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38화 (138/259)

41. 띠 한 줄, 길 한 가닥 (5)

그날 아침, 그러니까 꺽정이와 그 무리가 톱카프 궁으로 ‘정중히 모심’을 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톱카프 궁의 깊숙한 안쪽, 술탄과 그 피를 같이하는 사내들만 드나들 수 있는 - 실제로는 시종과 환관들도 잘만 드나들었지만 - 행복의 문 뒤편의 어느 작은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야 조금씩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하는 노인이 하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내가 둘.

“이 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Imparatorluğu)이다. 너희는 그 뜻을 아느냐?”

마침내 쉴레이만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

“라틴의 말로, 명령하는 자(Imperator)를 황제라 하니, 그의 명령이 닿는 땅이 곧 제국입니다.”

셀림이 머뭇거리는 사이, 바예지트가 잽싸게 먼저 답했다. 아버지 술탄이 통역관들을 후대하며, 그들에게 때로 외교의 중임을 맡기기도, 첩자로 서방에 보내기도 하였으므로, 권력을 탐하는 바예지트 역시 이교도의 말과 풍속, 역사에 해박하였다.

“틀렸다.”

뒤이어 그 하나뿐인 황제가 얼마나 강대하며, 얼마나 넓은 영토를 거느리고 있는지 따위의 입에 발린 말을 올리려던 바예지트는 절로 말문이 막혔다.

“황제가 그저 명령하는 자일 뿐이라면, 여느 군주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황제는 모든 임금을 거느리는 파디샤이자, 모든 이맘을 거느리는 칼리파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라 참은 거짓이 되고, 거짓은 참이 되며, 이교도는 믿는 자가 되고, 믿는 자는 이교도가 된다.

내가 만일 아들을 죽여도 되느냐고, 이 도시의 모든 이맘과 울레마(율법학자)를 불러 모아 묻는다면, 그들은 내 뜻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 자가 다스리므로, 제국은 비로소 제국이 된다.”

아비는 두 아들에게 거짓을 말하였다.

한때는 그 자신도 참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거짓이었다.

그러나 쉴레이만에게는 지혜와 행운이 따랐기에, 동쪽과 서쪽에서 실패를 겪은 뒤 비로소 그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무한한 권세와 위엄은 오로지 신께만 있으니, 불완전한 인간일 뿐인 파디샤의 위엄은 그의 군대와 함대라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그는 그저, 평균보다 조금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세속의 군주일 뿐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위해서는 재정이, 재정을 위해서는 백성의 행복이,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는 올바른 다스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진실은 아비가 아들에게 내릴 수 있는 것도, 또 말로써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거짓일지언정, 작게는 이 나라를, 크게는 그들이 아는 세상 전체를 지탱하는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

“아버지 술탄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항상 마음 속 가까운 곳에 두겠습니다.”

바예지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차갑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다면 너희 스스로 물어보아라. 근래 운하에 대한 이야기로 도시가 들썩이고 있다. 이것을 너희는 어떻게 할 심산이더냐?”

쉴레이만은 누가 셀림과 바예지트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는지, 먼저 손을 쓴 것이 둘 중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오로지 어찌할지를 물었을 뿐.

다시 한 번 두 아들을 가늠하는 그 냉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셀림과 바예지트를 흩었다.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또한 주군이신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책임을 지고 이러한 분란의 근원이 된 이방인들을 추방토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죄상을 밝히고, 만일 그들이 마땅히 벌 받아야 할 바가 있다면...”

바예지트가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던 중, 그간 가만히 뭔가를 고민하고 있던 셀림이 마침내 목소리를 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이냐?”

“황제는 백성을 위하여 그것을 드러내 밝히는 자일 뿐입니다. 만에 하나, 참도 거짓도 아닌 것이 있다면, 그럴 때는 무엇이 만인에게 이로운지를 헤아려 참과 거짓을 정하는 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를 이루셨기에 모두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이를 망각하는 자가 만에 하나 후대에 나온다면, 백성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며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셀림, 그것이 너의 생각이더냐?”

날카로운 물음. 그러나 메흐메트 파샤에게 언질을 받은 셀림은,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남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읊으면서도 스스로 해낸 생각이라 여긴다면, 이는 어리석음이다. 남의 생각을 스스로 해낸 것이라 부풀린다면, 이는 거짓이다.”

