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35화 (35/259)

12. 굽은 것을 들어 쓰다 (2)

이 무렵 의민당 패거리에 한 가지 우환이 있으니, 상놈들이나 향리들, 시골 유생들 대할 사람은 많이 있어도 학문이 깊고 지체 높은 이를 대할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었다.

이지함 정도면 손색이 없겠지만, 대역죄인의 탈을 아직도 벗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이이는 아직 너무나 어리고, 서림이는 선비라 하면 주눅부터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며, 꺽정이는 일전에 이언적 만났을 때처럼 앞에 있는 사람이 선비건 노비건 제 할 말 가감없이 하는 게 문제였다. 사임당은 암만 당차다 하도 여인이라, 외간 남정네들을 만나러 다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할 터. 꺽정이, 이지함, 서림, 사임당 신씨 등이 모두 모여 고심한 끝에 나온 궁여지책이란 이러하였다.

꺽정이는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고, 서림이 따라가서는 해주 감영 아전들을 구슬려서 그들로 하여금 주세붕을 대신 움직이게끔 하기로 한 것이다.

해주 감영 당도하자 이방이 곧장 나와 허리 숙이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는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어이쿠, 임 당수님 오셨습니까요, 헤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헌헌장부가 따로 없으십니다. 해주 감영서 이방 노릇하고 있는 임 아무개라 합니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가계(家系)가 맞닿지는 않았을지...”

‘이리 오너라’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외삼문 한쪽이 발칵 열리더니, 마치 ‘나 아전이오’라고

밝히는 듯한 생김새의 이방이 튀어나와 인사와 아첨 겸한 말을 건네었던 것이다.

‘가계가 닿았을 리 있겠소? 나는 백정이고 그대는 상놈들보다 한끗 위에 있으면서 마치 하늘 위에 있는 양 착각하는 아전인데?’

...라고 비아냥거리지 않을 만큼의 지각은 있는 꺽정이가, 대신 감사또 나리 여기 계시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답하기를,

“감사또께서는 수양산 자락에 가 계십니다. 그곳에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그 옆에 서당, 아차, 서원을 새로 지으려 하시고 계십지요.

이왕 서원의 일을 논의코자 오셨으니 직접 그쪽으로 찾아가심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 이 사람이 향도(길잡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길잡이 노릇 하면서 의민당에 연줄 붙여보겠다 하는 욕심을 감추지 못하는 이방이었다.

“그러면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그쪽으로 가십시다. 그리고 여기 우리 서 별감과도 인사 나누시오. 우리가 장차 함께 나눌 말이 아주 많으리라 믿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방이 꺽정이만 알아보고 저는 놓쳤다는 데 은근히 토라진 서림이에게 그제야 이방도 아는 체를 했다.

수양산으로 향하는 내내 서림이는 이 무례를 두고 이방을 은근히 갈구었다. 굳이 따지면 서림이 그의 조카뻘이나 될 텐데, 어찌 저리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달달 볶는지, 어째 두어 해 사이 실력이 늘어난 듯했다.

그리고 저렇게 들볶으면 들볶을수록 의민당이 해주에서 거둘 수익은 늘어날 것이었다.

“아, 마침내! 저곳이 바로 그 사당입니다. 저기 그 옆에 보이는 게 감사또 나리 행차입니다.”

한참 걸은 뒤, 천만다행이라는 듯 이방이 말했다.

곧 다가가니, 쓰러질 듯한 낡은 사당 앞에 관복 입은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퉁방울눈. 얼추 보아도 공부 열심히 한 선비 같은 느낌이니 바로 주세붕이었다.

“인사드리오. 소인 의민당 이끄는 임거정이라 하오.”

“임 처사 아래서 당무를 맡고 있는 별감 서림이라 합니다.”

“... 관찰사 주세붕일세.”

영 석연치 않아하는 낯빛과 말투. 그제야 꺽정이와 서림이 모두 주세붕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감영을 비우고 이곳 수양산 자락에 와 있던 것은 서원 건립하는 일을 현장에서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눈치 채고 알아서 돌아가라는 뜻이었음을.

허나 의민당과 연줄 만들 생각에 눈이 먼 이방이 아니었더라도, 점잖은 선비 대하는 데 익숙지 않은 꺽정이와 서림은 눈치없이 곧이곧대로 이곳까지 찾아왔을 터였다.

