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86화 (86/259)

28. 중화를 흠모하는 나라 (1)

조선국 첨절제사 정걸, 민주당 당수 임거정과 학생(벼슬하지 않는 유생) 이지함·기대승·이정 등이 황명을 받들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니, 왜구의 굴혈을 곧장 들이쳐 한판 싸움으로 왕직을 토벌하였다.

그 섬은 본 주인인 송포씨(마츠라)에게 돌려주었으며, 왕직에게 붙잡혀 노예로 있던 대국의 양민들은 서해라는 전직 화상을 우두머리로 세워 송포씨와 함께 그 섬에서 계속 살아가기로 하였다.

서해가 울면서 고하기를, 황은을 저버리고 도적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비루한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큰 죄라. 이 죄를 오로지 궁벽한 원도(遠島)에 남아 대명의 바다를 지키는 데 일조함으로써 씻겠노라 하였다.

이것이 조선국에서 (예조와 홍문관 관리들의 밤샘 끝에) 다듬어 황도(皇都) 북경으로 보낸 글의 요지였다.

그런 ‘왕직의 노예’들이 실은 왕직 아래서 열심히 노략질하던 왜구라는 사실은 당연히 누락되었고, 왜구 두령들이 바친 공인(工人) 여럿이 지금은 경제사 탈을 쓴 민주당과 새로 계약을 맺고 동래 왜관 옆에서 선소(船所, 조선소)와 노야(爐治, 대장간)를 차리고 있다는 말도 역시 빠졌다.

또한 왕직의 본거지를 털어 나온 금은은 송포씨와 불우한 노예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으며, 그들이 바친 귀물 중 진상할 만한 것은 모두 모아 황상께 바치기로 하였다.

미리 적어 올린 진상품 물목 중에는 조총 세 자루가 있었는데, 당초에 핀투의 상 투메 호에 실린 것은 분명 여섯 자루였다.

‘사라진’ 세 자루 중 하나는 동래의 노야에서 조선 대장장이들 가르치는 데 쓰기로 했고, 다른 하나는 꺽정이가 선심 쓰듯 군기시(軍器寺)에 던져주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지금 여기 이원수네 집 뒤뜰에서 널리 선보이고 있었다.

명희가 백정의 배필 되겠노라며 열심히 말 타고 활 쏘던 곳이니, 여러 사람 모아다 구경시키기에는 딱 좋았다.

“아씨, 실로 자태가 참하십니다. 자세도 도저히 흠잡을 데가 없구만요.”

꺽정이 일행을 따라온 복주 대장장이 중 우두머리가 열심히 아첨을 하였다.

복주 사람들은 대개 평범한 백성이라 문자를 잘 알지 못하고, 우두머리가 더듬더듬 필담이 조금 가능한 정도였다. 허나 왕직의 바다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말은 일본 말인 고로, 그들 또한 맞아가면서 배운 일본 말이 꽤나 능숙하였다.

또한 이름을 왕삼(王三)이라 하는 이 우두머리 놈은 나름 신뢰를 얻어, 가끔 다른 왜구 두목을 대신해 저들이 만든 조총 시험하는 일도 맡곤 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명희에게 조총 재고 쏘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조총도 역시 드는 사람에 따라 맵시가 달라집니다. 총 만든 사람으로서는 이쪽이 훨씬 보기 좋습죠.”

명희가 웃으며 그 말을 옆의 지아비에게 전해주니, 꺽정이도 씩 웃었다.

“딴에 보는 눈은 있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미 화승에 불 붙은 채 쏘아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조총을 든 사람 앞에서라면 누구든 아첨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터였다.

“그런데 과녁이 너무 작은 것 아니오?”

“몇 번 쏘아보니 얼추 감이 잡혀서, 해볼 만할 것 같네요.”

명희는 뒤뜰 반대편에 조그만 표주박 하나를 세워놓고, 그것을 맞춘다면서 연신 가늠을 했다가 놓았다가 하고 있었다.

“원래 이 총이라는 것은 활이나 대포가 아니라 창대가 아주 긴 창처럼 쓰는 것입니다. 대열을 이루어서 상대편 대열에 쏘는 용도이고, 멀리서 정확하게 조준하여 쏘는 데는 오히려 장궁이나 쇠뇌가 더 나을 수도 있지요.”

산티아고 기사단 시절에 카스티야 군대의 훈련을 먼발치서 구경한 게 육상전 경험의 전부인 핀투 선장이 짐짓 아는 체를 했다.

