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다이몬 백작가의 정문 앞에 선 드한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일전에 북부성 신전의 신관들과 함께 왔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이들을 감찰하러 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몸을 의탁하러 온 거니까.’
드한은 그간 애써 무시해 왔던 현실을 하나씩 상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부성 신전에서 버려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북부성 신전이 벌인 한심한 짓거리들을 그들이 교황에게 낱낱이 고발할까, 북부성의 신관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그런 흉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신관이 된 것인지.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신관이 되어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그렇게 된 것일까.
뭐가 됐든, 드한은 애써 머릿속에서 북부성 신전을 치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자마자 다음 현실이 떠올랐다. 바로 중앙성 신전에서 있었던 일 말이다.
교황과 세키나가 이상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자마자 바로 마물이 나타났고, 그 후에…….
‘겪은 적이 없는데 겪은 듯한 기억이 살아났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드한 자신이 느낀 걸 표현하려면 이보다 더 명확한 표현은 없었다.
‘세키나 다이몬…….’
그 아이가 자신에게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그리고 자신과 어떤 관계였는지,
어떤 관계였기에 세키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도 마음 한구석이 아픈 건지,
밝혀내야 했다. 그래야만 드한은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이몬 백작가에는 요정의 샘이 있다지.
-그것을 훔쳐 오면 네 가족을 죽인 이들을 모조리 찾아내 주겠다.
-네 가족을 죽인 존재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일전, 세키나와 교황을 만나러 갔을 때 교황이 몰래 흘렸던 전음이다.
드한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일까?
사실은 이 마족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머리로는 다이몬 백작가, 즉 마족들을 믿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간 그들이 보여 주었던 행동과 세키나를 생각하면.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드한의 머리를 붙잡고 ‘저들을 믿지 마!’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조종당하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드한은 매 순간 정신줄을 놓지 않고자 애를 써야만 했다.
‘요정의 샘.’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교황에게 가져다주건 가져다주지 않건, 두 눈으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게 대체 뭐길래 교황이 욕심을 내고 있는 건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또한 가지고 있다 보면 언젠가 이용해 먹을 순간이 오지 않을까?
고작 5살짜리 어린아이가 할 만한 생각이 아니었지만, 드한은 스스로가 이상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날 때부터 ‘새삼스러울 정도’로 어른스러웠으니까.
“드, 드한?”
그때, 유리엘이 드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드한이 유리엘을 쳐다보자, 그는 다소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아서 님이 부르셔. 무슨 새,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거야?”
“아…….”
드한은 고개를 저은 후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넋을 놓고 있었어요.”
“으, 응…… 별거 아, 아니라면 괘, 괜찮지만…….”
여전히 걱정을 지우지 않고 있는 유리엘을 뒤로 하고, 드한은 저만치 서 있는 아서에게 갔다.
“부르셨습니까?”
아서는 생긋 웃으며 드한에게 손짓했다. 드한의 어깨와 그의 허리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아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유리엘에게 말했나요?”
다이몬 백작가가 마족이라는 걸 말했냐는 뜻.
드한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잘했네요.”
그의 대답에 아서는 여전한 웃음을 지으며 드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유리엘은 끝까지 모르고 있어야 해요. 알았죠?”
이 말은…… 뭐랄까, 권유가 아닌 협박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협박이 맞을 거다.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드한은 솟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서도 지우지 않아 놓고서는 왜 유리엘에게는 숨긴다는 말인가.
“……왜요?”
“궁금한가요?”
드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의 입술이 비죽 올라간다.
“저 심약한 인간이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무슨 선택을 내릴지……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내가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거든요.”
유리엘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죽인다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그럼 갈까요?”
드한은 마족의 극악무도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서 들리는 마족을 믿지 말라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발을 옮겼다.
마족의 소굴, 다이몬 백작가로.
***
“아, 지짜 왜케 돌아다니는 그야!”
세키나는 머리끝까지 올라온 화를 느끼며 크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게, 아까부터 찾고 있는 1장로 노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딜은 원래 성밖에서 지낸다. 하지만 세키나 일행이 성을 빠져나가면서 르카이츠도 자주 성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기에, 노딜은 당분간 성에 머물기로 했다. 혹여나 생길 수도 있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래서 세키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노딜이 머문다는 동쪽 별관에 왔는데, 노딜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평소 일과가 늦은 오전에 식물들을 돌보는 것이란 걸 들은 세키나는 곧바로 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 늦었는지 방금 전 노딜이 등산을 갔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오늘내일 까딱까딱하는 이가 뭔 등산이래?
세키나는 그를 찾아 설산을 오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춥기도 했거니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오겠지 싶어 그 자리에서 얌전히 노딜을 기다렸다.
그런데 두어 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이쪽 길이 아니라 반대쪽 길로 내려왔다는 것을 뒤늦게 들은 세키나는 그제야 그가 있다는 도서관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지가 먼 홍길동이야 머야.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네, 아주.”
동에도 서에도 번쩍거리며 돌아다니던 노딜은 다행히도 도서관에 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평소 구름에 묻혀 대낮이어도 환한 느낌이 들지 않는 지역인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밝았다. 마치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그의 반들반들한 민머리가 더 반짝였다.
세키나는 허억허억 숨을 고른 후 노딜에게 다가갔다. 그는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혼자 체쓰 두면 재미써?”
세키나는 노딜 쪽의 흰색 말을 쳐다보며 물었다. 노딜은 세키나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참이다. 와서 앉아 보려무나.”
뭔가 찜찜한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세키나는 얌전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체스는 둘 줄 알지?”
“…….”
아무렇지 않게 알고 있다고 말할 뻔했다.
지금의 세키나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체스를 두는 걸 배운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모른다고 해야 했다.
“아뉘. 난 몰…….”
“머리 데굴데굴 굴리지 말거라.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엥?
“멀 안다는 거야?”
세키나의 즉각적인 질문에 노딜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내기하지 않겠느냐?”
그는 체스 말을 툭 건드렸다.
“네가 이긴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주지.”
“너가 이기면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야지.”
“난 알고 있눈 게 업는디.”
“그럴 리가.”
노딜은 단호히 대꾸한 뒤 폰을 쥐었다.
“예를 들어…….”
그는 세키나의 뒤편, 어깨 위쪽을 응시했다.
“네가 달고 다니는 그 희한한 존재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있겠지.”
……뭐라고?
“끌끌. 나는 이래 보여도 꽤 오래 산 늙은이란다.”
내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없지.
그리 웃는 노딜을 보며, 세키나는 문득 ‘원래 게임’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노딜 다이몬.
르카이츠와 함께 ‘다이몬’이라는 성을 공유하는 유일한 인물.
이 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