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36화 (136/259)

41. 띠 한 줄, 길 한 가닥 (3)

오스만의 술탄이 기거하는 톱카프 궁의 가장 바깥쪽 문은 황제의 문이요, 그 안쪽 문은 안녕의 문이라 불렸다. (보통은 조금 더 성의 없게, ‘중문(中門)’이라 부르곤 했다.)

이 문을 지나고자 술탄의 허락을 기다리는 귀빈들은 대개 그의 관대함을 칭송하며 술탄의 안녕을 축원하곤 하였다. 가끔은 처형당한 중죄인의 목이 그 문 밖에 걸려있곤 하였는데, 재수 없게 그럴 때 찾아오는 귀빈들은 더욱 열심히 술탄을 칭송하곤 했다.

허나 오늘은 반대였다. 술탄은 그 문을 지난 이방인 귀빈을 만난 지 오래지 않아, 저의 안녕을 위하여 그 귀빈이 속히 안녕의 문 바깥으로 사라지기를 내심 바라게 되었다.

“... 흥미롭구나.”

당대의 수많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술탄이자 파디샤, 칼리프, 기타 등등인 쉴레이만이 마음을 추스르자마자 던진 한 마디였다.

‘림 파샤’의 언행은, 명석한 술탄의 두뇌에는 하나하나가 새롭고 선명한 자극이었으며, 반대로 노쇠한 그의 심장에는 곧 부담이 되었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대재상 뤼스템 파샤가 디반(내각)의 다른 관료들을 대신하여 사죄하였다. 군주가 ‘흥미로운 일’을 손수 겪게 만들었으니, 이를 미리 알아채고 고하지 못한 신하들의 잘못이라 할 수 있었다.

“그자는 정녕 신(중국) 황제의 대리인이 맞는 듯하다. 참람되게 그런 자리를 사칭하는 자라면, 그러한 기세가 나올 수는 없겠지.”

림 파샤는 서방인들과는 달리, 술탄 앞에서 예법 갖추는 것을 꺼리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서스럼없이 꾸벅 고개 숙이고는 한다는 말이, ‘예법이 단순하니 참으로 간편하구려’ 였으니 문제였지만.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땅 위의 단 하나의 군주, 동·서방 모두를 아우르는 술탄을 대하는 림 파샤는 오만하지도 않았지만, 겸손하지도 않았다.

그저 웃어른이요, 나라의 우두머리 노릇하는 어르신이니 존중할 뿐. 이것이 사람을 꿰뚫어보는 쉴레이만의 눈에 비친 림 파샤의 모습이었다.

톱카프 궁에서 보위에 오른 후 삼십육 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나라의 사신을 접견한 쉴레이만이었으나, 림 파샤와 같은 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머나먼 동쪽 땅에서 고관이 직접 찾아오는 것 역시 처음 있는 일. (오스만 집안의 원수인 절름발이 티무르도 굳이 따지면 동쪽에서 오긴 했지만.)

“모카에서 올라온 보고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실로 무뢰한과 같은 자입니다.”

“그것은 이 궁에 들어오는 서방인들, 소위 외교관이라 자처하는 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적어도 림 파샤 그자는 스스로 당당하니, 그들보다 낫다.”

술탄의 말은 호의적이었으나, 실제로 호의가 담겨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림 파샤를 칭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재상들 중 림 파샤를 칭찬하는 데 동조하는 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좌중 모두를 떠보는 것인가?

겉치레 인사가 끝나자마자 림 파샤는 대뜸 그 운하 이야기를 꺼냈다. 메흐메트 파샤를 통하여 이미 그 내용을 들은 바 있던 술탄은, 운하를 파자는 말에도, 그 재원은 남으로 하여금 부담케 하자는 데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당당하게, 그것도 겉치레 인사가 한바탕 오가자마자 바로 꺼냈다는 것이 놀라울 뿐.

“재상들은 어떻게 보는가?”

림 파샤를 이곳 코스탄티니예로 초빙하자고 건의한 내각의 재상들을 향해 술탄이 물었다. 역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물음.

잠시의 침묵 사이에, 재상들 사이에 눈치가 오갔다. 그리고 눈길은 곧 대재상 뤼스템에게 쏠렸다.

