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14화 (114/259)

35. 춘추대의 (3)

임금이 느닷없이 선위(禪位)를 거론하니, 조정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비망기를 읽은 대신들은 얼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안에 의리가 밝혀져 있음을 모두가 알면서도 요망하다 일컬어야만 하는 책이 발단이요, 그에 대한 원망을 풀 심산으로 성상께서 미행을 나가시어 임거정을 대면하셨으니 불씨에 물 대신 기름 부은 격일 테다.

원자가 아직 세자로 책봉을 받지 못한 전초로 졸지에 이 일에 휘말리게 된 덕흥군은 광화문 앞으로 달려가 석고대죄를 하고 - 그에게도 그만한 자각은 있었다 - 저의 것 아니었으나 저의 것이라 굳게 믿던 꾀에 제가 넘어갈 지경이 된 심통원은 발만 동동 굴렀다.

그 누구도 임금이 정녕 보위를 넘기리라 믿지는 않았건만, 통촉하여주십사 청원하는 것 외에 임금을 설득할 방도도 딱히 없었다.

임거정이 직접 나아와 석고대죄라도 한다면 그나마 주상의 심화가 풀리지 않겠는가. 벼슬살이 하지 않기에 대궐이나 광화문 앞에 달려가 부복하지 않아도 되었던 조식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위해 찾아왔다.

보나마나 임거정 성미에 차마 입에 못 담을 소리를 하여 그 유순한 성상을 진노케 하였을 터. 그 고집을 꺾을 사람은 같은 고집쟁이인 조식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조식은 대뜸 따져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왜 어르신까지 나한테 그러시오? 그저 간밤에 조금 언성 높였을 뿐이오.”

밤새도록 같은 당원들에게 열렬한 지청구를 당하였던 꺽정이가 불퉁거렸다.

“언성을 높였다고? 어전에서?”

“그러는 어르신께서는 임금님더러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하지 않았소? 나는 그저 임금님 고조할아버지만 욕했을 뿐이니, 나더러 뭐라 하시려면 먼저 거울부터 보고 말씀하시구려.”

아쉬운 사람이 먼저 굽혀야지, 어찌하겠는가. 조식이 크게 숨 들이마시고서는 물었다.

“우선 들어나 보세. 어전에서 무슨 망령된 말을 하였기에 성상께서 그런 명을 내리시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꺽정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나마 듣는 이가 조식이었기에, 두어 번쯤 뒤로 넘어가는 것으로 그쳤다.

언사의 무엄함으로 따지면 삼족을 세 번쯤 멸하기에 족하였다. 무엄함이 지나쳐, 들었을 때 화가 나기는커녕 헛웃음 나올 정도였다. 더구나 그 내용을 따지면 오히려 참에 가까우니, 어찌 뒤로 넘어가지 않고 배기겠는가.

임거정이 정녕 역심을 품었다면 고작 서책 몰래 내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요, 오 년 전 도성 뒤집어 엎었을 때 망측한 짓을 했을 터였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따지고 보면 광묘(세조) 대의 소위 성덕(聖德)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그 또한 이치로만 따지면 틀리지 않았다. 그것을 그 광묘의 현손(玄孫)이자 나라의 지존이신 분 앞에서 하였으니 문제일 뿐.

“휴우, 이보게, 임 당수. 금번 일은 어떻게든 자네가 석고대죄를 아니 하면 수습이 불가하게 되었네.”

결국 조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그 망언에 대해 더 생각하기보다는 앞으로 어찌할지를 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째서 그렇소?”

“지금 나라의 사정을 생각해보게. 자네가 무엄한 언사를 하였다 하여 벌할 수도 없고, 벌하지 않을 수도 없네.”

정말로 기군망상으로 벌하자니 그럴 만한 힘이 조정에 없고 - 임거정과 그 무리의 세력이 너무 센 탓이었다 - 여건을 참작해 가벼운 벌만 주자니 이 또한 좋지 못한 전례를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광화문 앞에 부복하고 있는 덕흥군 옆에 임거정이 가서 함께 죄를 청하는 것, 그것만이 그나마 조용히 수습하는 길이었다. 그 역시 앙금을 많이 남기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그 말씀을 성상께서 물리시도록 할 수는 있을 테다.

