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79화 (79/259)

26.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1)

미지의 나라 코레, 또는 디오시온.

‘동(Dom, 남성 왕족 또는 귀족에 대한 포르투갈어 경칭) 림’과 그의 동료인 젊은 학자 ‘율곡의 동 리’, 그리고 ‘덕수의 도나(Dona, Dom의 여성형) 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코레는 이미 백오십 년 전에 멸망했고 그 자리에 디오시온이 세워졌다 하니, 이제 지도에는 디오시온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이 기록되게 될 것이다.

“얼른 이 지도를 완성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과연,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은 배움 구하는 학자와 닮았군요.”

동 리의 초롱초롱한 눈 앞에서는, 차마 이 지도를 고아 부왕령에 바치고 그 포상금을 넉넉히 받아내어 이 배에 딸린 빚을 얼른 갚을 생각만 가득하다는 생각을 발설할 수 없던 핀투 선장이 적당히 말을 흐렸다.

이 모든 것이, 여기까지 항해해 오면서 자신이 무슨 거창한 모험가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린 결과였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흠흠, 곧 ‘하니양’에서 허가가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 말대로, 상 투메 호는 부산포 앞바다에 닻을 내린 채 며칠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 리와 ‘동레’ 시의 행정관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하니양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큰 배가 쉽게 들어갈 수 없으니 반드시 본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숙련된 수로안내인을 대동해야 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식수를 구하러 잠시 상륙하였던 일등 항해사와 그 동료들은, 자폰보다도 훨씬 얼굴이 하얗고 용모가 수려하며, 자폰 사람들이 먹는 것보다 몇 배는 될 만한 양의 삶은 쌀을 식사로 삼는 디오시온 주민들에 대해 보고하였다.

과연 동 림의 장담대로 이 땅은 시나(중국)와 자폰, 그리고 북쪽 타타르를 잇는 땅인 동시에 그 자체로도 부유한 것이 틀림없었다. (말라카와 고아에 있는 그의 채권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땅은 부유해야만 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계속 듣자고요. 가만히 동래 구경이나 한다고 뭐가 떨어지나요? 우리가 이곳 동래를 떠나게 되면 이럴 여유도 없어질 텐데, 한 각 한 각이 귀하다고요.”

도냐 리가 채근하였다.

히라도를 떠나고 프란치스코 신부가 정신을 좀 차리자마자 시작된, 거의 심문을 방불케 하는 질문 공세가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며칠간 핀투가 이 선실에 거의 붙잡혀 있다시피 했던 사연은 이러하였다. 프란치스코 신부의 이방인 구원자들은 당연히 그에게 물어볼 것이 적지 않았는데, 신부는 자폰 현지의 언어에 그리 밝지 않았다.

따라서 돈벌이를 위해서라도 자폰 말에 능숙해져야만 했던 핀투가 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어째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질문이 끝날 줄을 몰랐다. 자폰 말을 못하는 동 림은 그나마 중간에 떠났지만, 그 아내 도냐 리는 그대로 남아 저의 오라버니와 함께 질문을 퍼부었다.

선실의 지도를 보면서 거기 나온 모든 나라의 이름과 특징을 묻는 데까지는 그나마 핀투도 아는 바가 있으니 조금 거들 수 있었는데, 역사와 철학이 나오니 핀투는 속수무책인 반면 프란치스코 신부는 흥분하여 말이 빨라졌다.

“아, 그렇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해 마저 이야기를 하고, 얼른 논리학으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신이 난 신부는 서방 이교도 학자의 학설을 열심히 소개하고, 동방 이교도들 또한 덩달아 신나서 툭하면 질문을 던지니, ‘Eudaimonia’니 ‘克己復禮’니 하는 말이 양쪽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통역하는 핀투는 죽을 맛이었지만, 다른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그런 사정 알 바 없는 꺽정이는 간만에 단단한 땅을 밟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야, 세상에! 어찌 저런 배가 하늘 아래 있단 말인가! 꺽정아, 네가 참으로 큰 공덕을 세웠다. 내가 네 덕에 저런 구경을 다 하는구나.”

