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라의 경사 (1)
대조선국의 모든 것이 모인다고 자부하는 경조(京兆) 한양.
그곳에서도 가장 부산스럽고 인파 번잡한 곳이 있으니, 육의전 앞도, 광통교도 아니요, 바로 서 별감 서림이 기거하는 민주당 당청이다.
“자, 보시오, 아버지, 형님. 이곳이 바로 내 아랫사람들 일하는 곳이라오.”
도성 한 번 올라와 영달한 아들놈 (또는 아우 녀석) 행색 구경이나 하시라는 말에 혹하여 상경한 말대가리와 가도치의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핑핑 돌아가다시피 했다.
서림 따라 상경하여 민주당 사업을 맡아보고 있는 젊은 아전 하나를 붙잡아 안내를 해 달라 하였더니, 기꺼이 – 임 당수 말씀이었으므로, 기꺼이 따르거나 얼굴 어딘가에 멍든 채로 따르거나, 길은 이 두 가지 뿐이었다 – 저의 일은 제쳐두고 당청 안을 함께 돌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들을 소개해 주었다.
고(故) 서원군 윤원형 – 시호를 내린다는 말이 잠깐 돌았는데, 이준경이 한 번 입궐했다 나온 뒤로는 헛소문으로 끝났다 – 의 농장을 처분하여 학당 세우는 일은 얼추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윤곽만 잡힌다고 그치는 일이 아니라, 그 가르치는 바에서 정학과 잡학의 비중은 어찌 조정할지, 고을에 학당이 여럿 있을 경우 학생을 어찌 배분할지 등등, 계속 살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뿐이랴? 『공보』 찍어내어 파는 일도, 종이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음 순(旬, 열흘)에 낼 글은 어떻게 정할지, 그 문장은 누가 쓸지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길 요하는 것들이었다.
“... 허나 요새 저희가 가장 힘쓰는 바는 학당이나 공보의 일이 아니라 바로 방납이지요.”
“방납이라 하셨소?”
이미 반쯤 혼이 빠진 말대가리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였다.
“의민당 시절에도 관에 들어오는 세곡 떼어먹는 것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이문 남는 장사가 바로 방납이었지요.
학당과 공보의 일로 인하여 한양에 있는 모든 경저리들은 이제 민주당과 엮이다시피 하였으니, 이 방납을 전국에 걸쳐 민주당 이름으로 하는 것도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전 녀석이 가슴 확 펴며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게... 되겠소?”
“되고 말고요. 이미 방납은 어느 고을이든 널리 행하고 있고, 다만 그것을 고을마다 자잘하게 조금씩 행하여 중간에 떼먹는 것도, 떼어먹히는 것도 많았을 뿐입니다. 이를 임 당수 위엄으로 하나로 묶어버리면, 놀랍게도 분명 똑같은 토산품을 똑같이 사들이는데도 모두에게 더 이문이 돌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장사의 묘리(妙理)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그렇게 전국 군현의 토산을 하나로 묶어서 관리하는 것이 좀 어렵다는 것인데, 그거야 뭐, 밤샘 좀 하면 될 일이지요. 젊어서 고생해야지 또 언제 하겠습니까.”
아전의 말투에는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는 마음이 역력하였다.
한양에서 민주당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으니, 한양의 양반들조차 서 별감 지나가신다 하면 한 발 비켜설 정도요, 호구가 급한 서생들은 매문(賣文)이라 자조하면서도 향리들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며 『공보』에 실릴 글을 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당무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아전들로 하여금 꼿꼿하게 허리 펴고 다니게끔 하는 것은 바로 그 보람이었다.
향리로 태어나, ‘진짜 양반’은 되지 못한다는 설움을, 그래도 저들 상놈들보다는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억누르며 살아온 아전들이다.
그러나 이곳 민주당에서는 여느 양반보다도 더 바쁘게 살아가면서, 그들 손으로 조선국 사정을 주물러가며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어찌 보람차지 않으랴.
이곳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아전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일 테다. 늠료가 매우 후한 것도 한몫 했겠지만.
그러나 그런 마음 짐작할 턱 없는 가도치와 말대가리는, 그저 그들 눈앞에서 이러한 말이 오간다는 사실 자체에 넋이 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꺽정이는 태연하게 걸어가고, 그 옆에서 아전은 신나게 떠들고, 다른 두 백정은 벌어진 입 못 다물고서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서림이 일 보는 사랑채 앞까지 왔다.
