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7화 (7/259)

4. 송도삼절 (1)

병오년(1546) 삼월 보름. 한양에서 임금이 내린 교서(敎書)가 개성유수부에 닿았다.

본디 지난달 보름에 나온 교서이니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를 가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린 셈이었다. 만일 그 사유를 문책한다면 도성의 고관들은 미관말직 서리와 녹사(錄事)들을 탓할 것이요, 서리와 녹사들은 다시 개성부를 탓할 것이며, 개성부에서는 도로 도성 사람들을 탓할 테다.

이 무렵 나랏일이라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교서에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하나이니 현저한 것도, 미미한 것도 다름이 없다. 음양이 서로 부닥치기도 하고, 선악이 서로 밀치기도 하는데,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하늘이 위로부터 경계하는 현상을 드리운다. 형세가 대개 그러한 것이니, 이 이치를 속일 수 있겠는가?”

하면서 서두를 떼고, 구구절절 팔도에 재이가 많음은 임금 자신의 부덕한 탓이라 중언부언하고서는, 바른말 올릴 자 있으면 언제든 나오라며 구언(求言)하는 뜻을 드러냈다. 그러고서 말미에 또 이르기를,

“아아, 나는 큰 의심이 들어, 이미 경사(卿士)들과 더불어 논하였노라. 너희 민서(民庶)들 또한 말을 펼쳐, 심중에 품은 바를 펼칠지어다.”

하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정말 재이(災異)는 많구려.”

“비가 안 오는 게 어디니.”

연이틀 떨어지는 우박을 맞으며, 꺽정이는 그의 사저 황진이와 같이 화담의 초당으로 발걸음 옮기고 있었다. 우박도 눈이 있는지, 어째 옆에서 함께 걷는 황진이는 제쳐두고 꺽정이의 머리통에만 떨어져 통통 옆으로 튀었다.

“일전에도 한 번 우박 내렸던 것 같은데, 그때야 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았을 때니 괜찮았지만 지금은 논밭에 꽤 해악이 클 게요.”

“말하는 것만 보면 장성한 사내가 따로 없다니까.”

그해 농사가 어찌 되느냐에 따라 도적질할 때 얼마나 주변 백성들에게 떼어줄지, 또 반대로 얼마나 떼어먹을지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산적 두목 시절 꺽정이에게도 한 해 농사의 추이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는 산적이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리백정들한테도 한해 농사가 어찌 되는지는 퍽 중한 일이오. 농사 망쳐서 인심 흉흉해지면 생계도 생계지만 당장 사람들 인심이 흉흉해지거든. 그러던 와중에 주변에 만만한 백정이나 재인 패거리가 지나간다? 곧장 해코지당하기 십상이지.”

일신의 본분으로 따지면 꺽정이나 황진이나 같은 천출(賤出)이지만, 그래도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황 진사의 귀여움 잔뜩 받으며 살았고 후에 용모가 드러난 뒤에는 온갖 사내들의 추앙 받으며 살아왔기에, 꺽정이의 담백한 대꾸에 오히려 깜짝 놀랐다.

“뭐, 그래도 여기 송도는 항상 번화하니 무슨 상관이야 있겠소. 여기 이 사탕(沙糖, 설탕) 같은 귀물도 들어오는 판인데.”

혹여 우박이 언제 비로 변할까 싶어 몇 겹씩 동여매듯 싸맨 보자기를 품에서 들어보이며 꺽정이가 말했다.

나라에서 사치를 연이어 금하고 있건만, 그 금해야 할 사람들부터가 사치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이런 귀한 물건들도 때로는 중인환시 하 저자에 나오고, 또 때로는 은밀하게 산속 오가는 궤짝 속에 담기곤 하였다.

“얘, 그게 어디 송도 덕분이니. 다 이 누님이 잘난 덕이지.”

“어쩌다가 우리 스승님 문하에는 성정 괴이한 사람만 모였는지 모르겠소.”

“너만 할까.”

황진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정말로 내 덕이 맞대두? 원래는 송도 저자는 물론이고 나랏님도 함부로 못 잡수시는 물건이 이 사탕이라니까.”

