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85화 (85/259)

27. 금적금왕 (4)

임꺽정이 왜구 두목 왕직을 붙잡고 은과 비단으로 그 수하들을 유혹하니, 왕을 꿈꾸던 사내의 꿈은 하루 만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흥, 네놈이 이렇게 쉬운 길을 택했으니 허사가 되는 것도 쉬울 테다.”

정신 차린 왕직은 눈을 뜨자마자 꺽정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꽁꽁 묶인 것과는 별도로 딱히 몸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으니, 필히 생포하여 저의 공으로 삼으려 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반대로 저를 끌고 조선의 한성이든 천조의 경조(京兆, 수도)든 데려가기 전까지는 해코지하지 못한다는 뜻.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저놈의 눈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일이었다. 산길에서 붙잡힐 때 저놈이 사람 찢어발기던 것을 생각하면 – 보는 눈이 없었으므로 꺽정이가 간만에 본디 성미대로 칼부림을 했던 것이다 – 나오던 부모님 욕설도 절로 들어갔다.

허나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자니 이는 또 왕직 저의 성정이 허용하지 않는 일. 그러므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로써 네놈은 곧 망할 것이라며 욕을 할 뿐이었다. 상인 겸 해적으로 대성한 사람답게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차라리 관군이 하는 것처럼 모조리 잡아 죽이고 살아남은 자는 노비로 끌고간다면 뒷탈이 한동안은 없었겠지만, 결국 나 한 사람만 잡아들이고 나머지는 그대로 쓰려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믿을 만한 꼭두각시는 어디서 구할 것이냐? 새로 네 아래 들어온 놈들의 밥벌이는 또 어떻게 시켜줄 것이고?”

“제법 도움 되는 말을 하는구나. 도적이 왕을 칭할 때쯤 되면 욕을 해도 나름 배운 사람처럼 하게 되는 모양이지? 걱정 말고 내가 하는 것이나 잘 보아라.”

다가오는 배 여러 척을 바라보며 꺽정이가 웃었다.

꺽정이는 분명 두령 본인이 오든, 두령의 목을 들고 오든 하면 된다고 말해두었는데, 누가 무식한 도적놈들 아니랄까 봐 시체를 통으로 바치는 놈이 있었다.

먼저, 진사혜 아래에 있다가 왕직의 손에 두목을 잃고 대신 왕직 아래로 들어온 왜구들이 작당하여, 옛 두목에 대한 의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모해봉을 죽였다. 그러고서 당당하게 그 시체를 꺽정이에게 바쳤다.

“도적놈 주제에 의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의리. 그냥 은과 비단에 혹해서 그런 것이라고 인정들 하거라.”

“이야, 역시 큰 도적께서는 다르십니다!”

대저 관에게 뇌물 바칠 때든 두목에게 벌이의 몫을 상납할 때든 아첨을 곁들이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것이 늘어나기 마련.

꺽정이 꼴을 보면 결코 관원은 아닌 듯하고, 무장도 아닌 듯하므로, 이 왜구들은 저들끼리 머리 맞대고 생각하기를, 아마 관에 투항한 같은 도적 출신일 것이므로 도적답게 아첨하면 되겠다 하였다.

“저희들 속을 귀신같이 알아보십니다!”

“헛소리는 되었고, 조만간 여기에 새로 두목을 세울 터인즉 그 사람 말이나 잘 듣고 따르거라. 종종 내가 부르면 조선으로 와서 뱃일 좀 돕고.”

“아이고, 물론입죠, 헤헤.”

그 다음으로는 마츠라 타카노부가 저의 수군을 거느리고 후쿠에에 당도하였다. 그와 함께 대마도에서 히라도로 오는 연안 뱃길을 지키던 왕십육과 서해의 무리도 돌아왔는데, 서해는 살아서 오고 왕십육은 시체 되어서 왔다.

“이 서해, 큰 깨달음을 얻고 임 장군께 귀부하러 왔습니다.”

까까머리 서해가 머리를 푹 숙였는데, 꺽정이의 답은 그 옆의 타카노부에게 향했다. 눈빛과 기세만 보아도 그간 곡절이 얼추 짐작되었던 것이다.

“타카노부 네놈이 고생이 많았다.”

