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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81)화 (82/149)

81화

중앙성 신전.

그곳의 가장 깊숙하고, 가장 화려하며 가장 넓은 공간.

그 공간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이가 있다.

마치 새하얀 눈밭처럼 고귀하고 순수해 보이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이.

“흐으음.”

루치페르 아가토.

그는 허공에 띄운 수정구를 응시하며 나지막한 비음을 뱉었다.

“재미가 없네.”

수정구 안에는 아카데미에서 뛰쳐나가는 율리안이 담겨있다.

그 뒤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족의 거처까지는 자신의 힘이 닿지 않으니까.

“더 난리를 쳐야 했었는데.”

호문쿨루스 주제에 인간을 좋아하고 있는 게 퍽 우스워서 괴롭힐 맛이 났다.

주변 인간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엉엉 우는 꼴이란!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 볼 수가 없어졌으니 아쉬워졌다.

루치페르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결박된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인간이 있다.

“추기경. 정신 좀 차렸어?”

그 인간은 바로 추기경.

교황 다음가는 권력자인 존재.

하지만 그런 위대한 존재도 루치페르의 앞에서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너 일어나면 내가 꼭 묻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루치페르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추기경에게 다가간다. 그가 입고 있는 신관복이 낭창낭창하게 흔들린다. 신관복 틈으로 보이는 새하얀 살결은 지극히도 금욕적이라, 과연 모든 존재를 매료시킨다는 천족답다.

루치페르는 새하얀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 새까맣게 변해 있는 머리카락이 있다. 루치페르는 다소 앞으로 쏠린 검은 머리카락을 베베 손가락에 꼬며 고개를 까딱였다.

“왜 네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있을까? 응?”

탁, 하고 루치페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으읍! 읍!”

그러자마자 허공에 아이 여섯 명이 둥둥 떠올랐다. 모두 목과 몸이 분리된 상태다.

“신관은 평생 수절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응? 정조를 지켰어야지, 응? 왜 애가 여섯이나 돼? 응?”

루치페르는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오직 신만 섬겨야 할 새끼가.”

“으읍!”

“이딴 식으로 아랫도리 놀리고 다니니까.”

“읍! 읍!”

“너네가 이 꼴이 된 거잖아. 응?”

“으으읍!”

추기경의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밟은 루치페르는 후우, 한숨을 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난 X발, 진짜 잘해 보려고 했는데.”

그는 다시 기절한 추기경의 등을 꽉 짓밟았다.

“우리가 내쫓긴 건 다 너네 같은 인간들 때문이야. 알지? 응? 알잖아. 너네가 X같이 구니까 우리까지 이렇게 된 거잖아.”

루치페르는 기절한 추기경과 죽은 아이들, 그리고 또 죽어 있는 신관들을 한 바퀴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려고. 모두 없애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야.”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띠링!

[시나리오가 만들어집니다.]

“내가 신이 됐으니까.”

루치페르는 신전이 떠나가라 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은 죽었고,

인간 껍데기를 쓰고 있는 이들밖에 없었으니까.

***

아. 너무 흥분했었네.

세키나는 살짝 메이는 목을 가다듬으며 잔기침을 뱉었다.

율리안의 사정을 들으니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만 몰입하고 말았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이전 생에서, 나를 협박하고자 하던 무리가 가족을 죽이고 친구라 불릴 법한 지인을 죽였던 일이 있었다. 그들에게 크나큰 애정이 없던 나였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던 나였지만 당시에 너무나도 괴로웠었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고, 나만 없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가정하며 아파했었다.

그래서 종탑에서 떨어지기도 했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았다. 돌이켜 보면 그건 ‘용사의 연인’으로서 죽지 않은 거라서 산 거였지만, 글쎄. 난 정말 죽고 싶었는데.

어쨌거나, 그런 일이 있었다 보니 세키나는 율리안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그래서 더욱더 분했다.

세키나는 그래도 ‘다시 태어나는’ 선택지가 있었다. 거기다 더해 ‘날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아니다.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없고, 사랑을 받았으며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루치페르라고 했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놈의 이름은 시스템이 준 설정집에도 없었다.

말인즉슨,

‘비하인드 스토리의 인물.’

고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건 하나.

‘그놈이 다른 시스템이야.’

백 퍼센트 확신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하지만 그놈이 시스템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놈을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으니까. 

“후우.”

세키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눈앞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마왕, 르카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르카이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달이 높게 떠 있는 시간.

늦은 밤이다.

……아이는 자야 하지 않나?

문득 호문쿨루스의 생체리듬이 궁금해졌지만, 그는 애써 상념을 지운 뒤 제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세키나를 쳐다보았다.

이 호문쿨루스는 어쩐지 지쳐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목덜미에서부터 배까지 피가 찐득하게 눌러 붙어있는 셔츠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파리하게 지친 안색이 그다음으로 보였으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마지막으로 관찰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호문쿨루스에게 관여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닌 존재.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존재.

버릴 존재.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르카이츠는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느냐?”

르카이츠는 부러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호문쿨루스들끼리의 다툼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제게 하소연을 하러 온 것이라면, 혹은 싸움을 말려달라고 온 것이라면 돌아가라는 뜻.

아무리 호문쿨루스라 한들, 아무리 쓰고 버릴 패라 한들 세상을 살게 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르카이츠는 단호했다.

“돌아가라.”

그 말에, 세키나의 잇새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웃는다고?

르카이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쓰. 제가 고작 그런 걸로 보쓰 만나러 올 꺼 같아여?”

세키나는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며 눈을 치켜떴다.

“루치페르.”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씩 힘을 줘가며 말했다.

“천족인가 나발인가 하는 놈. 보쓰는 알고 있져.”

르카이츠의 숨이 일순간 멎었다.

그놈을 어떻게?

아니, 그놈을 왜?

순간 던전에서 발굴한 보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천마 전쟁에서 분실했던 창. 그것이 돌아왔을 때에 르카이츠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빌어먹을 천족 놈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게 무슨…….”

“세키나 님!”

하지만 그런 르카이츠의 말을 막은 게 있었다.

바로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온 아서였다.

“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래요! 뭐야!”

아서는 세키나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서, 설마 마, 마왕님이 이렇게……?”

그는 르카이츠를 원망하듯이 쳐다보았고, 김이 빠진 르카이츠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서를 노려보았다.

“미쳤나?”

“그럼 세키나 님이 왜 이런 거지꼴이에요! 어디 봐봐요. 안 다쳤어요? 죽은 건 아니죠? 아니, 장로님이 불러서 다녀왔더니 방이 아주 개판이고 피가 난리가 나고 막! 뭐예요!”

난리는 아서 네가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좀 꺼…… 아니, 비켜 바.”

갑자기 아서가 끼어들어서 왈칵 짜증이 났지만, 세키나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르카이츠를 응시했다.

“저 그 루치페른지 먼지 하는 놈 때문에 디질 뻔 해써여. 율리안도 디질 뻔했고요.”

르카이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것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에여? 전 이대로 못 참겠거든여.”

세키나는 그런 르카이츠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부라렸다.

“보쓰는 참을 거예여?”

“…….”

“우리가 진짜 마족이 아니니까?”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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