뤼스템은 술탄의 총애를 받는 휘렘 술탄의 사위로서, 재상들 중에서 명분상으로나 실제로나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재상들 중 유일하게, 저의 생각을 술탄 앞에서 그대로 꺼낼 수 있는 자이자, 그것을 때로는 관철시킬 수 있는 자가 바로 뤼스템이었다.

“동방인들을 초대하여 파디샤를 알현케 할 것을 건의한 자로서, 이번 일로 심기를 어지럽힌 일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지고 수습하고자 합니다.

감히 사사로운 의견을 말씀 올리자면, 운하를 개통하는 것은 이익은 없고 손해될 바는 많습니다. 주인이자 주군이신 술탄께서 승낙하신다면, 저 뤼스템이 저들 동방인들을 찾아가, 그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도록 만들겠습니다.”

“이익이 없다니, 대재상이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술탄의 말에, 뤼스템은 지금껏 디반의 국무회의에서 숱하게 늘어놓은 바 있던 저의 지론을 다시금 꺼냈다.

“교역은 귀한 이와 천한 이들을 가리지 않고 큰 이로움을 주는 일입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국고에 여력이 부족할 때는 더욱 교역이 중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로움이 믿는 이들과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는 적게 오고, 그러지 않는 자들에게는 많이 쏠린다면, 그러한 교역은 오히려 끊어 없애는 것이 더욱 이롭습니다.

그러므로, 교역되는 물산이 우리 땅이 아니라 머나먼 다른 땅, 이교도의 땅에서 오고, 그것을 실어나르는 것 또한 우리 사람이 아닌 이교도들이라면, 그러한 교역은 역시 끊어 없애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메흐메트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분명 이방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 중 지아웃딘을 자처하는 신 사람의 논변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살피기로, 그대는 그 말을 옳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저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의심되는 바가 있어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주군이 하문하니 신하로서 진실을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대재상의 말을 반박하여 보라. 대재상이 동방인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림 파샤가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뒤에도, 또 나간 뒤에도 똑같이 무미건조한 얼굴의 술탄이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은 시시각각 이채를 띄었으므로, 명민히 주군의 안색 살피는 자는 그 마음 속에 흥미가 동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쟁과 행정으로 나름 잔뼈가 굵었다지만, 정작 내각에 들어온 지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 운하를 굴착하는 것이 국익을 위하여 더 이로운 선택이었으므로, 스스로 용기 북돋으며 말했다.

“림 파샤는 말하기를, 우리 대신 다른 곳에서 재정을 구한다면 족히 운하의 공사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 뤼스템 또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만한 공사의 재정을 빌려줄 자가 하늘 아래 어디에 있겠습니까?”

뤼스템 파샤가 쉴레이만과 메흐메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반문했다.

“베네디크(베네치아)뿐 아니라, 림 파샤의 나라에도,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요하는 일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자금을 모으는 법도가 있다고 합니다. 한 번 뚫린 운하는 백해(Akdeniz, 지중해)에 연한 모든 나라의 모든 상인들이 능히 쓸 수 있습니다.

저 오만불손한 미스르의 맘루크들도 술탄의 명이 내리면 기꺼이 그들의 자금을 낼 것이요, 베네디크와 제네비즈(제노아)의 가장 교활한 상인들도 그들의 신에게 맹세하며 금고를 열 것입니다.

백해(Akdeniz, 지중해)에서 홍해로 나아가는 항로가 뚫린다면, 베네디크(베네치아)와 이스파냐(에스파냐) 사이를 영구히 갈라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자비와 은혜에 기대고 있는 프란사(프랑스) 또한, 남쪽으로 백해에 연하니 우리의 운하를 빌리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해에서 술탄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이스파냐와 포르테키즈 뿐인데, 동쪽의 우환이 되고 있는 포르테키즈(포르투갈)는 운하가 뚫리면 힘을 절반 넘게 잃을 것입니다.”