“내가 그저 가만히 팔짱 끼고 있는다면? 그때는 어찌 되겠소?”

“군왕의 위엄이 무너지고, 조정의 위엄도 함께 무너지며, 종국에는 지금껏 자네와 자네 당이 이루어놓은 것도 무위로 돌아가겠지.”

꺽정이가 무어라 한 소리 더 하려 했으나, 조식이 선수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를 꾸짖고 호통도 더 치고 싶지만, 자네 말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이 암만 그리한들 벽 보고 꾸중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임을 알겠네.”

“아마 그럴 게요.”

“그러니 귀한 하루를 그렇게 허비하지는 않겠네.”

그렇게 말하고서 조식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꺽정이가 한숨 돌리려던 차.

“남명 선생 말씀을 듣고 왔다, 꺽정아.”

“그분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낭군께서는 따르시지요.”

“아이고.”

무릇 병법에 이르기를 공성(攻城)은 하책 중의 하책이라. 성채와 같은 고집불통은 안에서 공략하는 것이 훨씬 나은 길이었다.

조용히 사라진 조식은 꺽정이 대신 그 곁의 사람들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주변은 모두 물렸고, 오라버니도 집으로 보내두었습니다. 모주님께서는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고맙소.”

명희가 ‘너마저도’ 하는 낭군의 눈빛을 외면하며 이지함에게 말했다.

“꺽정아, 나도 나름대로 오래 생각해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뭘 오래 생각하셨단 말씀이시오?”

“일전에 충주 다녀왔을 때부터의 얘기다.”

‘충주 다녀왔을 때’라 하면, 이정랑의 집으로 가는 논두렁 중간에 걸터앉아, 장차 임금 폐하고 천명 훔쳐 나눠주고 싶다고 꺽정이가 말하였던 그때를 이르는 것을 테다.

사형 꺼내려는 것이 가벼운 이야기 아님을 깨닫고 비로소 꺽정이도 허리를 곧추 폈다.

“결국 네가 주상께 무례 범한 것도, 한사코 사죄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니냐? 인군(人君)을 군주로 여기지 않으니, 예를 갖출 마음도 아니 드는 것일 터.”

“... 그건 맞소.”

꺽정이가 한참 뜸 들이다 수긍하였다.

사람은 좋을지언정 어리석고 유약한 임금이다.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윤원형과 그 일당이 날뛰는 것을 막기는커녕 그 손에 놀아났으며, 조선국 만백성의 어버이라지만 어버이 노릇은 한 번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꺽정이는 임금을 은근히 친하게 여기고 나름의 정을 줄지언정 저의 윗사람으로 대접하려는 마음은 품지 않았다.

“꺽정아, 네가 하려는 일, 그것은 불가하다. 수백 년에 걸친 대계를 세우고 국인(國人) 전체의 마음을 차근차근 바꿔나가거나, 아예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사람의 피를 마구 흘리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너의 성정도 그렇고, 우리 당이 지금껏 해온 일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어제와 오늘의 일을 향하여 꾸준히 달려온 것과 다름 없었다. 굳이 『육신전』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벌어질 수밖에 없었겠지.

결국 네가 생각하여 결정할 일이다. 이 모든 것, 나와 네 안사람, 그리고 너와 정을 쌓았던 주상 전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피를 흘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그 천명 도둑질을 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금 너의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고 네 독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깎아낼 것이냐?”

꺽정이가 궁궐 있는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껏 바꾸어놓은 나라의 제도를 누가 함부로 되돌리지 못하도록 천명을 훔쳐 쪼개버린다. 그 생각으로 지난 두어 해 동안 날뛰어 왔다.

그러나 그 천명은 이미 지닌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지키고 싶어하는 자들도 많았다. 지금껏 꺽정이가 상대해 왔던 관군보다도 더 많을 테다.

그들과 부딪히며 숱한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꺽정이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분명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만약 사형이 반대한다면 어찌할 텐가? 안사람은? 신씨나 서림은?

그리고 당장 이번 일로 부딪히게 된 임금은?

