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78화 (78/259)

25. 그곳에 용이 있었네 (4)

대개 같은 일에 종사하는 이들끼리 만나면 서로 실력을 견주어보기 마련이다. 선비들도 서로 만나면 은근히 저의 시문(詩文)을 뽐내곤 하는데, 도적이라고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러므로 왕직의 속셈도 꺽정이 눈에는 훤히 들어왔다. 아마 저의 체면 구겨진 것을 만회하고자 이렇게 위세를 부리려던 속셈이었을 테다.

허나 꺽정이가 그들 눈앞에서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을 등에 업고서 돛대 위로 뛰쳐올라오는 묘기를 선보이니, 오히려 기 죽는 쪽은 반대편이었다.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군그래, 껄껄!”

돛대 위에 오르자, 비로소 거대한 ‘남만선’에 탄 왕직과 얼추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제야 왕직이 무어라 떠들어대었는데,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 없었다.

“낭군님! 왕직이 말하기를, 올 것이면 미리 저에게 기별을 할 것이지, 이 무슨 행패냐고 하네요!”

돛대 아래에서 명희가 외쳤다.

“왕가 놈아! 조선말로 해라! 조선말로! 아니면 진서로 써서 부치던가! 대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뭔 왜말을 하고 있느냐?”

어쨌든 싸움에서 이긴 쪽은 꺽정이요, 타카노부의 목숨을 말 그대로 등에 짊어지고 있는 쪽도 꺽정이였다. 왕직이 끝내 한 수 접고 들어가, 급히 조선말 할 줄 아는 자를 구해왔다.

“임 장군 들으시오! 그대는 조선국에서 명망이 높다 들었소이다! 어찌하여 바다 건너까지 와서 이처럼 흉악한 일을 벌이시는 것이오?”

“그야 왕직 네놈이 무례하니 그렇지! 네놈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하여도 엄연히 도적일진대, 어찌 도적들 중의 큰 어른을 알아보지 못하고 행악하느냐?”

스물남짓 젊은이 치곤 그 연배로 도저히 보이지 않는 꺽정이지만, 그 반대편의 왕직 역시 휘주(徽州)에서 소금장수 하던 시절부터 산바람 바닷바람 다 맞고 살아왔으므로 험한 세월의 흔적이 그 얼굴에 명백히 드러났다.

그런데 젊은 놈이 스스로 어른이라 외쳐대니 어이가 없을 따름. 그러나 저쪽에서 먼저 하대하는데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임 장군은 도적의 어른을 자처하는가? 이 노야(老爺)야말로 바다의 왕, 모든 해적들의 우두머리 정해왕(淨海王) 어르신이로다!”

“푸하하! 왕이 뭔 대수냐? 팔도 거느린 조선국 임금도 붙잡아서 명성 떨친 이 어르신인데, 고작 섬 몇 군데에 뱃놈 한 이삼천 거느린 네놈이야 가소롭기 이를 데 없구나!”

조선국 사람 중 그 누구도 함부로 벌일 수 없는, 임금 붙잡기 운운하는 격장지계(激將之計).

지금까지 조선왕 붙잡은 경력을 지닌 사람은 잘 쳐봐야 두 사람인데, 그마저도 아들이 아버지, 또는 숙부가 조카 해코지한 일(태종·세조)이라 떳떳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내가 임금 붙잡아보았는데 별 것 없더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조선국 열린 이래 꺽정이 한 사람뿐.

그만큼 희귀한 격장지계라서 효험도 확실하였다. 왕직의 얼굴이 절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한참 노하여 저의 자랑과 꺽정이 욕을 섞어서 내뱉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칭 왕의 체통이 있다 보니 자제하는 면도 있고, 또 꺽정이의 아픈 구석을 찌르기에는 그 내력을 충분히 알지 못하였다.

욕지거리라고 나오는 것도, 고작해야 축생(畜生, 칙쇼)이니 무어니 하는 정도. 금수만도 못한 백정놈 타령을 시작으로 온갖 험한 말 많이 듣고 자란 꺽정이 귀에는 아주 점잖을 지경이었다.

“저놈이 내 무서운 것을 모르고서 입만 털어대는구나. 모르면 가르쳐 줘야겠지.