“설령 남에게 들었다 하지라도 제가 스스로 판단하여 그것을 참이라 믿는다면, 어찌 저의 생각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바예지트는 어리석기만 한 줄 알았던 형의 입에서 논리정연한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들으며, 차마 대응을 못하고 관망하기만 할 뿐.

그러므로 한동안 다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눈빛만 오갔다.

“좋다. 그토록 생각이 많은 너 셀림은, 지금의 소란을 어떻게 다스리기를 원하느냐?”

“제가 직접 서방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는 이미 나이가 예순을 넘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정녕 모르느냐?”

아버지의 차가운 물음에도, 셀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멈추지 않았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운하를 뚫어 두 바다를 통하게 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며,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과분한 은혜를 입어온 셰자데로서 어떤 위험도 감수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셀림의 말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자신이 소문대로 사절로서 서방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헛소문을 퍼뜨린 자로 동방의 사절들이 지목된다면, 그 모든 일을 지켜본 도성의 백성들은, 가장 지엄한 이들에 대해서도 누구든지 능히 소문을 꾸며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문은 참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훗날에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릴 필요가 있을 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문이라는 유용한 수단은, 그것에 대한 신용이 있을 때만 쓰일 수 있었다.

또한 셰자데가 술탄의 보위에 대한 미련을 끊고 서방의 여러 군주들을 예방한다면, 이는 운하의 개통으로 큰 이익을 얻을 맘루크들로 하여금 자금을 내어놓게 할 좋은 명분이 될 것이었다.

“... 그러므로 사절로 나아가는 것을 승낙해주시기를 아버지 주군께 거듭 청합니다.”

예상 외로 그럴듯한 논변 펼치는 형에게 난감해하는 바예지트, 그리고 저의 것이 아닌 생각을 아비 앞에서 당당히 늘어놓고 처분을 기다리는 셀림.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한 사람은 남에게 생각을 맡기는구나. 한 사람은 옳고, 한 사람은 그르다.”

다시 한 번 냉정한 눈길이 두 사람을 훑었다. 셀림과 바예지트 두 사람 모두 그대로 굳었다.

“곧 진실을 밝힐 것이다. 두 셰자데는 물러날지어다.”

이미 이렇게 될 것에 대비하여, 뤼스템 파샤를 보내 림 파샤와 그 일당을 ‘정중히’ 데려오도록 지시한 쉴레이만이었다.

그의 말대로, 곧 진실이 정해질 것이었다.

“왔는가.”

“왔소.”

두 셰자데가 물러난 자리에 거한 하나가 섰다.

“무슨 일로 부르셨소? 내가 딱히 잘못을 안 했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성심(聖心) 쓰실 일까지는 안 만들었던 듯한데.”

“원하는 바가 있으니, 받고자 할 따름이로다.”

“말씀하시오.”

“진실. 그것을 고하라. 만일 내가 듣기에 진실이 아니라면, 그대와 일행은 살아서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할 것이요, 진실이라면 그때는 기꺼이 그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다.”

통역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군사까지 보내어 저를 이곳 궁전으로 데려온 것, 그리고 그의 일행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것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진실이라. 내 속마음 그대로 말씀드리면 듣기에 좀 불편하실 텐데, 괜찮겠소?”

하지만 어디 한두 번 당해보는 압박이던가. 꺽정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가감없이 말하라.”

“알겠소. 그러면 내 먼저 이것 하나 말씀드리리다. 나리와 같은 임금과 나 같은 무뢰한에게 같은 점이 있는데, 아시오?”

“무엇인가?”

“바로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오. 백정의 아들이든 임금의 아들이든, 팔 두 개 다리 두 개인 것도 똑같고, 모가지 부러지면 이승 하직하는 것도 똑같지.”

“그대가 지금 형틀에도, 밧줄에도 묶이지 않은 채 나를 상대하는 것부터가 크나큰 호의임을 모르는 것인가?”

“알긴 알지. 그런데 호의를 꼭 호의로 갚을 것은 없잖소. 빠져나갈 구멍 없으면 발악이라도 한 번 하는 것이 귀하든 천하든 사람의 본성이라오.”

알현의 절차에 따라 저의 팔을 잡고 있는 시종 하나를 그대로 슥 들어보이며 꺽정이가 말했다. 쉴레이만의 눈에 아주 잠깐이나마 놀라움이 비쳤다.

허나 그 뒤에 나오는 것은, 시종을 불러 저 무엄한 자를 붙잡으라 하는 호령이 아니라, 그저 미풍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흥미를 담은 미소.

