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2)
사람만 해도 수십에 마필도 여럿인 행차가 수산역(壽山驛)을 지나 연비산(燕飛山) 고갯길로 향하고 있었다.
가운데서 경마잡힌 말 타고 가는 초로(初老) 사내는 회재대감 이언적이요, 그 주변을 지키는 것은 조정에서 함께 내려온 군관들이었다.
또한 그 뒤에는 군관들 따르는 군졸과 이언적의 몸종들이 붙고, 다시 그 뒤에는 어제 황강역(黃江驛) 지날 무렵부터 따라온 봇짐장수 무리가 있었다.
개중 입담 좋은 자가 있어, 무슨 내력으로 그들이 송도부터 여기 산속까지 들어왔나 그 사연을 떠드는데, 군졸들은 귀 쫑긋하며 듣고, 급료 짠 군관들도 안 그런 척 하며 귀를 기울였다.
“... 암만 연이어 흉년이라지만, 살 사람은 살고 벌이할 사람은 벌이하여야지 않겠소? 이럴 때면 집안의 패물을 내다 팔려는 규수들이 많이 있는데, 대개 시골은 아직 장시가 흥하지 않아 그런 것 처분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니 우리가 돌면서 포목으로 패물 값을 쳐주면, 그쪽은 어려운 살림에 조금 빛 들어오는 셈이올시다. 들고 다니는 재물이 많아 호환이니 도적이니 무서워서 이렇게 항상 뭉쳐다녀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그래도 이렇게 한두 고을 돌고서 송도로 돌아가면 이문은 꽤 남지요.”
그런 얘기를 아니 듣는 척 듣던 이언적은 마음이 미어질 뿐이었다.
그뿐이랴. 저 일행 중 임 선달이라는 자는 무재가 출중하나 집에 인정 바칠 재물이 부족한 고로 만년 선달로 있다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 이 상행의 호위로 붙었다 했다.
심지어 그들 옆의 유생은, 아직 내다 팔 패물이라도 있는 집 중 저와 티끌만한 연이라도 있어 식객을 받을 만한 곳이 있는가 찾고자 그들과 함께 따라다니고 있다 했다.
그러든 말든 행렬은 계속 나아가, 어느새 고갯길 중턱에 이르렀다.
행상 중 하나가 땀 난다며 패랭이를 잠시 벗고 휘휘 흔들었다. 옆에서는 사람이 오죽 안 나다니고 편하게 살았으면 이 정도 산길에 땀이 나느냐, 이래서야 나중에 강원도나 함경도 상행 나서면 중간에 죽어나자빠지겠다 등등 비웃었다.
패랭이 벗어 흔드는 것이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으라’ 하는 뜻으로 미리 정해둔 신호였음은 꺽정이 패거리 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허탕치고 그대로 단양 읍내로 행렬 따라 들어왔다. 동헌 옆 객사까지 따라갈 수는 없으니 어물어물 둘러대고 적당히 행렬에서 빠져나왔는데, 의외로 운수 통한 일이 있었다.
대저 동네 소문 듣기 좋은 곳은 오래된 주막이요, 반대로 동네에 소문 내지 않기 좋은 곳은 흘러들어온 외지인이 막 연 주막이었다.
그런 곳 하나를 오막손이가 미리 알아두었는데, 암만 보아도 술장사 할 것처럼은 안 생긴 주막 주인이 꺽정이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충주에서 파옥할 때 곁가지로 휘말린 비부쟁이였다. 안사람이 이약빙네 옆집 마나님의 계집종이라 마나님이 패물 숨겨두는 곳을 알고 있었기에, 마저 챙기지 못하여 그 자리에 남아 있던 패물 부스러기를 모조리 챙겨와 이곳 단양서 새 살림을 꾸렸다 했다.
역적의 재산을 터는 게 도적이라면 가산 적몰하는 나라야말로 도적일 테다. 더구나 진퉁 도적인 꺽정이가 무어라 할 것도 아닌지라, 그냥 잘 되었다 하면서 비단 적당히 내주며 근 며칠은 저들 패거리만 여기 주막에서 묵게끔 해달라 했다.