뒤에서 갑자기 호들갑 떠는 소리가 나니,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형 오셨소? 족히 사나흘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축지법이라도 쓰신 게로구려.”

“영남대로는 정비되고 역참은 제 몫을 다하게 되었으니 몇 해 전과 같지 않더라.”

본디 역졸과 역리들은 상민과 향리 중에서도 천하다 손가락질 받곤 했는데, 길이 닦이고 그 길 위로 양보(兩報) - 『공보』와 『정론보』를 합해 부르는 말이었다 – 와 온갖 재화가 오가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기호(畿湖) 정도라면야 경저리들이 직접 사람을 보낼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먼 군현까지 양보를 나르는 일은 역졸들이 맡고 있었다. 그 와중 사족들 중 누군가가, 멀리 사는 벗이나 친족 사이에 서로 서간이나 선물 주고받을 때, 저들 집까지 양보 들고 오는 저 역졸들을 부리자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상학원에서 얼치기로 장사를 배운 뒤 서 별감처럼 사업으로 치부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역리 중 몇몇이 이를 보고, 아예 삯을 받고 물건이나 서한 날라주는 장사를 시작했다. 양반이 시키는데 어찌 감히 품삯 거론하느냐며 꼬장 부릴 만한 고루한 자들은 이미 향전 소란통에 (강제로) 제정신을 차렸으므로 꽤나 성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빨리 돌아다닐 수록 실지로 이득이 돌아오게 되자 역졸들 중에도 큰 맘 먹고 말을 장만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겼고, 각 역의 말은 장부 속에만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마구간에도 있게 되었다. 특히나 오가는 사람 많던 영남대로 쪽은 더욱 그 변화가 빨랐다.

“내가 저 배 선장 빙동인지 핑투인지 하는 놈을 잘 꼬셔서 데려왔소. 내가 아니면 저놈이 일본국 떠나면서 입은 손실 돌려받을 방도가 없으니 내 말은 잘 들을 게요. 사형 원하시면 저 배에 같이 올라가서 안쪽 구경도 시켜드리겠소.”

“너도 작정만 하면 이렇게 마음 곱게 쓰기도 하는구나.”

이지함이 어느새 저의 버릇이 된 꺽정이 놀리는 말을 휙 던졌다.

“조정에서 바닷길 향도(길잡이)도 하나 보내주기로 했는데, 그이 오는 대로 함께 배로 돌아가면 되겠소.”

“지금 가면 된다. 내가 그 향도거든.”

이지함이 태연하게 답했다.

“거 참 농담도. 사형이 향도 노릇하다가 배 뻘밭에 박으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영종도에서 늙은 선인 한 사람을 더 향도로 태우기로 했으니 걱정은 마라. 강화 앞바다까지 가는 길이야, 내 소싯적에 종종 배 타고 다녀보아서 훤히 안다. 얼마 전에 한 번 더 조운선 빌려서 살피기도 했고.”

농담인 줄 알고 비꼬았는데 진지한 대꾸가 돌아온다. 꺽정이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엥? 올해가 그 식년시인가 과거 있는 해 아녔소? 그건 어찌하시고 뱃놀이나 하셨소? 사형이 양반 관두려 하신다면야 난 언제든 환영이지만.”

“과거는 때려치웠다.”

꺽정이 말문이 일순 막혔다. 이지함의 가벼운 말투 뒤에 서린 회한을 숨기기에는 꺽정이와 이지함이 함께한 세월이 너무 길었다.

“누가 사형 마음을 괴롭게 한 게요? 그놈 이름만 대면 내가 저 배의 화포 들고 가서 때려주겠소. 쇳덩이 묵직한 것이 사람 패기 좋아보이더만.”

“후... 너 없는 동안 도성이 시끄러웠다.”