“그러면 내기나 하지, 무어. 내 아내가 맞춰서 아예 저 표주박을 조각낸다는 데 은자 한 냥 걸겠소.”

꺽정이가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 투메 호는 잠시 휴식 취한 뒤 겨울에 출항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그 덕에 구경꾼들 사이 이지함 이하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뿐만 아니라 유극량 이하 각미사 사람들도, 또 제 몫으로 챙긴 담비가죽과 인삼 처분하러 겨울마다 한양에 오기로 한 니탕카이와 ‘백정여진’ 몇몇도 있었으며, 핀투 따라서 한양 구경나온 상 투메 호 선원들도 있었다.

(그리고 저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구경하는 서생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어째 이윤경을 닮은 듯했다.)

허나 이 각양각색 구경꾼들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임 당수 면전에서 그 안사람이 뜻 못 이룬다는 데 돈 걸 만큼 담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후, 쏠게요. 흡!”

명희가 숨을 죽이자, 옆에서 불씨 들고 있던 왕삼이 잽싸게 화승에 불을 붙여주었다.

“방포요!”

곧 방아쇠가 당겨지고,

“하하, 잘한다!”

우렛소리와 더불어 마당 반대편에 과녁으로 세워둔 표주박이 박살났다.

구경꾼들은 모두 환호하고, 꺽정이와 명희는 자랑스레 웃었다.

“거 생각보다 쓸만하구만.”

“낭군이 안사람을 잘 둔 것일 수도 있지요.”

연기 나는 총을 옆에 내려놓으며 명희가 삐죽 끼어들었다.

자연스레 그 이후로 구경꾼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니탕카이는 찾아온 길에 논상원과 사업당 구경이나 하러 가고, 핀투는 야코 죽은 채 그가 신세 지고 있는 하비에르네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조총 더 구경하겠다며 남았다.

본디 여기가 저의 집인 이이가 슥 다가오더니 총을 들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정밀한 무기이기는 하나, 귀한 화약을 쓰는 게 조금 걸립니다. 활은 아교만 풀어지지 않게 하면 되고, 핀투 선장 말마따나 훨씬 정확하게 쏠 수 있는데...”

눈치 없음에 있어서는 공사(公私) 분별을 두지 않는 이이다운 말이었다.

“동기 간에 칭찬은 못할망정 헐뜯다니 매정도 하다. 장모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서러워하실까.”

“누이동생이 대단한 것이지 저 ‘조총’이 대단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꺽정이도 처음에는 조총이 퍽 볼품없게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글쎄, 굉장히 쓸모가 많을 것 같은데? 갑옷을 입고 있든 맨몸이든, 바로 이것 한 방이면 관통될 텐데. 우리 군관 나리께서는 어찌 보시오?”

꺽정이가 가만 있던 유극량을 데려와 물었다. 꺽정이와 이이 사이에서 잠시 눈 굴리며 고민하던 유극량은 결국 자기 생각을 솔직히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율곡 말씀이 맞습니다. 이 화포도 분명 나름의 쓸모는 있겠지만, 그래도 활만은 못합니다. 당장 저 화승에 불 붙인 채로 기사(騎射)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거 보십시오.”

“아니, 그럼 말 타고 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마병들은 활 버리고 도리깨나 창만 쓰고, 뚜벅이들은 죄다 이 총 들고 다니면 천하무적이 될 텐데.”

“그리고 그 총과 화약에 필요한 재정은 땅 파면 나오겠지요.”

이이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비꼬았다. 저의 남편을 닮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철이 안 드는 것인지, 이럴 때면 퍽 답답한 오라버니를 보면서 명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 조선 땅 최고의 무장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지, 쯧쯧.”

꺽정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혀를 찼다..

어떻게 하면 조선 관군과 같은 군대를 때려부술 수 있는가 오랜 세월에 걸쳐 고민해온 꺽정이다. 머릿속에는 저 조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꽤 그럴듯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조총이 참 강력하지만, 한 번 쏘고 다시 재는데 한세월이 걸리니, 환도와 방패 든 이들을 함께 세우고 중간중간에 창도 섞으면 뭔가 될 법도 했다. 그렇게 오만 잡스러운 병기 든 이들끼리 뭉쳐서 버티는 것은 지난날 의민당 시절에 이미 한 번 해본 바 있었다.

허나 암만 머릿속 생각이 정교하면 무얼 하는가. 그것을 조리 있게 풀어낼 언변이 없으니 그냥 뻔뻔한 억지만 부릴 뿐.

