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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41)화 (142/149)

141화

세키나에게 향하는 리아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도 그럴 게, 세키나에게 해야 할 말이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아트는 황실에서 날아온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구구절절 길게 늘어진 안부 인사와 쓸데없는 말들을 치우면, 본론은 하나였다.

<황자의 식견을 넓히기 위하여 북부에서 협조해 주었으면 한다.>

즉, 황자 놈을 이곳에 보내겠다는 통보였다.

‘젠장맞을.’

리아트는 잠시 걸음을 멈춘 후 심호흡을 했다.

황자를 이곳에 보내는 속셈이야 뻔했다. 황자 놈과 세키나를 어떻게든 엮어서 자기네들 세력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겠지.

‘인간 주제에.’

마족들이 원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간 따위가 감히 이딴 술수를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우리는 위대한 마족이고, 인간들은 미천하기 짝이 없는 종족이니까.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분노하기에는, 세키나라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세키나는 인간도 마족도 아닌 호문쿨루스.

보다 미천한 존재로 여겨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지만 리아트에게 있어 세키나는 더 이상 미천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아간, 자세히는 설명이 힘들지만 어쨌거나 마음속에 콕 박혀 있는 그런 존재.

이전에는 세키나를 대하는 감정을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뒤로 미루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게는 못 하겠다.

-마계로 돌아갈 때가 되면 세키나 님을 놓고 갈 생각 아니었습니까?

-애초에 호문쿨루스를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말씀하셔놓고서는.

아서.

그 개놈의 자식이 들쑤셔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세키나에 대한 감정을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세키나…….’

아니, 세키나뿐 아니라 다른 호문쿨루스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들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애초에 호문쿨루스들은 폐기시키는 게 원칙이었는데…….

‘골치 아프군.’

후우. 리아트는 한숨을 길게 뱉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놈들과도 이야기해 봐야겠어.’

마왕님은 또 무어라 말씀을 하실까. 그분은 결정에 번복을 내리는 법이 없으니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차라리 그냥 다…….’

리아트의 회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더 이상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면 안 되는 생각이 그려지는, 바로 그때였다.

“삼쫀?”

리아트의 소매를 쭉 잡아당기는 이가 있었다.

“머해여, 여기서?”

바로 세키나였다.

“내 방 가는 길이어써여? 왜? 나 볼라구? 보고 시퍼서?”

“…….”

리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키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감각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이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울 뿐.

“그래.”

리아트는 희게 웃으며 세키나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네가 보고 싶어서 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세키나는,

더 이상 호문쿨루스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

어슴푸레한 노을빛으로 물든 세상.

해가 넘어가는 것을 지그시 지켜보던 세키나는 이내 밀려오는 한기를 더듬으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풀썩, 하고 침대에 몸을 널브러뜨린다.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이 나 있는 얼굴이었다.

“돌겄네, 지짜.”

으으으!

세키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 위를 뒹굴며 발버둥을 쳤다.

“황자 새기가 왜 오냐고!”

그렇다.

세키나가 이렇게 짜증이 나 있는 이유는 바로 황자, 베니타 때문이었다.

리아트에게 전해 들은바, 황후 쪽에서 일방적으로 베니타를 북부에 보낸다고 편지를 썼다 한다. 한 달 남짓이면 그가 도착할 것이라고도 말이다.

수도에서 황후의 초대를 받았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때는 말 그대로 ‘얼굴을 한 번 살피고 서로의 의중을 알아내는’ 정도였으니까.

그들이 약혼을 이야기한다 하면 얼마든지 수락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실과 연을 만들어 두는 것이 세키나의 미래에 좋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다소 결이 달랐다.

수도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찾아가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얼마든지 상황을 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황자가 북부에 온다면?

그가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대접을 해 주어야 했고, 세키나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골치 아프네.’

거절하고 싶지만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황실 쪽에 반발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괴롭혀서 내쫓으면…….’

이때다 싶어서 지랄 지랄을 하겠지.

그러니 황자에게 맞춰서 납작 엎드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 한다는 건데.

“게임에서 황자 넘이 나오는 경우가 업서써 가지고, 어떤 넘인지 모르겠딴 말이지.”

유리엘의 말에 따르면 심약하고 소심하다는데,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을일 때와 갑일 때의 태도는 다른 법이니까.

세키나는 에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서, 세키나가 정보를 뜯어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야, 씨스템. 나와 바.”

띠링!

[SYSTEM]

저는 당신의 개가 아니랍니다! 세나한테나 그렇게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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