서쪽 나라들의 이름이 언급되니, 술탄의 눈이 또 한 번 빛났다. 한때 스스로 군을 이끌며, 비야나(빈) 앞까지 진격하였던 술탄은, 그때의 패배 이후로 스스로 서쪽을 평정하기보다는 그 땅에서 할거하는 이교도 군주들을 이용하여 적은 약화시키고 벗 - 신하라고 부르기는 과하고 아우라고 부르기에는 남사스러운 - 은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내부에서의 싸움으로 제국과 맞닿은 소위 ‘신성’ ‘로마’ 제국이 흔들리는 지금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게 안달루스(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를 제한 나머지 나라들이 모두 운하에 의존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되면 그 어떤 해군 함대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탄께서는 한마디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아무개 국왕은 불손하니 그 나라에게는 운하의 통행을 금하겠다.’ 그리하면 그 나라의 상인들은 그날로 무너질 것이요, 늑대와 같은 이웃나라들은 곧 이빨을 드러낼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운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서방 국가들이, 저들끼리 연합하여 숫제 운하를 빼앗으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브르스(키프로스)가 기독교인들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 그 섬은 운하를 빼앗기 위한 전초기지이자, 빼앗은 운하를 지키는 요새로 기능하겠지요.”

“베네딕 인들이 운하를 다른 나라들과 나누려 할까요? 그 베네딕 상인들이?”

“그들은 대가만 충분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족속입니다. 운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팽팽하게 몇 차례 논박이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뤼스템 파샤가 묵직한 무게추를 논쟁의 저울 한쪽에 얹었다.

“무릇 남의 금으로 재정을 마련하려면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와 이교도 군주들 사이에 그러한 신용이 있습니까? 또 어떠한 명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뜻 나서서, 저들 기독교인들에게 운하를 새로 파고자 하니 함께하자 제의한다면, 저들이 이를 호의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간악한 음모가 숨어 있으리라 의심하며 머뭇거리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저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이교도 술탄에게 충성도 맹세하고, 연공(年貢)도 바치고, 또 그의 권위를 인정하며 교역을 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무력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만인이 신용하는 증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림 파샤만큼이나 그대들의 주장도 흥미롭구나.”

묵직한 한마디가 알현실에 울려, 반박할 말을 찾는 메흐메트의 생각을 끊었다.

“다만 대재상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동·서 양쪽으로 우환이 있으니, 어찌 지금 큰일을 함부로 논할까.

그러니 대재상은 나아가 신 황제의 대리인에게 고하라. 운하의 발상은 훌륭하나 아직은 때가 아니며, 다만 다른 이교도들과 동등하게 우리의 항구에서 교역할 권리와, 우리의 항구에 밀레트(millet, 일종의 자치구)를 둘 권리를 허할 수 있다고 전하여라.”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술탄이 직접 명하였으므로, 대재상 뤼스템은 바쁜 일정을 쪼개어 림 파샤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 그리 말씀하셨다고?”

“그렇소. 이는 대재상이자 술탄의 충복으로서 한 치 어긋남 없음을 맹세하는 바요.

림 파샤 그대가 신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우리 땅과 바다의 주인께 합당한 경의를 바치고, 그 법과 규칙을 지키며, 다른 이들을 존중하겠노라고 서약서(Ahidname, capitulation)에 서명한다면, 지금 거론한 혜택이 곧 그대 나라와 부족에게 베풀어질 것이외다.”

‘민주당’이라는 것을 그저 흑해 건너편의 골칫거리 코사크 무리와 비슷한 것이라 여기는 뤼스템이 재차 확언하였다.

잠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림 파샤 안면에 감도니, 뤼스템은 순간 저의 경호원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어서 나오는 답변은 의외로 순하였다.

“뭐, 그리 말씀하셨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지내다가 갈 길 마저 가겠소. 고아에서 리스본 가는 이들보다는 빠르게 그쪽에 도착해야 할 사정이 있어서.”

“알겠소. 자세한 일정은 나중에 실무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도록 하시오.”

머나먼 동방에서 온 사신이니, 올 때만큼이나 떠날 때도 후하게 환송해야 할 터였다.

이것만 하더라도, 이 미심쩍은 - 솔직히 말해 항구를 돌면서 그 일대의 가장 이상한 작자들만 모아온 듯한 - 무리를 제대로 된 사절로 대접하였다는 전례가 남는 것이니 역시 후의(厚意)가 아닐 수 없었다.

술탄의 손님으로서 숭고한 문 안쪽을 드나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서쪽 군주 그 누구도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의심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뤼스템 혼자의 생각이었다.

“에라이, 쫌생이들.”