과연 칼날에 그들의 피가 묻는 것을, 꺽정이는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이제 한 발 더 나아갈 때가 되었다, 꺽정아. 깨지 않고 계속 꿀 수 있는 꿈이 어디 있겠느냐. 굽히지 않고 바다까지 갈 수 있는 강이 어찌 있겠느냐. 부디 잘 생각해다오.”

결국 꺽정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이지함과 명희를 앉혀두고 어찌할지 조언을 듣고, 몇 번 따라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못 따라해서 또 몇 차례 싫은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하루도 절반 넘게 지나고,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놈의 고집불통 성미 때문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는데, 끝내 그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어찌하여 저는 낭군께서 품은 깊은 뜻 있었다는 그런 말을, 지아비 대신 모주님으로부터 듣게 된 것일까요, 낭군님? 순순히 다녀오신다면 해명하실 기회는 한 번 드리겠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상을 담아 명희가 지아비에게 상냥하게 말하니, 이만큼 뜨거운 불똥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등 떠밀린 꺽정이는 (용케 도망가지 않고 있던) 서림에게 찾아가, 경제사 제조 박한종이에게 기별 한 통 넣어달라 청하였다.

“무슨 기별 말씀이십니까?”

“덕흥군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임꺽정이를 궁으로 부르시라. 그렇게 전해주시오.”

“예?”

“덕흥군. 임금님 서형(庶兄)인 그 덕흥군 말이오.”

“아니, 그분이 뉘신지는 당연히 알지요. 그런데 덕흥군 대감의 목숨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른답게 사내 대 사내로 만나서 불화를 풀고자 하는데, 저쪽에서 먼저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만나겠다 하였으니 어쩌겠소. 만날 만한 핑계를 만들 수밖에.

엊그제 밤에 한 번 다녀와서 그 사람 집이 어디께인지는 알고 있소. 광화문 앞에 엎드려서 석고대죄 하고 있다니, 밤 되어 돌아올 즈음 적당히 모셔오면 되겠지.”

서림은 더 따지기를 포기하였다. 애초에 임금 면전에서 그 조상 욕도 하는 사람인데, 고작 왕자군 쯤이야 무슨 대수랴.

“분명 방금 전까지 모주님과 명희 아씨께 한 소리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

“그랬소. 하여, 나도 자로(子路)처럼 좋은 얘기 들으면 바로 실천하기로 했소.”

자로가 저승에서 들었더라면, 그런 데 저를 끌어들이지 말라며 발끈할 만한 언사였다.

그날 밤, 광화문 앞에서 철야까지 할 생각은 없던 덕흥군은 해가 떨어지자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이럴 때 덥석 왕위를 받았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것을 알 만큼의 지각은 있는 덕흥군이었다. 허나 선위를 받는다는 그 생각은, 비록 공상 속의 공상이라지만 제법 달콤한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도저히 밝힐 수는 없는 속내였지만, 솔직히 말해 금상보다는 자신이 그나마 더 만인지상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덕흥군은 그 생각의 타래를 겨우 끊으며, 귀가하는 발길을 재촉하였다. 내일도 이렇게 종일토록 멍석 위에 엎드려 있어야 할 터인즉, 얼른 돌아가서 쉬어야 하리라.

그리고 곧 돌아가는 길 골목에서 검은 인영 여럿이 튀어나와 그를 모셨다.

덕분에 덕흥군은 푹 쉴 수 있게 되었다. 저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게 되었고, 그 과정에 저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며, 복면 쓴 작자들은 덕흥군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멍석 위보다는 방바닥이 편하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내관 박한종 통하여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여차하면 임거정 그놈에게 제대로 버릇 가르쳐줄 마음 품으며 그놈을 궁으로 불러오라 하였다. 어젯밤에야, 덕흥군의 사저에 데려간 무관이 몇 되지 않았으므로 끝내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지만 궁궐 안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선대왕 재위 말엽에 몰래 여승(女僧) 들였던 통로 있었음을 기억하는 내관들이 있었으므로, 누구 눈에 띄지 않고 데려오는 - 꺽정이 덩치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임거정아, 대체 왜 이리 나를 괴롭게 하느냐.”

