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걸레질을 끝마친 드한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북부성 신전으로 돌아온 그는 전과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기도를 하고, 청소를 하고, 기도를 하고, 성전을 읽고, 청소를 하고, 기도를 하고…….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이다.
다만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유리엘의 태도였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오랜 시간 기도를 했던 유리엘이었는데, 백작령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기도 시간도 굉장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아침 기도를 제외하고 기도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독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드한은 유리엘이 걱정스러웠다.
“신관님!”
그래서 일부러 유리엘이 있는 곳으로 왔다. 드한은 유리엘의 소매를 꼬옥 잡았다.
“어, 드한……! 여, 여긴 어쩐 일이야? 저, 점심시간인데……?”
“신관님이 식사를 하지 않고 계신 것 같아서요. 빵을 좀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자, 잘 먹을게.”
드한은 빵을 건네받는 유리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에 비해 혈색이 어둡고, 눈빛도 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 어?”
“최근 신관님이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아.”
유리엘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드한밖에 없다. 저가 기도실에 나가건 나가지 않건 상관하지 않는 신관들, 은근하게 무시하는 신관들……. 그 틈에서 유리엘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그냥…….”
그래서 드한의 다정한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툭 터놓게 되었다.
“교, 교황님과 여, 연락도 잘 안 되고……. 주, 중앙성 신전에서도 이, 이상한 말이…… 아, 아니야. 이런 말을 해, 해서 뭐 해. 미, 미안해…….”
그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눈치 빠른 드한은 이상함을 바로 알아챘다.
“중앙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유리엘은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잘 모르겠는데…… 느, 느낌이 안 좋아서……. 아, 아냐…… 괜찮아……! 우,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
드한은 유리엘을 빤히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유리엘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 보니 쉽게 넘길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자신은 어린아이일 뿐이고, 유리엘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드한은 스스로의 무력감을 짓씹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다, 다음 주에 백작령에 가, 가기로 했어…… 와, 완공이 될 때까지 쓸 수 있는 이, 임시 거처가 있어서……. 너, 너도 같이 가니까…… 나는 좋아……!”
다이몬 백작가의 사람들을 또 보아야 한다는 거구나.
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으, 응…… 그런데…….”
율리안은 뺨을 붉히며 슬그머니 물었다.
“넌 그 사람들, 어, 어떤 거 같아……?”
“네?”
“그, 그냥…… 새, 생각보다 엄청 나,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 않아서…….”
분명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무서워하고, 의심하던 유리엘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드한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을 하려 했다.
-내 세계를 네가 가져쓰면 조케써.
라는 세키나의 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거, 고백이었나.
나를 좋아하는 건가, 설마?
드한의 얼굴에 살짝 열이 올라왔다.
“그…….”
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일단 저도 지켜보겠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나쁘게 평가하면 안 되니까…….
드한은 애써 그렇게 자신의 설렘을 부정했다.
***
결국 빙벽에 가는 건 세키나와 율리안, 디디에, 그리고 고양이로 결정되었다.
율리안은 마법 능력이 뛰어나 데리고 가고자 한 건데, 디디에가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울어 버리겠다며 생난리를 쳐서 어쩔 수 없이 포함시켰다.
뭐, 율리안에게 설득을 시켜서 디디에에게서 ‘마왕의 힘’을 뽑아 온다면 이득이니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넌 왜 따라오는 거냐.’
고양이는 대체 왜.
세키나는 제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사념을 흘려보냈다.
-캘빈 놈이 날 씻기려 했다!
‘그래. 좀 씻어라. 냄새난다.’
-이 몸이 얼마나 깨끗한 상태인데! 냄새라니! 그럴 리 없다! 캘빈 놈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그놈은 귀찮아! 싫어!
하아. 씻기 싫다고 생떼 부리는 고양이라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세키나. 우리 이제 가는 거야?”
“가는 거야?”
율리안과 디디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세키나는 망토의 매듭을 꽉 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아써는 먼저 가 있눈다고 해써. 대충 정리대쓸 테니까 가쟈.”