“임 당수, 그대 당의 제안은 내 기껍게 받았네. 이곳 사당으로 말하자면 전조에 최 문헌공(최충)을 기리며 세운 사당인데 어느새 이렇게 퇴락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일세. 그러나 이를 드러내어 빛내는 데 굳이 그대 당의 재물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야.”

꺽정이 일행이 찾아오기 전, 이지함이 공들여 ‘처사 임거정’ 명의로 된 서한을 보내어 서원 건립 돕겠다 제안하였던 것을 트집 잡는 주세붕이었다.

“그대 당이 도적을 추포하고 여러 일을 경영하여 민리(民利)에 보탬은 이 사람도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그대 당이 모은 재산도, 또 들여오는 서책도 결국 말업(末業, 상업)의 이익에 기대어 얻은 것 아닌가?

그저 이 사람이 전답과 전부(佃夫, 소작농)를 구하여 서원의 재정을 마련하고, 서책은 내 사사로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태면 될 일일세. 그대들 뜻은 가상하나, 동방의 옛 성현의 이름을 기리는데 어찌 떳떳하지 못한 도움을 받을까.”

관찰사가 일개 상민 둘을 대하는 것 치고는 매우 정중하게 퇴짜를 놓는 주세붕이었다. 허나 일전에 충주서 파옥할 때는 관찰사 눈앞에서 칼부림도 했던 꺽정이었다.

“학문을 널리 일으키는 것이 관찰사께서 품으신 뜻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아닌가 보오.”

꺽정이가 입 열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주세붕의 냉담함에 놀라 가만 있던 서림이, 뒤늦게 ‘아차’ 하고서는 저의 미간을 움켜쥐었다.

“무어라 하였는가?”

“장시를 널리 열고 이런저런 사업 경영하는 것이 부끄럽다 한들, 이 흉년에 오갈 데 없는 떠돌이들 거두어 부려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또한 이 ‘서원’에 붙이려는 전답도 결국 백성들에게서 사들일 텐데, 관찰사께서 뒤에 계시거늘 과연 백성들이 저의 뜻에 따라 순수하게 제 값 받고 땅을 넘길 수 있겠소?”

의외로 서림이 속마음과 같은 소리를 꺽정이가 하니, 서림 또한 잠시 고개 끄덕이다가 지금 그들이 관찰사 – 몇 년 전만 해도 앞에서 눈도 못 마주쳤을 – 앞에서 말대꾸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고서 절로 다시 굳었다.

“후... 나도 이런 말까지는 아니 하려 했는데, 이곳 해주 사람들 사이에서 그대들 의민당 평판이 좋지 않네.”

“사람들이라 하면 유생들만을 뜻하는 것이지 않소? 관찰사께서 다스리시는 황해도에 사람이 과연 그들뿐이겠소.”

못 들은 척 주세붕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의민당은 결국 이익 탐하는 소민(小民) 모임이고, 간혹 사족들 가운데 상종하는 이들이 있으나 대개 봉산 유생 김절과 같이 사족 대접받지 못하는 간악하고 용렬한 자들 뿐이라 하더군.

아무리 그대들이 세력 창성하여 근래에는 도성까지 나아가 국법을 고치는 일을 거들었다지만, 서원은 장차 문운(文運) 북돋고 후진(後進)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하네.”

순박하고 물정 어두운 사람들 중, 오히려 자신이 아는 한두 가지만은 굳은 원칙으로 삼아 꿈쩍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꺽정이 보기에 주세붕이 그런 부류였다.

암만 황해도 일대에서 의민당 위세 높고 한양 다녀온 일로 그것이 한층 드높아졌다 한들, 싫다는 관찰사의 손목을 비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지함과 이이가 조금씩 꺽정이 닮아가는 것처럼 – 사임당 신씨에게는 크나큰 근심이었다 – 꺽정이 또한 사형과 밤골 도령에게 듣는 풍월이 있었다.

”관찰사께 여쭙고자 하오. 대저 학교가 흥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오?”

“그야 배우는 이들이 많고, 스승이 훌륭하며, 향사(享祀, 제사)와 전적(典籍, 서적)의 법도가 완비된 것을 흥성하다 하겠지.”

“아마 의심하고 계시겠지만, 나는 배움이 짧아 학교를 흥하게 하는 일은 잘 알지 못하오. 그렇지만 무언가를 두고 생각이 갈릴 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요결 하나는 알고 있소이다. 바로 같은 곳, 같은 때에 다른 방법을 택하여, 결과가 어찌 달라지는지 견주어보는 것이오.”