거기에 행장 풀고서 곧장 읍내로 탐문을 나갔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 많음이 꺽정이 눈과 귀에 확 들어왔다.
안색이 피로해 보이는 것을 제하면 멀쩡하던 이언적이 갑자기 여독으로 앓아누워 며칠 병구완을 해야 한다지를 않나, 수행하는 인원이 많아 객사(客舍) 한 군데로는 부족하니 다른 유숙할 곳을 마련해 달라고 청했다지를 않나.
“역시 사형 말씀대로 윤원형이가 사람을 붙여 술수를 부리고 있는 듯하오.”
돌아온 꺽정이가 주막 평상에 걸터앉으며 그간 탐문한 바를 전달했다.
“그래. 얼추 보아도 수상하구나. 그래서 군수가 어디를 내어줬다고 하느냐?”
“읍내에서 멀찍이 있는 향교에 딸린 집을 내어줬다 하오.”
시골 사람들 생각에 서울서 내려온 군관이 벌일 수 있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면, 저의 위세 믿고서 토색질을 하거나 저자 오가는 이들에게 행패 부리는 것 정도였다.
그러므로 선정(善政)으로 이름 높은 군수가, 읍내에서 꽤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향교 옆, 교수와 훈도 및 그 일가가 기거하도록 새로 지은 집을 내어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읍내 사람들은 그들의 군수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꺽정이와 이지함 생각은 달랐다.
“군수 딴에는 읍내 백성들로부터 떨어뜨리려 한 것일 텐데, 오히려 저들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준 셈이 되었구나.”
“나도 그리 보오.”
갖은 핑계를 대며 이언적을 외딴 향교로 옮기고, 누가 오든 걸릴 수밖에 없도록 주변에 함정을 파는 모양새가 눈에 선했다.
“저들 무리 중 윤원형이 끄나풀이 몇이나 된다고 보시오? 앞서 길에서 그들 행렬을 보니 어디서 굴러왔는지는 몰라도 군관 행색이 영 어색한 자들이 여럿 있던데. 개중에 눈빛에 독기 가득한 자도 하나 있고.”
무엇이 그리 분하고 노여운지 여기저기 째려보다가, 꺽정이 저와 눈이 마주치니 확 고개를 돌리는 자가 있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놈은 확실히 군관이 아니었다.
“네 말이 맞을 것이다. 내 충주 머물 때 영월이나 그 근처로 유배 내려가는 행렬을 종종 보았건만, 지금 회재 대감을 수행하는 이들의 수효는 족히 그때의 곱절은 되는 듯하구나. 더구나 말 탄 군관 수가 군졸에 비해 과하게 많았다.”
“그렇소. 얼추 대여섯쯤은 되는 듯하오.”
“아마 그럴 것이고, 많아보아야 여덟은 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쪽에는 네가 있고, 또 데려온 당원도 한 사람 몫은 할 테니,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그러면 당장 오늘 밤 향교를 들이치십시다. 암만 생각해도 그때 나와 눈 마주친 가짜 군관 놈이 마음에 걸리오.”
정말로 윤원형이 사람을 붙였다면, 그저 이언적 주변을 맴돌면서 말 건네는 자 없는가 감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 트집 잡을 구석을 찾아다닐 공산이 컸다.
단양이 그리 큰 군도 아니고, 더구나 외지인 오갈 만한 곳은 이곳 읍내가 전부였으므로, 허투루 시일을 흘려보냈다가는 그만큼 위태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지함 생각은 달랐다.
“아직은 안 된다. 저들이 회재 대감을 수행하는 군관들과 섞여 있는 것이 문제다. 자칫 진짜 군관을 상하게 했다가는 회재 대감에게 지금보다 더한 죄를 줄 명분이 된다. 고을 수령도 일전에 『화담자의』 받아가기도 한, 학식으로 이름 높은 이황(李滉)이라는 이인데 그 또한 해를 입을 것이고.”
어떻게든 군관 차림을 한 윤원형의 끄나풀들만 쳐낼 수 있다면 그때는 괜찮을 것이다.