듣는 사람 없으면 나랏님 욕도 한다 하였으니, 하물며 남의 나라 임금은 어떻겠는가.

“정말로 이대로 있다가 떠나실 겁니까?”

도키치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럴 리가.”

“서약서를 받아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호의를 받는 것은 맞습니다. 프랑키아(프랑스)만 하더라도, 이교도들과 손잡는다는 비난을 받아가면서 겨우 얻어낸 혜택이니까요.”

이교도 소굴 코스탄티니예를 빨리 벗어날수록 좋다고 여기는 핀투 선장이 은근히 꺽정이에게 이만 만족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건 그렇겠는데, 우리가 예멘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시오. 외즈데미르랑 리드완 등등이 모두 늙어죽기 전까지 우리가 발을 붙일 수 있겠소?”

뒷탈에 대해 웬일로 걱정을 하는 꺽정이었다. 핀투는 꺽정이가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다는 데 놀라면서도, 뻔히 그리할 수 있었으면서 지금껏 미친 짓거리를 여기저기서 저지르고 다녔다는 데 대해 속으로 치를 떨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써 보고, 정 안 된다 싶으면 거기 태수인지 총독인지 하나 새로 앉혀달라고 청하든가 해야지.”

그리고 꺽정이는 저의 말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썼다.

제 몸에 넘쳐나는 힘으로, 다음날 밤이 되자마자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저택 담장을 넘었던 것이다.

쉴레이만의 대에 이르러, 술탄과 내각의 재상들, 그리고 여타 고관들이 모여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는 디반 모임은 이레에 네 번으로 굳어졌다.

흐리멍텅한 사람이 보위에 올라있다 한들, 한 주에 네 번 모이는 것은 결코 부담이 적지 않았다. 하물며 쉴레이만과 같이 영명한 군주를 뵙는 것은 어떻겠는가.

더구나 ‘숭고한 문’ 안쪽에서 다루는 국사의 현실은 그리 숭고하지 않아,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악체(Akce) 은화의 양면과 같이 함께 따라다녔다. 늘 그렇듯 제국에는 적이 많았고, 모든 적을 물리치기에는 군사가 부족했으며, 군사를 늘리기에는 재정이 부족했다.

차라리 운하의 일을 논할 때가 즐거웠다. 다가올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론이 내려졌으니, 이제는 지나간 일.

그러므로 메흐메트 파샤는 오늘도 그의 일신과 나라 전체, 그리고 오스만 가문에 평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무사히 하루가 끝나가는 것에 감사하며 저택에 돌아왔다.

“이야, 우리나라 정승들만 힘들게 일하는 줄 알았는데.”

“내각수보 서 대인도 일을 열심히 해서, 엄숭 그자에게 익숙해져 있던 환관들이 자주 놀란답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응접실에서 편하게 디반에 기대어 헛소리나 하고 있는 작자들을 보게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저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리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나가지 않겠노라 강짜를 부려서...”

차라리 저택의 문앞에서 막는다면 모를까, 어떻게 몰래 저택 안쪽까지 들어와서는 당당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자들, 그것도 술탄의 초빙을 받고 이 도시에 임한 자들을 일개 하인들이 내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의 집에서 떠나기를 정중히 청하는 바요.”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시오. 밤손님은 손님 아니오?”

비록 지금은 세월이 지나면서 힘줄은 느슨해지고 허벅지와 배에는 군살이 붙었지만, 메흐메트 역시 한때는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 그 몫을 하던 이였다.

그러나 눈앞의 림 파샤 - 어째 엊그제 만났을 때보다 더 덩치가 커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 테다 - 는 한창때의 자신이 열 명쯤 모여도 상대하기 어려울 듯하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자의 이성에 호소하든, 후과를 들먹이며 말로 협박하든 해야 하리라.

“림 파샤. 이 사람의 인내와 숭고한 문의 호의를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지금 정승 노릇하는 사람들이 죄다 깍쟁이에 장삿속은 어린애만도 못하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군. 뭐, 떠나라면 떠나겠소.

아, 이건 저기 모카에 있는 외즈데미르라는 늙다리와 리드완이라는 애송이가 하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오. 벌주려면 그 두 사람을 벌주면 된다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이 집에서 나간다면, 밖에서 누군가 보고 수상하게 여기지 않겠소?

