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곳에는 뒤집힌 마차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보통 북부에는 통행하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상단을 빼면 거의 고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딸랑 마차 한 대가 전복돼 있다니?
세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게 뜬금업네. 왜 저러고 있대.”
“안에 인간이 있는 거 같은데.”
“지켜 줘야 하나?!”
파르데스가 물었고 메르데스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아무래도 메르데스는 지킨다는 단어에 꽂힌 것 같았다. 툭하면 지킨다, 지켜야 한다, 이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흐음.”
창문에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아서가 말했다.
“신전의 마차입니다. 안에 있는 건…… 인간 두 명. 둘 다 정신을 잃었네요.”
“신전?”
메르데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안 지킬래! 지지!”
“그냥 지나가는 게 좋겠어.”
아무리 인간과 가까워졌어도 신전과 관련되어 있는 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모양이다. 세키나 역시 루치페르가 정복한 신전에 유감스러운 마음이 있기에 그들의 태도를 백번 이해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인명을 구해야 한다는 숭고한 인식 때문이 아니라,
‘뭔가 이상해.’
신전에서 둘만 빠져나와 북부를 나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북부성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중앙성 신전에서 저들을 불렀다는 것일 텐데.
‘그럼 안 봐도 누군지 알겠네.’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구하는 게 조케써. 저러케 두다간 얼어 디질 테니까.”
“으윽…… 그래도 신관 놈들인데? 신관 놈들은 정말 죽어도 싫은데?”
“멜데스. 네가 잘 모르는 거 가튼데.”
세키나는 기겁하는 메르데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원래 적은 곁에 두는 게 쪼은 거야.”
“어, 왜?”
“구래야 뒤통수를 칠 쑤 이쓰니까.”
“아……!”
메르데스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키나. 지짜 마족 같다!”
“그러게. 순간 리아트 경인 줄 알았어.”
“저는 조금 감동했습니다, 세키나 님.”
……나 인간이야, 새끼들아.
꿍얼거리고 있던 때 세키나의 허벅지에 누워 있던 고양이, 세라가 상념을 흘려보냈다.
-마족에게 마족 같다 칭찬받은 기분이 어떠하느냐?
‘시끄러워.’
-네가 인간임을 저놈들이 알게 되면 어떨지 퍽 궁금하구나.
‘시끄럽다 했다.’
세키나는 세라를 옆으로 치운 후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구해 주자.”
아서가 밖으로 나갔고, 얼마 가지 않아 세키나가 예상했던 인물 둘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
왜 이렇게 된 거지?
유리엘은 흰 눈으로 뒤덮여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교황 성하의 부름을 받고 드한과 함께 북부성 신전을 나온 그였다.
물론 그가 신전을 나올 때 다른 신관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안나는,
-저희를 버리고 중앙으로 가신다는 건가요? 저는 유리엘 님만 믿고 여기까지 온 건데!
-어떻게 저희를 두고 떠날 수 있어요!
라며 엄청난 화를 토해냈었다.
유리엘은 도통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북부성 신전의 모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교황 성하의 지고한 부름을 받고 떠나는 입장이다.
저는 교황 성하의 말을 거절할 수 없고, 반드시 그의 말에 따라야 한다.
한데, 왜?
왜 내 앞을 막으려 드는 것인가?
왜 내 앞길이 불행하길 바라는 것인가?
같은 신을 모시고 있는 신도이면서.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기도를 올리는 고귀한 신관들이면서. 대체 왜?
하지만 이런 의문을 굳이 더 길게 가지고 가지 않으려 했다.
어쨌거나 그는 드한을 중앙성 신전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어야 했고, 그 임무만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거였으니.
그런데,
-신관님!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전복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유리엘은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드한을 마차에서 빼냈고, 그다음에 마부의 안위를 살폈다.
그런데 마부가 없었다. 마부뿐 아니라 말도 사라져 있었다. 이 하얗디하얀 세상에는 그저 뒤집어 엎어진 마차만이 존재할 뿐.
그때서야 유리엘은 깨달았다.
북부성 신전에서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신관들은 인간이었다.
제 마음에 서려 있는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는 미천한 인간일 뿐이란 말이다.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드한…… 정신 차려봐…….
유리엘은 차게 식은 드한의 몸을 꽉 감싸 안아 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차가 뒤집히면서 이리저리 크게 부딪힌 탓에 온몸이 성하지 않다. 피를 너무 흘려 머리가 핑 돌았다. 이대로라면 피 냄새를 맡고 마물들이 몰려오리라.
그럼 우리는 죽게 되겠지.
죽을 수 없다.