때마침 이지함이 끼어들어 꺽정이를 옹호해주었다.

“숙헌(이이)아, 허나 활도, 기병도 재정을 적잖이 잡아먹지 않느냐? 활이 값은 덜 들지 몰라도, 대신에 활 쏘는 재주 익히는 데 들어가는 공력이 적지 않지. 더구나 활에 들어가는 무소뿔이나 아교도 나름 귀하고.

당장 네 누이동생도 며칠 사이에 저만큼 숙달이 되었지 않으냐? 저것 들고 쏘는 데 들어가는 힘도 시위 당기는 것보다는 적을 것이니, 오히려 재정만 풍족하다면 저 총이 더 병비(兵備)에 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이가 무어라 반론하려던 차, 자연스레 끼어드는 과객이 있었다.

“이 사람도 짧은 식견으로 한마디 보태고자 하네. 적어도 지난번 난리통에서 깨우친 바가 있다면 전장에서 장수가 겪는 문제의 태반은 총통과 화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네. 당장 성황산성을 그렇게 깨뜨리지 않았던가.”

다름아닌 이윤경이라, 다른 이들은 놀라서 인사 올리는데 꺽정이는 그저 팔짱 끼고 물었다.

“웬일로 다 찾아오셨소? 일국의 판서대감이 이리 한가하셔도 되오?”

저를 옹호해준답시고 하필 의민당과 싸우던 얘기를 꺼낼 건 무어란 말인가. 빈정 상한 꺽정이의 대꾸에 날이 서 있었다.

“일국의 병무(兵務)를 모두 한 사람이 짊어져 주니 내 한가하지 않을 리 있는가?”

허나 이윤경의 능글맞은 웃음 서린 눈가에는 주름도 깊어, 그 말과 달리 바쁜 일정 중 잠시 틈을 내서 나왔음을 보여주었다.

“딱 보아도 피곤해 보이시는구만.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마저 얘기 나누십시다.”

금세 마음 푼 꺽정이가 (딴에는) 상냥하게 제안하니, 이윤경도 군말 않고 따랐다.

흑의군 가운데 싸움박질 실력으로는 꺽정이 다음인 – 물론 그 격차는 매우 컸지만 – 양벽에게는 예순 먹은 노모 고양댁이 있었다.

고양댁은 망나니 아들놈 거두어 사람 노릇을 하게 만들어주신 임거정 당수께서 한양에 새집 구하였다는 소문 듣고 찾아와, 은혜 갚는다면서 찬모(饌母) 일을 해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자신에게 의외의 재주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허. 차가 이러한 향을 낼 수 있다니. 점필재(김종직)께서 차를 좋아하신 데는 이런 연유가 있었던가.”

“점필재 얘기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고양댁이 아주 잘 우려내는 건 맞소.”

뜨거운 것은 잘 들지 못하는 꺽정이가, 김 송송 올라오는 찻사발을 후후 불며 말했다.

“서 별감이 경제사에 청하여, 궁방전 처분하면서 삼남의 산지에 대신 차밭 마련할 것이라 하오. 그러니 곧 찻값이 꽤 헐해질 것이외다.”

논상원에서 나오는 논변을 정리한 허엽과 박순이 말하기를, 무릇 물건의 값과 그 유통되는 양 사이에는 긴밀한 연계가 있으니, 소출이 늘어나면 값이 떨어지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하였다.

여전히 그 원리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지함의 동문들이 그렇게 말하고 명희도 그 말이 이치에 닿는다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꺽정이었다.

“자,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그에 앞서... 여기 이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있어도 되겠는가?”

임거정과 그 사형 겸 모주 이지함, 그리고 어쩌면 서림 정도까지 마주할 줄 알았던 이윤경이 물었다. 서림은 없고 그 대신 이이와 이씨 부인(명희)이 앉아 있던 것이었다.

아우와 악연 있는 이이도 이이지만, 무엇보다 젊은 이씨 부인과 동석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여기 내 사형은 조만간 멀리 남쪽으로 떠나갈 것이오. 오가면서 여기저기 들리고, 풍랑 잦을 때 피하고 하다 보면 돌아오기까지 꼬박 한 해가 걸린다 하니, 그사이 대신할 사람 구해야 하지 않겠소.

이 두 사람이 바로 그 직분을 맡게 되었으니 그러려니 하시오. 밤골, 아차, 율곡 이 사람은 총명하긴 한데 좀 못 미더울 때가 많아서.”