너무나 당당하게 꺽정이가 말하니 이번에는 주세붕이 당황할 차례였다.

“아니, 이보게. 어찌 학교의 일을 범상한 내기와 같이 말할 수 있는가?”

“관찰사께서는 어찌 이를 내기라 하시오? 이 또한 격물치지의 이치에 맞닿으니 배움의 길이오. 듣기로 그 서원 역시 관찰사께서 처음 세우신 이래 그 제도가 오래되지 않았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반드시 그 길만이 온당하고 나머지가 그르다 하기에는 아직 한참 이르지 않겠소?”

사실 꺽정이도, 나머지 주변 사정을 똑같게 하고 한 가지만 바꾼 다음 결과를 살핀다는 이지함과 이이의 자칭 ‘격물법(格物法)’이 그냥 내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고매한 학문의 방도가 저자 노름꾼들 내기와 닮았다는 사실이 재밌다고 생각할 뿐.

다만 주세붕 앞이므로 끝까지 이것 또한 학문의 길이라고 바득바득 우겼다.

“흠흠, 소인 서 별감이 말씀 올리겠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저희 당수의 말이 과격하기는 하나, 관찰사께서 배움 일으키시는 뜻에서 그리 어긋나지는 않을 듯합니다.”

보다 못한 서림이 슬쩍 거들기 시작했다.

하나는 우악스럽게 뻗대고 다른 하나는 나름 유들유들하게 타이르니, 결국 주세붕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움직이고야 말았다.

“좋네! 그러면 이렇게 하지. 이곳 수양산에 서원 짓는 일은 그대로 하겠네. 단, 자네들이 이곳 해주에 학교를 또 한 군데 세워 그곳의 운영을 지금 호언한 대로 훌륭하게 할 수 있음을 보인다면, 그때는 이 사람도 서원의 제도에 그대들 의민당 뜻을 일부 담도록 하지.”

딴에는 단호하게 삿된 무리를 배격한다 여기면서 주세붕이 단언했다.

“꺽정아, 내가 요새 깨닫는 게 있는데 말이다. 왜 너희 집안 사람들이 멀쩡한 네 이름 놔두고 굳이 꺽정이라고 새로 이름 붙였는지 알 것 같다. 혼자 보내면 사고를 치기에 서 별감까지 붙였건만 끝내 무효하다니, 다음번에는 정말 신씨 부인이라도 옆에 붙여야 할까 싶구나.”

“놀리는 건 그만하고 대책이나 마련하십시다. 정 그리 아니꼬우면 사형이 수염 밀고 변장해서 다니시든가.”

아랫말 돌아와서 곧장 대책 논의하는데, 이지함이 초장부터 꺽정이 놀리기로 운을 떼었다. 그러나 옆에서 서림이 다른 얘기를 꺼냈으므로 더 이어나가지는 못하였다.

“그... 일이 꽤 번잡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서 별감은 어찌 그리 보시오?”

“제가 직접 만나보니, 관찰사 나리의 성품이, 그...”

“호구는 호구인데 저의 믿는 바는 확실한 호구라 하겠소.”

서 별감에게 물었더니 꺽정이가 말을 이어받았다.

“헴헴, 당수님 말씀이 거칠지만 얼추 맞습니다. 비록 서원의 설립에 재물을 대어 장차 그 운영을 우리 멋대로 한다는 당초 계획에서는 멀어졌지만, 오히려 지금 결론난 바가 더 유리하다고도 할 수 있습지요.”

서림이는 이런 쪽으로 머리 굴리는 데는 비상하기 이를 데 없으니, 모르는 이가 보면 이 또한 도술 같다 할 만 했다.

“제가 살펴본 관찰사 나리 성정이라면, 설령 우리네 새로 세울 글방이 훨씬 뛰어나다 한들 서원 운영의 전권을 넘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관찰사께서 직접 다루실 부분, 감영에서 재정을 지원할 부분 등등을 따로 나누어야 할 텐데, 그러면 그런 부분들끼리 분간하는 일을 누가 맡겠습니까?”

주세붕이야, 스스로 실무를 일일이 도맡는 대신 ‘적당히 아전들 부려서’ 어디까지 감영이 맡고 어디까지 청석골 사람들이 나설지 잘 처리하게끔 하면 된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아전들 마음이 어찌 감영만 향하랴.

