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굽은 것을 들어 쓰다 (1)
내년이면 나이 열다섯이 될 이이는 어려서부터 주변에 친구로 삼을 만한 또래가 없었다.
강릉과 파주, 한양을 오가며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성정이 괴팍하니 친구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됨 이상하고 하는 짓은 더 이상한 것이 결코 흉이 아님을 임 처사를 통해 보고, 또 스승 이지함을 통해 보았으므로 이제는 당당히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지함이야 자신이 임 처사의 동류(同類)로 생각된다는 데 크게 억울하게 여길 테지만, 유유상종이요 근묵자흑이라. 후회하기에는 몇 년은 족히 늦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아랫말 서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하는 것 구경하기도 벌써 두어 해. 오늘도 담장에 걸터앉아 한눈으로는 책 읽으며 다른 한눈으로는 아랫말의 분주한 광경을 구경하는 이이였다.
“김 서원(書員), 그때 그 조읍포창(助邑浦倉) 쪽에서 받아온 임운(任運, 세곡 대리운송) 계약 말이야, 자네가 맡은 것 맞지?”
“예, 제가 문기(文記)까지 받아서 일전에 박 사임(事任)님 앞으로 보내드렸잖습니까?”
“그거 숫자가 안 맞는다잖냐! 네놈 탓에 별감님 한양서 돌아오시자마자 한 소리 듣게 생겼다. 어디서 꼬였는지 오늘 중으로 찾아내! 그게 얼마짜리인데,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오늘도 아랫말 향리들은 분주하였다. 봉산·재령·평산·서흥 네 고을 아전들이 뒤섞여, 욕지거리도 하고 가끔 나와서 함께 농지거리도 하고, 그러다 다시 욕지거리 듣고 하는데, 이미 그들이 본디 어디 아전인지는 중요치 않게 된지 오래였다.
이왕 거하게 해먹는 것 짜임새 있게 하자며, 서림이 스스로 별감이라 자칭한 이후 서원이니 사임이니 하는 자리를 만들어 여기저기 나누어준 뒤부터는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본래 어디 출신인지는 중하지 않게 되었고, 사임이니 서원이니, 서림이 정한 직책 이름이 더 중해졌고, 또 그 소임이 방납인지, 대립인지, 아니면 이번에 새로 일꾼들 많이 뽑으면서 생긴 이쪽 고임(雇賃, 용역) 인지가 중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의민당 서림의 ‘사업’에 한몫 끼어보려고 육방 아전들의 아랫사람이나 젊은 친족들을 보내오던 것이, 어느새 의민당이라는 커다란 무리 아래에서 함께 일하는 격이 되어버렸다.
“잠깐, 그거 그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본래 있던 서흥 곡식 옮기는 건뿐 아니라, 제가 이번에 발의해서 입안(立案, 공증)까지 받아왔던 재령 세곡 옮기는 건까지 합산해서 계산했다고요.”
“뭐? 언제 그랬나?”
“분명 그때 제가 발의하면서 박 사임님도 살짝 껴드렸지 않습니까? 별감님께서도 한양 올라가시기 전에 듣고 좋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됐습니다. 까마귀 고기 삶아드시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제가 직접 별감님 뵈러 가겠습니다.”
“이봐, 김 서원! 헤헤, 그러지 말고... 이번에 내가 엉? 저기 강음 호방 어르신이랑, 엉? 그, 알잖나. 자네도 껴줌세.”
“휴, 이번만입니다, 박 사임님.”
저 모든 광경이 이이에게는 지금도 새로웠다.
친구뿐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딱히 큰 관심도 없었다. 이이뿐 아니라 오늘날 글공부하는 이들 태반은 다 그러할 테다.
그저 하민(下民)은 하민답게, 마땅히 공경하여야 하는 것을 공경하고 위아래를 지키면 그것이 합당하다 여겼을 뿐.
허나 이이가 그간 살피니, 저들은 저들 나름의 고충이 있고, 욕심이 있으며 심지어 지모(智謀)도 있었다.