야, 타카노부야. 꽉 잡아라. 곧 풀어주마.”

저의 이름과 ‘잡아라’ 소리 알아들은 타카노부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돛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 그 말 안 따를 계제가 아니었다.)

“왕가 놈아! 옆으로 비켜라!”

그 말과 더불어, 꺽정이가 또 한 차례 도술을 선보였다.

타카노부를 등에 업은 채, 활대(돛을 고정하는 가로 방향 지지대) 가로질러 도움닫기를 하더니, 번쩍 뛰어올라 왕직 바로 앞에 착지하였다. 사람이 하늘을 날았으니 도술 아니면 이것이 무엇이랴.

“으아아! 쇼군!”

“쇼군이 날았다!”

“배가! 내 배가!”

꺽정이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판옥선의 활대와 ‘인도의 상 투메(성 토마스)’ 호의 갑판은 ‘쩌적’ 하는 비명을 질렀고, 타카노부도 비명을 질렀으며,

또한 자신이 공들여 만든 배가 안타까운 꼴 당하는 것을 본 정걸도 비명을 질렀으나, 부두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묻히고야 말았다.

“바다의 임금아, 이 어르신이 눈앞에 왕림하셨으니 다시 떠들어 보거라.”

당황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왕직의 부하 열댓이 우르르 몰려와 칼을 꺼냈는데, 꺽정이는 한결 두려움 없이 씩 웃을 뿐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반면 왕직은 웃음기도, 분기도 사라진 얼굴로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더 물어보느냐? 이 도깨비 화상은 내 손님이다. 풀어준다면 네가 화상 붙잡은 그 죄는 눈 감아주겠다.”

“좋다. 네가 정 원한다면 풀어주마. 단 네가 데려온 저이는 내게 중한 사람이니, 지금 여기서 넘겨받아야 하겠다.”

왕직이 여전히 꺽정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타카노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웃는 낯을 풀지 않는 –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더욱 섬뜩해 보였다 – 꺽정이는 값을 올려받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 하나 몸값으로 사람 하나 넘겨주는 것은 그렇다 쳐도, 네놈의 괘씸한 짓에 대해서도 따로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이 배가 큼직하니, 나와 같은 대인(大人)이 타야 마땅할 것이다. 내놓아라.”

처음 이 포구에 들어오면서 이 배를 보았을 때만 해도 꺽정이는 그저 ‘배 크다’ 하는 감상만 품고 있었지만, 왕직 이놈이 큰 배에 타서 거들먹대는 꼴을 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 이치에 따라 절로 빼앗고 싶어졌다.

“네놈이 참으로 오만하구나. 설령 네가 이 남만 중놈에 이어 이 배까지 얻는다 한들, 어디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으냐? 남해 바다는 나의 것이다. 배가 있어도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더냐?

또 바다가 막힌다면 아무리 이 도깨비 족속들이 뛰어나다 한들 무슨 재주를 부리겠느냐? 네놈이 정녕 나를 거스르려 한다면 철포(鐵砲, 조총)는커녕 화약조차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고 고토나 류큐 바다에서 빼앗기고야 말 것이다!”

“하하하! 뭐? 바다가 너의 것이야? 웃기지 마라. 조선국 팔도를 모두 끌어와 수군을 정비한다면 어디 섬 몇 곳 가지고 거드럭대는 네놈이 배기겠느냐? 네가 먼바다로 도망간다면 네놈 굴혈(窟穴, 소굴) 있는 섬만 점령하고서, 여기 있는 이 타카노부 놈이나 저기 대마도 소 씨한테 넘겨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남만 도깨비 놈들도 어차피 네놈의 부하라기보다는, 잠시 네게 의탁한 정도 아니냐? 우리 조선국이야말로 바다와 땅, 대국과 팔도, 그리고 저 북변까지 모든 귀물을 모아서 줄 수 있는 땅이다. 정 왕을 섬길 것이라면 너 같은 엉터리 왕보다야 진짜 임금이 낫지. 우리 임금이 좀 모자라고 성품 용렬하긴 해도 사람은 착하거든.”