“그러면 내 묻겠노라. 그대는 무슨 마음으로 이 소란을 일으켰는가?”

“그냥 운하가 있으면 장사에 이롭겠거려니 생각했을 뿐이오. 다른 뜻은 없소.”

‘그냥 운하’라고 하기에는, 두 바다를 잇는 공사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컸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처음 찾아온 남의 나라에서 술탄의 후사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여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끝내 술탄은 묻고야 말았다.

“고작 그것을 위하여, 그만한 일을 행한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 하고픈 일을 하는 것 아니겠소. 남한테 해코지만 안 한다면야, 무슨 짓을 하든 그게 대수겠소?”

“그대는 신 황제의 대리인이라 하였다. 그대 나라에서라면 이러한 일을 하였겠는가?”

“하, 이미 실컷 저지르고 왔소이다. 무엄한 짓을 하지 않고서야, 어디 나 같은 놈이 천자를 대리한다고 자처하고 다닐 수 있겠소?

아, 곁가지 이야기인데, 나만 이러고 다닌다오.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나중에 여기 코스탄티니예에 온다면, 그자들은 아마 임금님께서 만나보신 그 어떤 작자보다도 더 고지식하고 예절 바른 사람들일 테니 괜히 오해는 마시오.”

주절거리는 림 파샤를 앞에 두고, 쉴레이만은 생각에 잠겼다.

눈앞의 이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듣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품게 될 것인지 알고 있는가?

저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 - 그것을 무어라 부르든 - 도, 세속의 그 어떤 권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원하기에 행하고자 하는 자.

쉴레이만의 머리 한 구석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달가운 아픔이었다.

자신이 많은 것을 깨달았노라 자부하게 된 이후로 느껴본 적 없는 아픔이었다.

본디 그의 뜻은 이러하였다.

어리석은 - 어디까지나 바예지트에 비해서였다. 쉴레이만 눈에는 두 형제 모두 그 부모의 절반도 닮지 못하였다 - 셀림에게 저의 것 아닌 생각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일 터였다.

운하가 나라에 이롭다고 여길 만한 재상은 그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흐메트의 품성을 쉴레이만은 알고 있었다. 결코 그 스스로 셰자데들 사이의 대결에 끼어들어 어느 한쪽 편을 들 만큼, 술탄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거나 권력을 욕심내는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둘을 이어주었는가? 사랑하는 아내 휘렘 술탄? 그의 부마인 대재상 뤼스템 파샤?

그러나 통역을 겸하는 그의 눈과 귀들은, 다름아닌 눈앞의 동방인이 바로 그들 사이를 이어주었노라 말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듯하도다.”

“두려워하는 것이 왜 없겠소? 내게 소중한 사람들 잃을까 두렵고, 내 뜻 이루기 전에 죽지는 않을까 두렵고. 사람인 이상에야 두려움을 모를 수는 없지.”

“그러나 신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신의 은총으로 만민을 다스리고 그 위에 서는 군주도 두려워하지 않고.”

“뭐, 그건 그렇소.”

꺽정이가 허심탄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님이 진실을 말하라 하였으니 말하는 것이지만, 내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소. 그때 결의하기를, 다시 죽기 전까지 그 누구도 내 이름 모르지 않을 만큼 거한 일을 벌이기로 하였지.”

“예컨대, 눈앞의 예순 노인 목을 부러뜨리는 것 같은 일 말이더냐? 지금껏 많은 전장을 누비고 수많은 음모를 겪어보았지만, 그대와 같이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에이, 그 정도가 뭐 대수요? 나랑 같이 다니는 총명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이 말에 따르면 그 옛날에 몽골 사람들이 이미 비슷한 일 한 번 했다고 합디다. 그러니 임금님 말씀하신 그런 일로는 좀 부족하지 않겠소?

운하를 파는 일. 그것도 좀 부족하지. 운하가 파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장사를 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 배가 좀 부르고 가산깨나 가멸차게 되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이전에는 꿈도 못 꾸던 것을 마구잡이로 꾸게 된다면, 그때나 되어야 뭔가 이루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뭐, 임금님은 총명하시기로 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시던데, 임금님께는 내 생각이 영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겠소. 허나 어쨌든 이 임꺽정이의 생각이 그러하니, 뭐라 하시든 바꾸지는 않겠소.”