그를 기다리며 임금이 한탄하였다.

만약 겉으로는 그를 임금으로 모시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저 조정 신료 중 누군가로부터 어젯밤 임거정이 한 것과 같은 말을 들었더라면, 그때는 직접 옥수(玉手)를 휘둘러 그 뺨이라도 휘갈겼을 것이다.

그러나 임거정에게 그랬다가는 역으로 손찌검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거니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칠고 무엄한 만큼 진실함을 알았으므로, 분기가 치솟을지언정 당장 그 자리에서 쳐 죽이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퍽 미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벌하자니 막상 벌할 방도가 없고, 벌하지 않자니 괘씸하기 그지 없는데, 또 그렇다고 작정하고 미워할 수도 없는 놈이 임거정이었다.

어쨌든 나라에 공은 있고, 또 어쨌든 임금 그와 대면하며 이야기 나누었던 몇 안 되는 - 솔직히 말하면 하나뿐인 - 또래였다.

조정의 신료들은 그를 어쨌든 임금으로 모셨다. 허나 그 눈빛 속을 이제는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된바, 그들은 임금을 모실 뿐, 이환(명종의 휘)을 모시지는 않았다.

그들은 잊지 않은 듯했다. 한때 임금이 윤원형을 듬직한 외숙으로 여기며 의지하였던 것을, 그리고 그 이전, 임금이 물정 모르던 시절 그 이름을 빌린 윤원형이 사람을 마구 죽이며 위세를 누렸던 것을.

돌이켜보면 임거정은 그 반대였다. 그를 임금으로서 제대로 모시지는 않되, 사람으로서는 멀쩡히 잘 대해주었다.

그의 외숙과 어머니조차 그를 이용하여 권세 부리려 하였건만, 임거정은 오히려 곁가지로나마 그를 위해주었다.

아들이 고열에 시달릴 때, 곁에서 부채질이라도 해주었고, 내수사를 두고 말이 나왔을 때는 더욱 내탕 불릴 방도를 마련해주었다.

대대로 근심거리였던 종계의 변무를 이루어주었고, 백성에게 추앙받는 임금 노릇을 할 수 있게끔 공회라는 것도 열어주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더욱 임거정이 밉고 괘씸하였다. 이왕 그렇게 저를 도울 것이라면, 차라리 저의 총애를 탐하면서 권신 노릇이라도 할 것이지, 어찌하여 그토록 무엄한 짓을 골라 하면서 화만 돋운다는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리라.

“전하, 금군의 군관들은 모두 대령하고 있나이다.”

시위하던 내관 아무개가 조심스레 다가와 고하였다.

“알았다. 너는 내 곁에서 그들을 부를 대비를 하되, 내 명이 있기 전까지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말거라.”

임거정을 궁으로 데려오라 명하면서, 동시에 임금은 지시를 내려 천하의 임거정조차 단번에 제압할 만한 머릿수의 군관을 미리 준비케 했다.

독대하며 오가는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 자리에서 떨어뜨려 놓되, 명하는 대로 달려 들어와 임거정을 제압하기에는 족할 만큼 가까이 두었다.

그나마 마음이 흔들리던 차, 임거정이 또 무엄한 짓을 하나 더 하여 스스로 매를 벌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군관들이라도 몰래 준비해두고 여차하면 몰매라도 맞히고 무릎이라도 꿇릴 심산이었다.

“민주당 당수 임거정 입시이옵나이다.”

“들라 하라.”

곧 박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임거정 녀석이, 마당을 절반쯤 가로지르다 갑자기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무얼 하는 게냐?”

이제 보니, 딴에는 부복한답시고 엎드린 것이었다.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놈 얼굴 아니 보겠노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그 명 받들고 있는 것이외다. 가까이서 보니 마당 흙이 퍽 고운데, 정 바라신다면 이 흙을 용안에 던져드리리다.”

“네놈이 정녕 화를 재촉하는구나.”

여전히 노기등등한, 허나 저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약간은 맥이 빠진 옥음이 마당에 깔렸다.