언제고 서림이 말하기를,
‘시각(時刻)이 황금과 같소이다, 당수.’
하였는데, 정말로 일 각의 겨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멋들어지게 꾸민 저의 사랑방은 비워두고 마당에 나와 직접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 서생들 사이에 계신 분이 바로 서 별감 되십니다.”
“아, 저분이...”
가도치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러니까 저 서 별감이란 분이 저의 새 상전인 셈이었다.
헌데 그 새 상전의 상전이 저의 눈앞에 있는 아우 녀석 배도치라는 것 아닌가.
“가도치야, 그냥 생각하는 것을 관두거라. 그게 낫겠다.”
“아버지 말씀이 맞는 듯하오.”
하기야, 백정의 아들이 그냥 백정으로서 양반과 혼인하겠다는 세상인데 이 정도로 놀라서야 되겠는가.
“고생 많았네.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하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당수님. 그저 서흥 출신 김 서원(書員)이 이처럼 당무에 진심이더라, 별감님께 그렇게 한 마디만 해 주시면 평생의 은혜가 되겠습니다.”
“그, 살펴 가시오.”
그렇게 아전 녀석을 돌려보내는 사이 서림이 옆에 또 사람이 둘이나 붙었다.
“좀 기다려야 하겠군.
서림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저기 나이 지긋한 양반이 주세붕이라고, 학당 일 맡아보시는 어르신이고, 그 옆에 좀 추레하게 생긴 서생은 남사고(南師古)라 하는데 공보 일 담당하는 분이라오.”
주세붕은 나이도 나이거니와 본디 사람됨이 둥글둥글하여, 세간에서는 그가 윤원형과 이기의 무리와 결탁하다가 이제는 향리와 어울린다고 흉을 보곤 하였으나 민주당 상것들은 몇 달 사이 주세붕을 존경하게 되었다.
서림 역시 한편으로는 자신이 양반들과 어깨 맞댐을 자랑스레 여기면서도, 저도 모르게 양반 앞에서 주눅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주세붕은 개의치 않고 그를 동등하게 대해주니 – 물론 학당의 재정이 서림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남사고는 병해가 광통교에서 도술 선보인 이래 그와 안면을 텄다가 추천을 받아 들어오게 된 경우였다. 사람됨이 수더분하기는 하지만 자꾸 저의 입맛대로 『공보』에 글을 실으려고 해서 서림과는 종종 다투곤 하였다.
지금도 주세붕 제쳐두고 서림과 남사고 둘이서 손짓발짓하며 격하게 얘기 나누는 것이, 또 무언가를 두고 생각이 갈린 듯하였다.
“공보의 취지는 오직 옳은 소식을 전하는데 있지 않소? 그런데 백정이 여진 야인의 후손이고 이것을 널리 밝히는 글을 싣자 하니 이 사람은 따르기 어렵소이다.
당장 저기 반촌(泮村, 성균관 앞 동네) 재인(宰人, 도축업자)들만 하더라도, 안문성공(안향安珦)이 거느리던 노비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무슨 야인의 후손이라 하겠소?”
“우리 당수께서 손수 양주의 백정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들으신 바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수께서 백정이시니 백정들 사이의 이야기는 더 잘 아시겠지요.”
서림이 슬슬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이니 싫으면 사직하고 나가라’라는 말을 던질까 말까 고민하던 차, 꺽정이가 나섰다.
“『정론보』에서도 곧 백정의 기원에 대하여 글을 낼 것이오. 어찌 남명과 퇴계 두 분 선생께서 거짓말을 함부로 실으시겠소?
반촌 백정들로 말하자면, 아마 안향 어르신께서 원나라를 오가실 때 거둔 이들인가 보오. 여진은 그 선대 금나라 때 몽고와 원한이 생겼으니, 원나라 아래에서 노비가 되지 않고 배겼겠소?”
꺽정이가 서경덕 아래에서 대충 주워들은 것을 저의 입맛대로 짜 맞추어 둘러대었다. 허나 서림 말마따나 백정보다 백정 사정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 조식과 이황 이름까지 대니, 남사고도 더 할 말이 없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용케 참고 기다린 주세붕이 학당 일을 두고 서림이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차, 말대가리와 가도치가 꺽정이 어깨를 한 쪽씩 잡고 마당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야인이 우리네 조상이라고?”