무식하게 생긴 놈 입에서 어째 말이 청산유수로 나오는데, 그렇게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왕직의 정곡을 찔렀다. 휘주에서 보잘것없는 소금장수로 시작해 겨우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을 사정없이 비웃으니,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네가 정 그리 대든다면 내 휘왕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마!”

“아이고, 이거 무서워서 밤에 잠이나 자겠나.”

결국 왕직이 버럭 외쳤는데, 끝까지 꺽정이는 비웃었다.

저 자칭 임금 놈이 결국 저의 ‘왕직 때려잡기 대계(大計)’에 어울려주고 있었으니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어떻게든 설욕을 하겠다며 왕직이 날뛰면 날뛸수록, 꺽정이 쪽에서는 조선국 역량을 끌어와 제 맘대로 부릴 명분만 늘어날 터.

“흠흠. 어쨌든 이 자리에 함께 서게 되었으니, 여기서 거래를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겠소? 이 사람은 여기 휘왕(왕직)과 함께 가고, 바테렌은 임 장군과 함께 가고. 이 거선(巨船)의 일은, 휘왕과 장군 두 분이서 나중에 차근차근 논의하셔도 늦지 않을 듯하외다.”

한 차례 노성과 냉소가 오간 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자, 이 틈을 타고 얼른 저의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던 타카노부가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해도 난 좋소. 저 임금 놈만 억지 안 부린다면야.”

“이... 흠흠. 히젠노카미(타카노부)의 제의가 온당하오.”

‘자폰’의 말에 능하지 못하여, 지금 저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기이한 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하비에르는 갑자기 제게 눈길이 쏠리자 깜짝 놀랐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조선국 귀빈이 우리 히라도에 오셨으니 이제라도 무례에 사죄를 드리고자 하오. 조선의 천하인께서 오늘밤 우리의 누추한 성에 찾아와 연회를 즐겨주신다면 영광이 아닐 수 없겠소이다.”

한편, 꺽정이 등에서 내려오자마자 다이묘의 위엄이 돌아오기 시작한 타카노부가 그 자리에서 수상쩍은 제의를 건네었는데, 꺽정이는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하비에르와 함께 판옥선에 돌아온 – 정걸과 판옥선에게는 다행히도, 이번에는 멀쩡하게 거룻배를 내려서 그것을 타고 돌아왔다 – 꺽정이가 잔치 얘기를 하니, 명희와 이이는 모두 반색하였다.

“저야 좋지요. 처음으로 온 일본국에서 싸움만 하고 돌아가는 건 아닌가 아쉽던 차였는데.”

“저도 누이동생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곳 풍습과 풍광. 저 대명(다이묘)의 집안 내력 등등, 물어보아야 할 것이 산더미라서요. 이왕 일본 말을 익혔으니 그 고생한 만큼의 보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 저들이 못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걸이 걱정하며 묻자, 모리타네가 곧장 해명하였다.

“왕직이라면 모를까, 마츠우라 당은 결코 우리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한들 얻을 게 없으니까요. 이미 한 판 싸움에서 승패가 가려졌으니, 오히려 임 당수와 조선 수군의 무위를 과할 만큼 칭송하는 쪽이 마츠우라에게는 더 이득입니다.”

그래야만, 그토록 강대한 상대와 마주하며 담판을 지은 마츠우라 타카노부의 이름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조선의 천하인이 그 옛날 원구(元寇)를 하나로 뭉쳐놓은 것 같은 강적이었다고 이야기를 꾸며내야만, 비로소 오늘 마츠우라가 당한 패배를 묻어버릴 수 있을 터.

“일본국은 퍽 이상한 나라요.”

“요즘 조선국만 하겠습니까.”

임 당수 이하 민주당 사람들이 저를 ‘어리석은 왜놈’ 대접하지 않고 격의 없이 대해주다 보니, 모리타네도 어느새 그들을 닮아가서 말이 꽤 거침없어졌다.

그러나 정걸조차 모리타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요즘 조선국 이상하다는 말을 입증하는 임 당수라는 증좌가 떡하니 눈앞에 서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차피 연회에는 가야 하오. 가서 만날 사람이 둘이나 있거든.”

꺽정이가 스스로 어리석다 여기지만, 정말로 아둔한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꺽정이에게 머리 달아난 수많은 군관들도 마지못해 동의할 것이다.) 다만 학문이 짧아 조리 있게 논변 펼치거나, 한 가지 일의 주변 사정을 폭넓게 헤아리지 못할 뿐.