“과연 쇼군이십니다.”

꺽정이의 친서를 받아보자마자 얼추 그 계획을 짐작한 타카노부였다. 소 모리타네를 통해 확언까지 들었고, 또 조선의 배가 후쿠에를 함락하든 말든 이 계책대로라면 히라도 앞바다에서 싸움 벌어질 일은 없었으므로 타카노부는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므로 히라도로 오는 뱃길에 저의 수군을 모두 묶어두고, 은근히 미덥지 못한 시늉을 하여 왕십육과 서해의 패거리까지 히라도 쪽에 붙잡아두었다.

허나 시키는 일만 묵묵히 따른다면 논공행상의 말석을 벗어나기 어려운 법. 타카노부 머릿속에 꿈틀대는 야망이 있었으니, 그에 따라 서해를 충동질하여 왕십육을 죽이고 이렇게 데려왔다.

“무엇을 원하느냐?”

“도적의 머리만 치고 나머지 도적들은 모두 거두신다면, 이제 새로운 우두머리가 필요하시겠지요. 쇼군께서 이곳 좁디좁은 섬들에 직접 머무실 생각은 아니실 테니까요.”

“그러면 뭐, 옆의 저 까까중 시키면 될 일이다.”

후쿠에 포구에 들렸다 오면서 꺽정이와 흑의군들이 만들어놓은 살풍경한 난장판을 목도하고 온 서해는 주눅이 꽤 들어 있었다. 그러던 차 꺽정이가 저를 콕 짚어 말하니 깜짝 놀랐다.

“아, 저, 저는 별다른 것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돈벌이만 좀 시켜주십쇼. 제 숙부도 저처럼 바닷바람 먹고 사는 사람인데, 진 빚이 좀 많아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할 말은 다 하였으니, 과연 빚이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숙부라면 서전(徐銓) 아닌가? 쇼군, 이놈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씨 끄나풀입니다!”

모처럼 세력을 뻗쳐보려던 차, 갑자기 눈앞에 난국이 닥쳤으니 타카노부 입에서 다이묘 체통에 맞지 않는 비난이 나왔다.

“흠흠, 저희 숙부께서 제 이름으로 사츠마의 유력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좀 많이 빌렸습죠.”

“그 ‘유력한 사람들’이 모두 시마즈의 가신들입니다!”

고작해야 류큐 정도나 괴롭히며 살던 시마즈 씨는, 지금의 당주 타카히사(島津貴久) 대에 이르러 바닷길 돈벌이에 눈을 떴다.

지금까지는 그 돈벌이를 왕직이 독점하고 있었으니 근근이 서전 같은 명국 사람을 앞잡이로 내세워 다른 판로를 찾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왕직의 빈자리를 자신이 채우고자, 갖은 수를 다 쓸 텐데, 그때가 되면 이 서해를 가장 먼저 포섭하려 할 터.

“왕직은 이제 이곳과 연 끊어졌고, 나머지 굵직한 두령은 다 죽었다. 그러니 서해 이놈이 물려받아야 그나마 무리가 유지되지 않겠느냐?”

“쇼군, 시마즈 씨는 저희보다 훨씬 강대합니다. 누군가 이 섬을 마음 단단히 먹고 지키지 않는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마즈 씨에게 바닷길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지킬 수 있다는 말이냐?”

“이곳 고토의 섬과 사람들은 본디 마츠라 씨에게 속했습니다. 그리고 왕직 이전에도 이곳 사람들은 배를 띄워서 대국을 오가곤 했지요. 그러니 저희가 이 섬 차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들도 쉽게 명분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서는 뒷말 나올 거다.”

“장군께 감히 말씀드리건대, 지금 규슈 어디를 뒤져보아도 저희 마츠라 당이 가장 믿음직할 것입니다. 다 무너져가는 쇼니 씨나 둘로 쪼개진 류조지 씨 상대로도 겨우 버티는 마츠라 당이니, 감히 배신을 하고 싶어도 그럴 요량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꽤 그럴듯한 언변이 나왔다. 지난 몇 달 사이 온갖 몸고생 마음고생 하면서 제법 당주다운 수완이 생긴 타카노부였다.