“아, 별 건 아니오. 우리 백정이 항상 천것은 아니었고, 조선 토박이들과 뿌리가 달라서 냉대받았을 뿐이었다고 알릴 심산이오.”
“대체 왜?”
“일전에 고향집에서 찾아뵈었을 때 말이오, 그때 아버지께서 나는 그냥 천애고아라고 치고 혼사 치르라고 하시지 않았소? 그 말씀 절반만 따를 생각이오.
내 색시 삼으려 마음 굳게 먹은 그 처자가 말하기를, 나는 굴레를 벗다 못해 송두리채 부수는 사람이라더군. 내 그것을 잊고 있었소.
그래서 이번 혼사를 기회로 삼아, 아예 백정을 천하게 여기는 모든 놈들의 기를 팍 죽여놓을 생각이오. 우리네 백정들 위세는 드높이고.”
꺽정이에게 재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채찍질할 배필이라니, 월하노인(月下老人)이 천생연분을 찾아준 것인지 아니면 저의 직무를 완전히 내팽개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과 여진 야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가도치가 물었다.
“여진 오랑캐 소리는 백정들 한데 모을 때 내세울 핑계일 뿐이오, 형님. 중한 것은, 우리가 한데 모여 힘을 보여서, 양반이든 상놈이든 우리를 천것이라고 업신여기지 못하게끔 하는 일이지.”
물론 처음에야 그저 명희로 하여금 혼사 단념케 하려고 내세운 거짓부렁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백정들 모을 핑계로도 나쁘지 않았다.
서경덕 문하에서 사서를 겉핥기로나마 공부해보니, 저들 오랑캐들도 한때는 나라도 세우고 잘 나갔던 치들이었다. 적어도 같은 나라 백성임에도 천대받는 백정보다는 북변 오랑캐들이 팔자 낫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쪽 사는 우리야 오랑캐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떠들지만, 정작 북변 가보면 그런 말 하는 작자는 없소. 언제 그 오랑캐 화살이 저의 등짝에 날아와 박힐지 모르거든.
대개 사람이란 저의 모가지 날아갈 계제에 처하면 비로소 예절을 알게 되는 법이오. 그렇게 힘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세월에 백정이라고 박대하는 이 세상 인습을 고치겠소?”
당장 의민당이 거병할 때 저들이 나서는 대신 노복들에게 도리깨 들려주어 내보냈던 황해도 양반들도 난이 끝나자마자 그 노복들을 모두 면천시켜주었다고 들었다.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올바른 일에 목숨을 걸었으니 그 공이 크다고 했겠지만,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혀본 이들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종으로 부리다가 자칫 대가리 박살난 관군 갑사 꼴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백정 또한 그리하여야 비로소 꺽정이 그의 대에 천민 신세를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미 명희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으므로 더 온건하고 길게 돌아가는 길을 택할 계제가 아니었다.
“아, 마침 신재(주세붕) 어르신도 말씀 다 하셨나 보군. 갑시다.”
여전히 별세계 거니는 듯한 심정의 두 사람을 끌고 서림이에게 나아가는 꺽정이었다.
“아, 임 당수. 아까 거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같은 당 사람이니 돕고 살아야지.”
꺽정이가 씩 웃었다. 어째 저런 웃음 뒤에는 골치아픈 말이 따라오곤 하였으므로, 서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급히 도로 떴다.
“그런 뜻으로, 내 혼사를 좀 도와주셔야겠소. 당에서 좀 재정을 덜어내야 할 것이오.”
“그야 당연히 당수님 혼례인데 도와드려야...”
“그런데 어지간한 혼례와는 규모가 좀 다를 게요. 전국의 백정을 양주 고을에 모을 생각이외다.”
“예?”
서림의 입이 일순 막혔다가 그대로 떡 벌어졌다.
“내 혼례는 『주자가례』에 따라 친영례로 치르기로 했소. 어디 여염집도 아니고 신씨 부인의 따님이니까.
그런데 그 예를 따르려면 혼사 치르기 전 우리 아버지께서 집안 사당에 혼례를 고하셔야 한다 하오. 백정 따위에게 뭔 놈의 사당이 있겠소. 그러니 사당 대신 전국 백정들을 모두 모아서 그들 앞에서 혼례 치르겠노라 밝힐 심산이오.
