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15화 (115/259)

35. 춘추대의 (4)

한양을 뒤흔든 양위 소동은 다음날 아침 임금이 그 뜻을 거둠으로써 하루 만에 끝났다.

일설에 따르면, 덕흥군이 전날 밤 왕위를 사양하는 말을 남긴 뒤 종적을 감추었던 것이 성심(聖心) 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도 하였다.

그러한 설을 퍼뜨리는 자들이 간밤에 덕흥군을 잠시 ‘모셨던’ 이들이기도 했다는 것은 덕흥군과 임꺽정, 그리고 흑의군 몇몇만 아는 사실이었다.

‘대감, 저희 말에 잘 따르시면 저희는 뜻을 이루고 대감께서는 평판이 오르실 것입니다.’

모실 때는 보자기만 없을 뿐 영락없는 보쌈을 했으나, 어쨌든 이렇게 약조를 지켰으니, 양상군자(梁上君子, 도둑)라고 해서 개중 진짜 군자 없는 것은 아닌 셈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과하게 입 가벼운 몇몇 궁인과 내관들이 말하기를 간밤에 임거정이 입궐하였다고도 했는데, 금군의 군관 여럿이 동원되었고 또 먼발치서 바라본바 임거정이 부복하고 있었으므로, 상께서 임거정을 크게 꾸짖으신 것 아니시겠느냐 하였다.

다만 금상의 성품과 임거정의 성미를 모두 아는 사림 중신들은 두 가지 모두 믿지 않았는데, 특히 후자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듣자마자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귀로 흘리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임거정과 그 일당이 난행뿐 아니라 해괴한 발상을 해내고 그것을 여기저기 옮기는 데도 탁월한 솜씨 있음을 깜빡하고야 말았다.

“경들은 들으오.”

“예, 전하. 하유하시옵소서.”

영의정 심연원이 문무백관의 우두머리로서 앞장서서 고개를 숙였다.

“내 작일(昨日, 어제) 갑작스러운 일을 논하여 상하 막론하고 모두가 놀랐을 것으로 아오.”

“실로 그러하였나이다. 다만 대소신료와 도성 여염의 민려(民黎)가 한마음으로 뜻 거두어주시옵기를 청하자 바로 거두셨으니, 일시의 놀라움은 곧 그쳤나이다. 총(聰)이란 곧 귀밝음이니, 널리 뜻을 듣고 항상 되돌아보시는 것은 곧 빼어난 성총(聖聰, 임금의 총명함)의 발로요, 조선 만민의 기쁨이옵나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참 다행이다’ 하는 뜻을 잘 포장하여 아뢰는 심연원이었다. 다만 아우 통원과 달리 그저 종실과 나라에 풍파 없기만을 바라는 심연원이었으므로 그 말에 진심이 다소 담겨 있었다.

이어서 이준경과 심통원 등 여러 중신들이 성은의 망극함을 돌아가며 아뢰었다.

그렇게 허사(虛辭)가 한 바퀴 돈 뒤, 임금이 다시 말을 꺼냈다.

“매상(昧爽, 동틀 때)에는 일신(日新)에 뜻을 두어, 스스로 옛 허물을 반성하고 새로 깨우친 실마리를 풀어냄이 마땅한 일이오. 하여, 근래 요망한 책으로 인하여 큰 소란 일어난 것을 오늘 아침에 되새긴즉 돌연 깨달은 바가 있었소.”

“또한 성유(聖諭)를 받잡사옵나이다.”

“무릇 거짓이 흥하는 까닭은 참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경들이 누차 아뢴 것과 같이, 소위 『육신전』이란 한없이 거짓된 글인데, 다만 계유년부터 정축년 사이의 일에 잘잘못이 갈리는 바가 많아, 그 의혹에 힘입어 마침내 그릇된 말이 여염(閭閻) 사이 돌게 된 듯하오.

그러므로 이제 생각건대, 우리 세조께서 정난(靖難)하신 일을 올바르게 기리기 위해서는 마땅히 옛일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외다.”

임금이 그렇게 말하니, 은근히 켕기는 구석 있던 심통원이 앞장서서 발의하였다.