당장 지금 저들이 말하던 것도, 서림이나 임 처사, 아니면 스승 이지함이 낸 꾀가 아니라 저들 사이에서 스스로 나온 꾀였다.
능침 옮기는 일 끝나면 – 이제 일이 대강 끝나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 그간 모여들었던 장정을 어떻게 부릴까 생각을 모으던 중, 요새 사람이 없어 운영이 어려운 조창(漕倉, 조운을 위해 세곡 모아두는 창고)의 일을 거들어주고 그 비용을 받자는 안이 나온 것이다.
어디 향리들 뿐일까. 아랫말 민총이 늘면서 부쩍 함께 늘어난 주변의 논밭에서 가을걷이 마무리에 힘쓰는 농군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에는, 자신이, 그리고 만약 자신이 안 된다면 그 자식의 대에라도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것이었다.
그 욕심을 두고서 스승과 벌이고 있는 논쟁으로 생각이 돌아와, 열심히 읽고 있던 『양명선생유언록(陽明先生遺言錄)』을 잠시 덮고 고민에 빠졌다.
보다 정확히는, 막 빠지려던 차에 웬 솥뚜껑마냥 묵직한 것이 등짝에 툭 닿았다.
“어이, 꼬마 도령.”
“임 처사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꼬마 도령이라 부르실 것인지요?”
“거 인사할 거면 곱게 인사만 하면 어디 덧나냐? 그리고 내가 듣기로 양반들은 관례 치르기 전까지는 다 꼬맹이라고 했다.”
임 처사 출신이 한미하다 못해 떳떳하지 못할 지경임은 이이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궁금하여 언제고 내력을 물었더니 스스로 밝히기를 저의 이름은 꺽정이고, 그 이름 또한 스스로 지은 것이며, 성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것이 양반들 관례 치르며 자(字) 받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장가 안 간 것은 마찬가지지만 저는 어른이요 이이는 애라는 것이 임 처사 논변의 골자였다.
“저도 내년이면 열다섯이니 관례 족히 치를 나이입니다. 이대로면 제때 치르기는 어렵겠지만요.”
저 ‘이대로면’이 무슨 뜻인지 꺽정이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너도 들어 아는 게로구나. 꼭 그런 데서만 눈치가 좋다니까.”
“어찌 모를까요. 스승님께서 요새 한숨이 퍽 늘어나셨던데.”
“실은 그 때문에 찾아왔다. 너희 스승님 어디 계시냐? 별채는 비어 있던데.”
“잠시 청석골 올라갔다 오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듯합니다.”
“그래? 산채에 계신 장인어르신 뵈러 가셨나 보네. 나도 지금 당원들 데리고 올라갔다 오는 길인데. 길이 엇갈린 모양이로구만.”
‘데리고 올라갔다 옴’이란, 지난 초가을에 의민당 데리고 한양 다녀온 이래 꺽정이가 매진하고 있던 정병(精兵) 조련의 일부였다. 우선 산을 바람처럼 타고 다닐 수 있어야 뭐라도 한다는 생각으로, 등에 묵직한 짐 짊어지고 산길 뛰어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아마 지금 거리에 나가면 곳곳에 힘 빠져 널부러진 당원들이 발에 치일 것이다.
“뭐, 약골 놈들 기운 차릴 때까지 할 일도 없는데 그러면 별채에서 기다리기나 해야겠다. 서림이 괴롭히는 것도 요새 통 그쪽이 바쁘다 보니 재미가 없단 말이지.”
비록 이 일대에 이지함 얼굴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자주 얼굴 보여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이 가르칠 때는 아랫말에서 가장 널찍한 서림이 집 별채에 머물면서 이곳을 글방으로 쓰고 있었다.
“야, 여기도 오랜만이다. 그때 너희 어머니 되시는 분께서 쳐들어오셨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
“쳐들어오시다니요. 그냥 찾아오신 것이지.”