겸사겸사 올바른 혼례 절차를 널리 알리고 백정들끼리 우애도 다질 것이외다. 우리 백정들의 잊힌 뿌리도 널리 알리고. 아무래도 백정 대다수가 까막눈이다 보니 암만 글로 알려도 정작 백정들은 못 알아볼 공산이 크거든.”
“그, 그러면 비용이...”
“꽤 들지. 거기에 백정들이 글을 모르니 누가 가서 알려야 하지 않겠소? 우리 의민당 옛 당원들을 황해도에서 끌어온다 치더라도 품삯은 꽤 쳐주어야 할 테요.”
머릿속으로 얼추 계산을 마친 서림이 겨우 정신을 붙잡아가며 물었다.
“모주님이나 신씨 부인도 알고 계십니까?”
부디 누구 하나쯤은 중간에서 가로막았기를 바라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하늘이 무심하게도 이미 끝난 일이었다.
“내 사형과 그 제자까지 끌어들여 오래토록 궁리한 끝에 내놓은 계책이라오. 신씨 부인도 듣고서 좋다 하시더군. 물론 신씨로 말하자면 그 전에 마루 꺼질 만큼 한숨 푹 내쉬기는 했지만.”
만약 서림이 지금 마당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방 안에 앉아 있었더라면, 능히 신씨의 예를 따라 한숨으로써 구들장도 꿰뚫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너무 손해라고만 생각하지는 마시오. 그렇게 백정을 끌어들이면, 그들이 어디 ‘당수님 잘 뵈었습니다’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겠소? 눈도장 찍은 김에 민주당 당원 하려고 하겠지.
그러니 전국에 우리네 일손을 늘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시오. 장사 크게 하려면 때맞추어 밑천 부어넣어야 할 때도 있는 법.”
“휴우... 알겠습니다. 그러면 때는 언제로 잡고 계신지요?”
“올 가을걷이 끝날 때쯤이 될 것이오. 전국에 소문 퍼뜨리고 사람들 올라오기까지 기다리려면 지금부터 소매 걷어야 할 테지만.”
누구 안전이라고 함부로 ‘안 된다’ 하겠는가.
그 말 오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말대가리와 가도치는, 정말로 꺽정이가 그 임 당수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사이 범상치 않은 일을 마구잡이로 벌이고 행하는 것을 예삿일로 삼게 되었음을 비로소 체감하였다.
“민주당 곳간에 쌓인 미곡과 포목이 적지 않고, 또 달마다 들어오는 것도 상당하기는 하지만, 분명 바닥은 있습니다. 금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벌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힘을 써서 어떻게든 채우도록 하겠소. 이번 혼사는 부담을 감당할 만한 연유가 차고도 넘치는 각시, 아니, 일이오.”
그러면서, 방금 전 서림 앞에서 지은 것과는 생판 다른, 가도치와 말대가리조차 처음 보는 미소를 띄우는 꺽정이었다.
그 미소와 함께, 멀리 이원수네 집 쪽을 무심결에 바라보느라, 꺽정이는 등 뒤에서 저의 아비와 형이 수근대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아버지, 꺽정이 눈앞에 드리운 콩깍지가 나한테만 보이오?”
“저놈 저거 거하게 씌었구나. 대체 얼마나 참한 규수이기에...”
그러나 꺽정이도, 서림도, 말대가리와 가도치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이미 꺽정이가 조선국 하나를 뒤흔들게 될 만큼 권세가 대단해졌기에 그 혼사도 결코 조선국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오월 일일 무자(戊子), 임거정 당수가 민주당 당청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일개 양주 백정이요, 아버지는 임마두(林馬頭)시라 하더라.”
얼마 뒤 『공보』 뒤편의 ‘都도城셩風풍聞문’에 실린 글이었다.
한동안 『정론보』에서 선비의 의권(권리)을 말하려면 일개 백정의 의권도 말해야 한다는 논설과 더불어, 백정의 기원은 본디 전조 말에 귀부한 야인들이라는 기이한 글을 싣고 있었는데, 비로소 이번 『공보』를 보고서 그런 글이 실렸던 까닭을 짐작하게 되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그 논설에 동조하는 이들은, 전후를 뒤집어서 퇴계와 남명 선생 같은 분들이 도성에 계시니 임 당수도 감명을 받고 저의 정체를 밝혔다고 여기기도 했다.
