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39화 (139/259)

얼간이의 제자

보통 배가 먼바다로 나아가면, 열 척 중 한 척쯤은 중간에 큰바람 만나 가라앉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임꺽정을 태운 배는 그러지도 않고, 대국 앞바다에서 히라도로, 류큐로, 또 그 다음에는 조호르인지 뭔지 하는 이름도 묘한 곳으로 제멋대로 나다니곤 하였다.

남해 한가운데의 류큐가 임꺽정과 에스파냐 사람들로 인해 한바탕 난리 겪었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에 닿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카에서도 임 당수로 인해 크나큰 소란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호르에서 말라카로 옮겨간 뒤, 저의 앞길은 기독교인들이 칼날을 드러내기 전 말라카의 교역을 진흥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데 달려 있음을 깨달은 술탄 알라우딘이 과하다 싶을 만큼 열심히 배를 끌어모아 동쪽으로 상행을 보냈던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 한 번 오갈 때조차 목숨을 걱정하던 것이 조선 사람들인지라, 임 당수가 그리 신출귀몰하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다고들 하였다.

“남해 용왕도 몸을 사리는 것 아니겠는가. 함부로 배를 가라앉혔다가 불청객 임 아무개가 용궁에 당도하면 그날로 용의 일가붙이가 크나큰 화를 당할 터인즉.”

소문 들은 임금이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였다고도 했다.

『육신전』 소동 이후로 임금이 오히려 공회의 여론을 모아 노산군에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대국에 시호를 청한 바 있었으므로, 이 무렵에는 모두들 상께서 임거정을 아끼심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누구도 성상께서 그러한 소화(笑話)를 하셨다는 것을 크게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구국에서 다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니, 그때는 임금도 생각을 조금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임거정 그자는 무엇을 하고 다니는 것인가? 해외(海外) 먼 나라의 사정이 중원과 다른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건만, 그래도 이번 일은 기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유구국 중산왕 원(쇼 겐)이 새로 글을 보내 가로되, 서양 오랑캐와 공모하여 찬역(簒逆)한 양총(楊叢, 쇼 요소)의 무리 중 종친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선왕의 둘째 딸 일기(一枝, 쇼 잇시)였다.

죄를 물어 폐서인(廢庶人, 평민으로 강등함)하고 출궁한 뒤, 아예 나라 밖으로 출가를 시키려 하는데, 중산왕 원이 듣기로 조선국 임거정의 처가에 훤칠한 장부 있으니 곧 호를 율곡이라 하는 서생 이 모라.

하여, 폐서인된 공주를 다른 나라에 출가시키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니, 문헌(文獻) 갖추어진 조선국에서 가부를 판단하여 알려주십사 하였다.

그런데 그런 글을 실은 배에 (前)공주 본인까지 같이 실어서 보냈으니, 어찌 머리 아픈 일이 아니랴. 폐서인되었다 하여 그저 범상한 아녀자로 대할 수도 없고, 뻔히 역모에 가담하였거늘 귀한 손으로 대접할 수도 없었다.

그때 임금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결자해지가 당연한 이치이다. 생각건대 수운판관 이원수의 삼남 이이는, 예법에 밝은 서경덕의 사손(師孫)이기도 하니, 일기(쇼 잇시)로 하여금 그 일가에 잠시 머물며 처분을 기다리게 함이 옳지 않겠는가.”

조정의 대소신료들 듣기에도 이것이 합당하였다.

금상 즉위하실 무렵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국외인들이 나라 안 오가는 것은 딱히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몇몇 젊은 사람들, 그러니까 주로 사업당 분표를 두둑하게 사들였거나 상행에 한 발 걸친 문중의 젊은이들은 떠들기를,

‘무릇 중외(中外)에 나라의 아름다운 이름이 알려지면 이러한 형국이 때로 갖추어지는 것이니, 『역(易)』에서 관국지광(觀國之光)이라 일컬은 것이 이것입니다. 궁벽하고 인물(人物)이 모두 궁벽한 나라라면, 국외에서 일개 서생이 찾아와도 나라의 큰 귀빈으로 모시지만, 우리 해동은 중원에 버금가니 어찌 중후한 덕을 갖추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관광(觀光)하는 이들의 이름과 행적만을 기록하여 관리하고, 포조(浦租, 관세)는 걷되 가볍게 하면, 이것이 실로 왕업에 닿을 것입니다.’