“뭐, 어쨌든. 그나저나 꽤 모습이 달라졌다?”
바닥에 깔아두고서 온갖 왕조의 흥망성쇠를 재현하던 중원의 지도는 한껏 지저분해진 채 벽에 걸렸고, 그 옆에는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종이마다 빼곡하게 문장이 쓰여 있는데, 이제 보니 개중 지워진 것도, 지운 곳 옆에 새로 쓴 것도 있고, 떼었다 붙인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서림이가 보았더라면 지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의 새집에 무슨 짓이냐고 기함하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저의 재물은 퍽 아끼는 사람이라.”
“서 별감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게는 아무 소리 안 하던데요.”
“그래? 그럼 아마 너희 어머니 덕이 클 게다.”
‘남의 집 아이 기를 왜 죽이느냐’라는 말을 빙빙 돌려가며 서림이를 꾸짖는 사임당 신씨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다. 서림이도 그런 꼴 당하기 싫으니 아마 어지간해서는 별채에 접근도 아니 하려 할 테다.
“그래서 저게 다 무엇이냐? 지도야 그렇다 쳐도...”
“저와 스승님 둘이서 합의한 논점들을 정리해둔 것이지요.”
“논점이라?”
치세의 요결(要結)을 놓고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고금 수천 년을 오가며 한 해 남짓 얘기하고 또 다툰 끝에 합의한 논점이란 대개 이러하였다.
첫째, 치세의 도에 상도(常道)란 없으니, 사람의 성정과 사람 사이의 도리는 변하지 않을지언정 사람의 수와 그들이 먹고사는 방법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요순의 대에는 사람이 적어 마음만 먹으면 논밭을 갈고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임금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여겼으며, 나라는 오직 오랑캐와 사나운 짐승을 제압하면 되었고, 위에 누가 있든 그저 인덕만 있으면 족하였다.
그러나 하우(夏禹, 우임금)의 대부터는 사람이 늘고 농경의 술기가 발전한바 논밭에 물을 대어야 했고, 그러므로 치수(治水)를 위해 나라를 꾸렸다. 군주 한 사람의 덕보다 한 번 일으킨 대업이 계속 이어지도록 함이 더욱 중했으므로 이때 비로소 세습의 법을 세웠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던 때에는 사람이 더욱 늘고,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방도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를 다스리고자 옛 예의 대의를 되살리되 산삭(刪削, 편집)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절차탁마(切磋琢磨)와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모두 이를 이르는 것이었다...
“그만!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해라. 머리가 아파지려 한다.”
꺽정이가 짐짓 귀 막는 척 하며 이이의 입을 닫으려 했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내 스승되시는 화담 선생께서는 어려운 경전도 쉽고 재밌게 풀어서 말씀하시던데, 너는 어떻게 쉬운 말도 그렇게 어렵게 돌려 말하냐.”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
둘째, 무릇 권병(權柄, 권력)이란 하나로 모으면 반드시 썩어 문드러진다.
그러므로 순임금은 신하 다섯을 두고 자신은 오로지 그 가운데를 잡았을 뿐(允執其中). 공자 또한 이를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것이라 찬탄하였다.
반면 진시황은 천하의 정사를 모두 자기 한 사람에게 모았으며, 국법의 일은 오직 이사(李斯)에게 일임하였다. 그리고 이사가 마음을 돌리니, 장성을 쌓고 호수를 메우는 권세를 지녔건만 후계조차 마음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군신(君臣) 사이뿐 아니라 각 신하들 사이에도 권력을 나누고, 서로 믿고 의지하되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하여야만 사람이 바뀐 뒤에도 인정(仁政)이 대를 이어 계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네가 나에게 모욕을 주는구나. 이게 어딜 봐서 쉬우냐?”
“아니, 그러면 애초에 묻지를 마셨어야죠.”
“이제 됐으니 그만하거라.”