그러나 꺽정이 눈에는 여전히 애송이였다. (몸의 나이는 몇 살 차이나지 않았으므로 타카노부에게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성정 배배 꼬인 꺽정이는 대개 누가 간절하게 무언가를 노리는 것을 보면, 어떻게 훼방을 놓을지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그 심술보를 모르고서 어떻게든 숟가락 얹어보려 애쓰는 타카노부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었다.

“녀석, 제법 머리를 썼구나. 그런데 모리타네 놈은 어디 있느냐?”

“예? 그것은...”

“보나마나 소문 듣고 찾아온다는 것을 이런저런 핑계로 막고 있었겠지. 그놈 몫도 챙겨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암만 우악스러운 도적놈이라지만 애쓴 놈에게 그만큼 챙겨주는 이치는 알고 있다.”

꺽정이는 이 마츠라 놈의 관직이 무슨 비전국태수(히젠노카미)니 뭐니 한다기에 엄청난 자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핀투의 해도를 보니 고작해야 평산과 서흥 합친 정도의 땅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다.

의민당 시절에도 불과 몇 년만에 황해도 반절을 아울렀는데, 이놈은 그것의 절반도 안 되는 땅 다스리면서 자기가 태수니 당주니 하니 우습고도 고까운 일. 그 수완과 도둑놈 심보는 꽤 쓸만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 생기자마자 숟가락 얹으러 나서는 꼴은 좌시할 수 없었다.

“내 우리 모주 뵙고서 잠깐 상의하고 올 테니 너희 둘은 예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라.”

그리고 어딘가로 쏙 사라지더니, 한 각도 되기 전에 득의로운 표정 띄고서 도로 나왔다.

“내 눈에는 서해나 네놈이나 못 미덥긴 마찬가지다. 반면 모리타네와 그 뒤의 소 씨는 조금은 더 믿을 만하지. 동래에서 배 띄우면 한나절 안에 족칠 수 있으니 어찌 믿음직스럽지 않겠느냐? 더구나 너희와 달리 부산포를 닫아걸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게 대마도고.

여기가 본디 너희 집안 땅이라니, 이 섬들은 너희가 가져가도록 해라. 허나, 여기서 벌어지는 장삿일은 너희에게만 맡길 수 없으니 서해 저놈과 더불어 모리타네 그놈까지 셋이서 함께 관할하여야 할 것이다.”

눈 데굴데굴 돌리며 수지타산 맞추어본 타카노부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마츠라 당은 쇼군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아, 마츠라 당이라 하니 또 떠오르는 게 있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 하는가. 갑자기 지난날 히라도 앞바다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며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그 이름 말이다, 네놈과 서해, 그리고 모리타네 그놈까지 함께 관리하게 될 텐데 앞으로 마츠라 당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허나 저희가 비록 조선국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이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자칫하면 오토모 씨나 시마즈 씨에게 쳐들어올 명분을 줄 테니까요.”

“야, 말은 똑바로 해라. 조선국 도움이 무엇이 있었느냐? 다 나와 우리 당이 도와준 것이지. 그러니까 너희 마츠라 당과 소 씨를 합해서 민주당이라고 부르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이미 『공보』가 널리 들어와, 민주당이 조선국에 있음을 다들 알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이름을 조선 사람들만 대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오로지 스스로 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핑계를 대면 될 것이다. 내가 왜 그런 것까지 고민해주어야 하느냐?”

남이 시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뜻으로 말미암아 모인 민주당이라. 한문으로 옮기면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이 될 것이다.

조선말로 읽든 일본말로 읽든 다섯 글자는 너무 거추장스러우므로, 아마 자유당이 되었든 자민당이 되었든 줄여서 부를 텐데, 어차피 무사들 중 그 뜻에 대해 크게 신경 쓸 사람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조선의 민주당과 그저 친분이 있을 뿐이요, 조선 민주당이 장악한 조선 국왕의 경제사에서 밑천이 나오는 것 역시 그저 사업상의 관계일 뿐일 테다.

“이제 더 불만은 없겠지? 이 섬이 적당히 정리되면 서해 저놈에 모리타네까지 데리고 언제 한양이나 한 번 와라. 경제사 밑천까지 받아서 제대로 장사판 벌일 궁리를 해야지. 그런 일에는 제갈공명과 다름없는 서림이라는 이가 있으니 네놈들에게도 꽤 도움이 될 게다.”