하였다.

반대로 국외인들이 지나치게 나라 안팎을 드나들어 군기(軍機)가 누설된다 우려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나날이 늘어가지만 목소리는 아직 못 내는 불평 가득한 서생들 사이에 침잠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공주 지위도, 슈리오기미아지가나시(首里大君按司加那志)라는 기나긴 존호도 잃은 채 조선으로 쫓겨난 쇼 잇시는 문제의 결론이 날 때까지 이원수네 집에서 기묘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대대로 데릴사위 들이는 것을 풍속으로 삼았던 해동 조선국이지만, 더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민며느리 또한 옥저의 유풍(遺風)이었으니, 야박하긴 해도 아예 근본 없는 처사는 아니었다.

어차피 돌아갈 길 없음을 아는 잇시도, 나름대로 저의 부군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헌데, 아무리 그래도 명색히 한 나라의 공주였으니 알아서 어련히 모셔주리라 여겼건만, 이 놈의 집안은 어디를 들춰보아도 범상한 사람은 없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만 많아, 도저히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누이는 병마를 조련하고 그 바깥사람이 벌여놓고 간 일을 대신 맡느라 바쁘고, 시어머니는 그런 딸 도우랴, 사업당 서 별감 괴롭히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부군 되어야 할 율곡 선생마저 『격몽요결』이 세상에 풀린 이래로 ‘몽(蒙)’에 해당하는 자들과 부지런히 논박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국혼인듯 국혼 아닌 기묘한 혼사에, 조선 사람들의 이목이 오롯이 모일 줄만 알았거늘, 온 나라가 늘상 시끌벅적하였으므로, 가뭄에 콩 나듯 그 공보인가 뭔가에서 사람 나와 고향 이야기 묻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잇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요. 당장 지금도 온 나라가 한전법 때문에 어지럽고, 거기에 사단칠정의 논변도 아직 결론이 안 났으니까요.

거기에 더불어 인천과 그 일대에 이목구비 기이한 사람들이 여럿 오가고 있으니, 형님 되실 분이 류큐에서 온 것 정도로는 그렇게 놀랍다 하기도 무엇하지요. 한 십여 년만 더 일찍 왔더라면 모르겠지만.”

명희가 차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하, 어째 나한테도 아무도 무어라 안 하더라니.”

스스로 일본국 경도(京都, 교토)의 호상(豪商) 차야 시로타로(茶屋四郎太郎)라 밝힌 일본 상인이 가볍게 웃었다.

당장 그가 제물포에 배 대고 이곳 한양까지 오는 동안에도, 말라카에서 막 넘어온 오귀자 노복들 - 오귀자들이 이렇게 떼로 모습 드러낸 것은 처음이라, 나름 구경꾼을 모았다 - 한 무리에, 번뜩이는 철갑 차려입은 남만인들 한 무리까지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드나드는 일본국 사람이야 무슨 구경거리가 되겠는가.

“일본국에서는 심지어 다이묘의 맏아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다이묘의 맏아들? 모리 씨의 그 얼간이 말씀이시오?”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 타카모토(毛利隆元)가 조선에서 ‘일백팔 원혼의 호피’를 들여온 이야기는 일본 전역에 유명하였다.

특히나 지금은 더 그러하였는데, 동래에서 찍어내는 조총이 민간에 널리 풀리며 조선 팔도의 산군들이 죄다 횡액한 이래 호피가 제법 좋은 값 받으며 일본에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카모토 공을 ‘그 얼간이’라 하셨나요? 차야 선생께서는 참으로 위세 높은 집안에서 오신 모양이로군요.”

“내 그대의 부군 되시는 ‘조선의 흑염룡’을 흠모하다 보니, 언행도 자연스레 닮는 듯하오. 헌데 타카모토 그이는 얼간이라 불러도 됨직하다오,

오와리의 오다(織田) 집안도 얼간이가 물려받았다고 소문 파다한데, 따지고 보면 공가(公家) 사람이든 무가(武家) 사람이든 그놈만도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지. 그러니까 다 얼간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겠소?”

“그러면 차야 선생은 어떠신가요?”

“나도 소싯적에 얼간이 소리 자주 들었소. 이번 상행 뒤에는 아마 그런 소리가 툭 끊어질 테지만.

그나저나 하시던 얘기나 마저 해주시지 그러시오? 기왕 시간을 끄는 것, 재밌는 얘기로 때워야지.”