“가서 우리가 뭘 하면 되는 거야?”
“되는 거야?”
“일다는 너히가 할 일은 없꾸, 구냥 무쓴 일 생기면 날 도와주면 대. 혹시나 시퍼서 같이 가눈 거니까.”
“무슨 일?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있어?”
“아직은 말 할 만한 게 없눈데…… 디디에. 너 왜 자꾸 율리안 말 따라 해?”
세키나는 율리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디디에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디디에는 씨익 웃으며 세키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같은 내용으로 되묻는 게 호감도를 올리는 데에 좋대. 상대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걸 나타내는 거니까.”
“……구런 쓸데업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최강 악역 영애지만 주인공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게 되었습니다만’에서 나왔어!”
“…….”
아우. 하마터면 오타쿠라 말할 뻔했네.
세키나는 고개를 두어 번 저은 후 아서가 만들어 준 텔레포트 진에 발을 넣었다.
“빙벽으루 연결대는 텔레포트 진이야. 요기다 마력을 넣으면 대.”
“아서 경이 만든 거야?”
“웅. 아까 만들구 나가써.”
“대단한걸……. 아서 경의 능력은 이쪽이 아닐 텐데도 굉장히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
“잘 만들었어!”
세키나는 디디에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율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요거 발동시켜 조.”
“네가 안 하고?”
“난 마력 아껴야 대.”
그럼 나는……?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율리안은 차마 말을 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세키나에게 잘해 주어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압박감이 있었으니까.
“그럼 지금 할게. 다들 모여.”
“모여!”
세키나는 고양이를 꼬옥 끌어안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게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고 있는 율리안,
그런 율리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하는 디디에,
꼬리를 팍팍 움직이며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계속 드러내고 있는 고양이.
이 무리, 정말 괜찮은 걸까.
어쩐지 걱정이 됐다.
***
파앗!
텔레포트 마법으로 방출된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렸다. 세키나는 아직 잔상이 남아 있어 따끔거리는 눈을 벅벅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족들이 훈련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없지?”
율리안의 말대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제가 그놈들을 뺑이 돌게 시킬 수 있다는 거?
-토 나올 정도로 훈련시켜서 세키나 님에게 아예 신경을 못 쓰게 만드는 거?
-아예 뒷목 쳐서 기절시켜 버리는 거?
아서는 과연 그 셋 중에 뭘 했을까.
뭘 했기에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걸까.
세키나는 섬찟함을 느끼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세키나. 아까 전에 마물 사체 뒤지러 가는 거라고 안 했어?”
“안 했어?”
“마자. 사체 보려구 온 거야.”
“으음.”
율리안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마물 사체가 빙벽에 있다는 거구나…… 그런데 왜? 왜 여기 있지?”
“있지?”
내가 게임 고인물이라서 알고 있는 거야,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세키나는 으쓱 어깨만 올렸다.
“나도 몬라. 들은 거라서.”
그리고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일딴 여기 이써 바. 난 고양이랑 가따 오께. 혹씨 먼일 이쓸 거 같으면 소리 지를 테니까 와야 대. 아라찌?”
“같이 안 가도 괜찮겠어?”
“괜찮겠어?”
“웅. 혼자 확인하눈 게 조을 거 가타서. 글고 디디에 너 쫌 닥쳐쓰면 조케따.”
“싫은데! 이렇게 하고 싶은데!”
“…….”
세키나는 디디에의 얼굴을 덮고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율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어쩌다 저런 거에 걸려 가지곤…….
“힘내, 율리안.”
“……으응!”
율리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율리안의 팔을 꼬옥 붙잡고 있는 디디에는 여러모로 참 대단했다.
“율리안 님! 여기 절벽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참 예뻐요! 저쪽으로 같이 가 볼까요?”
“아, 아니. 나는 다른 마족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데.”
“싶은데! 저도요!”
“…….”
빨리 튀자.
세키나는 진저리를 치며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