반대로 반상과 양천의 구분이 엄중하거늘 어찌 일개 백정이 나라의 위엄을 농락할 수 있는가 한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와중 양주 고을은 유난히 더 뒤집혔는데, 그로 인하여 졸지에 성이 생긴 임말대가리와 임가도치 앞으로 그간 밀렸던 버들고리 외상값이 정중한 사과 및 두둑한 이자와 함께 와르르 들어오기도 했다.
“또한 더불어 고백하기를, 근래 도성 저자에 본인의 혼사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이 또한 참이며, 소문의 규수는 수운판관 이원수의 삼녀(三女)라 하는데, 혼례는 오직 친영(親迎) 예법에 따를 것이나 집안에 사당이 없는 고로, 전국의 백정을 한데 모아 그들 앞에서 고하겠노라 하더라.”
조식이 노린 대로, 백정이 반가 규수를 배필로 맞이한다는 것만큼이나 혼례의 법도를 친영례로 한다는 것 또한 각지 사족들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천한 백정이 예법을 더럽힌다고 욕하기에는, 당장 저들부터 『가례』를 아니 지키고 남귀여가 풍습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굳이 따진다면 임거정은 양반, 그것도 현직 당상관이니 시골 동리에서 이렇게 세상 일을 두고 불평이나 하고 있는 자신들보다도 더 참된 양반에 가까웠다.
그러니 입은 한 자쯤 튀어나와도, 혼례 자체를 두고 책을 잡지는 못하고 그저 조선국 앞날 걱정하는 시늉이나 할 뿐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 길한 날을 골라 양주 본가에서 경사스러운 예식을 치를 것인데, 이때 백정이 찾아오면 전후 이틀간 숙식을 제공할 것이요, 또한 원방(遠方)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여비로 쓸 포목을 베풀 것이라.”
정작 백정들 중에는 『공보』를 나르는 이들은 있어도 이를 능히 읽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백정들만 찾아다니는 심부름꾼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으므로, 곧 어지간한 백정들도 이 경사에 대해 들어 알게 되었다.
또한 『공보』 기사를 맛깔나게 읽어주며 쌀을 받는 이야기꾼들이 이미 각지 장시에서 짭짤한 이문을 남기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심부름꾼들 오기 전에 먼저 소식 접하고 설레여하는 백정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퍼지는 소식은, 꼭 진서를 모르더라도 귀만 있으면 능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종성부 성저야인 어느 부락에서 가장 큰 집인, 족장 지탕카이(直堂介)네에 모인 여진 사람들 사이에도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무어라? 임당수께서 혼사를 치른다고?”
“저기 종성부에서 그렇게 떠든다고 합니다.”
종성부사 곽순수는 임거정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라고들 하였다. 황해도 난리 때는 묻혀 있다가, 흑의군이 한양에 쳐들어간 이후에 갑자기 다시 나타난 연줄이었으나, 어쨌든 그의 전직이 봉산군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렇게 떠들다 보니, 종성부 토관(土官)들도 저들에게 잘 보여야 성저야인(城底野人) 부락도 편할 것이라면서 오도리(吾都里) 여진 부락들에게 토색질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멀리 남쪽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임거정인가 임당수인가 하는 높으신 분이 실제로는 저들 주르첸(여진) 사람이라는 것 아닌가?
“임당수가 누구입니까?”
포로로 잡힌 집안 사람을 구하고자, 멀리 북쪽 우디거(亐知介) 놈들 땅에 다녀와서 소식이 어두웠던 떠돌이 니탕카이(尼湯介)가 물었다.
비록 저의 부족은 우디거와의 싸움에서 무너지고, 저의 일가만 데리고서 이곳 오도리 부락에 의탁하였다고는 하나 열아홉 나이에 벌써 그 무재가 드러나 거의 같은 부락 대접을 받는 젊은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지. 저기 남쪽 어디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서쪽 평안도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오만 군대를 일으켰지만 모두 무너뜨리고서 오히려 왕깅(王京, 한양)까지 함락시켰다고 하더라.”
“허. 사내대장부로군요.”
“그렇지. 그런데 그런 분이 사실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스스로 그리 말했다니 사실이겠지.”