세상에 자신이 살다 갔다는 표를 남기지 못하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신도, 군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권위, 모든 주장, 모든 믿음을 의심하고, 오로지 저의 생각, 저의 눈과 귀, 그리고 저의 손과 발만을 믿는 사람.

그리고, 저의 옳다고 믿는 바, 하고자 하는 바를 이 세상에 행하는 데 그 어떤 거리낌도 없는 사람.

“동방의 사람들은 모두 그대와 같이 생각하는가?”

“대개는 그렇지 않소. 다만 나와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그러하오. 아마 지금쯤이면, 내가 처음 고향 떠났을 때보다는 조금 늘어났겠지. 내 처갓댁 사람들도 그렇고, 내 사형도 그렇고, 다들 말 많은 사람들이라.”

“그렇다면 그대가 여기서 죽는다 한들, 똑같은 자들이 언제고 다시 나아올 지도 모르겠구나.”

“똑같기야 하겠소? 어쩌면 더한 놈들이 올지도 모르지.”

새로운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흐름의 가장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지도 몰랐다.

쉴레이만이 잘 아는 라틴 말로 굳이 옮긴다면, ‘근대의(modernus)’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끝내 쉴레이만은 웃었다. 눈앞의 신기한 것이 자아내는 즐거움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웃음. 좀처럼 나오지 않는 술탄의 웃음에, 시종들이 모두 놀랐다.

“나는 처음 림 파샤 그대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과장이리라 여겼다. 그 옛날 ‘백만의 사나이(마르코 폴로)’나 모로코 사람 이븐 바투타가 증명하듯, 멀리서 오는 이야기는 대개 그 거리만큼이나 과장되기 마련이니.

허나 이제 보니, 그대가 발 딛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나고 질서가 무너지며, 모든 것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찌 그대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 하겠는가.”

“칭찬으로 듣겠소.”

또 한 차례 긴 웃음 뒤, 평정을 되찾은 술탄이 말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할 것이요, 또 자신에게 닥친 어지러움은 마땅히 남들에게도 닥치게 해야 할 테다.

대책을 고민하는 것은 그 뒤, 실컷 웃고 경탄하고 새롭게 상상한 뒤로 미루어도 될 것이다.

“나 쉴레이만이 허락하노라. 그대는 서쪽으로 나아갈지어다. 나아가, 그대가 동방에서 행한 바를 나의 도시에서 행하였듯, 그대로 서방에서도 행할지어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굳이 또 허락이고 뭐고 받을 게 있겠소? 하지만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기는 하겠소이다.”

그리하여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바예지트는 도둑맞았으나 차마 도둑맞았다고 말할 수 없던 집안의 보화를 처분하여 운하 공사에 저의 사재를 ‘희사’하게 되었고, 셀림은 셰자데로서는 처음으로, 이 전무후무한 대공사를 위해 서방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식을 듣자마자 눈 돌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 특히 지중해에서의 무역에 도시의 사활이 걸린 베네치아가 그러하였다.

“임 당수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특사 아닌 특사로 급히 파견된 지롤라모 자네(Girolamo Zane)가 막 짐 챙기던 꺽정이 일행을 막아세우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 확실히 술탄 나리 위엄이 대단하긴 하구만. 들었냐? 돈이고 동이고 그런 것 없이, ‘당수(Dansu)’라고 제대로 불러주는구만그래.”

“임금님 독대도 하고, 왕자님과 함께 이곳저곳 돌아다시기도 할 분을 깍듯이 안 대하면 바보지요.”

꺽정이와 도키치로가 시덥잖은 소리를 하든 말든, 포르투갈어 통역관까지 대동하고 찾아온 자네는 저의 용건을 늘어놓았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운하를 뚫는다는 그 계획은 우리 공화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이들은 지금껏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드물었는데, 뜻밖의 손님이신 임 당수께서 이 일을 이끌어주시니 백 번 감사드릴 일입니다.”

“백 번이 무어요. 천 번, 만 번 해도 괜찮소.”

겸양 따위 하지 않는 꺽정이였다. 애초에 서로 간에 그저 체면치레로 늘어놓는 아첨인 것을 꺽정이도 알고, 자네도 알았다. 가운데서 말 옮기는 핀투만 민망할 뿐.

“우리 공화국 정부는, 운하의 운영과 이익 분배에 대하여 지분을 보장받는다는 조건 하에, 숭고한 문에 공사대금을 지급할 의향이 있습니다. ”

“오. 잘 되었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꺽정이가 자네의 말을 끊고는, 등 돌려 외쳤다.