도적이 귀양 가는 죄인을 습격하여 군관을 죽인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되지만, 그 군관이 본디 군관도 아니요 갑작스레 행렬에 따라붙은 수상쩍은 자들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억지 군관들이 붙은 것도 이상한데 도적이 하필 그런 군관만 골라서 해쳤다고 하면, 그때는 누가 보아도 윤원형 일당이 억지로 이언적에게 죄를 주고자 빌미를 만드는 모양새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지함 말마따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꺽정이는 결국 마음을 조금 바꾸었다.
내일 낮에 다시 그 향교 주변 물정을 살피고, 이상한 동향이나 그들이 쓸 만한 허점이 있는가 찾아본 다음 해 떠 있는 동안 최대한 준비하여 밤에 향교를 들이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문제의 향교 주변을 직접 살펴보러 나간 꺽정이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방 돌아왔다.
“대숲이라?”
“그렇소. 딱 은밀하게 향교로 가기 좋게, 향교 뒤편 산자락 따라 대숲이 펼쳐져 있더이다. 그리고 군관이나 군졸은 얼마 되지도 않을 뿐더러 대숲 쪽에는 아예 없고.”
“놈들이 함정을 파두기에도 좋은 곳이겠구나. 장계취계(將計就計)를 할 만하다.”
곧장 두 사람이 계책을 마련한바 대강은 이러하였다.
필시 그 대숲에는 윤원형이 군관 사이에 섞어 보낸 끄나풀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다.
그러므로 꺽정이가 패거리를 이끌고 대숲 가장자리 따라 난 오솔길 따라 움직이며 저쪽이 차마 달려들지 않을 수 없게끔 시선을 끈다.
그리고 불우한 이들이 횡액 당하는 동안, 이지함은 대숲을 가로질러 향교 쪽으로 달려간다.
일이 잘 풀리면, 진짜 군관들은 상하지 않고 끝날 것이요, 이지함은 이언적에게 가서는 의민당이라는 이들 있으며 장차 척신(戚臣)과 폐행(嬖幸)의 무리를 쓸어내고 나라 바르게 하는데 힘을 빌려드리고자 하니 모쪼록 챙겨달라 말을 전하고 나올 것이다.
허나 세상 일이란 본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해는 저물고, 민가 사이에서 간혹 올라오던 밥 짓는 연기도 모두 흩어져, 겨울 찬바람만 스산하게 부는 밤이 되었다.
“다들 잊지 말거라. 이 오밤중에 대숲에 숨어 있는 작자가 떳떳한 놈일 리 없다. 지금부터 앞에 인영이 나타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찌르고 베면 된다. 알겠느냐?”
꺽정이가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당부하자, 모두가 숨죽여 대답했다.
“사형도 몸조심하시오.”
“이렇게 환도 차고 온 것 보이지 않느냐. 나도 어디 가서 꿀릴 무재(武才)는 아니다.”
오히려 꺽정이가 봐준다면 그럭저럭 대련 흉내는 낼 만큼까지 올라왔으니, 선비들끼리 활 대신 검으로 겨룬다면 이지함보다 나은 이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가 보겠소. 자, 가자!”
스르륵 소리와 함께, 환도와 단창 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오솔길 따라 적당히 기척 숨기는 시늉만 하며 잰걸음한 지 한 각쯤 지났을 무렵.
“웬 놈이냐!”
무성한 시누대 사이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답변까지 해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겅- 소리와 함께 뜨뜻한 것이 흩뿌려진다.
“옳지. 온다. 내가 놈들 시선 모을 테니 너희도 준비해라.”
비명소리에 이끌려 부나방 달려들듯 대여섯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무리 사람 해쳐본 적 있다지만 제대로 무예 배운 이들 상대하는 것은 처음인 졸개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우리 서원군께서 이렇게 대나무숲을 아끼시는 줄은 몰랐다.”
꺽정이 홀로 태연자약하게 한 발 나서서 그림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한 놈이 그대로 걸려들어왔다.
“그 무슨 소리냐?”
“이 겨울에 대나무들이 얼마나 힘들겠느냐? 그러니까 거름으로 쓰라고 이렇게 단양 고을까지 너희를 보내신 것 아니겠느냐.”
“이놈!”
윤원형이에게 뭐 깊은 은혜라도 받았는가, 분개한 놈 하나가 달려들어와 칼날을 들이밀었다.