작년 10월의 일이었다. 원자가 탄생한 경사를 기념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근정전에서 임금이 정시(庭試)를 보았는데, 소문난 망나니 이량(李樑)이 장원급제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뒤, 꺽정이가 도성 떠난 뒤에 이량의 장원급제 비결이 밝혀지면서 뒤늦은 논란이 터졌다.

“... 그의 스승이었던 정사룡(鄭士龍)이 전(箋)의 제목을 이량에게 알려주어, 저 홀로 몇 달을 미리 준비한 뒤 외운 글을 그대로 적어냄으로써 장원을 했다는 것이다.”

“동고 대감 그 꼬장꼬장한 사람이 가만히 있었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정사룡 그자는 윤원형의 무리와 교분이 깊어서 본디 인망이 좋지 않았다. 그저 윤가 놈과 얽힌 자들이 워낙 많았기에 모두 쳐낼 수 없어 조정에 남았을 뿐이었지. 정사룡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당했지만, 이량은 그대로 환로(宦路, 벼슬살이)에 올랐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대손인데, 품행은 효령대군보다는 그 형을 쏙 빼닮았다. 허나 본인도 어쨌든 선원록(璿源錄)에 이름 올린 몸이요, 더구나 그 외조카가 금상의 중전 되시니, 외척으로서 저의 세력을 모으고 있는 심통원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이미 소위 ‘임자경장(壬子更張)’의 세 절목, 즉 대동법과 균역법(均役法), 사창제의 일로 모든 힘을 쏟고 있던 이준경으로서는, 심통원까지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우선 정사룡 한 사람만 쳐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거 그 심가 놈들도 언제고 손을 봐줘야 하겠구만그래. 그런데 사형은 무슨 연고로 거기 얽히셨소?”

“내가 이량의 일을 두고 깊게 생각해보니, 비록 겉보기로는 못난 사람 한둘로 인한 것이지만 더 깊게 살피면 과거라는 제도 자체의 병통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경장의 때는 지금이니, 과거 역시 이럴 때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여, 밤잠을 쪼개어 과거의 폐단 고칠 방편을 마련한 뒤 동고 대감에게 전하러 갔단다.”

사제(師弟)가 말만 꺼내고 왜국으로 도망친 탓에 자신만 늙어서 고생한다며, 자조 섞인 농담으로 이지함을 맞이하던 이준경은, 인사(人事)의 폐단을 고치는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정색하였다.

“국사(國事)를 능히 맡아볼 수 있는 국량(局量)은 헤아리지 않고, 고작 문장을 다듬는 재주만을 살피니, 이량과 같이 시세에 영합하여 얄팍한 수를 쓰는 자가 걸러지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시문(詩文) 짓는 재주가 나랏일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책문(策問)은 그나마 쓰임새 있는 과목이지만, 그마저도 대개는 천리(天理) 잘잘못과 군왕의 수양을 논하는 것이 급제의 지름길이니 쓸모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국량을 헤아릴 길이 있긴 하오?”

“왜 없겠느냐? 소위 잡학(雜學)이라고 깔보는 것 중에는 정말로 하찮은 기예도 있지만, 산학처럼 나랏일에 있어 오히려 글재주보다 중한 것도 있다. 고작 한나절 글재주 겨루기로 사람을 가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목들까지 두루 살핌으로써 참된 인재를 가려낼 수 있을 터.”

꺽정이가 듣고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하기야, 어디 감영에서 취재를 볼 때도 그 재주에 얼마나 능숙한지를 따지고, 무과를 볼 때도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를 분(分, 점수의 단위)으로 따져서 견주는데, 유독 문과만 문장의 유려함을 따진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소?”

이지함이 힘없는 냉소로써 답변을 갈음했다.

“아, 사형이 과거 때려치운다 했었지.”

“동고 대감이 말하기를, 지금과 같은 때야말로 정학(正學)의 기치를 바로 들 때이니 함부로 과거에 손을 댈 수는 없다 하더라. 그러니 말이 통할 리 있을까.”