“신 공조판서 심통원 아뢰옵나이다. 무릇 어버이와 지존을 위하여 휘(諱, 말하기를 꺼려함)하는 것은 후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제 성상께옵서 옛일을 바로잡는다 이르시니, 신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트이는 듯합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조차 거슬러 올라가면 이로부터 멀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요설(妖說) 한 토막으로 말미암아 세론(世論)이 한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올바르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경의 말이 참으로 옳소.”

심통원이 속으로 안도하며 미소를 감추었다.

어쨌든 『육신전』에 발문까지 붙여 제대로 출간한 것은 민주당에서 일어난 일이요, 비록 통의부의 대송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늙은 신료들 생각에 그 정도만 되어도 능히 탄핵할 만한 죄목이 되었다.

비록 중간에 다소 일이 어긋날 뻔하기는 하였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 이치로 칼날이 다시 임거정 향해 돌아가게 되었으니 잘 된 셈이라. 그렇게 여기면서 심통원이 어떻게 금번의 소란에 연루된 자들을 처벌할지 건의하려던 차.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다스려야 후환을 남기지 않고 중외(中外)에 밝은 뜻을 널리 펼 수 있겠소? 내 생각건대 이를 공론에 부침이 온당할 듯하오.”

“하유하시는 바에 추호만큼의 어긋남도 없으니 신은 기쁘게 여기나이다.”

공론이라 하면 곧 이 자리의 논의요, 잘 해보아야 이곳 대신 저 중추부에서 나오는 논의를 뜻한다.

그러므로 심통원의 마음속 미소는 더욱 커지고, 이준경 등도 딱히 트집잡을 구석을 찾지 못하였다.

“다른 중신들도 이를 옳게 여기오?”

“신 이준경 아뢰옵나이다. 상께서 그 서책을 두고 통분해하심은 실로 천리(天理)에 맞는 일입니다. 다만 그 책은 모두가 그 요망함을 알고 있기에 있음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함부로 금령을 내리거나 반대로 섣불리 허통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공론에 따라 조심스럽게 단속할 방책을 마련함이 상책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공론에 맡겨 처결하시겠다 하시는 뜻이 지극히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이준경과 심통원 두 사람이 모두 그 말씀 옳다 하니, 조정에 더 이상 토 달 사람은 없었다.

임금 또한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고 기쁘게 여겼다.

임꺽정이가 전날 밤에 고해바친 계책이 있었는데, 과연 여러 신료들도 웬일로 저의 말에 잘 따라오고 있던 것이다.

그때 임꺽정이는 저에게 절을 올린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신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오.’

칭신(稱臣) 또한 나라 열린 이래 가장 해괴하게 하는 도적놈 임가였다.

‘그... 내가, 아차, 신이 임금님 조상분을 욕한 게 사실 이 한 사람 생각만은 아니라오. 민간에서 임금님 고조부님 두고 온갖 야담이 나도는데, 개중에 썩 좋지 않은 것도 많소.’

전생에서 이야기꾼 소질 있던 한온이에게 들었던 것만 해도 여러 마당은 되었다. 안질이 생겨서 온천을 갔다는 둥, 그 딸내미가 애비 싫다고 달아나 딴살림 차렸다는 둥.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괘씸하건 말건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어쩌겠소. 그러니 이 기회에 임금님께서 나서서 백성들 뜻을 들어주시고 겸사겸사 잘못도 바로잡으시는 것이오.

네 녀석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제 보니 그러할 만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이러하였으니 너희 생각은 잘못이로다. 이렇게 딱 말씀도 해 주시고, 내가 어찌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을 풀어줄 수 있겠느냐, 해서 대충 몇 가지 청원도 들어주시고.

그러면 놈들이 인두겁 쓴 이상 한입으로 두 말은 못 하지 않겠소? 임금님께 그런 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는데, 그래놓고 뒤에 가서 또 임금님 조상님네 욕을 하면 그건 정말로 못된 놈이지.’

애초에 이 나라 백성이라면 임금이든 그 조상이든 욕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으나, 그 사실은 임꺽정이 돌려보낸 뒤에야 겨우 떠올랐다.

‘네가 낸 계책이더냐?’