실제로는 이이가 미덥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론보』와 『공보』에 글 싣는 일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비에르를 쥐어짜다시피 하여 뽑아낸 서양 이야기가 그만큼 놀랍고 흥미로웠던 덕이었다.

이미 선비들에게 시달리느라 죽을 맛인 하비에르였지만, 글 말미에 ‘서양의 도(道)에 대해 더 듣고자 하는 이는 도성 건천동(乾川洞) 사는 하비씨를 찾아오라’ 한 줄 실어줄 테니 서양 이야기를 더 해달라는 이이의 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에 더하여 이지함 없는 동안 허엽·박순의 잡학 정리하는 일도 거들랴, 저의 그 ‘의권’ 논의 다듬으랴 바쁘기 그지없는 이이였다. 그마저도 그 의권론은 요새 어딘가 막힌 구석이 있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있었다.

반면 꺽정이는 어딜 가든 해괴망측한 일을 몰고 다니니, 이렇게 바쁜 이이 혼자서는 이지함 빈자리를 메워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사정의 꼬리대가리 싹 자르고 면전에서 흉이나 보고 있으니, 이이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아니 나올 수 없었다.

“그런 얘기는 저 없을 때 하면 안 됩니까?”

“에이, 어떻게 한 집안 식구를 두고 등 뒤에서 험담을 하나.”

험담은 안 되고 면박은 된다는 억지에 이이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윤경이 한숨 푹 쉬고 말문을 열었다.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왕직 그자에 대해 예부의 패문(牌文)이 내려왔네.”

“빨리도 왔구려.”

“어찌하여 빨리 왔겠는가?”

“엄 수보(엄숭)가 무언가 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이가 대신 답했다.

“중추부에서도 그리 보고 있다네. 패문에 이르기를, 이처럼 큰 공을 해가 바뀌기도 전에 세웠으니 참으로 훌륭하다 운운하면서, 정조사(正朝使, 신년에 보내는 사신) 편에 보낼 것도 없이 직접 천사(天使, 천조의 사절)를 보내 황도로 압송해가겠노라 하였다네.

그런데 그 천사로 온다는 이가 바로 공부상서 조문화(趙文華)일세.”

“그게 누구요?”

“엄 수보의 수족과 같은 이라네.”

엄숭은 명의 정사를 농단하면서, 바른말하는 이들, 제게 거슬리는 이들, 그리고 그 지재가 뛰어나 제게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은 걸리는 대로 쳐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각에 남은 이들은 그 기국(器局)을 숨기고 있는 자, 아무 생각 없이 엄숭 하자는 대로 따라하는 자, 그리고 엄숭과 심보 똑같은 자, 이렇게 셋 뿐이었다.

조문화는 개중 마지막 부류에 들었다. 그러한 소인의 무리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어, 조선까지 이름을 떨칠 지경이었다.

“공부상서라. 국조 이래 그만한 고관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듯합니다. 곱절로 큰일이 아닐 수 없군요.”

이지함이 턱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왜 큰일이 되오?”

“꺽정아, 상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천조를 공경하는 성의와 맞닿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히 중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사신이 상서라는 고관이요, 그 인물은 엄숭의 수족 노릇을 할 만큼 간악하다면 조정 대신과 여항의 백성이 모두 괴롭게 될 것이다.”

이윤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산(이지함)의 말대로라네. 그나마 의민당 덕분에 의주대로 인근의 고을들은 대체로 여력이 있으니 다행이지만, 조 상서가 여기 당도한 뒤의 일이 걱정이라네. 전례 없는 일이니 미리 대비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국초에 내려오던 환관들은, 토색질에 열중하여 나라의 백성을 괴롭게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 이후의 사절들도 비록 전도유망한 재사(才士)를 뽑아 보내기는 하였으나, 대개 적당히 낮은 품계의 사람을 골라서 보내었으니, 겉으로는 천조와 번국의 차등을 보인다는 뜻이었으나 실제로는 서로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4품 태감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정2품 상서가 찾아온다 하니 실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등체강(二等遞降)의 법도에 따르면, 조선의 정1품 정승조차 명국의 정3품과 같으니, 조선 안에서 상서보다 높은 사람은 아예 무품(無品)인 임금 한 사람뿐인 셈이었다.

하물며 그 상서가 무슨 인품 고매한 명사(名士)도 아니요, 그 엄숭의 아래에서 수족 노릇하는 사람이라 하니 근심걱정이 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꺽정이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잠시 고개 갸우뚱하다가 금방 안색이 밝아졌다.