“어차피 하실 일도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반면 셋째, 모든 사람의 심성에는 욕(欲, 욕심)이 있으니, 이것을 가르치고 이끌면 비로소 나라가 다스려지고, 억지로 막고 비틀면 나라는 어지러워진다는 데서는 의견이 크게 갈렸다.
그제야 꺽정이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래, 이건 조금 재밌는 말이로구나. 욕심이라.”
꺽정이가 결코 어디 가서 사서삼경에 통달했다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소위 선비님네 학문이 검소함을 말할 뿐 욕심을 다루지는 않음을 알고 있었다.
“실은 여기서 아직도 스승님과 제가 뜻이 갈리고 있습니다. 암만 그래도 과욕(寡欲, 욕심이 적음)을 통해 무욕(無欲, 욕심이 없음)에 이르는 것이 옳다고 스승님께서는 보고 계시고요.”
“그러면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반대지요. 저 세 번째 종이도 스승님께서 떼어내시면 제가 몰래 붙이기를 지금 며칠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욕심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게냐?”
“좋다기보다는 그 또한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의 심성이 선하다는 것은 곧 성(性)이요, 그 안에 욕심이 들어 있어 스스로 발하는 것은 기(氣)인데, 정자(程頤)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완비되지 못한 것이다 (論性不論氣 不備)’라 하셨으니...”
저놈의 입은 어떻게 정도를 모를까. 꺽정이가 마침내 눈을 부라렸다.
“밤골 도령아. 네가 정녕 도술을 몸으로 겪어보고 싶으냐?”
“도술이라는 건 없다고 스승님의 다른 동문 되시는 분께서 널리 밝히셨다 들었습니다.”
“충분한 힘은 도술과 구분될 수 없는 법. 한 번 겪어본 뒤에 다시 생각해봄은 어떻겠느냐.”
마침내 이이가 말을 멈췄다. 물론 온힘 다해 달려나가는 사람이 단번에 멈출 수 없듯, 끝내 몇 마디가 더 튀어나온 뒤에야 겨우 멎었지만.
“에, 그러니까 어쨌든 욕심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뜻입니다. 이게 다 여기 아랫말 돌아가는 모습 보고 생각한 이치지요.”
저 마지막 말이 다시 꺽정이의 흥미를 돋웠다.
“그래? 어쩌다가...”
“아, 그것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에라이, 젠장.”
겨우 잠시 막은 이이의 말문이 다시 트이게끔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꺽정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흠흠, 그러니까 요지는, 욕심을 아예 없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오직 이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가 스스로 선(善)을 이루도록 함이 치세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막히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대개 부정한 쪽으로 흐르게 되고, 부정한 이익은 대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 이상으로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지요.
위에서 보는 쪽에서는 백성의 욕심을 아예 막아 없애는 쪽이 편하다 여기겠지만, 아래에서 보면 또 다른 법입니다.”
그 말이 한 귀로 들어가 다른 쪽으로 나오니, 슬슬 이놈의 사형은 언제 돌아오나 싶어 멀리 청석골 쪽 바라보던 꺽정이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아, 그렇지. 그건 맞는 말이다.”
“예?”
“아니, 별 것 아니다. 너 하고 싶은 말 마저 해라. 흐흐...”
아직 꺽정이가 저런 웃음 짓는 것이 무슨 뜻인지 겪어보지 못한 이이는, 그러려니 하고 저의 하던 말을 재잘재잘 마저 풀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제 입으로는 질색을 해도, 어쨌든 이이의 말을 다 들어주는 (그나마) 동년배 사람이라면 이 임 처사뿐이었던 것이다.
이이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때까지도 이지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아랫말 곳곳에 지쳐서 퍼져 있는 의민당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불운한 소식이었다.
꺽정이는 아랫말 옆 너른 풀밭에 놈들을 모았다. 행인들이 힐끗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고작 이 정도로 지쳐 쓰러지면 어쩌자는 게냐? 자, 다들 일어나라!”
“예... 당수님...”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응답이 돌아왔다.