신의 뜻을 따르는 사자로서, 교황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로 죽을 수는 없다. 이 몸이 부서지더라도 뜻을 따라야 하는…… 아니, 아니.
그게 다인가?
지금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이, 살고 싶다는 욕심이, 과연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만일까? 이것뿐일까?
신의 뜻을 따르다 죽어 나간 신관들이 떠오른다.
교황의 명령을 따르다 사라져 간 성기사들이 떠오른다.
-죽는 게 두려우냐?
-신의 곁으로 가는 것이 겁나느냐?
나는, 나는……!
“……요.”
죽고 싶지 않다.
“……기요.”
살고 싶다.
“저기요!”
유리엘의 눈이 번뜩 떠졌다.
그러자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 살아 계시네요.”
바로 다이몬 백작가의 시종.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인물이자, 세키나라는 가장 어린 영애의 곁을 지키는 이.
유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에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그쪽은 인간치고 몸이 정말 튼튼하네요. 쉽게 안 죽어.”
“그, 그……! 여, 여긴 어떻게……! 으윽!”
“일단 구해드릴게요. 저희 세키나 님이 명령하신 거라.”
그 말을 듣자마자 아서가 대체 여기에는 왜 있는지, 어떻게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살고 싶다는 욕망만 뒤섞였을 뿐.
“눈 좀 감고 있으세요. 이젠 안전하니까.”
자신과 드한을 한꺼번에 안아 드는 아서의 손길을 느끼며, 유리엘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래.
신의 뜻을 지켜야 하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숭고한 핑계밖에 되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데에 이유는 없다.
이 생명의 불꽃을 더 오래 태우고 싶을 뿐이다.
***
온열 마법을 새긴 아티팩트가 마차 안에 있긴 하지만, 드한과 유리엘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치료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차 안에 있는 인물 중 그 누구도 치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율리안이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하나같이 공격형 마법만 쓸 줄 아는 족속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다음 마을로 가서 이들을 치료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 상태다.
덜커덩, 하고 마차가 흔들렸다.
“얘 주근 거 아냐?”
세키나는 마차 바닥에 뒹굴고 있는 드한을 가리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죽었겠지. 하지만 얘는 평균이랑 거리가 멀어.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튼튼해.”
파르데스는 대답하며 눈을 반짝였다.
“해부해 보고 싶다…….”
미친놈.
세키나는 진저리를 치며 혀를 찼다. 그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유리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걔는 갠차나?”
“자기를 죽이려 했던 놈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걸 보니 안 괜찮아 보이기는 합니다.”
아서는 제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는 유리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꽤 심보가 고약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세키나는 그럼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넘들이 왜 거기서 그러구 이썼는지를 모르겠네.”
이상하지 않은가.
신전 마차는 어느 정도의 마법이 둘려 있어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도 안 할 텐데 전복이 됐다고?
뭔가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세키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 보니까 마부도 말도 없었어. 발자국을 보니까 도망간 거 같았어!”
메르데스의 외침에 세키나와 파르데스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너는 언제 그런 걸 확인했어?”
“형아. 나는 검사야. 검사라면 응당 도망치는 적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하는 법!”
“오…….”
파르데스는 순수한 감탄을 뱉으며 세키나에게 슬쩍 몸을 기울였다.
“메르데스가 나름 머리가 생긴 것 같아.”
“나두 글케 생각해. 머지. 갑짜기 바뀌면 주글 때가 댄 거라던데.”
“죽나?”
“둘 다 진짜!”
씩씩거리는 메르데스를 보고 킥킥 웃던 세키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어쨌둔 깨어나면 물어볼 게 생긴 거네. 내 짐작으로눈 얘네가 북부성 신전에서 팽당한 거 가튼데…….”
씨익. 세키나는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구럼 우리한테 더 조은 게 아니게써?”
신전에서 버림받은 신관들이라.
이 얼마나 이용하기 좋은 인물이겠나.
세키나는 자신의 앞길에 빛이 드리워지는 것 같아 기쁜 마음을 가졌다.
바로 그때였다.
“으, 음…… 쿨럭!”
드한이 몸을 들썩거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오! 일어났다!”
“얘 뭐야? 인간 맞아?”
쌍둥이는 바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드한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 더 몸을 뒤틀며 기침을 뱉던 드한은 간신히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곳이 마차 안이며, 자신들이 구출되었음을 바로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해 준 존재는 또 다이몬 백작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도.
“……세키나 님.”
드한은 멍한 표정으로 세키나를 올려다보았다.
세키나를 만나고 싶었다.
보고 싶다거나 하는 성애의 감정이 아니다.
그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를, 알고 계시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