실제로는 조금 더 복잡하고 심란한 대화가 오갔지만, 꺽정이 앞에서 얘기하지는 않았다.

이준경은 대과를 자칫 고치다가 외려 어그러뜨려 잡과(雜科)와 같이 만든다면 기예를 갈고 닦은 잡인(雜人)만 올라올 것이라 하고, 이지함은 반박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여러 대소신료가 힘을 합쳐 하는 것인데 그들을 모두 군자로만 뽑으려 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 이준경은 이지함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군자의 나라를 이룰 수 없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조선국의 길이요 선비의 길이라네. 수산 그대의 지재는 이 사람도 익히 아는 바이니, 부디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게나. 그대의 뜻만 받고 그대가 제안한 이 글은 어디 알리지 않겠네.’

하는 것이었다.

이지함 그가 생각하는 것. 지금까지 꺽정이와 이이, 신씨 부인 등과 함께 해온 것이 정녕 선비답지 못한 길인가? 어쩌면 그와 이이만 제대로 된 선비요 나머지는 모두 고루한 자들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그들 몇몇만 편벽한 자들이요 나머지가 정도(正道) 걷는 이들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과거를 때려치웠다. 남명 선생이 꺽정이 네 말 듣고 전답을 모두 처분한 것처럼, 나도 마음 놓고 세상을 비판하려면 먼저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나 꺽정이는 도리어 분할 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하는 당상관을 사형쯤 되는 사람이 못한다니 말이 되오? 당연히 나머지 선비들이 고루하고 사형이랑 밤골 도령이 생각이 트인 것이지, 거 참.”

꺽정이의 ‘나도 하는 당상관’ 소리에 잠시 울컥하는 이지함이었다. 이래서 전조 시절부터 문신들이 무신을 깔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른 선비들이 잘났으면, 진작에 저 일본국 사정도 꿰뚫어 보고 그 너머에 불랑기인지 포루투갈인지 하는 도깨비 나라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을 것이오. 결국 이를 찾아내고 저들을 데려온 건 우리 아니오?”

“하, 그건 그렇지.”

“어차피 저기 프란치스코 화상 데리고 도성 올라가면 임금님 뵈어야 하는데, 거기서 내가 선비님네들 망신이나 한 번 주겠소. 다들 머리통에 한 대씩 꿀밤 맞으면 정신을 좀 차리겠지.”

생긴 건 암만 도깨비처럼 생겼어도 엄연한 사람이다. 그러니 꺽정이가 암만 몽둥이 들고 금 내놓아라, 화포 내놓아라 한들 그 자리에서 만들어서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기 전에도 충분히 써먹을 구석이 있지 않겠는가?

“또 뭔가 음흉한 생각을 품은 모양이로구나. 나도 좀 듣자.”

“흐흐... 들어보시오.”

부산포 바닷가 모래톱에 털썩 주저앉은 거한과 선비가 두런두런 얘기하는데, 사정 모르는 이들은, 의좋은 사형과 사제가 담소하는 것으로 오해할 법도 했다.

허나 정말로 담소를 하고 있었으니 꼭 오해라 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충주 감영 파옥할 때부터 두 사람의 담소는 항상 음흉한 일 꾸미는 것으로 귀결되곤 하였으니 그것이 문제일 뿐.

그래도 이번의 흉계는 – 잘만 풀린다면 – 웬 일로 사람 하나 죽거나 다치지 않고 풀려나갈 것이었다. 일어날 파란은 결코 작지 않고, 오히려 이전의 향전보다도 더 전국의 사족들을 뒤흔들 수도 있겠지만.

“이곳이 디오시온의 궁궐이로군요. 분명 자폰의 바로 옆 나라인데, 문화가 매우 다른 듯합니다.”

짧은 한문 실력으로 더듬더듬 ‘빛과 조화의 문(光化門)’ 현판을 읽은 하비에르가 말했다.

“당연히 다르지. 어디 가서 왜국과 조선 함부로 견주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게요.”