아마 집주인이 뭔가 꾸미는 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들 하겠지. 가뜩이나 요새 나라 사정도 뒤숭숭하다 하던데. 뭐,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자, 나가십시다들.”

결국 메흐메트도 크나큰 한숨과 더불어 이 밤손님들에게 도로 앉으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올 때 몰래 들어왔으니, 나갈 때 몰래 나갈 수도 있겠지. 그렇지 않소?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하고 조용히 나가시오.”

“운하 말이오. 이대로 관두기엔 영 아깝지 않소?”

“그렇다 한들, 이미 나의 주군께서 결단을 내리셨으니 더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오.”

“에이, 다시 생각해보시오. 모름지기 신하라면 임금께서 잘못 생각하셨다 싶을 때 간언도 하고 그래야지. 우리 동방에는 저의 심장이 뽑힐 때까지 임금 발목 잡은 사람도 있다오.”

“임 당수, 비간(比干) 고사를 굳이 여기서 꼭 꺼내야 하겠습니까?”

이탁오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어쨌든 대인께서도 운하 파는 일이 이대로 무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잖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신하 된 몸으로 함부로 군왕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고. 그러니 서로 도웁시다.”

“무엇을 원하시오?”

“이 성안의 목소리 큰 사람들 중, 운하 판다고 하면 솔깃해할 만한 자들이 있습니까?”

꺽정이가 그 말을 받아 마저 부연하였다.

“명분이나 하나쯤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한데 묶으려 하오. 얼추 듣기로 이 성에 어르신네 임금님께 입조하는 사절들이 항상 머문다던데, 그런 자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주어도 좋고. 아니면 도성 안의 호상(豪商)들을 하나로 묶을 수도 있고.”

“동방에서 여기 임 당수가 그렇게 여론을 호도해서 제멋대로 국사를 농단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법 수완과 경력이 있는 사람이니 믿어보시지요.”

“탁오 선생, 이왕 맞장구를 칠 거면 좀 좋게 꾸며줄 수는 없소?”

꺽정이와 이탁오가 한 마디씩 돌아가면서 말하니, 메흐메트는 아득해지는 정신 부여잡으며 그 말의 옳고 그름을 잠시 따져보았다.

술탄이 서쪽을 정벌하는 대신 평화로써 그들을 다스리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래, 이곳 코스탄티니예에 상주하는 서방의 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합스부르크의 사신, 베네디크의 사신, 심지어 서방 기독교의 우두머리 교황의 사신도 항상, 또는 거의 항상 이곳에 머물며 숭고한 문과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그런 자들이 있노라고 이 림 파샤와 그 패거리에게 언질을 주는 정도라면 딱히 그의 주군인 술탄께 죄를 짓는 것은 아닐 듯하기도 했다.

“후, 알겠소. 우선은 합스부르크에서 보낸 부스벡(Ogier Ghiselin de Busbecq) 공이 있소이다...”

명분 놀음으로 여러 사람 골려먹은 적 있다는 임꺽정과 그 일당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코우지오니스’와 ‘타고스 박사’라는 좋은 서양식 이름도 생겼고, 술탄이 그들을 초빙함으로써 사실상 그 신원도 입증되었으므로, 그 다음날부터 코스탄티니예에 머무는 서방 사절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의 수로’?”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이들의 보고를 받은 뤼스템 파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운하를 통해 기독교인은 동방의 부에 접근할 수 있고, 우리 무슬림들도 그러한 부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운하를 통해 두 성지(메카·메디나)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니, 이로써 평화와 번영을 도모한다 하더군요.”

무슬림도, 기독교인도 아니요, 말 그대로 바다 밖에서 온 동양인들이 그렇게 제안을 하고 다니니 - 심지어 술탄의 하수인도 아니요, 술탄이 인정한 시나(중국) 황제의 대리인 아닌가 - 가장 먼저 베네치아 대사가 그 제안 좋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미 모카의 ‘상인’ 주스티아니를 통해 기이한 동양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던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그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필 것을 대사에게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미 거의 끈 다 떨어진 카를 5세보다는 그의 동생이자 술탄과의 개인적 연분도 있던 페르디난트에게 조금 더 충성을 바치던 합스부르크 대사 부스벡도 곧 거기에 동참하였다.