자신이 잘 아는 도적의 일이라면, 선비들 가운데 그의 스승 서경덕이 있듯 도적들 중에서는 자신이 임자(林子)를 칭해도 마땅하다 여기는 꺽정이였다.

당장 앞서 그 거대한 배에 올랐을 때도 그러하였다. 왕직이야 저의 도발에 넘어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꺽정이 자신이 왕직을 욕하면서 동시에 은근슬쩍 타카노부와 그 도깨비 놈 – 화상 말고 다른 놈 – 에게 솔깃한 말을 꺼냈지 않았던가.

아쉬운 것은 그쪽이니, 오늘밤 연회에서 필시 어떻게든 그와 이야기 나누어보려 할 테다.

그리 크지 않은 히라도 성이지만, 그럴듯한 연회 벌일 만한 널찍한 방 하나쯤 없지는 않았다.

돌아온 타카노부는 오늘 연회에 참석할 가로(家老)들의 명단을 곧장 적어서 가신들에게 돌렸다. 그 명단에 들지 못한 가신들은, 주군의 용단을 찬양하면서 모두 배를 갈랐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조선에서 온 손님들. (그리고 분명 조선에서 온 ‘장군’이 저를 구해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서 이곳 히라도 성으로 돌아왔는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하비에르.)

대맹선에 남아 있던 차와 사기그릇 등 귀물을 꺼내어, 나름 성의라고 타카노부에게 주었더니, 진심인지 아닌지 감탄하는 소리가 좌우에 진동하였다.

저쪽에서는 반대로 사카이 상인들 통해 배워온 긴키(교토 일대)의 진미(珍味)를 요리하여 바치고, 더불어 어설프게 배운 솜씨로 만든 남만과(南蠻菓, 양과자)를 상에 올렸다.

다만 술은 흑의군과 격 낮은 무사들 사이에서만 돌고, 이곳 상석에 앉은 꺽정이 일행과 타카노부, 그리고 마츠우라의 가로들 사이에서는 돌지 않았다. 허나 흥미로운 사람들이 한 자리 모였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인들 중 임 장군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 여겼던 타카노부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규슈의 역사를 물어오는 서생을 반갑게 맞이하였다가 그 자리에서 기를 모두 빨렸다. 조선 선비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타카노부를 대신할 이는 매우 많았다.

오늘 낮에 바다 위에서 ‘하야시 쇼군’을 상대했던 무사들은 장군의 위용에 다시금 감탄하고, 그 아내 되시는 분의 재주와 미모에 또한 감탄하였다.

그렇게 흥이 잔뜩 오르던 차.

“보배로운 찻잎과 더불어 천하 명품이라 할 만한 다완(茶碗, 찻사발)을 내려주셨으니, 그 마음을 이 어리석은 자조차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꺽정이가 주었던 사기그릇은 어디 꿍쳐두었는지, 보잘것없는 질그릇 하나를 꺼내어 감탄하던 타카노부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마츠우라의 가신들이 모두 그 속뜻 짐작하려 눈을 굴리는데, 꺽정이는 자신이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그렇지. 차라는 것은 모름지기 사람이 마셔야 그 가치가 드러나는 법.”

“들었느냐? 장군과 더불어 다도(茶道)를 즐길 것이다.”

그 말 들은 가로들이 모두 일어나 우르르 나갔다. 꺽정이에게 얼추 설명을 들은 이들은 놀라지 않고, 설명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하비에르만 놀라서 두리번대던 차, 엉뚱한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저놈도 차를 마실 줄 아오?”

“칸톤(광동)에서 저희가 가장 많이 사들이는 것이 바로 차입니다.”

분명 앞서 왕직 옆에 있던 남만인이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판옥선으로 데려온 뒤 제대로 통성명을 했다 – 와는 달리 일본말이 유창하였다.

“제대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포르투갈 인도 함대(Armadas da India)의 선장, 페르낭 멘데스 핀투입니다.”

“민주당 당수 임꺽정이오. 얼른 저기 하비에르 어르신께 가서 사정 설명 좀 해주시오. 말이 안 통해서 내 안사람이 퍽 답답하던 판이었소이다.”