인천부에 당도한 차야는 곧장 사업당 지부인 망양당으로 찾아가서는, 일본 내에서 다네가시마(種子島) 총보다 더 좋다고 알려진 가마야마(釜山, 부산포) 총 사들이길 원한다고 뜻을 밝혔다.

기실 다네가시마든 가마야마든, 그 성능은 별반 다를 것 없었고, 오히려 같은 쇠를 쓴다고 치면 규슈 다이묘들이 장인들 부려 만드는 다네가시마 쪽이 더 품질 좋을 터였다.

그러나 가마야마 쪽으로 말하자면, 한 어린아이의 발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장인들이 - 정확히는, 그 장인들의 상전인 서림의 지시에 따라 - 각자 부품을 나누어 만들곤 하였는데, 사람들 생각에는 장인 하나의 공이 들어간 총보다 장인 여럿이 나누어 공들인 총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마야마 총은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지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특히나 얼마 전, 모리 모토나리가 가마야마 철포를 이용하여 서국무쌍(西國無雙) 스에 하루타카를 단판 싸움으로 패사(敗死)시키고 옛 오우치 땅을 고스란히 먹어치우기 시작했으므로, 일본의 그 누구도 가마야마가 작금 난세에서 가장 유용한 병기임을 의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간을 끈다 말씀하시니 다소 아쉬운 걸요.”

“지금쯤 서 별감이나 그 아랫사람들이, 나와 함께 온 이들을 열심히 어르고 타이르고 있겠지. 이쪽의 정체 무엇이며 실제로 원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말이오. 그것을 위해 나를 여기 다점(茶店)까지 데려온 것 아니오?

나와 내 아랫사람들을 떨어뜨려 놓고, 각자 나누어 대질하려는 것이겠지.”

“하하, 대단하시네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히라도나 사카이의 어지간한 상인들에게 있어, 조선 본토의 민주당은 직접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모리 씨처럼 제법 세력이 있거나, 소 씨처럼 대대로 조선과 연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조선 쪽에서 뭔가 물색하거나 거래를 하고자 할 때면 자유민주당을 꼭 거간으로 삼곤 했다.

그런데 이 차야 시로타로는 배 세 척을 이끌고, 그것도 동래도 거치지 않고 직접 인천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니, 거래에서 값을 후려치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마저 말씀드리지요. 그렇게 해서, 기껏 조선에 당도하였는데 여염집 백성은커녕 장래 지아비가 될지도 모르는 제 오라버니마저 일지(잇시) 그 아이를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답니다.”

“아무리 류큐가 작다지만 명색이 하나의 나라인데, 말이 폐서인된 공주지 사실상 부마 자리 아니오? 그대의 오라버니는 대체 얼마나 세상사에 초연하기에...”

“세상사에 초연하다기보다는 그냥 눈치가 없는 것이지요. 바쁘기도 하고.”

그리하여 잇시는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는 명희를 찾아가 조언까지 구하였다.

어떻게든 이곳 조선에 터를 잡아야, 옛일 잊고 평화롭게 살든, 아니면 저를 먼지 털어내듯 휘휘 먼 나라로 떨쳐버린 오라버니 겐과 칸에게 설욕을 하든 할 것인데, 이대로는 이도저도 안 될 듯하였던 것이다.

기껏 대국 조정에서 혼사를 승낙받고 성혼까지 한다 한들, 남편 될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이 나라 조선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없을 터.

“먼저 미색(美色)을 내세우려 하였는데, 솔직히 말해 자색이 저보다 못한지라, 오라버니 눈에는 차지 않았지요.

그래서 애써 조선말을 배우고, 경서를 읽고, 심지어 오라버니가 쓴 서책까지 두루 섭렵하였답니다.”

“한 해도 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가한 일이오? 세상에 총명한 사람 많다더니.”

“물론 불가한 일이었지요. 조선말은 좀 익혔지만 나머지는 금방 지쳐 나가떨어졌답니다. 그나마 『격몽요결』은 책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 완독한 모양이더군요. 제대로 심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격몽요결』은 구절 하나하나가 논쟁 불러오기에 딱 좋은 내용이었다. <천지(天地)> 편에서 천원지방은 허구요 이 땅은 둥글다는 이야기로 운을 뗀 것은, 그나마 요새 조선에서는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므로 그나마 나았다. (이는 이이가 글을 잘 쓴 덕이 아니라, 경전 장구의 숨겨진 뜻을 조선 선비들이 드러냈다고 주장한 대양서생들의 공이었다.)