밑져야 본전이기도 했거니와, 그들을 찾아다니며 유세하던 동양인 일당이 은근슬쩍 술탄 측의 답변을 비틀어 전한 것도 한몫했다.

‘술탄 또한 이르시기를, 운하의 발상은 매우 훌륭하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 애석할 따름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여건이 마련되기만 하면 숭고한 문에서도 반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 누가 트집이라도 잡을 것 같으면, 번역 상의 사소한 오류라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중원 황제의 칙명은 아예 위조까지 했는데, 살짝 비트는 정도면 그래도 술탄의 권위를 존중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 참, 저 동방인들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군그래.”

그러나 뤼스템 파샤의 한탄은 아직 이른 것이었다.

“대재상, 큰일입니다! 지금 저자에 기이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이기에 그러느냐?”

“그... 셰자데(왕자) 셀림(Selim)께서 이 ‘평화의 수로’ 계획을 위해 서방을 순방하겠다고 자청하실 것이라는 소문이...”

“무어라?”

이미 나이가 예순을 바라보는 술탄. 그리고 그 아래 단 둘만 남은 후사, 바예지드와 셀림.

어떤 식으로든 도성이 시끄럽게 되면, 그것을 저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누군가 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배후에 있는 것이다! 당장 찾아라!”

그러나 이미 그 소문은 뤼스템 파샤의 장모이자, 술탄의 더없는 총애를 받는 유일한 황후 휘렘 술탄의 귀에까지 들어간 뒤였다.

꺽정이와 이탁오 두 사람이 저들의 이득을 위해 퍼뜨린 거짓말을, 다른 이가 낚아채 저의 이득을 위해 더욱 부풀리고 뒤틀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생각도 못하던 골치아픈 문제에 꺽정이도 끌려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이 행한 대로 돌려받게 되었으니 하늘 아래의 밝은 의리가 아직 모두 쇠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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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및 페르시아 상인 등이 인도양 무역망을 통해 교류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무역을 위해 각 영향권의 변방만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으로나마 유통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그저 ‘옛 대진국(로마) 자리에 세워진 서쪽 오랑캐 나라’에 불과했지만, 중동의 상인들에게 중국은 인도 너머, 엄청난 부와 물산을 지닌 나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 마닐라 항로가 개척되어 신대륙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중국의 물산은 나머지 세계로 퍼질 수 있게 되면서 오스만 투르크도 중국산 물자의 주요한 경유지이자 종착지가 되었지요. 지금도 톱카프 궁에는 일만여 점에 달하는 중국 및 일본산 도자기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55년 주오스만 합스부르크 대사였던 부스벡의 묘사에 따르면, 당시 오스만의 알현 의식은 이러하였습니다. 높은 소파에 앉은 술탄을 향해, 양팔을 시종에게 붙들린 채 - 암살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 나아가 그 손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고, 술탄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김동원, 2010. “쉴레이만 1세 시대 합스부르크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외교태도: 헝가리를 둘러싼 외교를 중심으로.” <지중해지역연구> 12(2), pp.17-18). 당대 유럽인들 눈에는 이것도 별나고 낯선 것으로 보였는데, 만일 그들이 명대의 오배삼고두나 청대의 삼궤구고두를 접하였다면 오스만은 그나마 ‘다시 보니 선녀같다’라고 평했을 것입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쉴레이만 대제의 시대에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 국가들과의 항구적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를 통해 견제와 협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에 여러 유럽 국가의 대사들이 상주하게 되고, 오스만 측에서도 상주대사까지는 아니어도 사절을 수시로 파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오스만 투르크는 흔히 ‘서약’ 또는 프랑스식 독음 그대로 ‘카피튈라시옹(Capitulation)’이라 하는 조약을 서양 국가들과 종종 맺기도 했는데, 특히 합스부르크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과 전략적 제휴를 선택한 프랑스가 그 대표적인 수혜국이었습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권을 인정하고, 대신 그 영내에서 비교적 우호적인 관세와 더불어 치외법권, 자치권을 보유한 거주구역의 설치 등을 인정받는 내용의 조약이었지요. 이후 서양 세력과 오스만 투르크의 힘의 균형이 18세기를 지나면서 뒤집히기 시작하자, 이러한 카피튈라시옹은 보다 근대적인-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차 불리한- 조약으로 대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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