“자, 다들 섬(곡물을 담는 자루) 다시 짊어져라.”
꺽정이 딴에는 옛날에 자신이 힘을 기른답시고 스스로 이것저것 들어보며 단련하던 것이 떠올라, 한 번 녀석들에게도 시켜보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 몸에 힘줄이 두드러지고 군살은 빠지는 것이 보였으므로 그 효험을 알만 하였다.
다만 이놈들이 의외로 약골이라, 금방 나자빠진다는 게 한 가지 문제였다.
“이놈들아, 어떻게 내가 열 살 먹었을 때보다도 힘이 약하냐?”
“그건 당수님이 천하장사라 그런 것이지요.”
“네놈은 남들보다 서른 번 더 앉았다 일어났다 할 줄 알아라.”
대꾸하는 녀석에게 응당의 보상을 주었다.
“이보시오, 당수님!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가?”
“아니, 모주님, 어디 가셨다 이제 오시오?”
때마침 이지함이 내려와 말을 붙이니, 엉거주춤 일어나던 졸개들은 은근슬쩍 섬을 내려놓았다.
“마침 잘 오셨소. 내 모주님 오시기 기다렸는데. 내 이놈들 단련하는 것만 조금 보고 가겠소.”
꺽정이 말에 다들 낙심하여 ‘아이고 맙소사’ 소리가 튀어나오던 차, 꺽정이가 졸개들에게 달콤한 말을 던졌다.
“내 이제 보니 너희들 중 꽤 힘 좋은 놈도 있고, 근래 빠르게 힘줄 붙은 놈도 있는 것 같다. 그런 놈들은 이제 이렇게 열심히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당수님!”
“흠흠, 제 어깨를 보십쇼. 몇 달 전보다 곱절은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아직 모자란 놈들도 많지 않으냐? 그러니 너희끼리 섬 드는 것으로 겨루어서, 가장 나은 열 놈은 앞으로 여기서 빼주고 대신 남들 단련 감독하는 일을 맡기겠다.”
그 말에 모두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저는 빠지고 남들을 대신 갈구겠다는 그 순수한 악의가 참으로 도적들다웠다.
“자, 이제부터 서로 겨루어라.”
자신이 밤골 도령 이이의 세 번째 논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을 꿈에도 깨닫지 못하는 꺽정이가 말했다.
그 난리법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지함을 데려온 꺽정이가 곧장 말을 붙였다.
“사형, 사형이 참 제자를 잘 두었소. 그 제자를 데려온 사람부터가 원체 대단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기껏 기다렸더니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흰소리나 할 생각이라면 난 그냥 가련다. 내려온 길에 한양의 그 각미사인가 하는 젊은이들 들려줄 글이나 한 통 써서 보내야지.”
“아니, 들어보시오. 지난번 한양 다녀온 이래 계속 앞으로의 계책 가지고서 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았소?”
그들 사이에 요새 골치아픈 이야기를 꺽정이가 단도직입으로 꺼냈다.
부민고소 금하는 법을 영영 철폐하였고, 꺽정이도 죄를 전혀 받지 않았으니, 이것이 훗날 역모나 다른 고변에 옭아매어 극형을 내리기 위한 밑수작이라는 데는 이지함도 동의하였다.
또한 윤원형 자신이 나서지 않고, 대비와 이기가 나서는 모양을 만든 것도 불길한 일.
아마 대비는 양종 복설이라는 미끼로 끌어들이고, 이기는 봉산군수 이원수가 그 친족임을 이용하여 꼬셨을 터이다.
언제고 이기가 늙어 죽든 ‘병사’하든 하게 되면, 그때 반드시 윤원형은 부민고소를 다시 금해야 한다며 그간 방자하게 수령을 고소하고 든 이들을 벌하려 들 것이다. 그 맨 앞에는 의민당이 있을 것이요, 멋모르고 윤원형에게 또 반기를 든 사림이 있다면 그들 또한 엮여들어갈 것이다.