결국 감영의 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그에 얽힌 아전들을 회유할 수 있는  – 의민당 사업을 미끼로 내걸 수도 있고, 포흠한 것을 트집잡아 겁박할 수도 있었다 – 기회의 문을 주세붕이 스스로 열어주는 격이었다.

“그러면 학교를 세워 결과로써 신재(愼齋, 주세붕의 호) 선생을 설복시키는 일만 남았군.”

“그렇지요.”

“맞소.”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 눈만 끔뻑이는 갑갑함을 이기지 못한 꺽정이가 다시 그 침묵을 깨뜨렸다.

“아니, 다 얘기해놓고 갑자기 가장 중요한 단락에서 막혀버리면 어쩌자는 게요?”

“그게, 서당 세우는 일이라 하면...”

“나도 낯설구나, 꺽정아. 더구나 나는 전면에 나설 수도 없는 몸이니...”

“저 서원인지 뭣인지도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지 않소? 거리낄 게 무에 있소? 어차피 우리가 서원이든 학당이든 세우면 줄 대고 싶어 눈치껏 달려올 일대 유생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텐데...”

“허나 신재 선생 귀에까지 우리 의민당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들어갔다면, 어지간해서는 학도를 모으기 어려울 테다. 아무리 시골 유생들이라 해도 체통을 귀하게 여기기는 매한가지다. 속마음이야 얼른 달려와 한껏 치부(致富)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쉽게 나서지는 않을 터.”

의민당이 봉산에 모여든 이래, 땅 파먹고 사는 상것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사족들 살림 역시 꽤 폈다. 당장 의민당이 끼어들면서 전호(佃戶, 소작민)들이 조세 떼어먹히는 것이 줄어들었으므로 땅주인에게 떨어지는 바도 늘었고, 또 시골 장터가 갑자기 번화해지면서 물건의 값도 싸졌으므로 이런저런 살림살이도 편해졌다.

하지만 그놈의 체통이 문제였다. 그들이 유생도 아니라며 욕하던 김절은 장사에 손을 대어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강릉의 거족 신씨 집안은 아예 가산 상당 부분을 옮겨와 벌써 크게 이익을 남기고 있다 하건만, 체통 때문에 선뜻 ‘사업’ 함께하자 나서는 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속마음 드러낼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면 되지 않겠소? 예컨대 우리 대신 다른 사람을 내세운다던가, 아니면 말만 그럴듯하게 꾸며서 뭔가 실지로 이득될 바를 미끼로 던져준다던가...”

“오, 임 당수님 말씀이 간만에...”

“간만에?”

“헴헴. 참으로 혜안입니다.”

꼭 잘 나가다가 엉뚱한 말을 붙여서 한 번 욕 먹을 것을 두 번 먹는 서림이었다. 아직도 사임당 만나면 탈탈 털려서 돌아오는 까닭도 어쩌면 저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당수님 말씀마따나, 생각보다 많은 세상 일이 재물로 해결되곤 합지요. 만약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 부족한 것이고.”

그러나 그 재물을 풀어 일을 해결하는 대부분의 부담은 서림과 그 아랫사람들에게 떨어질 것이므로, 따지자면 서림이는 지금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셈이었다.

그 이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림이는 밤새 통곡과 욕설을 번갈아 던져가며 산가지 만지작거리고, 이어서 그 통곡과 욕설, 밤샘은 다른 의민당 향리들에게도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 (코)피와 땀, 눈물이 헛되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꺽정이야 공정한 내기로써 진실을 가린다 말했지만, 애초에 의민당은 도적놈 무리. 이왕 치졸하고 비루한 무리로 불릴 바에야 억울하지라도 않은 쪽이 나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수양산 가는 길목에 있는 낡은 기와집 하나를 사들이고, 청석골 아랫말 장인들을 모조리 보내어 때 빼고 광 내고 있다는 소식 들은 이지함은 머쓱하게 턱을 만졌다.

“이미 우리를 이문 탐하는 잡배로 여기시고 계시는 관찰사 나리신데, 조금 더 치사한 짓 한들 무어라 하겠습니까.”

‘초야의 선비’(이지함)가 대의에 감격하여 써주었다는 ‘대녕학당(大寧學堂)’ 현판까지 달고 첫눈 내리기 전 문을 열었으니, 아직 첫 삽도 못 뜬 수양산 자락 서원은 한참 뒤쳐진 셈이었다.