‘다 이 머리통에서 나왔다고 아뢰고는 싶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의 머리가 그만큼 좋지는 않소. 다 우리 당 여러 사람들이 머리 맞대어 나온 것이라오. 어쨌든 우리 당 또한 그 놈의 책 때문에 조금 곤란하게 되었지 않소. 수습할 방도 논의하다가 나온 발상이외다.’

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임금의 생각에는 제법 그럴듯하였다. 더구나 이미 자신이 지난날 한 차례 은혜 베풀어준 무리가 지금도 한양에 머물고 있지 않던가.

그사이 이준경의 말에 찬동하는 언사가 또 한 차례 돌았다. 임금이 이윽고 하유하였다.

“경들의 뜻이 이처럼 명백하니, 실로 취할 만하오. 그 말에 따라, 곧 전정공회의 자리에 친림하여 공론을 들을 것인즉 경들은 그리 아시구려.”

이름부터가 ‘공(公)’회요, 전국 모든 군현의 사족과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모였으니 그만큼 공론이라는 이름에 맞는 곳이 또 있겠는가? 이미 소위 대훈(大訓) 내리고자 찾아간 일도 있었으니 저들 또한 그렇게 놀랍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무슨 연고로 거둥하였는지를 듣는다면 그때는 조금 놀랄 지도 모르겠지만, 얘기를 모두 듣고 나면 하나같이 임금 그만을 바라보며 ‘천세’ 산호를 하리라.

그 뜻밖의 말을 듣고 이준경과 심통원 두 사람이 급히 눈치 주고받는 사이, 임금은 그 자리를 파하고 행차 채비를 하러 쏙 들어가 버렸다.

한전법의 초안은 오랜 숙의 끝에 거의 완성되었다. 낙담하거나 분노한 사족들이 대거 낙향하고,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흥미가 떨어진 상민들도 제법 떨어져 나갔으므로, ‘모두의 뜻’을 모은다는 대의에는 다소 맞지 않게 되었으나 논의의 진전은 매우 빨라졌다.

이만하면 고향에서 한양에 올라와 한동안 수고로움 감수한 보람이 있지 않은가. 졸지에 민주당과 탕평당 사이에 끼어 고생하였던 이지함의 형 이지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흠흠, 지난 두 해에 걸쳐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함께해주심에 먼저 사의를 표하는 바요. 상하가 합심하여 명안을 마련하였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일별(一瞥)하고 아뢰는 일만 남았소이다.”

흑의영 한편에 마련된 단상에 오른 이지번이 운을 떼자마자, 사람 몇몇이 마당 건너편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동생의 은인인 동시에 모든 세파(世波)의 근원인 듯한 임거정이요, 다른 한 사람은 어째 그 임거정에게 끌려오는 듯한 탕평당 영수 이준경이었다. 그 옆은 내관과 금군 군관 몇몇인 듯하였다.

“오, 잘 되었군. 마침 다 모여 계셨구려.”

“임 당수, 이 무슨 일이오?”

‘임 당수’ 소리 들은 공회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임 당수가 공회에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 몇 번 뿐이요, 공회에 드나드는 사람도 두 해 사이 바뀌곤 했으므로, 그를 처음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임 당수 입에서 떨어진 말 듣고 벌어진 소란에 비하면 처음의 술렁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임금님께서 곧 이리 거둥하실 것이오.”

“성암(이지번의 호), 임 당수 말이 맞네. 우리 두 사람은 어명을 받들어, 미리 일대를 정리하고 대비케 하고자 찾아왔다네.”

뒤늦게 한탄하는 것 외에 따로 할 수 있는 바가 없던 이준경이 이지번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며 말했다.

“이보게, 지금 임 당수가 무어라 하였는가?”

“성상께옵서 이곳 공회에 친림하신다네!”

“뭐라고? 무슨 전초로?”

“동고 대감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는데?”

소심한 누군가는 겁을 덜컥 먹고, 머릿속이 온통 꽃밭인 누군가는 밝으신 성상께옵서 소문을 들으시고 한전법을 국법으로 바로 만들어주시고자 찾아온다 생각했으며, 대부분은 그저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두리번거리기만 하였다.

“자자, 다들 진정들 하시오.”

꺽정이가 단상 위로 풀쩍 뛰어올라가 목청 한 번 가다듬고 말했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흠흠, 임 당수. 이 사람에게 맡겨주게나.”

