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이전에, 드한은 세키나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꿈 때문이었다. 꿈에 나오는 이가 세키나 같아서. 세키나의 느낌이 들어서.
물론 세키나는 이에 대해 부정했고, 드한은 어차피 꿈일 뿐이라 치부하며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너지는 신전 잔해 속에서 본능적으로 세키나를 보호했을 때.
드한은 마치 지금 펼쳐진 듯한 생생한 환영을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어둠이 펼쳐져 있던 날. 괴기한 짐승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메우고 있던 날.
그날에 드한은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오랜 시간 갇혀 지낸 것으로 보이는 소녀의 손을.
소녀는 마치 앙상한 겨울나무의 가지 같았지만 반짝거리는 눈만큼은 봄에 비견할 바가 못 되었다.
다 죽어가는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두 눈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드한은 소녀를 구했다. 그리고 소녀를 품 안에 안으며 생각했다.
내가 지켜 주자.
하지만 그 다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새까만 밤 한가운데에 새하얀 옷을 입고 서 있던 소녀는 까무룩 쓰러지고야 말았다. 드한이 소녀를 마음에 안았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리고, 환영이 끝났다.
와르르 쏟아지는 잔해의 사이사이로 세키나의 덜덜 떨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세키나의 얼굴일까, 환영 속 소녀의 얼굴일까. 아니, 두 개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드한은 확신했다.
세키나와 자신은…… 자신은 세키나를…….
-콰과과광!
그리고 세상이 암전되었다.
***
“우리, 분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죠?”
드한의 말에 세키나는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갑자기 또 왜 이래.
내가 뭐 했다고.
세키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또 왜 이러는 그야? 머 어디 잘못 맞아써? 머리를 다쳤나?”
그래서 일부러 모르쇠로 나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랑 나랑은 온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라니까. 왜 자꾸 같은 걸 물어?”
“…….”
드한은 살짝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방금 전 정신을 차린 탓에 살짝 머리가 멍했다. 평소처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드한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갇혀 있던 세키나 님을.”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이 본 소녀가 세키나라는 듯이. 절대 틀릴 리가 없다는 듯이.
“하얀 옷에,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입가에 점이 있…….”
“아니야.”
세키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그거 나 아니야.”
물론 세키나가 맞다. 그때에 입고 있던 옷도 맞고, 겉모습도 맞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자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환생과 회귀를 반복해 왔다는 걸 시인하는 셈이었으니까.
대체 드한이 어떻게, 왜 기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분명 그건 ‘없는 일’이 되어야 했음이 맞는데…… 대체 왜?
‘시스템 새끼가 또 사고 친 건가.’
세키나는 쯧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표정을 정돈했다.
“너 착각하는 거야. 아니면 지굼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 가지구 혼란스러운 걸 쑤도 있꼬.”
“…….”
“그거 나 아니고. 지금의 나는 나일 뿐이야. 먼 말인지 알게써?”
세키나는 드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날 의식적으로 대할 필요가 업따는 거야.”
“…….”
세키나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돼 있다.
너와 나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
이미 시나리오는 뒤틀려 있으니 네가 나를 좋아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뜻.
그러니 너와 나는 갈 길을 가자는, 그런 뜻.
드한이 이 모든 뜻을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표정이 전처럼 좋지 않다는 것이었고, 꽤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키나는 살짝 주춤했다. 가만히 드한을 응시한다.
“세키나 님은…… 왜.”
갈라진 목소리가 천천히 새어 나왔다.
“왜 저를 멀리하려 하십니까?”
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세키나의 손목을 살짝 움켜쥐었다.
“말씀대로 우리가 만난 적이 없다면, 어떤 관계가 없다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내가 어떤 태도인데?”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드한은 헛웃음을 뱉다가, 이내 세키나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저를 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그는 잠시 동안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비취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세키나를 주시했다.
“세키나 님은 제가 싫으신 겁니까?”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담은 눈가에는 옅은 물기가 고여있었다. 그래서일까? 짙고 기다란 속눈썹이 퍽 처량해 보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끝도, 붉게 달아올라 있는 양 뺨도, 모두 다 그의 불안정한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너…….”
세키나는 드한에게 붙잡혔던 손을 확 뿌리쳤다.
“미인계 쓰디 마.”
“……예?”
“지 잘생긴 거 알아 가지고 아주 틈만 나면 눈 크게 뜨고 이써. 디질라고.”
“…….”
어, 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잘생겼다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미인계를 쓴 적 없습니다……?
드한의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다시 말하디만.”
세키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난 너한테 별 감정 업써. 싫은 것도 아니구 조은 것도 아니야.”
“그럼 왜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난 원래 모두를 피해. 기찬아.”
드한은 세키나의 이 말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가, 문득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와 아서에게 하는 구박들을 떠올렸다.
아하. 원래 귀찮아하는구나.
그제야 드한은 찝찝했던 마음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세키나가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우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처음 만난 것이라는, 그 거짓말 말이다.
‘분명 뭔가가 있어.’
그렇지 않다면 이런 환영을 볼 리 없을 테고, 지속된 꿈을 꿀 리도 없었을 거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세키나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확실했다. 그래서, 드한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마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차오른다.
“그럼,”
그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려 환히 웃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
세키나는 그런 드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콱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미인계 쓰지 말라니까 또 쓰네. 디질라고, 진짜.”
아니, 제가 잘생긴 걸 어쩌라고요…….
드한은 비죽거렸다.
***
아비규환의 풍경이었다.
중앙선 신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신전의 빈자리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신전 근처에 살던 일반 백성이었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이들이 있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세상을 원망하는 아비가 있다.
그뿐이랴? 썩어가는 마물의 사체에서 나는 악취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유리엘은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가, 다시 올려 떴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상황이 진실로 참인지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저기! 저기 사람이 있는 거 같아!”
“아악!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누구라도 좀 불러와 봐!”
하지만 사람들의 고함 소리는 생생했다. 더불어 코를 찌르는 고약한 피 냄새도 여전했다.
그래. 이건 참이었다.
실제 상황이었다.
“대, 대체…….”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대체 다른 신관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