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마족과 헤어진 드한은 목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좀 전에 나누었던 마족의 말이 떠올랐다.
-황자가 온다고 하죠? 세키나 님 만나러?
그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황자가 온다.
그놈은 세키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와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니 신전에서도 쫓겨난 처지인 너는 황자에게 비벼 보지도 못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일전 수도에서 황후가 세키나를 초대한 것을 알고 있다. 그때 다들 ‘황후가 황자에게 세키나를 붙이려 한다.’라는 사실을 입 모아 말했었다.
다만 그러다 세키나가 갑자기 북부로 돌아가 버려 상황이 무산됐었다. 드한은 그게 참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세키나와 이름 모를 황자가 약혼하는 건…… 아무리 정치적으로 엮여 있다 해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한층 마음을 놓고 있었다.
황자가 방문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젠장.’
드한은 욕설을 읊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황자가 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세키나와 약혼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면 더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이 상상이 단순히 상상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곧 일어날 수도 있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짜증스러웠다.
그와 세키나가 정말 결혼까지 한다고 하면……!
-그럴 일은 없어.
……어?
드한은 순간적으로 들린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자신에게 말을 시켰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잘못 들은 건가? 피곤하다 보니 환청을 들은 건가? 드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세키나는 결혼 같은 거 안 해.
휙!
이번에는 틀림없이 들었다. 지나치게 생생한 이 목소리는 환청 같은 게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다.
-너랑 세키나는 떨어지지 못해.
어디서? 대체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 거지?
드한은 또다시 소리가 들릴까 하여 그대로 몸을 굳힌 채 귀를 기울였지만, 해가 한 뼘 길어질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한은 당황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두려움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이상해.”
그래. 정말로 이상했다.
처음 본 세키나에게 이상하리만큼 과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녀에 대한 기억이 우후죽순 올라오는 것도, 괴상한 목소리가 낯설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다.
그중 가장 답답한 부분은, 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그러니 자신은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드한은 더 답답했다.
‘일단은…….’
그는 환청을 떠올렸다.
‘세키나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자신이 황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진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그저 환청일 뿐이라면?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약혼을…… 막는 게 최선일 텐데.’
과연 그럴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자신의 무슨 자격으로 세키나의 앞날에 손을 뻗느냐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세키나가 부를 때 빼고 세키나 옆에 있는 거 보이면 내 손에 죽는다.
율리안인지 뭔지 하는 마족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더더욱.
“정말 되는 게 없네.”
드한은 머리를 헝클며 중얼거렸다.
다소 패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럴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라고, 이렇게 한다면 넌 행복해질 것이라고 길을 안내해 줬으면 좋겠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야. 너 왜 여기서 청승 떨구 이써?”
……있나?
드한은 갑자기 나타난 세키나의 똘망똘망한 두 눈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세키나 님?”
“웅. 나다.”
세키나는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올렸다.
“근디 왜 유령 본 것 같은 얼굴이야. 주글래?”
“아, 아뇨. 단지 조금 놀라서…….”
“멀 놀래.”
세키나는 픽 웃으며 드한에게 손을 뻗었다.
“너 나랑 어디 쫌 가쟈.”
손…….
드한은 세키나의 조막만 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
장로들을 엿 먹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나.
바로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블랙 스피넬을 독점하는 것이다.
블랙 스피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세키나는 그들을 보기 좋게 엿 먹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본래 세키나는 그 블랙 스피넬을 ‘마족에게 나눠 줄’ 용도로 쓰려 했던 것.
다시 말해, 블랙 스피넬을 많이 차지할 생각이 없었단 뜻이다.
‘한 번 블랙 스피넬이 풀리면 장로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근원지를 찾으려 할 테니…….’
소량만 가져와서 으스댈 수 없었다.
그러니 블랙 스피넬의 씨가 마를 정도로 싹쓸이를 해 와야 한다는 건데.
‘인어가 과연 그걸 가만히 둘까가 문제지.’
원래 세키나는 몰래 블랙 스피넬을 훔쳐 오려 했지만, 많은 양을 가져와야 하는 지금으로써는 도둑질이 불가했다. 만약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다면 그날이 제삿날일 거다. 인어의 성정은 마족에 버금갈 정도로 포악하니까.
그렇다고 포기하느냐?
아니, 그럴 리가!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갈 방법이 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어들은 마기에 예민한 종족이다. 마기의 ‘마’ 자만 나와도 어느 새끼냐며 뛰쳐나가기 일쑤다. 마기를 싫어하고, 마족을 혐오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특성 아닌가.
바로,
‘신관.’
종족이 다른 인어와 신관이지만 그들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인어는 바다신의 힘을 이어받은 종족이고, 신관은 유일신의 힘을 빌려 쓰는 종족이었으니까.
신을 숭배한다는 점이 공통점이자 다른 종족과의 유일한 차별점이었기에, 인어는 종족 중 유일하게 신관을 좋아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지금 마왕성에는 신관 하나와 대단한 성기사가 될 재목 하나가 얌전히 숨 쉬고 있다.
‘유리엘과 드한.’
평신관이 어쩌다 표류해 흘러 들어가도 잔치를 열며 그를 반겨 주는데, 유리엘같이 신성력이 엄청난 신관이 간다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드한이 웃어 준다면?
‘뒤집어지지, 아주.’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연무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드한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너 나랑 어디 쫌 가쟈.”
물론 드한만 데리고 갈 건 아니다. 유리엘도 함께 갈 거다. 지금 유리엘이 어디 있는지 몰라 드한에게 온 것이니, 이제 유리엘을 찾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한 세키나는 드한에게 쭉 손을 내민 채 눈을 깜빡였다.
“…….”
뭐야.
왜 안 잡아.
세키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드한을 쳐다보았다.
“왜 구래? 내 손에 머 묻어써?”
멍하니 세키나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드한은 아, 소리를 내며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세키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시릴 만큼 청명한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드한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해 왔던 생각을 이어갔다.
누군가가 내게 길을 안내해 주었으면,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 주었으면, 그런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따라갈 텐데.
드한의 입이 열렸다.
“세키나 님을 따라가면 제게 무엇을 해야 할지 일러 주실 겁니까?”
뭔 개소리인가 싶어 세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웅. 그럴라고 데꼬 가는 건디.”
“앞으로도요?”
드한은 세키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앞으로도, 저는 세키나 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걸까요?”
이게 무슨 뜻일까 세키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웅.”
세키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짜피 싫어도 거절도 못할 꺼잔아?”
“……그렇지요.”
장난스러운 세키나의 말에, 드한은 그제야 긴장을 탁 풀며 대답했다.
어차피 자신은 세키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세키나는 마족이었고, 자신은 마족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세키나가 자신을 이끌어 준다 말을 하는 지금.
그걸 거부할 이유는,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드한은 해사하게 웃으며 세키나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너랑 세키나는 떨어지지 못해.
그 환청이 부디 틀림없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