“이대로 가면 여기저기서 나를 죽이라는 말도 나올 터인데, 더 재촉할 화가 얼마나 있겠소?”

“되었다. 고개를 들거라.”

“알겠소. 그럼 이제 흙 던져드리면 되겠소?”

“시끄럽다.”

고개 든 임거정이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덕흥군 대감께서는 몸 편히 잘 계신즉 걱정 마시오, 임금님.

내가 듣기로, 옛날에 태백(泰伯)이란 분도 왕위 사양코자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셨다 하였소. 덕흥군 대감도 그 덕을 본받았노라 하면 다들 믿지 않겠소? 장담컨대 군 대감의 평판에도 나쁘진 않을 것이오.”

멀쩡한 사람 붙잡아 가두어놓고서 한다는 말이 점입가경이었다.

“지난번처럼 허황된 말로 내 귀를 어지럽히려 왔느냐?”

“그럴 리 있겠소. 어제는 내가 잘못하였소. 하여, 사과도 드릴 겸 임금님께 좋은 말씀 올리려 왔소.”

“무어라? 다시 말해 보거라.”

“내가 잘못했소이다, 임금님.”

그러고서 정말로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기까지 하니, 임금은 일순 임거정 저놈이 저의 눈에 흙먼지를 날린 것은 아닌가 의심하여 눈을 비볐다.

그사이 임거정은 임금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가 애써 머릿속에 담아온 ‘좋은 말씀’을 꺼냈다.

“임금님, 정말로 후대에 추앙받는 그런 성군이 되고 싶으시지 않으시오?”

“후대의 추앙은 말할 것도 없이, 당대에조차 상한(常漢, 상놈)에게 무엄한 소리 듣는 처지 아니더냐.”

여전히 미운 마음 다 풀리지 않은 임금이 삐죽 말했다.

“그건 그렇지. 그... 우리 사이 얘기지만, 솔직히 나는 이 나라에 임금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오.”

놀랍게도, 이 정도의 무엄한 말도 어제 오간 것에 비하면 그나마 양순한 축에 들었다. 임금조차 잠시 별 이상한 것을 모르고서 넘길 정도였다. 촌음 뒤에야 화들짝 놀라, ‘네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소리를 내려던 차, 임거정이 말을 이었다.

“헌데 그 생각을 이번에 고쳐먹었소.

임금님 들으시기엔 어떨지 모르겠는데, 사실 나 말고 다른 백성을 이 자리 앉혀두어도 속마음은 얼추 비슷했을 게요. 임금님 앞에서야 나랏님이라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벌벌 떨지만, 또 어디 집구석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험담을 했겠지.

그러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충심은 백성들 사이에 딱히 없다, 그런 말이오. 예컨대 전란이라도 한 번 날 작시면, 저들 목숨 걸리기 전까지는 딱히 열심히 싸우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춘추』 같은 서책을 보면, 옛날 주나라 때 제후들이 천자 말은 죽어라 안 듣다가도, 좀 힘센 누군가가 나타나서는 ‘좋은 말 할 때 임금님 높이 모시고 오랑캐 무찌르자’ 하면 그제야 어마 뜨거라 하고서 한데 모이지 않더이까.”

제나라 환공이 존근군왕 양척외이(尊勤君王 攘斥外夷)를 말한 이래 그 뜻을 명분으로 내세운 작자는 많았다. 그런 명분을 저렇게 품위 없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이리라.

“지금껏 네가 해온 일과 내뱉은 말이 있거늘, 네가 이제 와서 근왕을 떠든다 한들 누가 믿을까.”

“그리 따지면 지금껏 어지간한 백성들이 충군보국(忠君報國) 운운한 것도 거짓말이오. 본래 무지렁이들이라서 나랏님 귀하신 줄 모르는 것도 있지만, 정말로 임금님과 조상분들께서 그치들에게 보태준 것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외다.

선비들이야, 임금님이 계시고 조정이 있어야 저들 벼슬길도 생기고 녹봉도 받을 수 있으니 귀에 발린 말을 떠들겠지만 말이오.”