이어지는 <인사(人事)> 편에서는 이기(理氣) 논변을 겉치레로나마 다루면서, 기가 발하여 생기는 이익 욕심은 그것이 의롭기만 하다면 궁극에는 인(仁)에 닿는다고 하였으며, <이재(理財)>에서는 상학(商學) 논변으로써 어떻게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였는데 그렇게 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논증하였다.

그와 더불어 <상수(象數)> 편에서는 『역』이며 하도(河圖)며 하등 다루지 않고 오로지 『기하원본』과 산학 이야기만 하였으니, 소강절(邵康節) 선생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었다.

“그 책에 실린 논변 몇몇은 사카이 상인들도 이야기하고 있더이다. 나도 그리 문리가 밝지는 못하지만, 제법 심오하면서도 색다른 듯하였소. 적어도 케케묵은 불경보다는 재미있을 듯하던데.”

“그러면 돌아가는 길에 한 질 사서 돌아가시지요.”

“그건 사양이오. 원래 영웅은 시서(詩書) 따위를 가까이하지 않는 법이라.”

차야는 눈앞의 차 한 모금 마시며, 그 옆의 작은 경단을 슬쩍 집어먹었다. 제법, 아니, 아주 맛이 좋았다.

“그래서 말로도, 또 미색으로도 오라버니 눈길을 끌 수 없게 되니, 낙담하며 다시 제게 찾아왔답니다.”

“제 살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인데.”

“모든 사람이 능히 그리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더구나 오라버니가 혼담 오갈 때마다 모두 내치는 바람에 어머니께서도 근심걱정이 많으셨는데, 비록 잇시 그이가 좀 부족하긴 해도 그간 혼담 오간 규수들보단 나았거든요.”

“그래서 조언을 해주셨구려.”

“장기를 살리라 했지요.”

류큐 사람의 장기라면 장사요, 물산 대단치 않은 류큐지만 사탕만은 잘 나왔다. 그리하여 사탕과 더불어 유채 - 류큐에도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최신 문물이었다 - 까지 들여와서는, 그 나라 과자를 차에 곁들여 팔게 되었다.

명희의 오라버니지만 성정으로 치면 동생과 같은 이이는, 입맛도 사실 어린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잇시가 사타안다기 과자를 들고 오니 마침내 눈길이 그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잘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곳 가게는 잘 되고 있지요.”

“아, 이곳이 그곳이었소? 내가 굉장히 귀한 다과를 들고 있었군그래.”

이제는 슬슬 상일지 또는 그 호를 따라 계월당(桂月堂) 상씨(尙氏)로 불리게 된 잇시는, 자신의 다점 당호에 조상의 전명(殿名, 휘諱)을 담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산의 개조(開祖) 슌텐(舜天) 대왕의 함자를 빌리고, 비록 죄지어 북녘의 이국으로 쫓겨났지만 조상께 부끄럽지 않은 삶 살겠노라 다짐하는 뜻으로 그 앞에 한 글자 덧붙였다.

그리하여 당호는 임천당(任天堂, 닌텐도)이 되었다.

“너무 장사가 잘 되어서, 나중에는 다른 쪽으로도 나아갈까 생각하고 있다더군요.”

“만약 좋은 물목이 나오면 내게도 알려주시오. 사카이나 교토에서 파는 일이라면 이 차야도 한몫 거들 테니.”

누가 이야기 끝났음을 알려주기라도 한듯, 남녀가 동시에 찻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조선국 풍속은 여인이 다른 집 사내를 이렇게 대면해도 무방한 모양이오?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하면 부인 행실이 문란하다는 둥, 깐깐한 작자들이 바로 흉을 본다 하였는데.”

“규방의 법도로 따진다면, 옳다고만은 못할 일이지요. 하지만 저도 그렇고 부군도 그렇고, 법도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은 사이인지라.”

“역시 흑염룡의 배필다우시오.”

“그리고 흉 보는 사람이 있으면 뭐 어떤가요. 총 든 사람 앞에서는 나오려던 흉도 금방 찬사로 바뀌기 마련일 걸요.”

차야가 그 말 좋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내 그대 따라 이곳에 오기 잘하였소. 재밌는 얘기 많이 듣는군그래.”