피하고, 쳐내고, 벤다.
처연한 비명과 함께 또 하나가 쓰러져 땅을 피로 적셨다.
“그렇게 아니 서둘러도 어차피 오늘 너희 모두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텐데, 성미도 참 급하다.”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남은 다섯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야, 너희도 쳐라!”
그렇게 열 명과 다섯이 붙었다.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가 꺽정이 칼날에 절명하여 다섯은 넷이 되고,
졸개들에게 에워싸인 녀석이 마침내 손도끼 맞아 머리통 쪼개지니 넷은 셋이 되고,
오막손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녀석 등 뒤에서 최만복이가 창을 내지르니 셋은 다시 둘이 되었다.
이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어쭈, 받았냐?”
꺽정이가 가볍게 내리찍는 칼날이 막혔다.
돌아오는 답은 없고 형형한 안광뿐.
“아하, 네놈이로구나. 네놈이 대장일 줄 내 알았다.”
예의 그 눈빛 이상하던 군관이었다.
이번에는 묵직하게 가로로 벤다. 그리고 또 막혔다. 물론 막히기를 기대하고 휘두른 칼날이었지만.
“제법이구나, 흐흐.”
다시 두어 번 힘 주어 때린다. 일일이 받아내는 칼날에 힘이 빠진다.
“멍청한 놈. 너 사람을 베어본 적이 없지? 재주만 있으면 뭐 하느냐. 제대로 한 번 내지르지를 못하는데.”
마지막 한 번. 어김없이 막아내던 칼을 지탱하던 힘이 단번에 빠지며, 옆으로 휙 젖혀진다.
“딴에 오기는 있구나, 녀석. 다음 생에는 어디 좋은 데 태어나서 무과라도 보거라.”
길손 덮치는 범처럼 위에서부터 크게 내리찍는다.
놈은 남은 힘을 쥐어짜 옆으로 몸을 피했다. 꺽정이가 노리던 대로.
칼 대신 거센 발차기에 놈의 몸이 멀리 날아가 대나무에 부딪혔다. 우지끈 소리가 요란했다.
“저기, 저놈 도망칩니다!”
그사이 남은 하나가 나 살려라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야, 오막손이, 창!”
“네, 넵!”
창을 건네받자마자 노리고서 휙 던졌다. 이어지는 비명과 신음, 그리고 정적.
“자, 이제 도망칠 일 없다. 죽은 놈 있으면 말해봐라.”
“죽은 놈이 어찌 말을 합니까?”
“그런 대꾸 나올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그게 바로 죽은 놈 없다는 뜻 아니겠냐, 이놈아.”
손 탁탁 털고 아마 혼절하였을 아까 그놈 명이나 끊으려 다시 칼을 뽑았는데, 그놈 날아가 박힌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달려나가, 대나무 사이로 빠르게 멀어지는 그림자 하나뿐.
그 그림자 향하는 쪽에 향교가 있음을 그제야 깨우친 꺽정이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빠르게 걸음 옮기던 이지함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멀찍이서 들려오자마자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대나무 사이로 기와지붕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그때-
“사형!”
멀리서 꺽정이 외치는 소리 들리자 저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저의 몸 있던 자리를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를 굴릴 겨를도 없이 곧장 환도를 뽑았다. 상대는 이미 꺽정이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이지함을 노려보면서도 부들부들 떨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마 멋모르고 싸움 걸었다가 일패도지하여 달려온 것이리라.
“사제가 나설 것도 없겠군.”
저 역시 손이 떨리지만, 억지로 호기로운 시늉을 하며 칼을 들이댔다.
꺽정이와 함께하기로 한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그러나 내지른 손을 타고 피륙과 살점 베이는 그 느낌 전해올 것이 두려워, 뻗어나가는 칼날이 찰나만큼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찰나를 틈타, 얼음보다 차갑고 불꽃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뱃가죽 꿰뚫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이 절로 꺾이고, 땅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저를 찌르고 달아나는 그림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이지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배의 고통보다 더 얼얼하게 뺨이 화끈거리자 절로 눈이 떠졌다.