말이 권유지, 사실상 명령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힘으로 이익 취하지 않았으니, 도저히 거절할 여력은 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 할 때였다.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저 임 장군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을 때까지, 즉 약속한 부와 위세를 주지 못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터.

항복할 놈은 항복하고, 저승 갈 놈은 저승 가고, 고토 왜구는 이제 글렀다 여기는 놈들은 시마즈 씨의 사츠마나 오스미(大隅)로 저들 배 끌고 갔다.

끝내 미련이 남은 타카노부는 자신이 비록 명목상이라지만 이 섬들의 주인임을 보일 심산으로 없는 살림에 군사를 오백이나 내어 섬 곳곳을 흩었다.

그러면서 행여 숨겨놓은 금은보화라도 찾게 되면 모두 저의 것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은근 기대하였건만 이미 왜구들이 선수를 친 지 오래였다.

그러니 꺽정이와 조선 선단에게만 좋은 일을 해준 셈이었다. 왕직의 잔당이 지형을 이용해 기습해올까 걱정할 일도 없이, 포구 앞바다로 돌아와 마음 편하게 귀로를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라도에서 발목 잡혀 있던 소 모리타네가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소 씨 일족의 한 사람일 뿐인 모리타네를, 명색이 히젠노카미 관직 있는 마츠라 타카노부와 어깨 나란이 할 수 있게끔 해주었으니 그것을 감사하다 하는 줄 알았는데, 나오는 말은 완전 딴판이었다.

“지금 대마도가 난리도 아닙니다. 당분간 그곳 벗어날 명분을 주셨으니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 무렵 일본의 다이묘 집안들 중 풍파 없는 곳은 별로 없었다. 주군과 가신이 싸우든, 주군의 후사를 두고 편을 갈라 저들끼리 다투든 하기 마련이었는데, 소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기회가 굴러들어오니, 절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츠라 수군과 왕직 아래 있던 왜구들, 그리고 소 씨까지 힘을 합치면, 땅 위에서는 보잘것없어도 바다 위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세력이 된다.

일본에서 바다 바깥으로 나가는 교역을 완전히 독점할 수는 없어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또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힘.

밑천만 제대로 받아와, 어리석은 짓 하지 않고 잘 운용한다면 족히 큰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익이 저희 집안 사람들 감당하기엔 좀 컸습니다. 거기서부터 불화가 불거졌지요.”

늙은 하루야스는 본디 내년쯤 가독을 늦둥이 아들 요시시게에게 물려주려 하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요시시게의 이복동생 마사모리(將盛)가 저를 지지하는 가신들을 그러모아 반대하고 나섰다.

마사모리는 ‘조선의 흑염룡’과 친분 깊을 뿐 아니라 때마침 엄청난 기회를 집안에 가져오기까지 한 모리타네를 추켜세우며, 그를 양자로 들인 뒤 후계로 삼으라는 요구를 하루야스에게 하고 있었다. 아무 기반 없는 모리타네를 앞세우고 그 뒤에서 자신이 실세 노릇하려는 심산이었다.

“다행히도 다들 정신머리는 붙들고 있어서, 우리끼리 싸우더라도 장삿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덕분에 가신 몇몇을 이렇게 데리고 나올 수 있었지요.”

“사내대장부라면 더 높은 곳 노림직도 하지 않은가? 네놈 하기에 따라서는 이 몸도 나서서 좀 도와줄 수 있는데.”

“아휴, 높은 자리일수록 거기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적고 오르려는 사람은 많기 마련이지요. 저는 그냥 조용히 오래오래, 저희 당주님(하루야스)만큼 살고 싶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결론인데, 모리타네 주변에는 왜 동의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은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나 임 당수 뵈러 올 때마다 자주 체감하는 문제였다.

“그런다는 놈이 내 혼사 전날에 그렇게 몰래 빠져나와서 나를 보러 왔더냐?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놈이 그때 왕직 얘기를 발설해서 시작한 것 아니냐.”