“이제 제 얘기는 끝났으니, 선생의 얘기도 들려주시지요.”

“서 별감 그이가 알아서 잘 처리해주지 않겠소?”

“그렇기는 하지만, 먼저 정체와 본뜻을 밝힌다면 저희 쪽에서도 참작해주지 않겠어요?”

촌음의 고민 끝에 차야가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러면 본뜻을 밝혀드리지. 이 사람은 오와리 국의 오다 씨를 위해 일하고 있소이다.”

“처음에 얼간이 언급하신 것이 어째 미심쩍다 했지요.”

“오, 그 얼간이를 잘 아시나 보구려.”

“근래 우리 당에 적이 늘어난지라, 중외(中外) 곳곳에 눈과 귀를 늘리고 있답니다. ‘얼간이’라 하시면 오다 노부나가 공 외에 더 있을까요.”

“허, 정말 우리 사정에 밝으시오. 맞소. 그놈은 언제 영지 안에서 싸움 터질지 모르는데 천하 유람에만 바쁘다는 얼간이지.

다만 오와리 안의 오다 씨가 그놈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오. 조만간 오와리 국 안에서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고, 그 싸움이 끝나면 아마 한 사람만 남아 오와리 전체를 거느리게 되겠지.”

그리고 그 일 총괄하는 것은 다름아닌 명희였다. 바우와 자주 놀아주지 못하니 조금은 미안한 일.

(물론 바우 본인은 별 생각이 없었고, 주인댁 자리 비운 사이에 아비 닮은 주인댁 아들의 짓궂은 장난질을 당하는 고양이 검손이만 괴로웠다.)

“오다 씨는 비록 세력이 작고, 심지어 지금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분명 저력이 있소. 오와리의 비옥한 땅은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엄청난 소출을 내고, 키나이(畿內, 교토 인근)와 사카이 양쪽과 통하니 장사에도 유리하다오. 더구나 서국(西國)과 동국(東國) 사이 절묘한 곳에 있으니 입지도 탁월하오.

반면 자유민주당은 규슈 한 구석, 모리 씨는 주고쿠 한 구석을 겨우 점유하고 있을 뿐, 그 밖으로 세를 뻗치긴 어려운 판국이지.”

“그래서 오다 씨를 대신하여 화포를 사들이러 오신 것이군요.”

“그렇소. 한 번 거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리고 가마야마 외에도 다른 화포와 화약 등을 계속 거래하고자 하오. 오다 집안 안의 다툼이 어떻게 끝나든, 이 차야는 그대로 남아 오다 씨에게 화포를 계속 넘겨줄 것이외다.

그대 당에도 이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오.”

“말씀하신 것처럼 오와리 국은 규슈나 주고쿠에서 떨어져 있지요. 그만큼 더 우리 몫을 보장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새 웃음기 가신 채 명희가 말했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은 물론이요, 어지간한 일본 무사들보다도 더 정확한 지도를 머릿속에 품고 있는 명희였다.

그러나 차야 역시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그야 당연한 얘기 아니겠소. 우리에게 넘겨주는 화포와 화약이 오다 씨에게만 가지는 않을 것이요, 두둑한 웃돈이 얹힌 채로 주변의 다른 다이묘나 절간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말이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다만 이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외다. 우리를 통해 주변에 가마야마 총이 퍼진다면, 이는 우리 쪽에서 공을 세운 것과 다름없소. 그러니 마땅히 그 몫을 쳐 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이렇게, 그대들이 우리 쪽 속을 떠보고자 벌이는 이 놀음에도 어울려 주지 않았소? 이만한 성의에는 마땅한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보오만.”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서 별감님?”

명희가 갑자기 문 밖을 향해 말하자, 바로 그 앞에 인영이 드리웠다.

“예, 아씨. 저분 말씀대로입니다. 일본국 경도 다옥(차야) 집안의 사람들이고, 화포를 얻기 위해 상행에 나섰다 하더군요.”

진작에 저쪽에서는 결론을 다 내리고서, 이쪽 차야 시로타로가 어찌 말하는지, 과연 정체를 제대로 밝히는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 수완에, 차야의 눈빛에도 다소간 경탄이 서렸다.

“자, 그러면 두 분이서 거래의 세세한 절목을 잘 상의하시면 되겠습니다.”

“세세한 절목이라.”