어떻게든 여기서 더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준경이 끼어들었다. 나이 오십 훌쩍 넘긴 사람에게 걸맞지 않는 민첩함이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거둥하시는 까닭은 무엇이며, 이 자리에서 논하고자 하는 의제가 무엇인지를 이준경이 밝히니, 또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저 전답 나누는 문제로 찾아왔을 뿐인데, 갑자기 계유년과 정축년의 일(계유정난·단종복위운동)의 옳고 그름을 논한다 하니 마른 하늘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선비들 중에서도 지난 무오년 사화의 곡절 기억하는 자들은 어떻게 몰래 빠져나갈 방도를 구하고, 이번 『육신전』 소동이 벌어진 이래 저의 입으로 무엄한 소리 한 적 있던 상것들은 제 발이 저리다 못해 절로 움직였다.

“아, 정말. 사람 말이 우습게 들리오? 엉? 거 진정들 하라니까?”

보다 못한 꺽정이가 호통 한 번 치니, 그대로 이루어졌다.

“성암 어르신, 금일 참석한 이들의 명부를 주시오.”

누가 조선 선비 아니랄까 봐, 따로 시키지도 않았건만 공회에 참여하는 식자들은 모두 누가 언제 열린 공회에 참여하여 무슨 말을 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이지번 역시 졸지에 공회의 좌장이 되자마자 명부를 만들어 사람의 들고 나는 것을 빠짐없이 적고 있었다.

그저 그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을 뿐, 다른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허나 꺽정이 손에 그 명부가 들어가니 일순 불안함과 후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 지금 달아날 사람들은 달아나시오. 만일 내게 누가 묻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못 보았다고 내 증언해줄 터이니.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남는다면, 마땅히 임금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생각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밝혀야 할 것이오.”

“허, 허나 임 당수. 나랏님의 집안일을 저희가 어찌...”

나랏님 집안일 논할 담력은 없으되 임 당수에게 대들 담력은 있던 아무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게 나랏님 집안일로 끝나는게 아니잖소? 임금님께서 임금님이 되시는 까닭은 민심을 받들기 때문인데, 임자들이 바로 그 백성 아니오?

각지 군현에서 그 고을 사람들 인망을 받아서 이곳 도성까지 올라왔는데, 조선국 모든 군현에서 사람이 모였으니 그것이 곧 조선 사람 전체의 민심이지. 이 자리까지 온 사람이 그런 식견도 없어서야, 원.”

졸지에 꺽정이보다 식견 없는 사람이 되어 본전도 못 건지게 된 사내는 풀 죽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말 들은 선비와 상놈들 중 여럿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이윽고 주상전하 납신다는 일성호령이 흑의영 마당에 울리고, 어가(御駕)가 그 문앞에 닿았다.

선비들은 이왕 나가지 못하게 될 바에야 후대의 부끄러움이라도 되지 않도록 하자며 제가 나서서 주변의 너저분한 것을 치우고, 민주당 상민들은 꺽정이 호령 따라 일제히 흑의영 주변을 소제(掃除)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이 당도할 무렵에는 전시(殿試)를 치를 때보다도 더욱 숙연하고도 말끔히 정돈된 마당에서 지존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임금이 곧이어 단상에 오르니, 모두가 부복하였다. 심지어 천하의 임거정마저 주저없이 무릎을 꿇었는데, 이를 곁눈으로 본 이준경은 필시 지존과 임거정 사이에 무언가 일어났으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임금은 이렇게 이르노라.

너희 공회는 비록 전정(田政)의 폐단을 이정(釐整)코자 모였다 하나, 이를 위하여 각 군현의 명유(名儒)와 부로(父老), 은일(隱逸) 등이 모두 모였으므로 취할 바가 반드시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근래 광묘조의 성덕에 대하여 잘못된 언설이 세상에 나타나, 후대로 하여금 오해케 할 소이(所以)가 되었다. 이는 지난 백여 년간 몰래 퍼진 것이 마침내 지금 드러난 것이니, 어찌 그 병통이 깊다 하여 고치기를 마다하겠는가?