‘네놈이 이렇게 미친 짓만 하고 다닐 줄 어찌 미리 알았겠느냐’ 하는 말이 모리타네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겨우 속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모험은 그의 소질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그것 하나는 임 당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맞았다.

“흠흠,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임 당수 앞에서 푸념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리를 저와 다른 소 씨 사람들께 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감사드리고 또 한 차례 감사드릴 일이지요.”

“퍽 일찍도 깨닫는구나. 여하간 때마침 잘 왔다. 네놈도 장차 네 아래서 일할 뱃놈들 얼굴은 보아두어야지.”

“예? 얼굴을 본다니요?”

“저기 포구 쪽 봐라. 다들 이렇게 새 상전 뵙겠다고 오고 있지 않으냐.”

민주당 아래서 일하기로 한 왜구 놈들 중 간혹 포구로 찾아와 귀물 또는 저들의 ‘손님’을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처분하기 쉬운 금은은 모조리 저들이 챙기고, 처분 어려운 것은 새 주인 환심도 살 겸 여기서 떨이하려 한 것이다. (마츠라 수군이 암만 고토 일대를 샅샅이 뒤져도 나

“어쩌다 소인네에게 ‘의탁’하게 된 천주(泉州)의 선공(船工)입지요. 손재주도 좋거니와, 글자도 몇 자 쓸 줄 압니다. 그러니 당수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필시 조선에서도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왜구들이 명의 해안에서 납치한 자들 중 재주 없는 이들은 이미 머나먼 남쪽으로 팔려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 꺽정이 앞으로 ‘진상’되는 사람은 대개 나름의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뱃사람이야 이지함이 그사이 보고 배운 바 있으니 쓸모의 유무를 금방 판단할 수 있지만, 듣도 보도 못한 귀물이나 재주를 떡 선보이면 이지함도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일본 쪽 사정에 밝은 모리타네가 나타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저기 또 한 놈 온다. 사람에 궤짝에, 아주 바리바리 싸들고 왔구만.”

꺽정이가 툴툴대는 사이 어느새 왜구 놈이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전하께서, 아이고, 내 입 좀 봐, 간악한 왕직 놈이 지난해, 왜추(倭酋)들이 이 작은 총통을 퍽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복주(福州)의 솜씨 좋은 대장장이 몇몇을 ‘모셔와’ 소소하게 대장간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왜구 놈이 궤짝에서 묵직하게 생긴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끝은 구부러져 있고, 손잡이로 보이는 부분은 쇠로 된 꽤 괴이쩍은 모양새였다.

“여기 요 ‘새총(鳥銃)’을 보십쇼. 꽤 정교하지 않습니까? 여기 이 대장장이들이 만든 것인데, 왜인들은 이것을 아주 비싸게 사들이고 있습니다.”

꺽정이가 모리타네에게 물으려던 차, 모리타네가 먼저 놀라서 말했다.

“당수, 저것이 바로 제가 당수께 양주에서 말씀드렸던 쇠막대 총통, 타네가시마(種子島, 조총)입니다.”

꺽정이도 그때 모리타네가 찾아와서 떠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비에르를 통해 구해오려던 귀물과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이렇게 (말 그대로) 제 발로 걸어들어온 셈이었다.

허나 막상 실물을 눈앞에 두고 보니, 총통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생김새가 가냘팠다.

“저거 쓸만은 한가? 암만 보아도 영 믿음직스럽지 않은데.”

“아직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장에서 쓰인 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허나 지금 저자 말대로 본토 다이묘들이 요새 저것을 구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저 총 한 자루의 값이 졸병(아시가루)이 한 해 받는 늠료만큼은 된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에 비하면 싸움에 이골이 났다고 해도 무방할 왜인들이다. 그 사이에서 저것을 귀물로 여긴다 하면 필시 아주 용한 무기는 맞을 테다.

“야, 왜구 놈아. 지금 이 자리에서 저것을 한 번 쏘아볼 수 있겠느냐?”

“송구스럽게도 저희는 화약은 따로 만들지 않는지라...”