“아무래도 일본국에 화포 파는 것을 두고 조선 안에서도 말이 조금씩 나오고 있어서요. 우리 쪽도 부담은 있거든요. 그러면 이만.”

그리 말하며, 곧장 몸을 일으키는 명희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림이 앉았다.

“자, 그러면 제대로 협상을 해 보십시다. 차나 과자 더 드시겠소이까?”

“물론이오. 이것 참. 사카이로 돌아간 뒤에도 그리울 듯한 맛이구려.”

차야 시로타로가 태연히 답했다.

아무리 근래 국외인들 드나드는 것에 관대해진 조선이라지만, 관련된 금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한양만 하더라도, 이미 한 번 허술하게 대비하였다가 임 아무개에게 허망하게 함락된 바 있었기 때문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국외인들의 출입은 나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사를 위해서 임천당은 부득불 성 바깥에 자리를 잡았고, 마찬가지로 국외인들이나 멀리서 올라온 이들 상대하는 여각(旅閣)도 성 바깥, 나루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차야 시로타로도 그날 저녁, 그런 여각 중 하나로 돌아왔다.

“다들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여각의 가장 좋은 안채를 통채로 빌린 차야가, 상행길에 데려온 아랫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처음엔 다들 생각하지 않았느냐? 차야 어르신의 조카 하나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영 불안하다고.”

“아... 하하, 그럴 리 있었겠습니까.”

다들 어색한 웃음을 짓던 차, 차야가 방금 전과 똑같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네놈들이야말로 영 못 미덥구나. 아무리 조선 천하인의 아랫사람들이 만만치 않다지만, 그렇게 쉽게 들통이 날 줄은 몰랐다.”

오다 씨를 대신하여 찾아왔다는 것, 화포를 사들인 뒤 기나이 일대에서 그 유통을 독점하고자 한다는 것 등등. 서 별감, 그 오니 같은 자에게 얼마나 속내를 훤히 읽혔을지 짐작할 수 있던 시로타로가 추궁하였다.

허나 시로타로의 아랫사람들 머릿속을 아무리 열심히 서 별감이 캐내본다 한들, 그들은 그저 차야 집안에서 장삿일만 하는 자들이었으므로 큰 그림 전체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테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랫사람들 골려주는 차야 시로타로였다. 이제 안뜰 마당에 웃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송구합니다!”

“저희가 큰 폐를 끼쳤습니다!”

“뭐, 그래도 못난 네놈들의 잘못과는 별개로, 아주 소득이 많은 상행이었다.”

그리 말하고서는, 제멋대로 마루 위에 올라가 드러눕는 차야 시로타로였다.

“네놈들 선에까지 큰 꾸중이 닿지는 않을 테니 적당하게만 불안에 떨면 된다. 다들 꺼져라. 나는 피곤해서 좀 누워야겠다.”

“옛, 예, 도련님!”

“자, 얼른 나가세나. 얼른들!”

그렇게 안뜰이 조용해지자, 마루에 누워 있던 차야는 슬쩍 몸을 절반쯤 일으켰다.

오와리와 사카이에서, 또 배 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노을이 서쪽 하늘에 드리우고 있었다.

“재밌지 않은가?”

누가 들으면 듣는대로, 못 들으면 못 듣는대로 나쁠 것 없었으므로, 차야는 혼잣말 소리를 키웠다.

“나라 안에 다툼이 무르익고 있는데, 주인은 자리를 비웠구나. 노림수가 무엇일까?”

사카이 상인들을 통해 조선 안의 사정을 면밀히 들어 알고 있었다. 흑염룡의 위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찬탄하며 배울 바를 찾던 - 이 오만방자한 젊은이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 그의 눈에는, 그러므로 이 미묘한 상황이 훤히 보였다.

누가 뒤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침없이, 빠르게, 또 나날이 복잡하게 변하여가는 조선에는 거기에 불만을 품고 만사를 몇 년 전 또는 그 이전으로 돌려버리려는 자들이 존재하였다.

이곳 한양에서는 그저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반대로 가장 천하인과 그 일파의 힘이 강성한 곳에서조차 그림자 드리운다는 것은 불만의 뿌리가 제법 깊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천하인의 사람들 또한 그것을 아는 듯하였다. 이미 겉보기에는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였음에도, 마치 한판 싸움을 기다리며 더 힘을 모으는 듯한 이들.