“이보쇼! 왕자님! 잠시 와 보시오! 좋은 소식이 있소이다!”

지롤라모 자네는 알지 못했지만, 꺽정이가 이제 완전히 저의 집인 양 자리 깔고 있던 메흐메트 파샤의 저택에는 어귀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전무후무한 여정에 앞서, 일정을 조율하고 계획을 다듬기 위해 메흐메트 파샤의 초청을 받아 그 저택에 찾아와 밤을 새었던 것이다.

(초청은 메흐메트 파샤의 이름을 훔쳐서 이루어졌고, 계획을 다듬기보다는 주로 술병과 안주를 더듬었지만, 어쨌든 겉으로 알려지기에는 그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 운운하는 것을 들은 셀림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는 ‘왕자님’이라는 조선말이 그 뜻은 몰라도 뭔가 굉장히 명예로운 호칭이리라 여기고 있었다.)

“여기 베네치아인지 배냇저고리인지 하는 나라 사신이 그러는데, 우리네 운하 파는 계획을 기꺼이 거들겠다 합디다.”

셀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오랜 원한을 잊고 이렇게 함께하게 된다니 참으로 반갑구려. 실로 신의 보살핌이 우리의 여정에 따르는 듯하오.”

에우로파와 지중해 일대에 아무런 연고 없는 사람 앞이라면, 설령 술탄의 보증을 받은 외국의 고관이라 할지라도 조금은 쉽게 대할 수 있었다. (즉,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속이거나 식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베네치아 코앞까지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오스만 술탄의 아들 앞에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러나 이 정도로 위축될 만큼 어설픈 자네는 아니었다. 내놓는 언사에 조금만 더 주의를 하면 되리라.

“허나 슬프게도, 지금 저희 재정에는 여력이 부족합니다. 민간에서 자금을 융통하려 해도, 이미 이탈리아 전역의 은행가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그 금고에 먼지만 남은 판국입니다.”

“아이고, 저런. 안타깝게 되었소. 도와줄 용의 있다 해놓고서 그럴 여력은 없다니, 왕자님 앞에서 실언을 한 격이 되었구려.”

하등 안타깝지 않은 말투로 꺽정이가 말했다. 또 한 번 말로 된 주먹에 얻어맞은 셈이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바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폐하께서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금은커녕 이자를 겨우, 그것도 아주 가끔 상환하고 있으니, 그분께 막대한 자금을 융통해드린 은행가들의 고민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아, 나도 그 어르신과는 조금 원한이 있지.”

류큐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꺽정이가 말했다. 이제는 포기한 핀투는 ‘어르신’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겼는데, 황제와 썩 감정 좋지 않은 베네치아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놀라 움찔하였다.

“그래서? 내가 무얼 해드리면 되겠소?”

“이번 운하의 공사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여러 나라와 민족들 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속 군주들 사이의 회담이나 조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히 중대하고도 중요한 사안이니, 마땅히 가장 먼저 교황령에 들리셔야 하겠지요.”

“마침 그럴 생각이었소.”

“그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과 여타 도시들을 위하여, 황제 폐하께서 조속히 그분의 채무를 상환해야 할 것임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왕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의 등골을 부러뜨리기 위해 하는 운하 공사라면, 척추의 여러 뼈를 동시에 때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것이 베네치아의 도제(Doge, 통령)와 10인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아직도 카를의 용병들이 영원한 도시 로마에 행한 모욕과 폭력(사코 디 로마)을 잊지 않은 교황령의 사람들, 그리고 선출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에 반대하는 뜻을 드러내 왔던 교황 바오로 4세 또한,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붙잡을 것이었다.

모든 종교 사이의 화합과 공영을 위한 일이라는 훌륭한 명분이 있으니,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이러한 압박을 견디기는 어려울 터.

“암. 빚은 갚아야지. 그렇지 않소?”

셀림은 분명 기억하였다. 꺽정이가 엊그제 메흐메트 파샤가 베네디크(베네치아)로부터 재정을 ‘조달’하는 것은 후에 큰 부담이 될 것을 걱정하자,

‘어차피 지중해인지 백해인지, 이 바다를 모두 아우르기 위해 그놈들과 한판 싸울 것이라 하지 않았소? 이왕 싸울 것이라면 빚 떼먹고 나서 싸워 이기는 쪽이 훨씬 이득이겠지.’