아아, 세조 혜장대왕(惠莊大王)께서 중흥의 대업을 이루신 것은 실로 한 사람의 일이 아니로다.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공히 받으시어 비로소 위태로운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셨도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무엇을 이름인가? 곧 국인(國人) 모두를 이름이다. 세조대왕의 성덕은 위에서 발하여 아래에 닿은 것이지만, 어찌 아래에서 받치지 않고 위에서 내리는 일만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너희의 뜻을 널리 듣고, 그에 맞추어 드러나지 않은 의리는 드러내고 감추어져 있던 허물은 들춰낼 것이로다. 너희는 이 뜻을 널리 알고 그에 따라 간(諫)할지어다.”

오는 내내 열심히 준비한 장구(章句)를 다행히 틀리지 않고 모두 읊은 임금이 마침내 옥음을 그쳤다.

이윽고 장내에 침묵이 돌더니, 갑작스레 깨졌다.

“영월 사람 엄명(嚴明)이 아룁니다. 저희 영월 고을 호장(戶長)이자 저희 집안의 먼 어른 되는 엄흥도(嚴興道)가,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해준 이래로 저희 영월 사람들은 모두가 이를 슬퍼하였습니다.

듣기로 노산군이 죽은 것은 세조대왕의 뜻이 아니요, 오로지 여러 대신의 잘못된 충절이 얽히고설킨 탓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노산군에게 다시 올바른 시호를 내리시어 세조대왕의 성덕을 만세토록 드러냄이 마땅할 것입니다.”

비슷한 말을 하려던 선비가 여럿 있었으나,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집안에 내려오는 설움을 간직한 영월 아전 엄명이었다.

남들이 말을 꾸미고 앞뒤를 생각하며, 저의 말로 말미암을 상벌을 떠올리는 사이 그저 나아가 부복하고서 격식 차린 구색만 겨우 갖춘 말로 아뢸 따름이었으니, 선비 백 명을 모아놓은들 그보다도 빨랐을 것이었다.

이어서 풍기·영천·봉화 고을 사람들 중 옛 순흥부 땅에 살던 이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잘못되었다 하나 충절은 충절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저희 옛 순흥부는 정축년의 일에 연루되어 사내가 모두 죽음을 당하고 그 부는 셋으로 찢어져 이름을 잃었습니다.

바라건대 나랏님께서 충주 고을의 억울함을 풀어주신 것처럼 저희 순흥 고을을 신원(伸冤)해주시면 이 자리에서 죽어 쓰러진들 여한이 없겠나이다.”

일백 년의 억울함이 기어이 그들의 대에 이르러 풀릴 것을 생각하니, 말이 나오기에 앞서 눈물이 나왔다. 주변의 사람들 중 정 많은 이들이 따라서 눈물 흘릴 정도였다.

허나 그 뒤로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주로 의리(義理)뿐 아니라 자칫 세간의 여론이 엉뚱한 쪽으로 흘렀을 때 저에게 불똥 튈 것을 두려워하는 사족들 가운데서 그런 말이 나왔다.

주로 영월과 폐읍(廢邑) 순흥의 의분도 참작할 만하나, 아직 노산군의 추복(追復) 논하기는 한참 이르다는 말이 나왔다.

개중에는 선대왕 시절 조정에서 노산군의 치제(致祭)에 대해 관에서 알아서 제사를 올리되 봉사손(奉祀孫)을 세워 그 제사를 이어주지는 않기로 한 처분을 끌어와, 그 예에 따를 것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대개 사족들의 말은 이처럼 논리가 있고, 상민들의 말은 그저 사람의 칠정(七情)에 호소할 따름이로되, 몇 차례 말이 오가다 보니 사족들은 조금씩 감정에 치우치고 상민들도 나름대로 어설픈 논리를 내걸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해가 그대로 저물게 생겼소.”

그러나 솔직히 말해 여기서 무슨 말이 오가든 저의 당에 떨어진 불똥만 누가 치워주면 그만이었던 꺽정이는 별 감흥이 없었다.

“자네 당이 벌인 일 아닌가?”

아직 성상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대개 이러한 일에는 임거정이 관여하고 있기 마련임을 격물법 이치에 의거하여 짐작하고 있던 이준경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어르신이 보시오. 반나절 넘게 잡아먹고 있는데, 우리 당 상놈들과 어르신네 탕평당 선비님네들 중 누가 더 오래 끌고 있는지. 우리는 그저 할 말만 딱 하고 입을 닫으니 이것이 바로 예절 아니겠소?

