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유리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온몸이 차가워졌다. 마치 이런 때이니만큼 이성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유리엘은 서둘러 사람들을 부축했다.
“이, 이리 오세요! 이, 일단 간이 천막을 서, 설치할 테니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꺼져!”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일 터지자마자 나 몰라라 도망간 신관 놈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대? 참나! 꺼져! 우리는 당신네들 볼 일 없으니까!”
신관으로 살며 단 한 번도 이러한 냉대를 받아 본 적 없던 유리엘이었기에 그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겨우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저는 중앙선 신전 소속이 아닙니다. 저, 저는 부, 북부성 신전 소속이에요.”
그의 말에 사람들은 더 크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북부고 중앙이고 나발이고 상관없다고! 지금 신전에서 마물이 튀어나왔어! 그리고 신관들은 모두 다 내뺐고! 그런데 널 믿으라고? 널 따라가라고? 차라리 개새끼를 쫓아가지!”
“맞아!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꺼져!”
“아, 아니…… 저…….”
유리엘은 식은땀을 죽죽 흘렸다. 이런 냉대와 악의가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도 있지만 ‘신관들이 모두 다 내뺐다’라는 말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마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관들이 피신을 한 것이었다면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민들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신관들은 ‘모두 다 내뺀 것’이었다. 주민들을 지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신의 이름을 뒤에 업었으면서 대체 어떻게…….
유리엘은 주민들의 분노를 백번 이해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물러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곳에 있어봤자 이들을 자극하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 그럼…… 의, 의원이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치료가 필요하니까…….”
“아이고, 됐습니다!”
뒤쪽에서 뛰어나온 여자가 소리쳤다.
“이미 다이몬 백작가에서 의원을 불러 준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좀 꺼지라고요! 신관들은 다 꼴 보기 싫으니까!”
“네, 네? 다, 다이몬 백작가가요?”
유리엘은 커다래진 눈으로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아니, 방금 전까지 자기가 그들과 있다 왔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는 주민들이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살짝 의심하다가, 이내 누군가를 떠올려 내며 헛웃음을 뱉었다.
“……아서 경.”
그 신출귀물한 작자밖에 없지 않겠는가. 유리엘은 일그러졌던 입가를 정돈하고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러자마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신관님?”
역시, 아서였다. 유리엘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뱉은 후 그에게 다가갔다.
“여, 여긴 어쩐 일로 오, 오신 겁니까?”
다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이를 알아챈 아서의 눈이 둥그렇게 접혀 올라갔다.
“어쩐 일이라니요? 당연히 사람들을 도우러 왔지요. 신관들이 다 튀어 버리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불쌍한 사람들을 말이죠.”
“그, 그건…….”
“신의 사자라면서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해도 되는 건가 몰라. 아휴, 불쌍해라. 이럴 줄 알았으면 신전 근처에서 안 살지. 그냥 저쪽 신전도 없는 곳 가서 밭이나 갈고 살았지.”
만약 세상에 비꼬기 대회가 있다면 아서가 우승을 차지할 거다. 이제껏 만나 본 사람 중에 이만큼이나 잘 비아냥거리는 놈을 만나본 적이 없다, 정말로.
유리엘은 마른세수를 한 뒤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아서 경. 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너, 너무하십니다.”
“왜요? 불경합니까?”
아서는 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진짜 불경한 건 이 꼴이 나고도 도와주러 오지도 않는 다른 지역의 신전들 아닙니까?”
“…….”
약 올리는 것도 약 올리는 건데,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게 더 속이 터진다.
“의원을 불렀고, 간이 천막도 설치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자들은 이미 진료소로 옮겼고요. 신관님께서 하실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해야 했을 일, 다시 말해 다른 신관들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처리한 아서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유리엘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런 유리엘을 보며 아서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화나셨습니까?”
우냐, 울어?
아서가 퍽 장난스러운 태도로 던진 농담이었지만, 의외로 유리엘은 심각했다.
“아니요.”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정말, 정말로요.”
아서는 그런 유리엘을 보며 픽 실소를 뱉었다.
그래.
이렇게 수치를 아는 인간도 있어야 인간사가 잘 돌아가는 법이지.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다.
이만큼의 정당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더 부끄러워질 일이 계속 생기실 텐데. 뭘 이런 걸로.”
유리엘은 끝없이 괴로워질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들의 졸렬함을 계속해 마주하면서.
“힘내십시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아서는 생긋 웃으며 유리엘의 등을 토닥였다.
***
“으아, 아아아악!”
루치페르는 두 손으로 볼을 쫙쫙 잡아당기며 괴성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기나긴 손톱으로 인해 뺨은 찢어졌고, 피가 뚝뚝 흘렀다. 하지만 루치페르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너희는 뭘 하고 있던 거야! 그 빌어먹을 계집이 소환진을 설치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에 곁에 있던 버추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뭐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들은 서부 사막의 작은 신전에 몸을 피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물을 처리하는 데에 큰 힘을 쓴 것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정리하고 주변 상황을 수습하기에는 루치페르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루치페르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고, 이러한 분노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인 루치페르의 몸을 무너지게 만들었으니까.
“루치페르 님. 부디 몸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더 자극이 가면 손 쓸 수가 없어집니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는 루치페르의 명에 따라 북부를 정찰하고 있었는데, 중앙선 신전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참이었다.
“몸을 생각하라고? 지금 내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루치페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를 갈았다.
“지금 내 몸이 중요하니? 아니면 우리가 수십 년간 노력해 온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 더 중요하니? 응? 말해 보렴.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할 것인지!”
가브리엘은 하아 한숨을 뱉으며 미간을 좁혔다.
“루치페르 님.”
그리고 이내 루치페르의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잡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고선 제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계획을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듣던 루치페르의 얼굴이 차차 정돈되기 시작했다.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이 말이다.
“그래…… 그렇게만 하면 되겠구나. 꽤 괜찮은 생각이야.”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일단은 수도에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 텐데? 지금쯤 그곳의 인간들이 난리를 치고 있지 않겠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가브리엘과 루치페르의 대화에 끼어든 버추스가 소리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평소 가브리엘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버추스로서 당연히 끼어들 일이다. 그는 제발 자신을 돌아봐 달라는 듯한 절박함을 내보였고, 그런 점을 루치페르는 높게 샀다.
“그래…… 그렇다면,”
루치페르의 뺨에 길게 나 있던 손톱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새하얀 손가락을 쭉 뻗어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버추스의 턱을 들어 올렸다.
“가는 길에 그것의 시체도 가져올 수 있겠지?”
그것.
아까 전 루치페르가 만났던 마족 아이를 뜻하는 것이다. 세키나 다이몬, 그 아이 말이다.
버추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하신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