하기야, 황진이네 집에서 머슴 노릇하면서 종종 들여다본 곳간에는 온갖 기이한 것들이 가득 차 있기는 했다. 꺽정이 그가 훗날 윤원형이네 앞으로 가는 ‘진상품’ 털 때나 보았던 야명주(夜明珠)며 사라능단(紗羅綾緞, 고급 비단)이며 하는 것들이 모두 먼지 쌓인 채 고스란히 쌓여 있던 것이다.

아무리 한때의 자색이 꽤 남아 있다지만 황진이는 엄연히 퇴기(退妓)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송도 상인들은 더욱 황진이를 만나 말이라도 한 번 나누기를 바랐다. 아직도 응큼한 생각 못 버리고서 달라붙는 그런 이들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부분은 근래 잠상(潛商, 밀무역) 판이 커지면서 국법의 애매한 경계를 슬슬 밟으려는 이들이었다.

송도에서 새롭게 이름 드러내려는 이들에게, 황진이와 화담 선생께 인사드린 적 있다는 그 명성이 가지는 값어치는 꽤 컸던 것이다. 물론 황진이 본인이 그것을 알고서, 은근히 그런 시세를 부추긴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리고 네 녀석 때문에 스승님께서 요새 몸이 축나셨으니, 못난 사제 대신 잘난 내가 이렇게 보양하실 수 있도록 챙겨드려야 하지 않겠니?”

은근슬쩍 책망하는 황진이였다.

초당에 당도하여 인사 올리려 하였더니, 방문 조용히 열리며 이지함이 사뿐히 나왔다.

“스승님께서는 지금 막 오침에 드셨습니다.”

스스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언한 이래 서경덕은 침식을 잊고 새로운 궁리에 뛰어들었다. 때로는 꺽정이를 불러다 옆에 앉혀두고, 또 때로는 이지함을 데려다가 문답을 주거니받거니 하였는데, 그러다 돌연 한두 시진씩 말없이 홀로 골똘히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괜찮아요. 이왕 이리 된 것, 조금 머물다 가지요. 듣기로 요새 우리 꺽정이와 그렇게 열심히 대련을 한다던데.”

‘아직도 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하고 혼잣말하는 것을 못 들은체 하며, 이지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이만한 상대를 또 만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관운장이랑 조자룡이 붙는 줄 알겠소.”

이지함이 마치 저와 제대로 맞붙는 것처럼 얘기하기에, 꺽정이가 옆에서 비웃었다.

“그래도 일전에는 세 합까지는 견디지 않았더냐.”

“그야 내가 사형이라고 봐주었으니 그런 게지. 실지로 싸움 붙으면 어느 얼간이가 그렇게 대해주겠소?”

“누가 들으면 백전노장 납신 줄 알겠다.”

제대로 무과를 보았든 어디 취재에 붙었든 칼밥깨나 먹었을 군관들 목을 실제로 쉽사리 따고 다녔던 꺽정이었으니, 굳이 따진다면 백전노장이 맞을 테다. 그러나 그런 천기(天機)를 누설할 만큼 꺽정이 입이 가볍지는 않았다.

“아쉽네요. 스승님께서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다면야, 간만에 여기 초당 온 김에 두 사람 대련하는 것도 구경하고 갈 텐데.”

어느새 제 집인 것처럼 마루에 편히 걸터앉은 황진이가 마당에 떨어지는 우박을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교서인지가 내려왔다던데, 사형께서는 소식 들으셨소?”

“이놈아. ‘그 교서인지’라니. 나라의 위엄이 있으니 말을 바르게 하거라.”

그러나 꺽정이가 그런다고 해서 말을 삼갈 놈이 아님을 불과 며칠 사이에 깨달은 이지함이었다.

“아니, 내가 말을 말아야지. 어쨌든 아침에 문안 올리러 온 유수부 아전이 있어 소식은 전해들었다.”

“임금께서 널리 바른말 듣고자 하신다던데, 그러면 우리 스승님께서도 한 말씀 올리셔야 하는 것 아니오?”

