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기도하는 집 (2)
한때, 이미 지나가 버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선 아니면 악이었다. 당시의 위대한 교황들 아래, 세속의 군주들은 하나가 되어, 선을 위하여 악을 멸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평화가 이 땅에 임하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분명 태양은 그때와 같은 태양이건만, 어찌하여 그 아래의 세상은 이토록 회색으로 가득하게 되었는가. 교황 바오로 4세는 한탄하였다.
어제 그를 시험에 들게 하였던 두 이교도들만 하여도 그러하였다.
그들이 들고 온 제안이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인도까지 갈 수 있는 운하가 뚫린다면, 분명 쇠락을 거듭하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들에 기대어 베네치아인들이 덧붙인 제안은 더욱 그럴듯하였다. 이왕 운하를 판다면, 이탈리아 도시들의 재정을 한데로 모으되 실제로는 황제의 금고에서 그 자금이 나오도록 만들자는 것. 교황령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는 이탈리아, 그리고 교황령이 이끄는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목줄 붙잡히는 에스파냐.
어찌 솔깃하지 않으랴?
하지만 이교도들이 제시하는 대가는 실로 컸다. 술탄의 아들 셀림이라는 자는 기독교와 저들 사라센의 가증스러운 믿음 사이의 평화와 공존을 말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과 마훈드(무함마드)의 이교가 공존할 수 있노라 인정한다면, 알프스 북쪽의 사악한 이단들 역시 똑같은 주장을 펼칠 것이다. 황제의 아우, 비겁한 페르디난트가 그 형의 이름을 훔쳐 체결한 소위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가 그대로 굳어질 것이요, 한 번 옳고 그름의 분간이 무너지면 그 뒤로는 걷잡을 수 없을 터.
그리고 셀림에 이어 찾아온 동방인 코우지오니스가 단도직입으로 소위 ‘믿음의 자유’를 논하니, 마침내 바오로 4세의 인내심은 동이 나고야 말았다.
“아아, 시험이 어찌하여 이토록 가혹한가.”
어제의 그 노여운 만남을 회상하니, 또 한 번 발끈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한 마음을 겨우 다스리며 바오로 4세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곧 그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세속의 이익이 아무리 달콤하게 보인다 한들, 신앙의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추구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오로 4세가 지안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이었던 시절부터 지켜왔던 믿음이었다.
세상에 회색은 없다. 횃불을 가까이 가져다 대지 않아 어슴프레하게 보일 뿐. 빛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흑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횃불을 들고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의 문제일 뿐.
그렇게 생각하며, 늙은 교황은 발걸음을 옮겼다. 시스티나 경당에 교황과 그를 수행하는 이들의 발걸음만 울렸다.
그리고 곧 교황의 눈이, 늘 눈살 찌푸리게 되는 그 지점에 가서 멈췄다.
“아직 그자는 답을 하지 않았는가?”
<최후의 심판>. 성(聖)과 속(俗)을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장엄한 벽화였지만, 바오로 4세의 눈에는 그저 난잡할 뿐이었다. 영광 가득한 이 장면을 어찌 죄지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형태를 빌려 묘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거룩한 기도의 집에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성하.”
사사롭게는 바오로 4세의 조카이자, 그의 몇 안 되는 충복인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어찌 그대의 잘못일까. 속되고도 우둔한 그자의 문제일 뿐.”
교황은 이 죄 많은 그림을 그린 미켈란젤로에게, 적어도 그림에 묘사된 인체의 국부만이라도 덧칠하여 가릴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자는 무엄하게도, 아직껏 가부조차 알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 고집 많은 자는, 심지어 바오로 4세가 그에게 지급되는 연금마저 중단했건만 아직껏 침묵을 지키며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성하! 성하!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이곳 바티카노에 머물고 있는 어지간한 성직자들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바티카노를 드나들며, 위대한 교황 율리오 2세와도 원수 같은 벗처럼 지냈던 늙은 미켈란젤로였다. 이미 그 시절부터 제멋대로 교황의 접견을 청하곤 하였으므로, 그로부터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미켈란젤로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전능하신 주님의 은혜로 제게 크나큰 영감이 내렸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성하께 위대한 조각상을 헌정코자 합니다.”
뻔뻔하게도 <최후의 심판>에 관한 지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며, 저의 새로운 구상에 대해서만 말을 늘어놓는 괴팍한 미켈란젤로였다. 그러나 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를 제압하였던 율리오 2세조차 이 미켈란젤로의 버르장머리만은 제압하지 못하였으니, 그 후임들 또한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 성 베드로 대성당 한편에 이처럼 성하의 뜻을 잘 담은 조각상이 서 있게 된다면, 보는 이들마다 스스로 두려워하며 경건한 마음을 북돋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카라파 추기경의 손을 거쳐 슬쩍 도안 한 장을 전하는 미켈란젤로였다.
바오로 4세의 마음속 한 구석에 늘 감돌고 있는, 그리고 그가 조금이라도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는, 주님께서 채찍 휘두르시며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
교황은 잠시, 천재적인 만큼이나 추레한 눈앞의 미켈란젤로를 보았다.
‘이것으로써 나의 눈을 피해가려는 것이로구나.’