“아, 그놈이 왜 오는가 알 법도 하오.”

“이보게, ‘그놈’이라니!”

“뭐, 어차피 여기 없는데 천사건 지사(地使)건 알 바 아니잖소?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 흉도 본다는데.”

왕직과 같은 외국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임금 흉을 보는 꺽정이였다.

“판서 어르신, 사람 말 좀 들어보시오. 실은 엄숭 그놈이 왕직의 뒷배였거든. 그러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지.”

“뭐, 뭐라? 임 당수, 그 말이 참인가?”

이윤경이 놀라서 말을 더듬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보나마나 압송은 핑계고, 적당한 곳에서 왕직 놈을 죽여서 입막음을 할 게요. 그래놓고 아마 우리 탓을 하겠지. 딱 보아도 뻔하지 않소?

바닷길 항해야 미리 허용을 해주었으니 못 막지만, 우리 임금님 족보 고쳐주는 건 해주기 싫다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까 저들 구린 구석도 감출 겸, 조선국 망신 주어서 족보 고치는 것도 없던 일로 할 겸, 그런 수작 부리는 것이겠지.

지금 말씀들 하신 대로라면 상서 벼슬이 꽤 높으니 그 조가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우리 조정은 손 놓고 보아야 할 수밖에 없고.”

떡 벌어진 이윤경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천조의 상서가 고작 그런 하찮고 옹졸한 일을 위하여 이곳 조선까지 온다니, 어찌 천하의 가운데 나라, 중화(中華)의 문명을 한몸에 담은 나라이자 중화 자체인 나라가 행할 바라는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꺽정이 말에 일리가 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 왕직과 엄숭이 한통속이었다면, 이 갑작스러운 사신행이 이치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후... 천조의 앞날이 어둡구나, 어두워. 대명(大明)의 천명이 마땅히 일월과 같이 장구하여야 할 터인데, 서둘러 국운을 수복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가 어찌 될 것인가?”

비록 국초에 다소간 다툼이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명은 상국이자 대국이요, 조선과 함께 일어난 나라였다.

물론 중화(中華)보다는 중화(中火, 점심)를 더 좋아하는 꺽정이가 그런 선비다운 감상에 어울려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남의 나라 걱정할 겨를 있으면 우리 앞날이나 먼저 걱정합시다.”

“그러잖아도 이번 사신행에 대해 알려주면서, 임 당수 자네에게 주의하라 일러두려 걸음하였다네. 그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자네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어서 아직 꺼내지 못했지만.”

“주의하라? 내가 딱히 주의할 만한 일을 한 건 없는 듯한데...”

“당장 『공보』에 실리는 글만 보아도 문제 될 바가 있지 않은가.”

『공보』와 『정론보』는 어느새 조선양보(朝鮮兩報)라 불리며 요동까지도 퍼지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요새는 드러내놓고 요양까지 가서 장사를 하니 – 먼 산동 대신 가까운 조선에서 물자 들여오니 요동 쪽에서도 남는 장사였다 – 그 소식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근래 실리는 서양 별천지 소식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대대로 철령위 지휘첨사를 지내던 이씨 집안의 자제 이성량(李成梁)조차 『공보』 읽기 위해 다시 조선말을 배운다는 뜬소문까지 돌겠는가.

그런데 그런 『공보』에서 이번 ‘남정(南征, 남쪽을 정벌함)’ 소식을 실으면서, 임 당수와 핀투 선장, 스무 명 대양서생, 첨사 정걸 등을 고루 칭송하면서 정작 두터운 황은(皇恩)은 칭송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자야 구중궁궐에서 도사들과 함께 연단술이나 행하고 있을 뿐이요, 조선에 왜구 잡는 데 보태라며 내린 은과 비단은 황제의 은혜가 아니라 그나마 성실하게 세금 바치는 명의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공보』를 편집하는 쪽에서는 의도치 않게 직필(直筆)을 한 셈이었다.

허나 이것만 해도 트집 잡기에는 차고 넘치는 빌미였다. 대국의 사신다운 위엄과 인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고 북경으로 돌아가 천자에게 바른 정사를 하시라며 상주(上奏)하겠지만, 애초에 조문화가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이들이 함께 골머리를 앓고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 하여, 얼른 그 남 아무개라는 서생을 시켜 황은 칭송케 하는 글을 속히 싣게 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었다네. 조 상서가 요양이나 의주에서 『공보』를 접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허나 이미 엄숭을 고꾸라뜨릴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왕직 놈 앞에서 공언까지 한 꺽정이는 고작 조문화 때문에 미리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가 그놈이 정이품이라지만, 저기 속리산 소나무 나부랭이도 하는 게 정이품 아니오? 왜 내가...”