“하, 어디 그렇겠느냐. 이미 그 문장을 살피면 말미에 ‘경사(卿士)와 이미 논하였다’ 하였으니, 그 뜻을 살피면 뻔하지 않으냐. 대저 작금 조정에 척신(戚臣)만 횡행하니, 이미 답은 그들이 정해두고 민간에 널리 구언하겠노라 시늉만 부리는 것이겠지.”

“이제 보니 우리 사형이야말로 참으로 무엄한 분이시오.”

“말이나 못하면.”

타닥타닥 우박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서경덕 명에 따라 일전에 저기 마당 한쪽에 심어두었던 꽃들이 죄다 죽어나갈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진기한 구경에 종 밤이도 동참하여 처마 아래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반 년새 부쩍 장성한 밤이 얼굴이 조금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저 아이가 나중에 저의 아래에 있던 그 밤이로 자랄 것인가, 뜬금없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는 꺽정이었다.

한동안 넷이서 그렇게 우박 구경이나 하고 있는데, 문득 이지함이 말을 다시 걸어왔다.

“스승님 환후가 그리 좋지 못하다. 스승님 스스로 밝히시기를, 올해를 아마 못 넘기지 않겠느냐, 그러시더라.”

“... 그리 짐작은 하고 있었소.”

“평소라면야, 이게 다 네놈 때문이라고 장난스레 탓하고서는 넘어갔겠지만, 이젠 진지하게 그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듣고 있소.”

“조만간 나도 고향을 떠나 바닷가로 몸을 옮길 생각이다. 거기서 배 타고 여기저기 절해고도 유람도 하고, 세상을 널리 둘러보려 한다. 어차피 너도 스승님 앞에 나아와 배우기까지 하였으니, 이전에 어찌 살았건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그때, 때맞추어 초당 안쪽에서 몸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필히 꺽정이 그의 스승 서경덕이 낮잠 자다가 일어난 것일 테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서, 기침하셨느냐 문안인사 올리러 몸을 일으켰다.

오월 보름께 어느 화창한 날. 화담 선생은 간만에 몸이 상쾌한바 박연폭포 나들이를 나갔다.

곁에는 황진이도, 이지함 – 아직 고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 도 없어, 오직 거정이 하나뿐이었다.

몸 일으켜 초당을 나서니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저 박연폭포의 장쾌함을 보는 것도 오늘이 지나면 한두 번이 고작이리라.

늘 앉던 자리에 돗자리 펴니, 거정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묵직한 바윗돌을 굴려와, 기대고 누우라 하였다.

거정이가 청한 대로 곧장 몸을 눕혔다. 오월 햇살이 나뭇잎 뚫고 내려와, 쇠잔한 몸을 비추니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폭포 소리와 바람을 벗삼은지 한 각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을 떼었다.

“거정아, 나는 네가 참 밉다.”

“그리 말씀하시니 이 제자는 마음이 아프오.”

꼭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말 안 듣기로는 그를 여기로 보냈다는 전우치와도 비슷할 터. 그러나 지금 조선에 자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천둥벌거숭이와 문답 나누어주며 깨우쳐주고 또 깨우침 받을 사람이 또 있겠는가. 천리(天理) 얄궂고도 오묘함이 이와 같았다.

“내 일찍이 여기기로, 생사(生死) 이치를 모두 깨달은 지 오래라 편안하게 세상을 뜰 줄 알았다. 그러나 네가 나타나 아직도 궁구할 바가 다함이 없음을 보였으니, 어찌 아쉬움이 남지 않겠느냐.”

거정이와 그때 논쟁하며 마음 속에 핀 불꽃이 이제는 열화가 되어 머릿속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낡은 오장육부가 땔감을 제때 넣어주지 못하니, 그럴듯한 그릇 하나 구워내지 못한 채 이대로 사그라들까 두려울 뿐.

그때 이후로, 한 번 시작한 의심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처음에 태허(太虛)가 있었다. 그로부터 갑자기 뛰어오르고 문득 열리는 것이 있었으니,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요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혹자는 이를 이(理)라 부르고 또 혹자는 음양이라 부르며, 또 혹자는 천지의 마음(天地之心)이라 불렀다.

천지는 만물을 생육하고, 옛 성인은 그 모습을 본따 만민을 이롭게 하는 법도를 세웠다.