주르첸 사람이 솔호(조선) 임금을 붙잡고 타이시(太師) 노릇을 하니, 그 옛날 훌리가이 사람 이만주보다도 뛰어난 전사였다. 소문이 대개 그렇듯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성저야인들 사정에 믿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르신, 그런 훌륭한 분이 이번에 결혼까지 한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니탕카이 네가 뭔가 생각이 있나 본데, 얼른 털어놓아 보거라. 네 녀석 말이라면 허투루 나오지는 않을 테니.”
“우디거(亐知介) 놈들이 또 언제 노략질을 하러 올지 모릅니다. 부사는 저들 방침이 그러하다며 가만히 있을 것이 뻔하고요. 이곳 토관들이야, 저들 성 앞까지 우디거 놈들이 오기 전까지는 발 하나 까딱 안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천하의 나쁜 놈들이지만 우리가 어찌하겠느냐.”
“그런데 그 임당수라는 분이 우리네 사람이라면서요? 뿌리가 같은 사람이니 이때를 틈타 다시 연을 맺는 것입니다. 지금 그분이 솔호 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면, 우리네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지탕카이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암, 그렇지. 임당수 그이가 정녕 우리와 같은 핏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스로 그리 말하였으니 우리가 가서 도움 청한다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예물, 예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예물이라 할 만한 것은 모조리 종성부 안에 들어가 있거나, 우디거 놈들에게 빼앗긴 지 오래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지탕카이는 곧 결심을 내렸다.
“축하를 하려면 솔호 남쪽까지 깊게 내려가야 하니, 종성부를 약탈할 수는 없다.”
“우디거 놈들을 치시렵니까?”
“그래. 어차피 언제까지 그놈들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번 거하게 때리고 나서, 어떻게든 임당수 그분의 도움을 구한다면, 설령 우디거 놈들이 복수를 하려 한들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
“저는 언제든 찬성입니다.”
“좋다! 니탕카이 네가 당장 나가서 전사들을 모아라. 이왕이면 우리가 상국을 위해서 이리한다고 생색을 내는 쪽이 나을 테니, 나는 종성부에 다녀오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두만강에 엉뚱하게도 핏물이 흐르게 되었으니, 그 냄새 맡고 몰려든 물고기로 인하여 하구에 살던 조선인과 여진인 어부들만 뜻밖의 풍어(豐漁)를 겪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반대쪽 끄트머리 동래부에도 임 당수가 백정이라는 소식과 조만간 혼사를 치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북쪽 야인들과는 달리 직접 『공보』를 구해서 볼 수 있던 일본 사람들은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리 생각하였다.
“마침내 계림(鷄林) 땅도 우리와 같이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으니, 사람 사는 곳의 생리가 대저 이러한 것이다. 하야시(林) 장군은 필시 조선국의 차나왕(遮那王,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과 같은 분일 터.”
‘하야시’가 아니라 ‘임’으로 읽는 것이 마땅함을 누군가 직언해야 하겠지만, 상하의 도리가 엄격하였고 또 윗사람의 체통을 지켜주어야 했으므로 좌중의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가뜩이나 네 해 전의 약조에서 허용한 세견선이 부족한 상황.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막부가 들어섰으니, 이전의 약조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기회가 우리에게 왔다.”
애초에 대마도의 소 씨, 규슈의 쇼니 씨와 오우치 씨가 모두 갑자기 동래에 사절을 보낸 것이 이 때문이었다.
조선국에서 정변이 일어났으니, 분명 누군가는 이겼을 터. 그 이긴 쪽에게 적당히 예물 마치며 아첨을 하다 보면 일전의 가혹한 약조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동래부에 당도하여 조선국 조정에서 그들을 도성으로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들여온 소식을 취합해보니, 조선에서 벌어진 일은 여간한 정변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임거정이라는 이의 내력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그곳과 통상하는 것을 이득으로 삼는 쓰시마와 규슈 사람들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러던 차 하야시든 ‘임’이든 어느 뜻 있는 무사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조라쿠(上洛)를 하여, 마침내 조정을 장악하고 국왕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일본 예순여섯 나라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클지도 모르는 조선국이다. 아무리 근래 조선이 문약함에 젖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한 나라의 도성을 고작 일천 병사로 함락시켰다니, 어지간한 무재(武才)가 아니었다.