“병판 대감께서도 정이품이십니다, 낭군.”

명희가 잽사께 끼어들어 낭군의 혀를 가로막았다.

“흠흠, 그 소나무 한 번 본 적 있는데, 아주 시원하게 잘 생겼더이다.”

꺽정이가 급히 둘러대었다. 다만 그마저도 엉뚱한 소리였다.

“이 아녀자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감?”

지아비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에 이윤경도 저도 모르게 응낙하게 되었다.

“다시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앞서 여러 분들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례없이 지체 높은 분이 천사로서 온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입니다.”

“그렇다네. 정말로 중대한 일이라면 부사(副使) 또한 격이 높아야 할 터인데, 그것은 평소대로 환로(宦路)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장거정이라는 이를 보내겠다고 하였지.”

“만약 엄 수보가 그토록 위세가 높아 천조의 정사를 시종일관 농단하고 있다면, 굳이 이러한 수를 쓸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 그렇지! 누이동생이 정곡을 찔렀습니다.”

꺽정이에게 면박 들은 뒤 지금껏 가만 있던 이이가 느닷없이 탄성을 질렀다.

“내각 안에 엄 수보의 당여만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지 않고자 이와 같은 강한 수를 무리하게 두는 것이겠지요.”

이번에는 오라버니 말에 누이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에 활로가 있을 것입니다.”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 상서의 품계는 높고, 그 위엄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보』에서 황은을 미사여구로써 칭송한다 한들, 그가 임 당수의 행적을 흠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겠지요.

하지만 조 상서의 위엄은, 빗대자면 여우가 빌린 호랑이의 위엄을 다시 담비가 잠시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파고들어, 대국 내각에서 바른 뜻 품은 이가 조선국에 사람 있음을 알고 손을 뻗쳐오게끔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양반가 남녀노소가 합세하여 어려운 말을 하니 백정은 서럽소.”

꺽정이가 그새를 못 참고 투덜댔다.

“낭군께서 아주 좋아할 말입니다.”

“뭔지 얘기를 해야 좋아하고 말고를 하지.”

이이가 또 동생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조 상서가 이곳 도성에 닿은 뒤 뭔가 수를 쓰기 전, 우리가 나서서 먼저 거하게 망신을 주면 된다는 뜻입니다.”

망신(亡身)이란 곧 몸을 망하게끔 한다는 뜻인데, 이는 꺽정이가 아주 잘 하는 일이었다. 어느새 그 못된 심보가 발동하여, 머릿속에서 온갖 방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지에 그런 모의에 함께하게 된 이윤경은 다리에 힘 풀린 채로 겨우 걸어나왔다.

“내가 천조의 앞날을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구나!”

일찍 저문 겨울 해를 대신하여 떠오른 초승달은, 그 모양새가 입꼬리와 같아 그것을 이제야 알았냐며 비웃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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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꺽정이가 생각하는, ‘조총과 다른 병종을 적절히 섞는’ 방안은 원 역사 유럽에서도 화기가 발전하자마자 빠르게 도입되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명성을 떨친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는 이 시기 도입된 총창진(銃槍陣, pike-and-shot) 중 가장 유명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술의 독창성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총창진 대형을 유지한 채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편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상비군, 그리고 그런 군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한 신대륙의 막대한 금과 은 때문이었지요. 당대 조선의 군사전통과 그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꺽정이가 조총을 보자마자 총창진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그러므로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문화는 작중 언급된 것처럼 엄숭의 수족이었습니다. 조선의 고전소설에서 엄숭과 세트로 등장하는 단골 악역이기도 하지요. 허나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어울리게도 조문화는 엄숭을 따르면서 동시에 엄숭을 제치고 가정제의 총애를 얻으려는 공작을 종종 벌였고, 그때마다 엄숭에게 발각당하여 저지당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부패가 지나쳐 가정제의 눈에 띌 정도가 되자 – 대표적으로 화재로 망실된 자금성 전각을 보수하는 일을 맡으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목재를 횡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 엄숭도 조문화를 ‘손절’하게 됩니다.

작중 언급된 이성량은 원말에 요동으로 건너가 요양성참정 벼슬을 지낸 고려 사람 이승경의 직계 자손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명의 장수 이여송이지요. 그 외에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할 만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등 여러모로 세계사에 드러나지 않는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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