“여기서 잠들면 아예 삼도천 넘어가는 것이오! 그리되면 내 사형 기일마다 욕을 한 바가지씩 퍼부을 테니 죽을 생각은 하지 마시오! 야, 야! 빨리! 그렇지!”
만약에 대비하여 챙겨온 무명베 한 필을 최만복이가 재빨리 꺼내 칼로 잘라냈다.
“대련할 때 하도 나한테 얻어맞아서 그런지, 어떻게 급소는 잘 피해서 찔리셨소. 이런 걸로 죽으면 사형도 퍽 억울할 게요.”
곧장 찔린 곳을 꽉 동여매는 꺽정이었다. 꺽정이가 온 힘을 다하니 갈빗대가 부러지는 듯했지만 어쨌든 피는 꽤 멎었다.
“젠장, 이걸 어쩐다...”
정신이 아주 약간 돌아온 이지함이 물었다.
“꺽정아, 지금 내 모습이 어떠냐?”
“어떻긴 뭐 어때. 죽다 살아난 사람 같지. 옷은 옷대로 피칠갑에.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어디 가면 저승에서 올라온 귀신인 줄 알고 까무러칠 사람 여럿 있을 게요.”
“하아... 그렇더냐.”
“사형, 이럴 겨를이 없소. 그놈이 달아났으니 언제 다른 관군을 끌고 올지 모른단 말요. 회재 선생을 뵈러 갑시다, 얼른!”
“아니, 안 되겠다. 너 혼자 가는 게 낫겠다.”
“나 혼자? 하지만...”
“가뜩이나 선비들 눈에 미덥지 못한 우리인데, 거기에 내가 피칠갑까지 해서 나타나면 회재 대감이 얼마나 의심을 하시겠느냐? 그분 눈에 우리 의민당 쓰임새는 싸움질 하나뿐일 텐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한다는 인상까지 주면 곤란하다.”
이럴 때 결정 못 내리고 머뭇거리는 것은 꺽정이 천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크게 한숨 내쉬며 답을 내렸다.
“후, 좋소. 대신 고대로 쫓겨나도 내 잘못은 아니오. 그 꼴 보기 싫으면 얼른 그이 설득할 말의 골자만이라도 추려서 알려주시오.”
“골자랄 게 뭐 있느냐? 이렇게 된 것, 그냥 우리 당 하려는 바를 가감없이 전하는 수밖에. 괜히 네가 억지로 말을 꾸미려 한다면 경계만 살 것이다.”
“알겠소.”
“미안하다. 내 미욱하여 네게 짐만 되는구나.”
“왜 사형이 내 짐이오? 사형 짊어지고 갈 여기 최만복이의 짐이지.”
졸지에 지명당한 만복이는 새삼 억울한 표정을 짓고, 저 뒤틀린 농담이 꺽정이 나름대로 정을 보이는 것임을 아는 이지함은 힘없는 웃음이나마 씩 지었다.
“자, 다들 들어라. 결국 한 놈이 도망하였으나, 이럴 때를 대비하여 밤이 녀석이 객사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니 이게 바로 유비무환이라는 것이다.”
‘나 저 말 들어 봤어’ 하고 눈치없이 한 놈이 딴소리했다가 꺽정이 째려보는 눈빛 보고 곧장 움추러들었다.
“회재 대감은 나 홀로 뵈러 간다. 언제 관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너희는 주막으로 돌아가서 우선 우리 모주의 상처를 돌봐라. 그리고 밤이 녀석이 낌새 이상하다고 말 전하면 즉시 도망하여 산수역 쪽으로 빠져나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당수님’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그럼 움직여라. 사람 죽이느라 고생들 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꺽정이는 홀로 멀찍이 보이는 향교를 향해 달려나갔다.
다사다난하던 밤이 지나고 동틀 무렵, 향교 빠져나오던 꺽정이는 안 보이는 곳에 숨어 기다리고 있던 밤이를 만났다.
그리고 곧장 밤이 따라 주막에 돌아온 꺽정이는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아니, 왜 아직 여기 계시오?”
“달아난 그놈이 끝내 객사 쪽으로 안 갔다더라. 군관들은 저들 옆에 붙었던 이들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아직 자고 있을 게다.”