라고 저의 일 아니라며 막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빚을 갚아야 마땅하다 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어느새 슬쩍 저의 새로운 벗에게 물든 셀림은 그저 맞장구만 쳤다.

“림 파샤의 말이 옳소.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아니, 심지어 유대인일지라도, 빚을 빌려주었다면 마땅히 되찾을 권리가 있지 않겠소이까.”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동의해주신 것으로 알고...”

지롤라모 자네가 사의를 막 표하던 차, 꺽정이가 한 손 들어 그 말을 끊었다.

“그런데 이 임꺽정이가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이다.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소?”

“하하, 물론이지요.”

다소간 경솔하게 동의하였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미 저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주기로 한 이들 앞에서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우선 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자네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곧 그 귀를 씻고 싶어졌다.

“그대들 대종사(大宗師, 교황) 큰스님께서는 사람 죄를 씻어주는 영험한 부적(면죄부)을 써 주신다고 들었소. 무슨 큰 죄를 지어도 벌을 면한다는 징표가 된다 들었는데, 그것을 받고 싶소이다.”

“예? 아니, 대체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별 건 아니오. 절간에 딸린 조그만 감옥 하나를 날려버렸을 뿐인데, 딱히 사람이 죽진 않았다오.”

대학에도 감옥이 있는 판국에 성당이라고 감옥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던 지롤라모 자네는, 뒤늦게야 모카 항의 주스티아니로부터 전해진 보고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림 파샤’와 그 일행이, 포르투갈령 고아에서 교회를 폭파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허나 아직 혼절하기에는 일렀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대종사 어르신 앞으로 가는 상소문도 한 통 있는데, 우리 조선국과 그 북쪽에서 좋은 일 하시는 하비에르라는 분이 쓴 것이오. 그런데 오는 길에 듣자 하니 그 내용이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할 법하다 하더군. 그러니 만에 하나 그것으로 인해 소란 일어나면 좀 도와주시오.”

“그 서신의 내용을 행여 알고 계신다면, 미리 일러주실 수 있으실지요.”

어째 괜한 물음을 던지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누르며 자네가 물었다.

“사람이 뭘 믿든 조정에서든 절간에서든 잡도리하지 말자는 게 골자라고 들었소. 내 생각에는, 싸움박질 벌일 게 없어서 그런 것 가지고 다 싸우는가 싶지만.”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같은 실수도 종종 반복하곤 하였다.

먼 옛날, 어리석은 사람들이 베네치아인들의 함대를 함부로 빌리는 바람에 이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한바탕 불탄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삼백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베네치아가 명성 자자한 임 단장/림 파샤/돈 림 etc.의 도움을 빌리려다가 엄한 일에 끌려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베푼 대로 돌려받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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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이만을 비롯하여 많은 오스만 술탄들은 뛰어난 어학적·문학적 재능을 보인 바 있습니다. 일례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한 메흐메트 2세만 해도 모국어인 튀르크어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슬라브어에 능숙하였고, 또 이탈리아인 친구 여럿을 곁에 두며 그들로 하여금 라틴어로 된 고전들을 읽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쉴레이만 역시, 적극적으로 통역관들을 육성하고 이들을 외교관으로, 또 때로는 첩자로 쓰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많은 유럽 국가들은 전문적 외교관은커녕 튀르크어를 구사할 수 있는 관료조차 미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 그러나 유럽 국가들도 곧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빠르게 오스만을 따라잡게 됩니다 - 이는 심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상당히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부상 이전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외교적 대화를 모색한 세력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14세기부터 수시로 오스만 측에 외교관을 파견하기도 했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는 바일로(Bailo)라는 상주 외교관을 두기도 했지요. (적지 않은 영향력과 이권이 개입된 자리였기 때문에, 무급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향력 있는 가문들이 이 자리를 노렸다고 합니다.) 작중에 등장한 지롤라모 자네는 원 역사에서 1542년~1544년 사이에 바일로를 역임했고, 그 뒤로 베네치아의 여러 고위직을 맡았습니다. 이후 셀림 2세 치하의 오스만 투르크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한 함대를 -비록 실패했지만 - 이끌기도 했습니다.

‘더 멀리(Plus Ultra)’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카를 5세는, 재정 분야에서는 주로 빚을 늘리는 데 있어 자신의 좌우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 천문학적 채무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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