“마침 혼사가 가을이라 하였으니, 아직 태풍이 건너오기 전 본국에 다녀올 여력이 있다. 다른 가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리 예물을 더 챙겨와야 할 것이다. 조선국왕을 알현한 뒤에, 조선의 새 쇼군께도 마땅히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동래부 왜관 가운데의 어느 저택에서 그러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는 사실은, 비슷한 시기에 다른 두 저택에서도 동일한 소리가 났기 때문에 딱히 주변의 이목을 끌지 못하였다.
이것이 그해 가을 양주에 백정뿐 아니라 생판 듣도보도 못한 기이한 무리가 나타난 내막이었다.
양주목사 백인영으로서는, 임 당수에게 대체 저와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러느냐며 하소연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 *** ---
성균관 앞에 형성된 일종의 대학가인 반촌은,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육류를 공급하는 역을 맡았습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이 나와서 노는 곳이기도 해서, 한양 안에서도 매우 특이한 분위기의 동네가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촌 백정들은 스스로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의 노비 출신이라고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안향이 고려 성균관에 자신의 노비들을 기부하였는데, 고려가 망한 뒤 성균관에 딸린 노비들을 그대로 한양으로 이주시킨 것이 바로 반촌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순흥 안씨 사람이 찾아오면 옛 상전의 후손이라며 매우 우대하였다는 야담이 남아 있습니다.
갑자기 꺽정이의 혼례를 ‘인터내셔널’하게 만든 두 주역인 여진과 일본은 작중 시점에서 모두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종대에 6진을 설치한 이후 그 지역에 본래 살았거나 후대에 남하하여 조선 영토 내에 살게 된 여진인들을 통칭하는 성저야인은, 조선의 지속적인 관심 및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은 성저야인의 족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여러 물자를 내리는 등, 지속적인 위무정책을 펼쳤고, 성저야인 족장의 자제들이 한양에 들어와 금군에서 복무하는 일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정책도 많이 해체되게 되지요. 한편으로는 성저야인들이 조선의 체제 안으로 한발 들어오면서, 정주민화되고 어느 정도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게 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조선 관헌의 토색질, 그리고 이들을 노리는 강 건너편 여진족들의 약탈 등이 심화되게 됩니다. 특히 1550년대 시점에서는 두만강을 둘러싸고 강 건너편 우디거 여진들이 반대편의 동족을 약탈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조선은 여기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작중 일본은 대중매체 등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시대(센고쿠 시대)를 겪고 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역(흔히 쿠니國라고 부르는)에서 영주(다이묘大名)들이 웅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 중 야심 있는 다이묘들은 교토로 진군(조라쿠上洛)하여 허수아비 쇼군 대신 막부의 실세가 되려는 마음을 품기도 했지요.
혼슈 서부와 규슈 북부를 한때 제패하였던 오우치(大內) 씨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다이묘 집안으로,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과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특히 15세기에는 옛 백제의 땅을 봉토로 달라거나, 『팔만대장경』을 내어달라는 등 황당한 청을 하기도 했고, 또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온 코끼리를 조공으로 바치는 등 여러모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지요. 그러나 전국시대 말 신흥 세력인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쇼니(少貳) 씨는 규슈 북부의 유력한 집안으로, 오우치 씨의 침공에 계속 시달렸고 결국 전국시대 말에 멸망하였습니다. 대마도의 영주 소 씨가 본디 주군의 집안으로 섬기기도 했던 집안이지요.
작중 시점 조선과 전국시대 일본과의 교역은 대마도의 소 씨와 규슈 북부~혼슈 서부 일대의 오우치 씨, 쇼니 씨 등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국왕’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 보낸 사절을 자칭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가문 명칭 (소이전·대내전 등)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1510년 삼포왜란의 결과로 15세기까지 형성되었던 조일 간의 교역체제가 붕괴하고 기존의 교역량이 대폭 축소되면서, 이를 우회하기 위해 사절을 자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절을 통해 교역 수요를 일부 해소하는 한편 교역량 제한을 풀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의 노력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 세력이 당시 발흥하던 왜구(원명교체기/여말선초의 왜구와 구분해 후기 왜구라고도 부릅니다)를 방조 또는 적극적으로 부추김으로써 1555년 을묘왜변이 발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