좌우지간 하나 부탁 좀 합시다. 임금님께서도 귀한 하루를 내시어 이렇게 오셨는데, 여기 공회에서 이렇게 의론 분분하기만 하면 안 되지 않겠소? 하니, 권점 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사람들 의중을 물어서, 지금껏 나온 안건들에 대해 찬반을 따지도록 하십시다.”

“그것을 어찌 내게 말하는가?”

“그럼 내가 임금님께 직접 고하는 것을 듣고 싶으시오?”

실로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이준경은 날로 깊어지는 주름이 오늘은 또 조금 더 깊어지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단상으로 다가갔다.

조선국 열린 이래 위민(爲民)이니 애민(愛民)이니 운운하며 민심을 말하는 일은 많았으나, 그것을 듣는 일은 세종대왕 시절 이래 드물었다.

하물며 계유년과 정축년 일처럼 이미 백 년 동안 여러 사람 죽었던 대사(大事)에 있어서는 김안로나 윤원형 같은 자들조차 말을 아꼈을 것이었다. 일개 백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나 오늘 저녁 그 자리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더이다.”

꺽정이가 이지함에게 마치 저 칭찬해달라는 양 가슴 쩍 펴며 말했다.

당일 공회에 참석한 이들은 도합 육백삼십팔 명으로, 꺽정이의 허락 구하고 - 주로 노모를 걱정한다든가, 집안에 구린 구석 있거나 하는 자들이었다 - 나간 이들을 제하고 센 수효였다.

개중 노산군 추복에 동의하는 자가 사백칠십하고도 하나요, 순흥부 복설에 찬성하는 자는 오백구십이요, 이른바 사육신의 복권에 동의하는 자는 대개 사족이라 이백삼십구 명뿐이었다.

“발상은 숙헌과 네 부인, 그리고 내가 했다지만, 그것이 이렇게 실제로 이루어지니 여전히 믿기 어렵구나.”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었지. 그래도 누군가 여쭤봤어야 하는 일 아니었겠소, 임금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국의 군왕 앞에서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여간 담력 또는 세력으로 되지 않으니 증험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저의 뜻을 마구잡이로 툭툭 던져댈 뿐 아니라, 이미 임금의 명줄을 한 번 손에 쥐었다가 사뿐히 놓아준 경력 있던 꺽정이가 아니었더라면, 조선의 여느 명유는 고사하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살아 돌아왔더라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뿐 임금을 설복시킬 수 없었을 것이었다.

“뭐, 여하간 이왕 이렇게 하기로 하였으니, 다들 뜻을 마음껏 펼쳐보시오. 임금님께 곧장 아뢸 수 있는 기회라면 여간한 선비님들은 껌뻑 죽을 만한 것 아니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임 당수는 어전에서도 그 말투로 일관합니까?”

이이가 늘 그렇듯 때를 가리지 않고 물었다. 허나 전정공회에서 논밭 말고 훨씬 중대한 일도 논하는 전례를 만들자는 발의를 처음 한 사람도 이이였으므로, 꺽정이는 눈 감아주기로 하였다.

“그럴 리가. 임금님 앞에서는 예의를 아주 깍듯하게 차려서 여러 사람 감탄하게 할 정도라고.”

“감탄 맞습니까? 탄식 아니고요?”

“거 사람 말을 못 믿네. 정 궁금하면 임금님께 여쭤보든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명희와 이지함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어심을 분명히 얻었으므로,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오 년 전, 통의부와 중추부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민주당의 나라 뜯어고치기 대업은 든든한 우군을 얻은 셈이었다.

마침 경제사 제조 박한종이라는 그럴듯한 연줄도 있겠다, 원한다면 궁 안쪽과 글을 주고받는 것도 이제는 불가한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렇게 궐내와 연통 주고받다 보면 반드시 소문이 날 터인데...”

서림이 망설이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꺽정이는 그런 걱정을 일축하였다.

“이 사람, 그런 간담으로 역적질은 어떻게 했소?”

