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느 날부터, 드한은 잠에 들면 이상한 꿈을 꿨다.
처음에는 꿈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면 ‘기분 나쁜 꿈을 꿨어.’라고 찜찜한 기분을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꿈은 또렷해졌다. 다시 말해, ‘꿈이 아닐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짙어졌다는 말이다.
꿈에서 드한은 지금의 그가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한 듯한 멀쑥한 청년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성기사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한 여자다.
그 여자는 매 꿈마다 바뀌었다. 어느 때는 가련한 귀족 영애가, 어느 때는 굳건한 검사가, 어느 때는 위대한 마법사, 어느 때는 끔찍한 실험에 동원된 불쌍한 제물이…….
그렇게 여자는 언제나 바뀌었지만, 드한은 그녀가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직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드한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케 이쓰니까 옛날 생각나네.
-너는 기억 몬하겠찌만. 내가 기억하니까 대써.
세키나 다이몬.
그녀가 아니고서야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이 생길 리가 없다.
드한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자마자 세키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
“얘 머라는 겨?”
세키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킁 코를 훌쩍였다. 곁에 있던 쌍둥이도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너를 알고 있지. 몇 번이나 봤잖아?”
“설마, 머리 다친 거 아니야? 해부해 볼까?”
드한은 제게 내리쬐는 쌍둥이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환상 속 여자가 세키나라는 건 어디까지나 직감이다. 꿈에 등장하는 사람이 당신 같습니다, 하고 말하면 자신이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혹은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드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정신을 못 차렸나 봅니다.”
“쳇. 아쉽네.”
해부를 거절당한 파르데스가 눈에 띄게 비죽거렸다. 그에 드한의 낯빛이 살짝 창백해졌고, 메르데스는 곁에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세키나는,
‘뭐여. 뭔 일이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를 알고 계시죠?
그 말에는 어떠한 의심이나 추측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확신을 담고 한 말 같았다. 세키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세라.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서 제게 안겨 있는 세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생의 일을 기억해 내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세라는 크게 하품을 하곤 대답했다.
-세계에는 모든 것이 저장돼 있지. 어떠한 이유로 그 저장고를 엿보게 되면 전생을 알 수 있게 되는 거다.
젠장맞을.
세키나는 초조한 듯 숨을 들이켰다.
사실 따지고 보면 드한에게 ‘전생’이라는 게 있을 수는 없다. 세키나는 언제나 회귀 후 환생을 해 왔으니까.
그런데도 기억이 남아 있단 말인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만약 내가 용사의 연인으로서 살다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드한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 시나리오대로 움직이지 않고 세키나가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숨기자. 무조건.’
세키나는 다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야. 종자. 너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 우리가 널 구해 준 건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러게. 지금 당장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드한은 자신을 갈구는 쌍둥이를 못 본 척하고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유리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유리엘 님은……!”
“제게 기대서 아주 잘 자고 있습니다.”
자신의 뒤쪽 의자에 앉아 있는 유리엘을 발견한 드한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신세를 졌네요.”
드한의 얼굴에는 참담한 기운이 서려 있다.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리라. 북부성 신전에서 자신들을 죽이고자 이 사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왜?’
자신과 유리엘은 결백하다. 죽을 만큼의 죄를 지은 적 없다.
이제껏 신전에서 시키는 대로 해 왔고, 신의 말씀을 저버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인가? 왜, 왜?
밀려오는 억울함과 혼란스러움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드한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음. 좀 불쌍하네.”
“그러게. 신전에서 버림받은 거니까.”
“버림받았으니 이제 어디로 가려나?”
쌍둥이는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하며 씨익 웃었다.
“구해 준 건 우린데.”
“맞아. 우리가 두 번이나 구해 줬는데.”
드한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신에게 버림받았으니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뜻이겠지.
만약 거절한다면 이 눈보라에 내팽개쳐질 수도 있었다.
유리엘이 기절해 있는 지금, 드한은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자.
그렇게 판단한 드한은 고개를 들어 쌍둥이를 쳐다보았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메르데스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그럼 일단 무릎 꿇고 머리 박는 것부터 시작…….”
“멜데스. 그만.”
그런 메르데스의 폭주를 막은 건 세키나였다. 세키나는 메르데스의 뒤통수를 꾹 누른 후 드한을 내려다보았다.
“너히 어디로 가는 길이었눈데?”
“……수도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
사실을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드한은, 이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 신전이고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세키나라는 걸 새삼스레 인지하고는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교황 성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를 부르셨고요.”
“흐음.”
세키나의 눈이 반짝였다.
루치페르로 추정되는 교황이 드한을 부른다?
‘분명 뭔가 있어.’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부른 것이리라.
하지만 별걱정은 안 된다. 어차피 드한은 자신의 손에 들어왔고, 그렇기에 교황의 목적을 밝혀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우리도 수도로 가구 이써. 구니까 데려다주께. 보답은 그때까지 생각할 테니까 쉬고 이써.”
“하지만……!”
“쉬고 이쓰래도.”
세키나는 일단 이놈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뭐라도 빼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말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드한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전은 다이몬 백작가를 의심했다.
그들을 의심하여 추궁하고 뒤쫓으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손을 건네준다. 마치…… 응답하지 않고 있던 신처럼.
“감사합니다.”
드한은 마음 깊이 감사함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유리엘이 어서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신의 이 마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테니까.
드한은 자신을 보며 킬킬 웃고 있는 세키나를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생각했다.
***
“꽤 귀찮은 놈들과 합류했군.”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있던 5장로, 뮐러가 말했다. 그의 곁에서 함께 수정구를 보던 4장로, 카르테도 인상을 찡그렸다.
“신관 놈인가? 그때 성에 왔었던?”
카르테는 긴 숨을 뱉으며 혀를 찼다.
“지금 저놈들을 죽이면 신전에서 나서려나?”
그의 질문에 내내 침묵하고 있던 2장로,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저곳에 있다는 건 신전에서도 내친 인간이라는 뜻이지.”
빈센트는 제 앞으로 끌어당긴 수정구를 흥미롭게 살폈다.
“하여 죽이는 것은 상관없다만…….”
그는 톡, 톡, 책상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신전의 실패한 계략을 우리가 성공시켜 주고 싶지는 않구나.”
뮐러가 두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어린 호문쿨루스를 죽일 순간은 충분히 많으니까요!”
“…….”
약삭빠르게 빈센트에게 붙은 뮐러를 보는 카르테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저 마차를 그대로 소멸시켜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빈세트의 말처럼 신전 놈들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 또 신관이 있는 이상 제대로 된 힘을 쓸 수는 없으니 일단은 잠자코 있어야 했다.
“수도까지는 그대로 두자꾸나.”
빈센트는 수정구를 멀찍이 치우며 말했다.
“도착한 즉시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니.”
마왕성의 장로들은 그렇게 작당을 한 채, 멀리멀리 나아가는 세키나 일행을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