유약하며 줏대조차 없으나 모질지는 못한 임금이다. 애초에 그간 쌓인 미운 정을 끊고 유일하게 벗이라 할 만한 자를 쳐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꺽정이 역시 어제와는 달리 나름대로 마음 고쳐먹고 찾아와 저의 품은바 뜻을 감춤 없이 꺼내고 있었으므로, 먼발치서 분기와 답답함으로 발 동동 구르는 내시들과 달리 임금은 꺽정이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러면 너는 만백성이 진실로 임금을 임금답게 모시도록 만들 계책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소. 나는 성정이 이따위라, 임금님을 귀하게 모실 자신은 없소.

하지만 그 대신 임금님께서 장차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만백성 추앙만 받게끔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소. 임금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나는 마땅히 도와드릴 테요.

백성들 중 양천의 구분을 만들고 우리네 백정 괴롭게 한 것은 임금님이 아니라 임금님 조상분들이고, 어쩌면 나도 선대에 죄 지은 놈이 있어서 백정 신세가 된 것일지도 모르지 않소? 그러니 구원(舊怨)이고 뭣이고 잊고, 큰일 위하여 임금님을 돕겠소. 임금님께서 ‘그리하자’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신다면.”

그 큰일이란 무엇이냐. 임금이 물으니 백정은 답한다.

의권이라는 것의 논변에 따르면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그렇다면 임금은 무엇인가?

임금이란 백성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었다는 상징.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사람.

그러므로 삼대(三代)에는 왕의 자리를 다들 어렵다 탄식하였고, 요임금은 후사를 구하고자 온 나라를 누빈 뒤에야 겨우 순(舜)을 얻었다.

허나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당초 임금을 세운 뜻은 모두가 잊고 그 한 사람에게 모인 권세만을 탐내었다.

핏줄이 고귀하여 보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자리를 바라며 골육상쟁을 벌이고, 타고난 피가 족히 귀하지 않은 이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노리거나, 간혹 수틀리면 찬탈을 범하였다.

“... 내 이런 말 다 외워오느라 나름 고생을 하였소. 임금님께서는 부디 헤아려주시오.”

“그, 그래. 고생 많았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다스리시되 다스리지 않으시면 된다고 합디다. 위엄을 세우고 나라의 가운데를 지키시되, 실제의 권세는 아랫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시고, 혹여 누가 엉뚱한 생각 품고서 저의 몫보다 더 탐할 것 같으면 ‘예끼놈’ 하고 혼쭐도 가끔 내주시는 것이오. 그리하면 암만 권세를 나누어주신다 한들 임금님보다 더 권세 부리는 작자는 못 나오지 않겠소?

만일 임금님께서 바라신다면, 나와 우리 당은 이 나라 정사의 제도가 그렇게 바뀌도록 온 힘을 다하겠소. 그리고 임금님께서 그런 결단 내리셨음을 가장 궁벽한 동리의 가장 어리석은 무지렁이도 알 수 있을 때까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겠소.”

“만일 내가 바라지 않는다면? 어제의 일로 그대의 무엄한 마음이 드러났거늘, 내 무엇을 믿고 그대에게 맡기겠는가?”

귀에 솔깃한 것은 애써 무시하며 임금이 다시 물었다.

“무엄한 짓이 어제오늘 일이오? 허나 싫으시다 말씀하신다면 내 어쩔 수 없지.

그때가 되면 다른 길을 찾아야겠지. 임금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 나라의 제도를 바꾸는 데 여러 방도가 있으니, 권모술수를 부려서 중신들을 교묘하게 움직이든, 불만 품은 백성들을 마구 선동하든 해야겠지.

이미 무엄한 말 한 것에 사과를 드렸는데, 옛날처럼 마구잡이로 날뛸 수야 없지 않겠소. 임금님 앞에서 이렇게 속내 드러내는 일도 더는 없겠지.”

임금이 역정을 내었다. 참으로 내는 것인지 거짓으로 내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였다.

“이 도둑놈 같으니. 내 서형을 마음대로 붙잡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일국의 군주를 알량한 인정 내세워 겁박하느냐?”

“미안하외다. 헌데 나는 천생 도둑놈인 걸 어찌하겠소. 임금님께서도 이쯤 되면 아실 때도 되지 않았소?