서원 찾아오는 이들은 무조건 이 학당 앞을 지나쳐 가야 할 터. 더구나 서림이 이지함과 상의하여 만들어낸 계책들은 그 앞을 지나는 식자들을 모조리 방앗간 앞 참새로 만들어버릴 만하였다.

“하기야... 그래서 학도들은 조금 모여들었소?”

“흐흐, 우리 김절 선생께서 힘을 많이 써 주셨습죠.”

다급해진 주세붕도 감영 바깥쪽의 행랑과 객사 일부를 급히 개수하여 임시로 ‘해주서원’을 열고, 장차 최충을 모신 수양서원이 완공되면 그쪽으로 옮길 것이라 하였는데, 뜻밖의 문제에 부딪혔다.

‘아니, 이곳의 서책은 모두의 것인데, 어찌하여 계속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것이... 원생들이 다들 한 번 본 책을 소매에 넣어 챙겨가고 있습니다.’

‘허어, 성현의 말씀을 배우겠다는 자들이 도적의 품행을 익혔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당장 엄하게 말하여 이를 막도록 하게!’

이런 사정을 아전들 통해 전해들은 서림은 곧장 김절과 작당하여 또 다른 비열한 술수를 부렸다.

“자, 자! 지금 우리 학당에 들어오시면 서책을 드립니다! 성현의 말씀은 천리 바깥부터 우리네 안방까지 두루 틀림이 없으니, 어찌 집에 머물러 있다 하여 배움을 멀리하겠습니까?”

김절과 안면을 튼 요양 상인 몇몇은 올해부터는 아예 산동에서 서책만 들여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봉산 장터에서 사들인 유기그릇, 은 따위를 가져가 고금의 온갖 서책을 들여왔으니, 주세붕이 아무리 책 많이 사 모은 것으로 이름났다 해도 비할 수 없었다.

이 사정 모르는 대명 조정에서는, 요동으로 넘어가는 서책이 늘어났다는 것은 곧 여진 야인들이 성현의 말씀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라, 마침내 천자의 교화가 외번(外藩)까지 닿았음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몽고의 엄답(俺答, 알탄 칸)이 다시 무역을 열 것을 요구하면서 매년 변경을 침입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좋은 소식을 듣고자 하는 사람 심리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꺽정이네는 물론이요 조선국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정이었다.

한편, 학당이 공량(수업료)을 조금 세게 받는다는데 불만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예컨대 해주의 유명한 참견꾼 김택(金澤) 같은 이가 그러하였다.

“성현의 말씀을 깨우치는데, 어찌 재물을 논한다는 말이오?”

학당에는 생김새 번듯하고 몸가짐 정갈하여, 이지함이 써준 말을 그대로 읊는 것도 꽤 그럴듯하게 할 수 있는 모산수 이정랑의 서자 이령을 보내두었다. 그쪽에서 전해오는 말을 보면, 그렇게 항의하는 이들도 쉽게 진압된 모양이었다.

“공부자(공자)께서도 육포 한 다발은 받으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렇게 서책까지 나누어드리고 있는데, 어딘가에서는 수용(需用, 비용)을 충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공량은 오로지 배움을 위하여 거둘 뿐이니, 이를 능히 내지 못하는 빈한한 집안의 자제들에게는 이를 면하고 있습니다.”

“흠흠, 우리 집안이 비록 한미하다 하나 예로부터 해주 고을에 적을 두었으니 공량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오. 그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이외다.”

“아무리 소인이 사정 어둡다 한들 어찌 해주 김 생원댁의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또한 저희가 이익을 탐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학당에 다른 사족의 자제를 많이 데려오시면 그 공덕을 기려 공량을 감해드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 그것 참 다행, 아니, 그, 참 좋은 발상이라 하겠소. 내 곧 다시 찾아오리다.”

무릇 곳간에서 인심이 나고, 항산(恒産) 있어야 항심(恒心) 나는 법. 족히 공량을 낼 수 있는  이들이 모여있다 하니, 꼭 의민당과 연줄 만들 생각이 없더라도 빠지는 쪽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사족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만큼 집안이 영락하여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친다는 뜻이 되거나, 주변에 함께 입당(入堂)할 만한 친한 집안이 없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기껏 주세붕이 모아둔 원생들도 하나둘씩 대녕학당 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주세붕이 밤잠 줄여가며 사무를 처리하고 낮에는 직접 나아와 학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겨우 이 사람의 유출을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내기판에서 못된 술수 부리기로 마음 먹은 의민당은 손속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이령이 비록 생김새는 반반하고 일머리도 나쁘지는 않다 하나 본디 무과 준비하던 사람이라 경학에는 족히 밝지 못하였다. 그저 이지함과 이이가 적어준 요강(要綱)을 거의 그대로 읽을 뿐.