생각해보니 그랬다. 임금과 조정을 상대로 황해도 한 도를 걸머쥐고 떨쳐 일어나기까지 했었는데, 이제 와서 임금을 등에 업고 모략질 벌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헌데 분명 말이 되는 논리임에도 어째 영 석연찮은 것은 왜일까. 서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것 걱정할 여력 있으면, 얼른 그놈의 책 끼워넣은 작자나 찾으시오. 꼬리가 한 번 드러났으면 얼른 밟아야지. 그 망할 책 때문에 벌어진 논란이야 훨씬 큰 논란으로 덮었다지만, 또 다음번에는 무슨 일로 우리 앞길을 가로막으려 들지 모르는 일 아니오?”

꺽정이 타박에 그제야 정신 차린 서림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업당 형방 쪽에서 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럼 진작에 말했어야지.”

“어떤 분께서 매일같이 큰일을 터뜨리셔서 도저히 그럴 여력이 안 되었습니다.”

서림의 반격이 유효하여, 꺽정이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타서 서림이 본론을 도로 꺼냈다.

“『육신전』 앞에 발문이 실려있지 않았습니까? 분명 누군가 새로 쓴 글일 텐데,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글줄깨나 읽은 사람의 솜씨였지요, 주자(鑄字) 만지는 일을 하는 모든 이들을 털어보았는데, 얼추 짐작가는 바가 있더군요.”

“그게 어디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재물은 그러지 않는 법입니다. 근래 갑작스럽게 욱재 대감(심통원) 댁에서 곳간 빗장이 열리고, 그 안에 비장되어 있던 비단이며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들이 도성이나 인천부에서 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어디론가 흘러갔지요.”

서림이 멀찌감치 북동쪽, 한때 윤원형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산장이 있는 수락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락산 골짜기에 무언가 수상한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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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언급되는 세조에 얽힌 야사는 모두 조선 후기에 활발히 편찬되었던 야담집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 권씨가 그 꿈에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 침이 닿은 곳에 피부병이 생겨 평생 고통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또한 수양대군의 맏딸 이세희(가공의 인물입니다)가 아버지의 야심을 알게 되자 이를 만류하다가 집에서 쫓겨났는데, 그 뒤 김종서의 살아남은 아들을 우연히 만나 해로하였고 세조는 평생 딸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 또한 고종 대에야 확인되는 민담입니다.

이러한 각종 야사와 민담은 당연히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와 동시에 조선 후기까지 기층에 존재했던 세조의 집권 과정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계유정난과 단종의 죽음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양녕대군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은거하는 현인 내지는 호남아로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조선의 공식적 입장은 작중에 언급된 것과 같았습니다. 즉 세조 본인은 조카가 ‘자발적으로’ 왕위를 넘긴 뒤 그를 상왕으로 모시며 지극히 예의를 다하였으나, 여러 반란 세력이 단종을 끌어들이려 하였고 주변 훈구대신들의 충동질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산군의 처벌을 주청하는 여론은 잦아들지 않았는데, 금성대군이 이끌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금성대군도 죽음을 맞자, 비탄에 빠진 노산군은 끝내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게 됩니다.

이러한 논리 하에서 세조의 ‘성덕’과 단종의 복권은 양립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눈 가리고 아웅이었기에, 원 역사에서는 시대상 거리가 제법 멀어졌을 뿐 아니라 정통성에 있어서 흠결 한 점 없던 숙종 연간에 겨우 복권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요.

또한 이러한 복권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숙종이 사육신을 복권한 것은 송시열과 서인을 숙청한 뒤였고, 단종의 추복(追復)은 (숙종 본인이 사사賜死한) 송시열의 복권 이후에 이루어졌지요. 이를 통해 숙종은 환국에 뒤따르는 불만을 억압하고, 자신과 어린 세자(경종)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의를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윤정, 2004. “숙종대 단종 추복의 정치사적 의미”. <한국사상사학> 22). 단종 복위운동에 휘말려 부내로부터 30리 일대가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지는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가 복설된 것도 숙종 10년(1683)의 일이었습니다.

한편, 여러 편에 걸쳐 계속 등장하였던 이지번은 1508년생으로, 1517년생인 동생 이지함과 터울이 아주 큽니다. 꺽정이가 서슴지 않고 그를 ‘성암 어르신’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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