핀투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사이 타카노부가 바짝 다가와 고쳐앉았다.

“왕직이 휘왕을 자칭하면서 위세를 부리는 것을 저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얼추 짐작은 했소. 다 그놈이 가져다주는 보화 때문이지. 그렇지 않소?”

“장군께서 과연 올바르게 보셨습니다.”

“뭐, 내가 뭘 보고 알았겠소? 다 이 사람 덕분이지.”

그러면서 옆의 소 모리타네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으니, 모리타네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흠... 이 일은 쓰시마의 노옹(老翁, 소 하루야스)이 꾀한 것인가? 과연!”

하루야스는 올해 나이가 일흔일곱. 궁벽한 데다가 규슈와 조선 양쪽의 눈치를 항상 보아야 하는 쓰시마에서 그만큼 장수한다는 것은, 그 재주가 범상하지 않음을 뜻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다 이 사람과 당원들의 궁리한 바에 이 불우한 모리타네가 끌려들여온 것이지. 뭐, 어쨌든 이 사람이 왕직과 척을 진 덕에 소 씨는 죽어도 나랑 같이 죽게 되긴 했소이다.”

모리타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반응에 타카노부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차, 오래 기다려줄 생각이 없던 꺽정이가 대뜸 물었다.

“그보다,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지. 내가 왕직 그놈보다 더 많은 보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것 아니오?”

여느 무가(武家) 사람보다도 더 단도직입에 가까운 화법에, 잠시 당황하면서도 바로 정신을 수습하였다. 눈앞의 거한에게 납치도 당해보고, 그 등에 업혀 하늘도 날아보았는데 – 심지어 그 모든 일이 오늘 하루 동안 벌어졌다 – 더 놀랄 게 무엇이 있으랴.

“장군께서 바로 알고 계십니다.”

“쇼니와 오우치가 모두 망하거나 망하기 직전이니, 어차피 우리도 새 상대가 필요하던 차요. 왕직 그놈을 고꾸러뜨린 다음에도 여기 규슈 본토에 우리 편이 하나쯤 있으면 좋긴 하겠지. 마침 그대들 사정도 꽤 급하다고 하던데.”

“아...”

만약 눈앞의 조선인이 조정에서 보낸 관헌이었다면, 쌍수 들어 환영하였을 것이다. 쇼니와 오우치가 한때 조선과의 교역으로 적잖은 이익 남기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 장군이 어지간한 관헌이었다면 오늘 그가 당한 수난이 어찌 일어났겠는가. 그가 말하는 ‘우리 편’이란, 차라리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생각하는 쪽이 맞을 테다. 의리 대신 이익, 금은보화와 탐욕으로 엮인다는 것이 다를 뿐. (냉소적으로 따지면 주군과 가신의 관계도 사실 탐욕으로 엮이는 사이기는 했다.)

그리고 임 장군은, 마츠우라가 왕직이든 누구든 바깥에서 도움 받아야 겨우 버틸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직은 비범한 자입니다. 앞서 그자가 말한 것처럼, 숫제 바닷길을 막아버리려 한다면 어찌하실 것인지요? 오늘의 일이 있었으니, 당분간 화해는 난망(難望)일 것입니다.”

“큰 배에 큰 화포를 많이 실어서 오가면 그만이지, 뭐. 오늘 보았다시피 총통은 뜻을 통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매우 탁월하다오. 그리고 큰 배로 말하자면...”

여전히 하비에르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던 핀투를 보면서 꺽정이가 말을 늘어뜨렸다.

“장군! 저 남만인들은 우리 히라도가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이들입니다! 저들을 데려가시려 하십니까?”

저들 남만인들이 히라도에서 교역하는 것은 오로지 왕직이 제공하는 편의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직이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조선이 제공해주지 못할 리 없었다.

중국과의 교역? 막부의 쇼군이 십 년에 한 번 조공을 허락받던 시절 조선은 일 년에 세 번 조공을 했다 한다. 더구나 조선에서만 나오는 귀물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선의 권력자가 손수 발로 뛰면서 돈벌이 궁리를 하는 것을 핀투 저자는 두 눈으로 보았다. 한 번 유혹하면 넘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대신 우리 조선의 배가 올 것이오. 그만하면 되지 않소? 임금의 이름으로 세운 경제사 얘기는 그대도 들어봤을 텐데?”