자전이 부민고소 허용에 한 발을 걸쳤으니, 이를 빌미로 옥사가 벌어진다면 기껏 병해가 자전의 마음 사로잡은 것은 무용지물이 될 터.
더구나 이언적을 통해 도성의 사림들 마음 움직이려던 것도 윤원형이 양종 복설을 부민고소와 함께 꺼내들면서 온통 뒤흔들리게 되었다. 의민당의 편을 들어주려던 이들조차 불교 탄핵에 먼저 마음을 기울이게 될 것이요, 조정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이준경·상진 등은 애초에 사림이 여기에 엮여들어가 또 한 차례 사화 겪는 것을 막으려 온 힘을 다할 것이다.
본디 오 년 기한을 두고 준비하던 대계였다. 그때부터 고작 두 해가 채 되지 않았으니, 윤원형이 언제 칼을 내리칠 지는 몰라도 결코 다섯 해를 모두 채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그간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각미사 같은 이들이 도성 안에 있고, 또 꺽정이가 기지를 발휘해 도성 인근 백성들에게 의민당 완장을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도성의 모든 경군(京軍)을 끌고 올라올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한들 족히 수천 병력은 상대해야 할 터.
꺽정이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과감하게 나서자 하고, 이지함은 그날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우선은 숨을 죽이자 하여 뜻이 갈렸다.
“... 그런데 말이오, 내가 저 밤골 도령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이 있었소.”
“그게 무엇이냐?”
“우리야 윤원형이 조정 위에서 농간 부림을 아니까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지.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아래쪽에서 보기에는 어떻겠소?”
“아!”
그 죄라면 다른 수령들보다 조금 탐학하였다는 점, 그리고 아래의 아전들이 의민당과 손잡고 바로 그 의민당을 고발하라 충동질하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 뿐인 우봉현감 김대는, 의민당이 한양 나아간 이래 시름시름 앓다가 저의 부정을 스스로 고해바치고서 사직하였다.
그러니 물정 어두운 이들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임 처사 일성호령에 수천 의민당이 모여 숭례문 틀어막으니, 하루 만에 나랏님도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었으며, 임 처사는 곤장 한 대도 맞지 않고 멀쩡하게 봉산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보이겠지.”
“네 입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낯 아니 간지러우냐?”
“중한 건 그게 아니잖소. 이렇게 떠오르는 권세로 보이게 되면 뒤늦게나마 영합하려 하는 얼간이들이 도처에 있을 것이라는 게 중하지. 물론 윤원형이 칼을 빼 들면 곧장 그런 착각도 사라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최대한 써먹어보아야 하지 않겠소?
당장 서림이 얘기 들어보니 벌써 강음과 우봉 아전들도 사람 보내오기 시작했고, 또 저기 두 군데 조창에 있는 판관들도 이번에 추수한 세곡(稅穀) 옮기는 일이 잘 되면 내년이랑 내후년에도 계속 함께 일하자고 뜻을 밝혔다 하더이다.”
이지함도 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서 별감까지 만나러 가자꾸나. 시일은 촉박하고 할 일은 많으니, 우리 당이 먼저 손 내밀면 따라옴 직한 이들을 죽 정리해봄이 마땅하겠다.”
그리하여 능침 옮기는 일 마무리하고 막 한양에서 돌아온 서림이에게 당수와 모주 두 사람이 들이닥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 당에 빌붙고 싶은데 때를 놓쳤다 여겨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 그리고 우리 당이 호구로 잡을 만한 어리숙한 사람. 이 두 종류를 떠올려보면 된다는 말씀이시오?”
“그렇다네.”
“우선 전자라면 황해도 각지의 유생들이 있겠소. 지금까지 우리 의민당을 닭 소 보듯 하면서 은근히 멀리하고 있었는데, 이제 후회가 막심하겠지. 우리가 대계를 꾀한다면 이들을 한데 묶는 것은 꼭 필요하오.”