이미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이 기회에 더 높이 오르고자 웃고 떠들고 협박하고 달래며 날갯짓 그치지 않는 메이히메. 자신의 생각이 옳다며, 사람 하나하나 설득하고 다니는 율곡. 그리고 기세로는 온 천하를 은으로 사들이고자 하는 듯한 서림.

“뻔하지 않은가. 자리 비운 사이 누군가 고개 내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 마치 오와리의 얼간이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오와리의 얼간이는, 이미 조선 쇼군이 갑자기 멀리 서쪽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이를 직감하였다.

서쪽에 무슨 보배가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요, 그저 유람을 떠나는 듯한 느낌.

그렇다면, 서쪽으로 향한다는 것보다 오래도록 조선을 비운다는 것에 더 노림수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일 터.

민주당이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바람. 그것을 가로막는 것들을 단번에 일소하고 더욱 멀리 나아가기 위한 것일 테다.

그리고 젊은이는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이곳에서 거래에 합의하고, 동래에서 화포를 실으면, 그 짐은 그대로 오와리로 향할 것이다.

나고야 성의 주인이 된 오다 노부나가는 가뜩이나 종잡을 수 없는 언행을 하였으므로, 가신들 사이에서도 많은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아우 노부유키를 대신 세우고자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든 말든, 제멋대로 오와리와 인근 명산들 돌며 구경을 하겠노라며 노부나가가 홀연히 사라졌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공모자들은 더욱 열심히 세를 불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나고야 성을 도모하고자 거병할 무렵, 가마야마 철포로 무장한 군사들,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주군의 명 받들어 모여든 이들이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놈들, 너희가 고개 들기만을 기다렸다.’

하고 웃음 만면에 가득한 오다 노부나가는 비웃으리라.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고, 오와리 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 마침내 일본 천하를 도모한다.

그리하여 흑염룡과 같이, 이 세상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만드는 자리에 오른다.

크나큰 대업, 머나먼 길의 첫 발짝을 그렇게 내딛으리라.

“내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고? 궁금하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내 그대로 알려줄 테니.”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흑염룡이 아니라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라도 여기까지 심계가 닿지는 않을 테지. 나 혼자 너무 어렵게 생각했구만.”

차야 씨가 오와리 오다 집안에 연줄 있음은 기나이와 사카이의 모든 상인들이 알았지만, 정확히 여럿으로 나뉜 오다 씨 갈래 중 어느 쪽의 편 들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여럿 중 어디 하나가 이기면, 그쪽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렇게만 짐작할 뿐. 심지어 차야 집안에서 일하는 자들 대부분도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차야 시로타로라는 사람은 없으며, 그저 지어낸 이름일 뿐임도 다들 알지 못할 것이다.

안뜰 안에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오다 노부나가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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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조선에서도 조총은 민간에 빠르게 보급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을 빠르게 재건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양의 조총이 제조되었는데, 그것이 관리의 부실과 전후 재정 궁핍으로 인해 민간으로 유출되게 된 것이지요. 일례로 1615년에는 복기라는 백정이 동래부의 군관으로부터 조총을 구매하려다 적발되는 사건이 있었고, 1624년에는 유출된 조총이 너무 많으니 차라리 조정에서 쌀을 주고 총을 사들이자는, 현대의 총기규제를 연상케 하는 대책도 논의된 바 있었습니다.

차야 집안은 무로마치 시대에 상인 집안인 나카지마(中島) 가문이 교토로 상경한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차야 씨의 저택에서 종종 차를 마셨기 때문에, ‘차야(찻집)’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지요. 즉 작중 등장하는 늙다리 차야는 차야 집안의 첫 번째 당주인 셈입니다. 이후 차야 씨는 오와리의 오다 씨 대신 그 옆 미카와의 마츠다이라(松平) 씨의 어용상인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시로지로(四郎次郎)라는 이름을 대대로 계승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자 비서, 때로는 밀정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원 역사의 오다 노부나가는 가독을 계승한 직후부터 그 거침없는 성격과 언행으로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오다 집안은 크게 셋으로 갈려 있었고, 노부나가는 그 중 한 갈래의 새로운 수장, 그것도 입지가 불안정한 수장에 불과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556년 그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세력을 잃자 그간 노부나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가신들이 노부유키를 옹립,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다른 두 갈래 오다 씨까지 차례로 정복하여 1559년에는 오와리 국 전체를 거느리는 오다 씨의 당주로 우뚝 서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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