그러나 타카노부의 걱정하는 말에 꺽정이는 매정하게 대꾸하였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타카노부는 침을 삼킬 뿐.

장군쯤 되는 사람이 직접 배를 타고 선봉을 맡아 찾아왔다. 그러니 임 장군의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족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건너올 수 있다는 사실이야, 이미 원구(元寇,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 때는 물론이요, 카키츠(嘉吉) 연간 쓰시마가 난을 당한 일(대마도 정벌)로 족히 입증되어 있었다.

그들 집안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쇼니와 오우치가 어떻게든 다시 열어보고자 매달렸던 조선과의 교역이다. 이익과 손해라는 너무나 묵직한 분동이, 타카노부 머릿속 저울의 양쪽을 짓눌렀다.

“왕직 저놈이 눈꼴시게 날뛰는 꼴을 언제까지 참을 게요? 그대가 그놈을 노려보는 것을 내가 놓쳤으리라 생각하진 마시오.”

마침내 한 번 더 들어온 임 장군의 부추김이 저울에 분동 하나를 더했다. 그 분동을 내려놓기에는, 타카노부도 아직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이 마츠우라 타카노부, 장군의 가르침을 깊이 받들겠습니다.”

“하하! 좋소. 그래야지.”

꺽정이가 다 식은 차를 꿀꺽 삼켰다. 자신이 알던 그 어떤 다도에도 없는 저 거친 풍모에 또 한 차례 놀란 타카노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장군의 새로운 도(道)를 따라 잔을 죽 넘겼다.

시원한 차도 나름의 맛이 있었다.

금방 떠날 줄 알았던 조선인들은 판옥선의 활대와 돛대를 고친다면서 하루를 더 끌었다.

분명 그날 밤 연회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을 테다.

“흥, 타카노부 그 애송이가 발버둥을 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히라도를 떠나 저의 근거지 오봉(五峯, 고토 열도)으로 돌아와 있던 왕직이 코웃음을 쳤다.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조선에 본때를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대명 조정도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겠지. 남경을 치는 대신 조선을 친다. 할 수 있겠느냐?”

왕직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당장 배를 내시지요!”

“죄다 불태워버리고 노략질하면 다들 정신 차릴 겝니다!”

왜인, 왜인인 척하는 화인(華人), 왜인 사이에서 태어난 화인 등등. 왕직 아래의 굵직한 두령들이 모두 동의하며 떠들었다.

“아니, 아직이다. 하지만 곧 그럴 때가 올 것이다.”

가장 거대한 노략질. 청사에 길이 남을 약탈. 해금령(海禁令)을 무너뜨리고, 바다의 왕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저 우뚝 선 천조(天朝)의 잘나신 황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저 임가 놈은 알 리 없던, 지난 여러 해에 걸쳐 왕직이 꾸준히 준비하던 대계(大計)였다.

어차피 어디를 불태우든 힘만 입증하면 끝날 일이다. 문약한 조선이야, 조금만 힘을 보여주면 알아서 북경에 도움을 구할 것이다. 그러니 남경이 불타든 그들의 왕경(한양)이 불타든 별 차이는 없었다.

“바다 위에서 이 노야를 거스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제 그 진사혜 놈을 끝으로 모두 물귀신이 되었지. 곧 뭍에서도 이를 보여줄 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였다.

“전하! 큰일입니다! 히라도로부터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졸개 하나가 뛰어들어오며 바로 부복하였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은 종종 왕직의 기분에 따라 비참한 꼴을 당하곤 하였으므로, 미리 저렇게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두령들 역시 바짝 긴장하였다. 왕직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냐?”

“불랑기(포르투갈) 놈들의 대선이 포구를 떠났다고 합니다!”

“무어라? 아직 떠날 때가 아닐 터인데?”

“북쪽! 조선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조선 배들과 함께 떠났다고...!”

