.”
“들어보지.”
“안대여. 약속해 조. 그러다 혼낼 거 알아.”
대체 뭐길래 이러는 걸까.
어쩐지 생각 이상의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르카이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하겠다.”
“넹.”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아까 전, 율리안과 있었을 때.
세키나는 율리안의 손을 잡았고, 율리안에게서 ‘마왕의 힘’을 전달받았다. 그 역시 변절을 한 것이리라.
그리고 방에서 나와 쌍둥이를 만났다. 메르데스가 세키나를 안아주었고, 그때에 또 ‘마왕의 힘’을 전달받았다. 아마도 메르데스는 변절이 아닌 인간을 좋아하게 돼서 힘이 빠져나온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세키나는 ‘마왕의 힘’을 꽤 많이 모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 마물을 다룰 수 이써여.”
소환술을 익혔다고.
촤아아-!
세키나의 손끝을 따라 새까만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세키나 주변에 커다란 원형을 그렸고, 술식을 새겼다. 쿠구궁! 소환진의 한가운데에서 새까만 것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꽤 크져?”
쿵! 쿠궁!
커다란 방을 꽉 채울 만큼 엄청난 크기의 마물.
하지만 르카이츠와 아서는 알고 있다.
마계의 기준에서 저 마물은 보통 크기의 마물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글구.”
설마?
“마계에도 갈 쑤 이써여.”
“맙소사.”
세키나가 펼쳐서 보여주는 마계의 정경을 보자마자 아서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마계라니.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공간인가?
태초부터 살아왔고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나의 고향.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 이거 거짓말한 이유는 간단해여.”
세키나는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볼짱 다 보면 쫓겨날 거 같아꺼든.”
“세키나 님. 왜 그런 생각을!”
“아써는 안 그래두 딴 넘들이 그러니까.”
르카이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세키나를 응시했다.
“근데 지금 거짓말이라구 말하는 이유도 간단해여.”
세키나는 그런 르카이츠와 시선을 맞댄 채 입을 열었다.
“소중한 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아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중한 것.
다시는 갖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
흑마법에 의해서건, 루치페르에 의해서건, 뭐에 의해서건, 눈 깜빡할 새에 사라질 수 있는 게 바로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키나는 이것들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백여 년 만에 겨우 가지게 된, 나의 것이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생겼는데, 또 잃어버릴 순 없어요.”
세키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 아서를 뒤로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왕님 힘, 제가 찾아 주께여.”
이제 숨지 않을 거다.
“그니까 나 대신 그 새끼 주겨 조요.”
메인 퀘스트,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