그렇다면 내기에서 이길 때까지만 잠시 외부에서 가르칠 이를 구해오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기자전(箕子殿) 참봉 선우춘(鮮于春)?”

“그렇습니다. 평양 부내에서는 아주 이름이 높으신 분이지요. 사람 보내어 설득하느라 인정(人情)도 꽤 흩뿌렸습니다.”

“기자의 후손이 대대로 전해져 기자전 참봉을 맡고 있음은 나도 들어 알고 있소. 허나 솔직히 말해 그분의 학문이 딱히 이루었다 할 만한 것은 아닐 터인데... 신재 선생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데는 결코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것이오.”

“헤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법이라지만, 때로는 짧은 것이 긴 것보다 더 요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러하였다.

주세붕이 가르치는 것은 사람과 우주의 성리(性理)를 다루는 그윽하고도 깊은 학문이요, 멋모르고 재물에 혹해서 온 선우춘이 가르치는 것은 말이 그럴듯하지 결국 경전의 장구만 겨우 새기는 정도였다.

허나 그 배움이 깊지 못한 유생들에게는, 저들이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해주는 선우춘이 그렇지 못한 주세붕보다 훨씬 훌륭하게 보였다.

그뿐 아니라 선우춘이 경학을 가르치면 그 뒤에 종종 서림이 가서 ‘제가(齊家)’의 실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의민당과 연줄 만드는 것이 본 목적이던 이들뿐 아니라 치부에 관심 많은 일반 유생들도 대개 귀 쫑긋 세우고 듣곤 하였다.

“흔히 조세를 내지 않는 것이 이롭다 여기고 은결(隱結, 토지대장에 오르지 않은 전답)을 사사롭게 부치는 등의 방도를 택하곤 하나 이는 잘못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께서는 족히 한 고을의 다스림을 거들 수 있는 분들이시니, 전정(田政)의 옳고 그름을 족히 다루실 수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전세(田稅)를 내시되 이를 본래의 어진 뜻에 맞추어 올바른 양만큼만 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포흠의 명인이 직접 가르쳐주는 절세(節稅)의 비법이라 하면, 체통 지키는 유생들이라 해도 솔깃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당에 가서 그것만 배운다 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이름 높은 숭인전감께 가르침을 받으러 가서 ‘우연히’ 마주친 서 별감에게 좋은 얘기 듣는 것이라면 무슨 흠이 있겠는가?

결국 해가 바뀌어 경술년(1550)이 되자 주세붕도 사세 여의치 않음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조만간 봉산군과 그 일대를 살피고자 직접 행차할 테니, 그때 만나 서원의 일을 재론(再論)하자는 내용의 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청석골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첨언하기를,

“... 금번 학당의 사안은 얼핏 장사치의 계책으로 보이나 그 뒤에는 선비의 꾀가 있는 듯하네. 봉산에 들렸을 때 반드시 그이를 만나보고자 하니 임 당수는 부디 헤아려주게나.”

하였다.

아무리 일처리가 치밀하지 못하고 어수룩한 면이 있다지만, 주세붕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학문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인 사람이라 이만큼은 족히 간파할 수 있던 것이다.

역적의 몸으로 함부로 모습 드러내기도 저어되고, 또 이번 학당의 일이 세력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의 욕심을 이용하는 것이라 여겨 께름칙하게 생각하던 이지함에게는 참으로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꺽정이는 이번 기회에 주세붕도 아예 저들 편으로 끌어들이자 말하고, 이지함은 영 내키지 않던 차. 며칠을 허송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대신 나섰다.

“뭐? 아니 된다!”

“스승님, 허나 저도 이제 나이가 열다섯입니다. 더구나 이번 일은 스승님이라면 몰라도 제게는 참으로 올바른 것인데, 그러니 제가 나섬이 마땅하지 않으련지요?”