누워 있던 이지함이 몸 일으키며 말했다.
“헌데 그사이 이곳 주막 주인이 해코지를 당했다. 오밤중에 찾는 이가 있어 나와봤더니 다짜고짜 우리 행방을 묻고, 모른다 하자 바로 찔렀다는구나. 나와는 달리 상태가 위중하다 하여, 오막손이 보내어 의원을 구하는 중이다.”
“잠깐, 설마...”
“그래, 암만 생각해도 달아난 그놈이 우리가 여기 머무는 줄을 어떻게 알아내고서 찾아온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허탕만 치고 간 듯하더라. 돌아온 패거리들 시켜서 저들 봇짐 확인하게 했는데, 사라진 물건도 없고 손댄 흔적도 없었다.”
“그나마 잘된 일이구려.”
“그래. 그렇다 해야겠지. 회재 대감은 잘 뵙고 왔느냐?”
“뭐, 사형 조언대로 잘 말씀드리고 왔소.”
“네가 ‘잘’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모양새였을지 생각하면 어째 내 금창(金瘡, 쇠붙이로 인한 상처)이 덧날 것 같다.”
보나마나 이언적을 대뜸 찾아가서, ‘회재 대감 되시오? 내 나라 뒤엎으려는 임거정이라 하오. 어차피 나라 뒤집혀야 숨통 트이는 것은 나나 대감이나 똑같으니 서로 뒤를 봐줍시다.’ 하였을 것이다.
물론 꺽정이도 배운 가락이 있으니 그렇게 투박하게는 하지 않았겠지만, 닳고 닳은 이언적 귀에 들린 속뜻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다.
“그럼 세세하게는 말씀 안 드리겠소. 우리가 무얼 하기 위해 모인 패거리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여 이렇게 찾아왔는지 정도는 전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이왕 이렇게 된 것, 한 며칠 더 몸을 돌보다가 회재 대감이 영월로 떠나간 뒤에 직접 군수를 뵈러 가야겠다. 퇴계 선생이 회재 대감의 문하에 계셨으니, 지금 확실하게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도 그를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군수 퇴계라면 그, 이황이라는 이 맞소?”
“그래. 일전에 『화담자의』 보내면서 글로써 서로 사귀게 되었으니,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알더라도 해코지하지는 않을 게다.”
“뭐, 알겠소. 어차피 군관들에게 인정 뿌리려고 챙겨온 포목이 많이 남았으니, 사형과 여기 주인 약값 댈 걱정도 없을 것이오. 맘 편히 계시오.”
“고맙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그러자 그 놈의 험상궂은 웃음을 또 지으면서 – 이번엔 정말로 상처가 덧나는 느낌이 들었다- 꺽정이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몸 낫는 즉시 나와 대련 다시 시작해야 할 게요. 뭐? 무재가 꿀리지 않아?”
“인석아, 내 바쁜 사람이다. 당장 제자도 가르쳐야 하고...”
“그러면 그 꼬마 도령까지 나한테 배우면 되겠네. 그 어머니 되는 신씨 부인도 사저께 검무 배운다던데, 자식이 부모의 행실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소?”
효(孝)의 뜻을 그렇게 비틀지 말라고 이지함이 말해주려던 차, ‘앗’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울상이 된 밤이가 곧 들어와 고해바쳤다.
“당수님, 당수님! 제 ‘의’자 완장이 사라졌습니다! 도둑놈이 봇짐을 온통 헤집어놨어요!”
밤이 홀로 밤새도록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저의 봇짐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지함과 꺽정이가 다시 새롭게 고민하던 무렵, 단양군수 이황은 스승 이언적의 부름을 받아 향교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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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이황은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농사에 필요한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단양향교를 옮겨서 재건하는 등 꽤 많은 실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단양의 옛 읍내가 충주호 공사로 수몰되면서 많은 흔적이 사라졌지요.
특히 단양 동헌은 바로 옆에 남한강이 흘러가, 겸재 정선이 그 그림을 그릴 정도로 경치가 수려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또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향교는 수몰되지 않아,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동헌에서 향교가 꽤 멀리 떨어져있다고 작중에 서술한 것은 이를 반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