통변이 옮긴 말을 들은 ‘돈 림’이 곧장 대꾸했는데, 이미 이 이국적인 광경에 홀린 하비에르는 듣지 못했다.

“경치 감상은 나중에 하시오. 임금님 오래 기다리게 하면 첫인상부터 망칠 수도 있으니.”

하비에르 곁에 있는 사람이 이지함 같은 이였다면야, 추기급인(推己及人)하여 그 이국의 풍광 감상하는 마음을 얼추 짐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하비에르 옆의 꺽정이와 핀투 두 사람 모두 그런 선비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하비에르가 감탄하건 말건 – 그리고 경복궁 궁녀들이 돌아온 임 별장과 그 옆의 도깨비 둘 중 무엇을 먼저 구경할지 고민하건 말건 – 이 기이한 일행은 대전(大殿)으로 곧장 향하였다.

“임금님은 저기 안에 계실 것이오. 다른 중신들도 다 저 안에 있고. 화상 어르신은 답변할 말은 모두 외우셨소?”

“걱정 마시지요, 돈 림. 지난 사흘 동안 돈 리와 여기 핀투 선장을 데리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비에르가 웃으며 답했다.

통역은 적게 거칠수록 좋은 법이었다. 디오시온과 자폰의 말은 그나마 비슷하다곤 하지만, 에우로파에서 잘 입증된 것처럼 말이 비슷하다 하여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디오시온 궁정에 딸린 통역사가 있다 하였으므로, 예상 가능한 답변들에 대해서는 하비에르 본인이 직접 자폰 말로 대답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일에 대비하여 핀투 선장을 대동하고, 또 그들의 신분을 보증할 돈 림도 함께하기로 하였으니, 하비에르는 긴장할지언정 이번 첫 만남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낙관하고 있었다.

“전 별장 임거정과 불랑기인 후랑치숙호하비애루(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후애랑맹대평투(페르낭 멘데스 핀투)는 들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법. 그러므로 꺽정이는 정걸에게 청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들리는 그대로 써서 올리라 하였다. 그 결과, 저쪽에서 몇 번이나 버벅댄 끝에 겨우 대전 안에 들 수 있었다. (아마 동석한 사관도 고생깨나 할 것이다.)

용상에는 제법 수염이 자란 임금이 앉아 있고, 그 주변에는 이번에 좌의정까지 오른 이준경을 비롯하여 여러 고관이 늘어서 있었다.

“민주당 임꺽정이 임금님께 인사 올리오. 걱정해주신 덕에 일본국 무사히 다녀왔소.”

꺽정이가 꾸벅 허리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주님의 종 프란치스코가 존엄하신 조선국의 국왕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어서 하비에르가 부복하지 않고 그저 허리만 굽혀 인사 올리니, 그 말의 정중함은 전해지지 않고 몸가짐의 무례함만이 전해졌다.

허나 중신들은 분개하면서도, ‘금군은 무엇하느냐’ 같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임거정 저 무뢰한이 먼저 예법을 어그러뜨리니, 사리에 어두운 오랑캐로서는 필시 이것이 조선국 예법이라 여기고서 따라한 것이라 여길 뿐.

또한 강화 앞바다에 정박한 대선(大船) - 중신들 중에도 그 위용을 목도하고 돌아온 이들이 여럿 있었다 – 은 물론이요, 저 후란 아무개과 그 옆 다른 양이(洋夷)의 기이한 복식과 풍모를 보니, 궁금한 마음이 치솟는 것을 어찌할 수 없기도 했다.

“... 이미 동래부에서 자세한 사정을 모두 글로 적어 고했으니, 더 길게 아뢰지는 않겠소. 좌우지간 이 모든 것이 임금님 덕택이오.”

꺽정이가 전혀 고마움 안 느껴지는 말투로 저의 아뢸 바를 모두 고했다.

이제는 하비에르의 차례였다.

‘구리수도(具利修道,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대가 닦는 도의 이름인가?’ 처럼, 사소한 오해에서 말미암은 질문도 있었지만, 에우로파의 정세나 예수회가 선교를 하는 목적에 대해 꽤 날카로운 질문도 여럿 들어왔다.