좌우지간 이 꺽정이는 이렇게 무릎을 꿇었소. 임금님 말씀만 기다리겠소.”

한참 전부터 무릎은 꿇고 있었으나, 새삼스럽게 이를 상기시키는 꺽정이었다. 꺽정이는 그 말을 끝으로, 그간 무엄하게 용안을 직시하던 것을 관두고, 땅만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임금의 눈이 꺽정이 머리통에 닿았다가, 마치 열성조께서 하늘에 계시어 답이라도 내려주실 것처럼 위로 향했다가, 누구 조언해줄 사람 찾아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다 끝내 질끈 감기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임금은 만인지상. 스스로 외롭다(孤) 말하는 사람.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내려놓고, 스스로 내려와야 하리라.

그렇게 지금껏 저의 뜻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려본 적 없던 임금은 마침내 저의 마음 속에서 저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냈다.

“지금껏 그대가 말한 것에 거짓이 없으렷다?”

“거짓이 있다면 언제라도 불러주시오. 와서 언제든 꾸중을 들으리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전처럼 무엄한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언사는 고치지 못할지라도, 그 뜻만은 오늘 아뢴 것에서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뭔가 일 벌일 것 같으면 꼭 내게 알릴지어다. 이번에 서책 두고 벌어진 소란도, 진작에 너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렸더라면 그런 소란이 없었을 것 아니더냐.”

꺽정이 닮아 점차 품격이 사라져 가는 옥음이 내렸다.

“임금님, 하면 절 받으시오. 양주 백정 임꺽정이는 한 사람의 백성으로서 장차 우리 임금님을 임금으로 모시겠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대체 그를 무엇으로서 모셨다는 말인가. 순간 스스로 묻게 되는 임금이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정말로 일어났다가 다시 엎드리며 제대로 절 올리는 꺽정이를 보자 눈 녹듯 사라지고야 말았다.

임금이 임금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으므로, 비로소 그 아래에 백성 되기를 바라는 백성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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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목에 방울 단다는 말은, 이솝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어떻게 퍼졌는지는 몰라도 이미 조선시대에도 들어와 있었습니다. 일례로 효종대 문신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에는 해당 우화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지요. 해당 우화도 아이소포스(이솝) 본인이 창작하거나 채록한 것이 아니라, 중세 유럽에서 돌던 민담이 우화로 정착된 것이라 하니, 근원은 알 수 없으나 아주 널리 퍼져 있던 우화인 셈입니다.

훗날 덕흥대원군으로 추증되는 명종의 서형 - 명종보다 4살 손위입니다 - 덕흥군은, 이전에 몇 번 언급한 것과 같이 행실 문제로 인해 명종대에 종종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양녕대군처럼 그나마 애써 호탕하다고 포장해줄 만한 것도 아니요, 기생집 드나들다가 서생들을 구타한다든가, 그의 집에 딸린 노비들이 장인어른 정세호의 노비들과 패싸움을 벌였다든가 하는 등 영 좋지 않은 일들을 많이 벌였지요.

나중에는 윤원형이 자신과 정난정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덕흥군의 아들 중 하나에게 시집보내려고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몰락 당시의 탄핵 사유에 한 줄이 추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명종이 장성한 뒤 어떻게든 윤원형을 견제할 친위세력을 만들고자 애썼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런 혼담이 나왔을 때 방조 또는 호응하였을 덕흥군은 이복동생의 뒷통수를 때릴 뻔한 셈입니다.

꺽정이의 억지 주장에 언급되는 태백은 『논어』 여덟 번째 장의 첫 구절에도 등장하여 해당 장의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백은 주나라 시조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막내동생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 주 문왕)에게 왕재가 있음을 깨닫자 다른 아우인 중옹(仲雍)과 더불어 장강 남쪽 오(吳) 땅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행적이 전하지 않기에 -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순순히 왕위를 양보했을지도 의문스럽지요 - 공자는 ‘그 덕이 지극하다 할 만하나 (...) 백성이 칭송할 길이 없구나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 民無得而稱焉)’ 라 언급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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