잠깐 고민하던 꺽정이는 금방 결단을 내렸다. 그의 스승 화담 선생도 말하기를, 남의 말만 듣지 말고 의심나는 것 있으면 스스로 겪어가며 배우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과 궤짝은 우리 배로 보내고, 너는 나가는 길에 이름 적고 가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종 연간 이래 처음으로 바다 멀리 나간 조선 수군은 대승을 거두고 귀로에 올랐다. 공을 세웠으니 정걸은 웃고, 종계를 바르게 하고 장차 먼바다에서 정학의 뿌리를 바로잡을 것을 생각하는 선비들도 웃고, 그냥 배 타는 게 좋은 이지함도 바닷바람 상쾌하니 그저 웃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놈은 당장 숨 언제까지 붙어있을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 정 아니꼬우면 이 술 마시지 말든가.”

왕직한테 술 한 잔 먹여주러 온 꺽정이가 비웃듯 잔을 홀라당 넘겼다. 왕직의 집에서 털어낸 술이었다.

병법에도 남의 쌀 털어오면 내 쌀보다 스무 배는 값어치가 있다 했던가. 과연 그래서인지 제 돈 내고 마시는 술보다 스무 배는 맛이 좋았다.

“자, 역관도 한 잔 하게.”

동래 왜관에서 데려온 왜인 통변이 황송해하며 잔을 받았다.

“왕직 이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꽁해있을 게냐? 도적질하다가 저보다 더 강한 도적을 만나면 도망을 치든 그 아래로 들어가든 해야지, 그냥 마구잡이로 상대하려 나섰으니 이런 꼴 당하는 것은 이쪽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도(常道)다.”

“결국 네놈은 이익을 약속하여 사람을 여기저기 모았을 뿐 아니냐? 네놈 몸뚱아리 하나의 무예와 알량한 술수로 사람 마음을 일시 휘어잡았을 뿐이니, 결국 오래가지 못할 터.”

그러나 왕직도 끝내 욕심이 동하여 술잔을 받고야 말았다. 얼마 전만 해도 미녀 거느리고 술잔을 받았건만, 이제는 묶인 채로 시커먼 사내 놈이 주는 술이나 마시는 신세. 그러나 신세 한탄을 이제 와서 한들 무슨 소용이랴.

“내가 장사에 그렇게 밝지는 못하지만, 대신 장사에 밝은 벗은 두고 있다. 그 친구 말로는 바다 위에 배만 잘 띄우면 반드시 이득 남길 방도가 있다고 하더라.”

한양에서 왜구 때려잡은 뒤의 일을 논의할 때, 서림은 분명 ‘잘 하면’이라고 답했지 ‘반드시’라고는 하지 않았다. 허나 꺽정이가 사람 말을 제멋대로 비틀어 듣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도적 사이 얘기지만, 내 죽을 때까지만 버티면 그 뒤로는 알 바 아니다. 내가 일 벌려두고 죽으면 뒷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나는 내 이름 석 자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면 그만이거든.”

너무나 뻔뻔하게 나오는 말에 왕직도 끝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냐. 하, 그래서 그토록 이 몸을 거꾸러뜨리려 애썼던 것이었군. 나는 그저 문턱일 뿐이었다, 그런 말이냐?”

“뭐, 따지고 보면 그렇다, 그래도 금은보화 가득한 창고의 문턱이었으니 조금 위안으로 삼을 만하지 않겠느냐.”

“이름 석 자라... 그래, 생각해보면 나도 그것을 원했지.”

“너는 이름이 두 글자 아니냐?”

“지금 그게 중한 게 아니잖으냐. 나도 이번 일로 너희 조선을 꺾고, 조정의 책봉까지 받으면 언제고 당당하게 고향 휘주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모두가 소금 장수 왕직이 이렇게 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이젠 개꿈 되었구만.”

연신 비아냥거리기를 멈추지 않는 꺽정이었다. 허나 그러면서도 술잔 주거니받거니는 계속하였으므로, 왕직도 욕설 한 번 내뱉고는 또 피식 웃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느냐.”

“내 칼부림하는 것 보지 못했느냐? 정 많은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또 한 차례 술잔이 돌았다. 꺽정이가 통변 녀석을 시켜 한 병 더 꺼내오게 하였는데, 그사이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왕직은 통변 돌아오자마자 대뜸 물었다.

“들어보아라. 네놈은 이제 나를 저기 북경까지 데려갈 심산이겠지. 그렇지 않으냐?”