아직 그 대계가, 남의 도움 없이 의민당 대 윤원형 모양새로 맨몸으로 부딪히는 쪽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모르는 서림이 가볍게 ‘대계’를 입에 담았다.
“선비들이라. 하긴,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만 해도 머릿수가...”
“꺽정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눈빛에 꺽정이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호구들 생각하느라 뭔가 저의 등 뒤에서 얘기 오감을 눈여겨보지 못하던 서림이 곧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을 하나씩 읊었다.
그리고 맨앞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높은 이였다.
“주세붕(周世鵬)?”
종종 들어본 이름에 이지함이 고개 갸웃하니, 향리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에 밝은 서림이 부연하였다.
“금년 여름에 부임한 남궁숙(南宮淑) 그이가 갑자기 중병이 들어서, 이번에 이 주세붕이라는 분이 새로 부임하게 되었다 합디다.
듣기로는 사람됨이 썩 치밀하지 못하고 학교 세우는 일과 백성들 구제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하던데, 우리가 아직껏 해주 고을에는 감영이 있어서 제대로 발을 못 뻗쳤으니 의민당 당세(黨勢) 넓히기에는 지금이 호기라 하겠습니다.”
보통 그렇게 한두 가지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과 엮이게 되면 피곤한 일도 따라오기 마련이라, 꺽정이는 어째 께름칙하게 여겼다. 그러나 짧은 시일 내로 해볼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자고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이었고, 관찰사만큼 황해도 한 도 냉큼 삼키는 데 도움 되는 인연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 주세붕 앞으로 연통이 가기를, 도내의 학풍을 일신하는데 마음이 있다면 의민당에서 힘껏 돕겠노라 하였다.
향리들 사이의 풍문대로, 해주 감영 당도하자마자 해동공자 최충(崔沖) 배향한 서원을 세우고자 하고 있던 주세붕으로서는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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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추앙되면서 기록이 많이 윤색되기는 했지만, 이이가 스승 백인걸 아래에서 평생의 지우 성혼을 만날 때까지 변변한 친구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대화를 할 만큼 ‘멀티태스킹’에 능했다는 것은 모두 이이와 그 주변인들 – 특히 성혼 – 에 관한 기록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중간에 언급되는 황해도의 두 조창은 모두 예성강에 있던 조창으로, 황해도 해안과 내륙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옮기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개간이 활발해져 황해도 미곡 생산의 중심지가 해안으로 옮겨가자 이들은 빠르게 유명무실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굳이 조창에서 한 번 모아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것보다, 가까운 해안으로 운송하여 배로 한 번에 한양으로 옮기는 쪽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16세기에 이르게 되면 다른 국역과 마찬가지로 조운 또한 문란해졌는데, 이로 인해 창고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그리고 제때 세곡을 모아 수송하는 것 모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관에서 직접 세곡을 나르는 대신 사영 조운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양성화되게 됩니다.
이이가 읽고 있는 『양명선생유언록』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의 어록과 유고를 모아 발간한 책입니다. 약 30여 년 후 이를 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전습록』이 발간되어 조선을 포함하여 널리 퍼지게 되지요.
훗날 소수서원이 되는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으로 교과서에도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주세붕은 학문과 문장에 밝았다는 평과,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시세에 뇌화부동하였다는 평이 동시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는 이준경, 상진 등 명종대에 끝까지 조정에 남아 국정을 운영해나갔던 대신들 대부분에게 붙는 논란이었고, 이들에 대한 처우는 훗날 선조대 붕당으로 이어지는 뇌관이 되기도 합니다.
원 역사에서도 주세붕은 1549년부터 1550년 초까지 잠시 황해도관찰사로 봉직했습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최충을 기리는 수양서원을 세웠다는 것을 보면, 아마 부임 후 최우선 도정과제로 서원 건립을 추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운 백운동서원이 바로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재정비를 거쳤으며 마침내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때에 이르러 겨우 체제가 완비되었음을 고려하면, 행정가로서의 주세붕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