그러나 실로 그러했는가? 전적(典籍)에 그리 나온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거정이 말처럼, 선비가 큰 도적이었다면, 저런 글을 적어 남긴 자들 역시 모두 도적일 테니 어찌 도적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요순이 정말 성인이 아니었다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이 훗날 덧붙인 거짓이라면, 정전(井田)의 제도는 그저 후대에 사람을 미혹하고자 꾸며낸 것이라면...

오직 도적이 스스로 도적이 아님을 논변하고자 교묘한 문장으로 둘러댄 것이라면, 상고(上古)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던 일들은 모두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그 두려움을 모두 치우고, 계속 궁리하였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확실한 것만을 남겼다.

그제야 깨달음의 한 단락이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대도(大盜)는 반드시 그 무리를 챙긴다. 또한 한 번 도둑질당한 집이 패가망신한다면 도둑도 벌이가 없어질 것이므로, 반드시 절도를 지키고, 또 다른 도둑이 넘어와 저 대신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켜준다.

이를 바꾸고자 하는 자 있다 한들, 어떻게 바꿀 것인가? 천하의 큰 근본은 농(農)이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전답이 필요하고, 그 전답은 가만히 있으면 결국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논밭을 갈아 오곡을 기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빼앗아 누린다.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지극한 이치이듯, 벌레가 풀을 뜯고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도 지극한 이치다.  하늘과 사람의 도리는 같고, 그 도리는 공히 무정(無情)하여 옳음도, 그름도 없다.

한 사람의 선비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요 결론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벗어날 길이 있을까 궁리하는 것이 마치 처음 학문을 배울 때처럼 기쁘고 또 짜릿하였다. 다만 그에게 남은 수명이 짧음을 한탄할 뿐.

“... 그러니 어찌 내 너를 미워한들 어찌 참으로 미워하겠느냐. 그리고 나는 또 네가 참으로 안타깝다.”

“그건 또 어찌 그렇소?”

“네가 큰 도적 되기를 바란다 하였을 때부터, 어찌하면 네가 천하의 근심 되지 않으면서 그 욕심을 채울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였다.”

잠시 몸을 일으켜, 저도 모르게 주변을 휘 둘러보고서 거정이 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나라의 신하란 말인가 싶어, 짤막한 웃음 한 토막이 나왔다.

“네 말대로 선비가 큰 도적이라면, 그보다 더 큰 도적, 저보다 작은 도적들을 무수히 거느린 그런 두목은 누구겠느냐.”

“임금 아니겠소?”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길었지만, 답할 때는 거리낌이 없는 거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것보다 더 훌륭한 법도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위에 있는 자가 달라져도, 사람 위에 사람이 있어 부리고 빼앗는 이치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전조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그러했으며, 그 뒤를 이은 사대부들 또한 그 규모가 작았을지언정 별반 다르지 않았고, 지금의 권신들 또한 이대로라면 비슷하게 갈 테다.

그러나 도적들을 다스리는 큰 도적이 없어, 모두가 모두와 다투는 아수라장이 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허황된 말이나 외적의 권세보다는, 겉치레뿐일지언정 도학(道學)으로써 수신하고 경계하는 지금의 사대부들이 나았다.

“사람이 곡식을 먹지 않아도 능히 살아, 온 백성이 힘써 오곡을 기르지 않아도 된다면, 그때는 달라질 지도 모른다. 신농씨가 살아 돌아와 씨앗을 심지 않아도 이삭이 팰 수 있게끔 한다면 그때는 또 달라질 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군가는 반드시 농군들의 위에 서서 그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요, 위엄을 갖추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세와 토산(土産)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꾸려 한다면, 반드시 그에 반하는 자들이 떨쳐 일어나 막아내고야 말 것이다. 지금까지 내 여러 차례 헌책(獻策)하여 백성들이 공상(工商)의 이익을 얻도록 하자 하였으나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까닭이 돌이켜보면 여기에 있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변통의 기회를 얻을 터인데, 나라의 군세가 비록 정예함을 잃은 지 여러 해라지만,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를 바꿀 것이냐?”

불편한 몸 잊고서, 열변을 오래 토했더니 목이 타는 듯하였다.