“겉으로 핑계 대기는 천자의 조칙 때문에 너를 붙잡은 것이니, 대개는 그렇게 되겠지. 중간에 병으로 픽 죽지나 않는다면.”

“내가 왕은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천자들 하는 것처럼 순장(殉葬)은 치르고 싶다. 내 이름을 사서에 남기기도 하는 길이요, 네게도 도움은 될 것이다.

내가 황성 저자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데, 나만큼 못된 놈이 호의호식하면서 그걸 구경하는 꼬라지는 보고 싶지 않다. 엄숭 그놈을 끌어내려서 나와 함께 벌 받게 해다오.”

제 말처럼 참으로 못된 놈다운 생각이었다. 저만 죽을 수 없어 멀쩡히 부정과 부패 저지르며 호의호식하는 나라의 대신을 함께 죽이겠다니.

허나 이 자리에 다른 관헌이 있었더라면 모르겠으되, 꺽정이가 앉아 있었으므로 그 말에 진지하게 호응해주었다.

“걱정 마라. 이미 네 집에서 다 증좌 챙겨놓았거든.”

고까운 놈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꺽정이 성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하하, 이놈 나와 동류(同類)인 줄 알았더니 한술 더 뜨는 놈이로구나!”

선창(船窓) 너머로 웃음소리가 흘러나갔다.

이번 일이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던 핀투 선장은 대체 또 누가 저렇게 쩌렁쩌렁 웃는가 싶어 알아보려다가, 이 위험천만한 항해를 통해 임 장군 얽힌 일은 가급적 깊게 알지 않는 쪽이 낫다는 깨달음을 이미 얻었으므로 곧 단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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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는 왕직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왜구의 수장입니다. 밀무역과 약탈을 병행하고, 명 관헌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가능한 왜구 노릇에 치중하였던 왕직과 달리, 서해는 철저하게 약탈로 일관하여 당대 절강성 일대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본디 그는 항주의 승려였는데, 1551년 왕직 아래에 있다가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자 은근슬쩍 움직이고 있던 숙부 서전의 꼬드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서전은 시마즈 씨의 후원을 받아 새로운 해적단을 꾸리려 하고 있었고, 왕직과 점차 갈등하면서 사이가 소원해진 서해도 숙부와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1555년 서전은 광동 해안과의 밀무역 루트를 뚫으려 노력하던 중 급사하고, 서해는 숙부 대신 시마즈 씨의 앞잡이가 되어 왜구를 이끌게 됩니다. (명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숙부의 빚을 내세워 시마즈 측에서 서해를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56년 3월 서해는 2만이 넘는 왜구를 이끌고 절강성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는데, 비록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무리의 약한 결속력이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를 간파한 호종헌은 서해 집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적극적인 이간 공작을 펼쳤습니다 (왕직과의 입조·호시 개설 협상 진행 중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왕직이 자기 아래에서 벗어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국 무리에게 버림받은 서해는 자신을 따르는 왜구들을 데리고 내륙으로 들어가 저항하였으나 끝내 호종헌의 관군에 포위당하여 자결하게 됩니다 (서해 집단의 특성과 다른 가정왜구 집단과의 비교에 대해서는 윤성익(2008), “‘16세기 왜구’의 다면적 특성에 대한 일고찰 – 서해 집단의 예를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29 참고.).

그 이름의 원형이 된 중국의 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센고쿠 시대가 진행되면서 점차 그 이전에 존재했던 주군과 가신 사이의 기강이 무너지고 배신과 갈등이 일상화되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 또는 그 이전부터 지역의 영주로 존재했던 유서 깊은 집안들이 가신들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또 한 집안 내에서도 후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게 되지요. 작중의 규슈만 하더라도, 쇼니 씨는 가신 집안인 류조지 씨의 반란에 밀려나 멸망 직전까지 몰린 상태이고, 그 류조지 씨는 가신들 사이의 분열로 내전을 겪는 중입니다.

이는 대마도 안에서도 비슷하였습니다. 작중 모리타네가 묘사하는 분란은 원 역사에서는 1559년 보다 본격적인 모반으로 불거졌는데, 당시 하루야스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은 상태였던 요시시게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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