하지만 하비에르는 안심하였다. 돈 림이 옆에서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며 잘 하고 있다는 응원의 뜻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다시 국왕이 물었다.

“그대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역시 예상했던 물음. 하비에르는 ‘인도의 상 투메’ 호에서 준비해둔 답변을 내놓았다. 디오시온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편하게, 그들에게 익숙한 음운으로 지명과 인명을 옮겨서 말해주는 것은 덤이었다.

“소승이 난 곳은 납아라(나바라) 왕국으로, 애우로파 대륙의 남서쪽에 있습니다. 또한 소승으로 하여금 이 땅에 오게끔 도움을 주신 교종(敎宗, 교황)께서는 대륙 남쪽 이타리아의 교종령(교황령)에 계시며, 또한 소승에게 배를 내어준 것은 에우로파의 남서쪽 끝에 있는 포루투갈, 즉 불랑기국입니다.”

“애우로파라 함은 무엇을 가리킴인가?”

“그것은 땅의 이름입니다. 중국에 여러 성(省)이 있으나 중원(中原)이라 통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듣기로 일본국에서는 그대들을 남만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천축에서 왔다고도 한다 하였다. 이는 애우로파가 천축의 남쪽에 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불랑기로부터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아불리가(아프리카) 남쪽으로 크게 돌아 천축 고아(Goa)와 말라가(말라카)를 지나야 합니다. 그 뒤에야 비로소 북상하여 중국이나 일본국 등에 닿을 수 있기에, 그곳 사람들이 저희가 남쪽에서 온다 여겨 남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두 땅은 서로 지구의 반대편에 있을 뿐이요, 불랑기와 이곳 조선의 위도는 대략 같으므로 남북을 논할 수 없습니다.”

“지구(地毬)란 무엇이며 반대편이라 함은 또한 무엇을 뜻하는가?”

“땅과 바다는 공(毬)과 같이 둥근 모양이니, 이를 지구라 일컫습니다.”

그 말이 옮겨지자, 주변의 귀족과 고관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하비에르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요 그저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이것이 무슨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당황하여 곁의 돈 림을 보았더니, 잘 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돈 림이 상륙하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 림이 말하기를, 디오시온의 귀족들은 대부분 학자이기도 하므로, 흥미로운 사실이나 주장을 두고 논쟁 벌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하였다. 속세 시절, 파리대에서 석사학위를 딴 뒤 잠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강사도 한 적 있던 하비에르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생김새와 몸가짐으로 볼 때 귀한 신분임이 틀림없는 돈 리와 도나 리 모두 이곳까지 배를 타고 오면서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그 말에 틀림이 없음을 하비에르도 능히 알 수 있었다.

‘그대가 말하는 것을 듣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의 학설을 가져와 논박하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오. 그럴 때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일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을 해야 한다오. 그러면 더욱 기뻐하며 논쟁에 나설 것이니, 이것이 조선에서 벗을 얻는 법도요.’

이 역시 돈 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었다. 물론 하비에르가 지금껏 만나본 디오시온 사람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증거가 엄연히 눈앞에 있으니 믿어봄 직하였다.

잘 되기를 속으로 기원하면서, 하비에르는 준비해둔 다음 말을 꺼냈다.

“공이란 무릇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는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종국에는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소승은 비록 동쪽으로 항해하여 이 땅에 닿았으나, 가수치야(카스티야)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아불리가 대신 서쪽 대양을 건넌 뒤 다시 서쪽으로 태평양을 지나도 이곳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태평양은 그 너비가 수만 리에 달하여 배가 쉬이 건너오지 못하니, 이것이 포루투갈에서 먼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마침내 귀국에 먼저 당도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국왕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릇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지구’를 운운하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이설(異說)이다.”