핀투로서는,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와 교역을 트고, 더불어 중국 북부와도 교역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쪽이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쇼군’ 한 사람은 도저히 미덥지 않았지만, 히라도의 영주가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의 신분을 보증하고, 더불어 딱 보아도 귀족과 귀부인 같은 이들까지 대동하고 왔으니, 노련한 선장 겸 해적 겸 상인인 핀투는 이 기회를 잡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만일 왕직이 핀투에게 따져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저 가장 이득되는 쪽을 따를 뿐이라는 태연한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것을 아는 왕직이었으니, 분기만 삼킬 뿐. 다행히도 히라도 앞바다에서 굴욕을 당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끝내 삼키지 못한 분기를 풀 수 있는 상대가 많이 있었다.

그날, 왕직의 저택 앞에 펼쳐진 바다에는 상어 여럿이 몰려들어 포식을 하였다.

세 척에서 네 척으로 불어난 선단, 그것도 지금껏 조선 사람 누구도 본 적 없던 거대한 배를 대동한 선단은 순항 끝에 대마도에 기착하게 되었다. 소 씨가 어쩌다 보니 민주당과 한 배에 탄 채 왕직을 상대하게 되었음을 친절하게 알려주고자 해서였다.

노회한 야스하루는 마츠우라 애송이보다 훨씬 상황을 부드럽게 잘 받아들였다. (늙은 만큼 한숨이 그리 세게 내쉬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의 뱃가죽이 하나로 붙어있기를 바라는 모리타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제게 명하시기를, 앞으로도 계속 동래에 머물면서 민주당과의 사업을 잘 맡아보라 하셨습니다.”

“귀양인가요?”

“유배 맞네.”

눈치 없는 이이가 진실을 짚으니, 꺽정이도 맞장구를 쳤다.

“저는 영전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모리타네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히라도 앞바다의 합전(合戰)’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과연 모두의 귀가 이쪽으로 쏠렸다.

“무어라 하던가?”

타카노부와 마츠우라 당이 엄청난 노력(과 재물)을 들인 끝에, 히라도 바깥으로 퍼진 소문은 이러하였다.

조선의 천하인 임 당수가 남만 바테렌을 초빙하였는데, 어리석은 무사 몇몇이 바테렌을 모함하여, 오해와 오해가 쌓인 끝에 바테렌은 성에 갇히게 되었다.

지혜로운 히젠노카미(타카노부)는 이를 깨닫고 바테렌을 방면하려 하였는데, 그러기도 전에 노기등등한 채로 조선 천하인이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명예를 위하여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나, 천하인은 괜히 천하인이 아니었다.

허나 당당하게 나선 히젠노카미가 사리를 따져가며 분노한 천하인을 설득하니, 그도 마침내 노기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하야시 쇼군은 미안한 마음에 귀한 다완과 차를 선물하였으며 – 그것도 천하의 일품이라 하였다 – 바테렌은 무사히 풀려나 조선으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조선의 천하인은 흑염(黒炎)의 용(龍)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좌중이 착 가라앉았다.

꺽정이 칼솜씨도 칼솜씨지만, 마츠우라 수군 뇌리에 더 강렬하게 남은 것은 판옥선의 화포였다. 연기와 불꽃 내뿜는 배를 마음대로 부리면서, 수군으로 이름 높은 마츠우라 당을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흑염.

그리고 그 위세도 위세거니와 실제로 하늘을 날았으니 – 이는 사카이의 유명한 상인들이 보증하는 사실이었다 – 말 그대로 용.

“조선국으로 이 말이 잘못 전해진다면 자칫 큰 오해를 사겠지요. 동래에 나가 있는 소 씨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하여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조선에서 용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모리타네가 말을 덧붙였다.

대저 나라에 용(龍)이라는 글자를 함부로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지존 하나뿐이요, 그 외의 사람이 용을 자칭한다면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음... 용이라 하면 조금은 조심해야 하겠지만... 소생이 도성에 돌아가는 대로 글을 실어 진상을 알린다면 여론이 쉬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임 당수.”

그러나 이미 역적질을 성공하여 그 죄를 떨쳐버린 꺽정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물정 모르고 헛소리를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야, 잘 달래든 잘 두들겨패든 하여 입을 막으면 그만. 이를 잘 아는 이이가 맞장구를 쳤다.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우리 당의 위세가 있으니, 누가 헛된 말로 민심을 어지럽히겠어요? 그러니...”