이지함이 직접 나서기에 손색 많으니 ‘군수의 영명한 셋째아들’인 자신이 대신 나서겠다며 이이가 주머니 속 송곳 노릇을 자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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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파옥 장면에서 지나가듯 등장했던 이정랑의 서자 이령은 가공의 인물입니다.

한편 ‘참견꾼’이라 언급된 해주 생원 김택은 실존인물로, 1555년 수양서원에 사액(어필로 된 현판을 하사하는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 이름이 실록에 전합니다. 이때 김택은 수양서원의 건립에 얽힌 사연과 그 직후 운영의 어려움을 소상히 밝혔는데, 16세기 중반 황해도 유생들의 각박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1549년 가을, 임지 주변의 명소를 탐방하던 주세붕은 수양산 자락에서 퇴락한 최충의 사당을 발견하고, 이곳에 새로 서원을 지어 사당에 제사를 다시 지낼 수 있게끔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때 주세붕은 향교 옆에 서원을 세우고, 논밭을 마련한 뒤 소작농을 모집하여 재정으로 삼는 한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적까지 아낌없이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세붕이 떠난 직후 바로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하도 원생들이 딴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서적 반출 금지, 기생 출입 금지 (書不得出色不得入)’라는 푯말을 정문에 붙여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는 소장된 책을 훔쳐가고, 크게는 감영 아전과 결탁하여 서원에 딸린 밭을 제것으로 삼으려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김택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청한 것은 이 때문이었지요. 여담으로 당대 주세붕의 서적 컬렉션은 유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록>에 적힌 사관의 논(論)에 따르면 – 따라서 신빙성은 조금 낮습니다 – 백운동서원의 기초공사를 할 때 삼백여 근이나 되는 구리 그릇이 출토되어, 이를 팔아 경서와 최신 성리학 서적 등을 모두 사서 모았다고 합니다. 그 구리 그릇이 정말 땅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양이 방대했다는 뜻이겠지요.

서림이 주세붕의 특강에 대응하여 모셔온 선우춘은 평양 일대에 대대로 거주하며 평양에 있는 기자의 사당인 기자전의 참봉을 지내온 선우씨 집안의 사람입니다. 조선조 내내 소외되었던 평양 사람들은 대신 평양이 기자가 도읍으로 삼은 땅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고, 기자전과 기자묘, 그리고 기자가 설치했다고 알려진 기전(箕田) 등은 모두 이를 상징하는 유적이었습니다.

선우씨가 언제부터 기자전의 참봉을 지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선조대에 ‘대대로’ 참봉을 맡는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조선 중기에는 관례로 자리잡은 듯합니다. 이후 광해군 대에 평양 기자전이 숭인전(崇仁殿)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선우씨는 참봉 대신 전감(殿監) 자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작중 등장한 선우춘의 손자 선우협(鮮于浹)은 스스로 학문을 익히고 삼남의 유학자들과도 교분을 다져서 ‘관서부자(關西夫子, 평안도의 공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된 알탄 칸은 몽골 투메드부의 군주로, 몽골의 중흥을 이끌었던 다얀 칸의 손자입니다. 그 자신은 대칸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나, 사실상 몽골의 지도자로 군림하며 티베트 불교 수용 등의 치적을 남겼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1550년 여름 벌어진 경술의 변, 즉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를 약탈한 사건으로 인해 그 이름이 중국 측 사서에 많이 남게 됩니다.

결국 명 조정은 알탄 칸의 요구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몽골 견제를 위해 중단하였던 무역을 재개하고 1571년에는 알탄 칸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게 됩니다. 이때 알탄 칸이 이끌던 투메드부의 수도로 번성한 도시가 바로 현재도 내몽골자치구의 수부(首府)인 후흐호트입니다.

한편, 이전에도 종종 언급되었던 김절의 서적 밀무역은 당시 명의 요동지배체제 특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명은 요동에 대한 간접 지배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인 개척과 직접지배를 노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른바 요동팔참이라 불리는 산해관-요양, 그리고 요동반도 일부 지역 정도 외에는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고, 그마저도 불안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요동의 통치를 위한 각종 물자를 자급자족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후금에 의해 요동 전체가 넘어갈 때까지 요동의 경제활동은 산동으로부터의 해운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남의현, 2008. “명대 요동지배체제의 특징에 관한 분석: 요동위소제와 삼도분치의 성격을 중심으로”, <강원사학> 23). 이를 틈타 밀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조선인들은 이를 이용해 중국 본토의 사치품을 요양을 통해 밀수해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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