“이설이 아닙니다. 삼십 년 전 선인(船人) 마갈량이(마젤란)와 애루가노(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실제로 서쪽으로만 항해하여 본디 출발한 곳으로 돌아옴으로써 이를 입증하였습니다. 또한 그전에도 저희 도를 따르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이 이 이치를 궁리하여 밝힌 바 있습니다.”

국왕의 말이 막히자, 귀족들 중 아마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듯한 사람 – 그 또한 ‘돈 리(이준경)’인데, 돈 림의 처가인 ‘리 데 덕수’ 가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 이 나아와 발언을 청하는 듯했다.

“그대는 불과 삼십 년 전의 일로 천하의 생김새를 논할 수 있다 여기는가?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여덟 척 규표(圭表)를 세워 그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니, 비로소 낙읍 땅이 천하의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이는 『주례』에도 전하는 바이다.

또한 주자께서도 전적을 널리 상고하시어, 사해(四海)의 가장 가운데는 천축의 북쪽, 곤륜산(톈산산맥)의 서쪽이지만 천하의 중심은 양성(陽城, 낙양)이라 하였으니, 이는 물과 뭍을 모두 헤아려 이른 말이다.”

처음 그 ‘지구설’을 듣고 수근대던 주변의 다른 고관들이 이준경의 말을 듣고서 통쾌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랑캐, 그것도 중놈이 성현들이 밝히신 천지의 이치를 논박하려 하니, 마땅히 차근차근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은, 이 자리에 모인 고관들에게는 실로 대경실색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주례』와 주자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비에르의 말을 들은 돈 림이 엄지를 척 올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일 초의 시간이 지난 뒤,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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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량의 과거 부정은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도 물의를 적잖이 빚었지만, 작중에서와 다르게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지요. 이량은 이후 윤원형의 전횡에 은근한 불만을 품고 있던 명종의 비호를 받아 1560년대 초에는 조정의 실세를 노림직한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본인의 방자한 처세가 화근이 되어 명종에게 버림을 당하고 몰락하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 사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발간되어 지동설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게 된 것은 1543년으로, 하비에르가 유럽을 떠난 뒤의 일입니다.

16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 도달하기 시작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여러모로 동아시아의 지식 지형에 큰 풍파를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지구설이었지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곧 중국이 더 이상 ‘가운데’가 아님을 뜻하기 때문에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실로 문제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고전에서 언급된 ‘천원지방’,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고 더욱 상세하게 풀이한 주희의 학술적 업적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이 한층 어려워졌지요.

하지만 17세기 이후 마테오 리치(이마두)와 아담 샬(탕약망)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천문·지리 저작이 전해지면서 조선 학자들도 조금씩 지구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선비들에 의해 천원지방의 세계관과 지구설을 절충한 ‘지구 육면체설’ 같은 해괴한 논변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담 샬을 통해 도입된 서양식 역법의 정교함이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중화의식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즉 중국이라는 지리적 실체와 중화의 문화라는 비지리적 존재를 떼어놓고 사고하게 됨으로써, 지구가 둥글고 ‘중국’이란 상대적이라는 것도 함께 사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지구가 둥글고 우주는 무한함을 언급한 것으로 유명한 홍대용의 『의산문답』이, 사람과 만물 사이 귀천이 따로 없고, 공자가 만일 바다를 건너 조선 땅에 왔다면 조선 땅의 『춘추』를 썼을 것이라는 주장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엄지를 세워 긍정의 의미를 표하는 것(이른바 ‘엄지척’)은 흔히 고대 로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제스쳐가 고대 로마의 몰락 이후 중세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점심』(El Almuerzo, 1617년 경)에 음식을 먹으면서 흡족한 표정으로 ‘따봉’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적어도 이 무렵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널리 통용되었던 듯합니다.

작중 시점인 1553년 현재는 멕시코와 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마닐라 갈레온’ 루트가 개척되기 전입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후에 동아시아 쪽에서 멕시코로 귀환하는 항로까지 발견되면서 비로소 태평양 왕복이 가능해졌고, 스페인이 마닐라를 점령하면서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독점은 깨지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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