거정이는 거정이 나름대로 한참 고민하는 듯. 미간 찡그린 채 저 폭포수를 보고 있었다.

글머리는 부족하지만 나머지 머리는 있는, 아니, 오히려 뛰어난 거정이다. 형백(馨伯, 이지함)이 평한 것처럼, 천출만 아니었더라면 천하의 장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정이었기에, 지난 몇 달 사이에 부쩍 생각이 깊어진 듯, 처음 보았을 때라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딴청 피웠을 녀석이 자못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스승님, 하면 내가 어찌해야 하겠소. 큰 도적이니 무어니 하는 것은 다 때려치우고 이제라도 조용히 살아야 하겠소?”

“네 성정에 그것이 가할 리 없겠지. 너도 알고 있지 않더냐.”

문득 거정이에게 그 옛날 스쳐지나간 전우치가 겹쳐 보인다.

“너를 내게 보냈던 그 전우치, 아니, 이젠 병해라고 하던가. 어쨌든 너의 그 늦깍이 사형(師兄)도 비슷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언변과 손재주가 남달라, 남을 속이기를 예사롭게 하였다. 네게도 솜씨를 보여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이의 도술이라는 것이 대개는 그런 절묘한 눈속임이었지.

내게 찾아와서는, 참으로 세상이 우습고 엉망진창이다. 그러니 저는 평생 세상을 조소하며 살겠노라 단언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고을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변을 당해, 마침내 물고(物故)를 당했다고 들었다. 아마 그때도 용케 몸을 빼돌리고서는 숨어 살고 있던 것이겠지.

이 천하에 남다른 생각 품은 이가 저의 뜻 펴며 살아갈 길이 그리 많지 않다.”

아마 마지막이 될 올 한 해, 지난 몇 년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배움을 쌓을 수 있게끔 해준 거정이에게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보답해줄 수 있었기를 바라며 말을 잇는다.

“분명 다른 길, 더 나은 길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하늘이 내게 시일을 그만큼 허여해줄 것 같지는 않구나. 그간 궁구한 바를 글로 적고 말로 남겨 형백에게 전해주려 한다. 형백 또한 세간에 기인으로 이름이 났으니, 반드시 후에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바라건대 네가 형백을 지켜다오. 그리하면 형백이, 또 그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나타나 네가 시작한 이 물음에 답 찾는 것을 이어나갈 테다.”

“... 내 바라던 바는 그것이 아니었소, 스승님. 알고 계시지 않소?”

“그래, 내 어찌 모르겠느냐.”

실망한 기색 역력한 거정이에게서 눈길을 돌려 폭포를 바라본다.

“네 말대로, 하늘의 도가 정말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세워진 이 나라의 법도가, 그나마 그처럼 매정한 도를 따르면서도 힘 닿는 데까지 궁구하여 사람 살 만하게 만들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섣불리 거스르는 자는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요, 설령 뒤집는다 한들 이전만 못하게 될 터인데, 이를 어찌하겠느냐, 거정아. 어찌하겠느냐.”

고구려 장수왕이 남정(南征)하였을 때도, 왕건이 마침내 이곳에서 왕업을 일으켰을 때도 쏟아져 내렸을 박연폭포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우레소리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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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조선은 사회 전반적인 위기와 더불어 유례없는 밀무역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연산군대 이후로 일어난 사치 풍조와 더불어, 재정 파탄으로 인해 사대부들 역시 녹봉이나 조정에서 하사하는 토지보다는 서로 주고받는 고액의 사치품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결과였지요.

이러던 중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은이 들어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통한 밀무역이 시작되게 됩니다. 특히 명나라가 국경 방어를 위해 요동 일대 개척을 시작하여 의주에서 국경이 닿게 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지요. 비록 사료의 부족과 임진왜란으로 인한 기록 소실로 인해 구체적인 교역량을 파악하는 것은 제한되지만, 한양에 거주하는 상인이 의주까지 가서 밀무역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평안도 관헌이 직접 종복을 국경에서 수백 리 떨어진 요양에 보내 밀무역을 벌이다가 걸리는 등의 사례가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 그 규모가 매우 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도영, 2015. “16세기 조선 대명 불법무역의 확대와 그 의의” <한국사연구>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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