오라버니와 누이동생 둘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피식 코웃음이 나오고, 이어서 웃음보가 완전히 터져버렸다.

“하하하하! 흑염룡이라니! 우리 매제께서 흑염룡이라니!”

“푸흡! 세상에... 용이래, 용! 우리 낭군이 용이래!”

“그만들 하시오.”

“그... 당수 옆구리에 실은 비늘 나 있는 것 아닙니까? 전조의 왕씨들도 그랬다는데, 심지어 당수는 용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니고 진짜 용이라잖아요.”

“낭군님, 여의주는 어디에 있나요? 숨기지 말고 한 번 보셔주셔요.”

“아니, 일본국 풍습이 용을 멋지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용, 얼마나 멋있소? 수염은 좀 변변잖고, 생긴 것도 도마뱀붙이랑 미꾸라지 섞은 것처럼 생기긴 했지만... 에라이, 젠장.”

꺽정이마저도 스스로 변명하기를 포기할 무렵, 가만히 듣던 정걸마저도 맞장구를 쳤다.

“흠흠, 임 당수. 그... 솔직히 우스꽝스럽긴 하오이다. 성덕(聖德)을 용의 위엄에 빗대는 것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을 억지로 그렇게 빗대다니.”

“맞습니다. 어지간한 얼간이가 아니고서는 그런 별명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겝니다.”

이이의 말에 담긴 통찰이 참으로 심원(深遠)하였다.

오와리(尾張)의 얼간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사카이로부터 ‘조선의 흑염룡’ 소문을 전해 듣고서는 천하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며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였던 것이다.

얼른 자신도 어떻게든 여유가 될 때 그 화포를 많이 구해놓아야 하겠다는 심산이 그 웃음 뒤에 있음을 모르는 가신들은, 어쩌다가 오다 씨의 가독이 저런 망나니에게 넘어갔는가 한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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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왜구와 조선인들 사이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기록으로, 선조 연간 왜구에 가담한 진도 사람 사화동(沙火同. 火는 이두식 표기로, 사을배동, 살화동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고토 열도에 표류한 뒤 왜구에 가담하여 현 여수 일대를 약탈하는 데 일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왜구 내에 조선인이 그 전에도 있었거나, 적어도 조정이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에서의 상호 교류가 존재했음을 방증합니다.

다만 설령 실제로 그 수가 많지는 않았을 듯한데, 만약 조선인 왜구의 수효가 유의미한 비율에 달했다면, 말라카에서 하비에르와 만난 일본인 안지로처럼 포르투갈인들과 조선인이 접촉하고 그것이 기록에 남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왕직의 무리 중 조선인은 없더라도 적어도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자가 한둘쯤 있는 것 정도까지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소 씨의 16대 당주인 대마도주 소 하루야스는 1475년생으로, 1563년까지 장수합니다. 원 역사에서는 1553년, 말년에 본 늦둥이 아들(1532년생) 요시시게에게 가독(家督, 무사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권리)을 물려주고 은퇴하지요.

16세기 중후반 일본에서 유행한 다도에서는, 흔히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 부르는 막사발 질그릇을 매우 높게 평했습니다. 질그릇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소탈한 풍격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다도의 문화와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그런 다완 중에서도 유독 풍격이 높다고 알려졌던 찻사발은 그 하나가 성 하나의 값과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여담으로, 작중 시점으로부터 수십 년 뒤 천하인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소박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다도 명인 센 리큐와 마찰을 빚은 바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로서는, 그런 투박한 질그릇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이 마찰은 센 리큐가 목숨을 잃는 쪽으로 끝났습니다.)

왕직의 대계는 원 역사에서도 남경 일대에 대한 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을묘왜변도 이때 왕직의 무리가 조선 남해안과 제주도를 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왕직 자신의 자리를 인정받고, 더 나아가 해금령 자체를 철폐하거나 예외를 인정받기 위한 무력시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왕직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명의 관헌 호종헌이 왕직의 의도를 간파하고, 관직을 제수하겠다는 미끼를 내걸고 그의 투항을 유도하자 왕직이 여기에 덜컥 응하면서 허무하게 체포되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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