아무리 조각과 그림에만 열중하고, 속세의 권력과 재산에는 마음이 없는 미켈란젤로라지만, 이곳 교황령을 드나든 세월이 있으니만큼 정치를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살아온 세월과 사귄 사람들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지간한 추기경 못지않은 권모술수를 부릴 수 있을 테다. (그나마 다행히도, 소위 천재란 작자들은 천재 아닌 자들과 말 섞는 것부터 귀찮게 여기기 마련이었으므로, 권모술수는 조금 덜 천재적인 이들의 영역으로 남곤 했다.)
이 조각상은, 정말 나쁘게 말하자면 뇌물이었다. 이것 하나로 <최후의 심판> 수정 지시를 비롯하여 온갖 검열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심산일 테다. 이미 속세에서는 ‘거룩하신 분(Il Divino)’이라는 무엄한 별칭까지 얻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면, 뇌물로 쳐도 차고 넘치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도안을 본 교황의 눈에, 어째 익숙한 모습, 솔직한 심정을 담아 표현하면 익숙한 낯짝이 들어왔다.
“잠깐, 설마 이 자는···?”
“아, 제가 앞서 말했던 영감의 원천입니다. 물론 실제로 작업을 할 때는, 이목구비의 형상을 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바꾸긴 하겠지만, 중한 것은 그 몸매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임하셨을 제 목수의 아들로 나시어 궂은일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과 어울리는···”
“우리 주님을 이교도 코우지오니스의 모습을 본따 그리겠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그저 그 모양새만 빌릴 뿐인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당장 제가 그린 저 그림만 보아도···”
미켈란젤로가 저의 정수리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 벽화를 가리키며 항변했다. 하필 그 손가락이, 죄짓지 아니한 어린 양이라기보다는 이교도 신 아폴로에 가깝게 그려진 주 예수의 나체 쪽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교황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썩 물러가게! 또 한 번 그런 무엄한 그림을 내게 보인다면, 성좌를 모독하는 것으로 알겠네!”
그리 말하니 어찌할 텐가. 궁시렁대며 물러날 수밖에.
자신이 그렸으나 자신의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벽화 아래로, 미켈란젤로의 투덜대는 소리가 조그만한 메아리 되어 울렸다.
“흐, 보기 좋게 퇴짜를 맞으셨나 보구려.”
성질머리 고약한 노인네 미켈란젤로가 씩씩대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장 옆에 임시로 세운 그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의 성미 아는 이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는데, 성질 더럽기로는 그와 비등한 꺽정이는 낄낄대며 노인을 놀렸다.
괴팍함으로는 미켈란젤로에게 밀리지 않는 이탁오가, 옆에서 함께 낄낄대다가 꺽정이 어투 그대로 살려 말을 옮겼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포르투갈어도, 라틴어도, 이탈리아어도 아닌 기묘한 말 - 대충 배운 탓이었다 - 이었는데, 대충 뜻은 전해졌다.
(마침내 고역스러운 통역에서 풀려난 핀투 선장으로서는 환호작약할 일이었다.)
“어찌 알았는가.”
“나도 큰스님 성정 겪어보았지 않소. 그러니 어르신이 무슨 꼴 당했을지는 안 봐도 훤하오. 어르신이 그 도안 내밀자마자, 큰스님께서는 역정 버럭 내면서 임꺽정이 그 무엄한 놈 면상을 어찌 그런 데 박으려 하느냐, 그렇게 꾸짖었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닐세. 그러려니 해야지.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저런 사람 한둘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참다 보면 알아서 지나가기 마련이라네.”
어차피 호구하려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독신에, 옷차림에도, 먹는 데도 돈을 아끼는 미켈란젤로였으므로, 바오로 4세가 연금을 끊은 것은 생계보다는 명예의 문제였다.
당장 이 위대한 성당의 공사도 무급으로 맡고 있고, 피렌체 등지에 그의 이름으로 예치된 재산만 5만 두카트에 달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냥 참고 지나가는 수밖에.
“그냥 참고 지나가실 생각이시오, 어르신?”
한숨과 더불어 단념하려던 미켈란젤로가 그 말 듣고 제 자리에 멈췄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처음부터 어르신이 일언지하 거절당하실 것을 알고서 석상 만드는 일 도와드리겠노라 하였던 것이었소.”
“뭐라고? 아니, 이런 고얀··· 그걸 알았으면 좀 도와주지 그랬나?”
교황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답게, 자칭 시나 황제의 특사 앞에서도 거침없이 아쉬운 소리하는 미켈란젤로였다. 만일에 대비하여 셀림은 이 자리에 데려오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도와달라고 말씀도 안 하셨지 않소?”
“자, 그럼 도와주게. 이제 말 했네.”
“그럼 도와드려야지. 내가 이래봬도 ‘결백한 사내들의 보호자’ 되는 사람이라, 불의는 참지 못한다오.”
그 즈음, 이탁오가 말 옮기다 말고 폭소 터뜨리는 사소한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자네, 무슨 수가 있기는 한가? 교황 성하께서 이미 자네를 몹쓸 이교도로 알고 계신다고 하던데.”
“소문도 빠르시구려.”
“이곳 로마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간혹 높은 사람들이 쫓아와서 귀찮게 굴 때가 있는지라, 나름 여기저기 눈과 귀를 심어놓곤 한다네. 젊었을 때는 그러질 못해서 고스란히 당하곤 했는데, 요새는 미리 알고 도망을 다닐 수 있게 되었지.
헌데 지금 그게 중한 게 아니지 않은가? 교황 성하께 말씀 올려서 그 조각상에 대한 마음을 돌려야 할 텐데, 자네는 이교도고, 나는 이미 미운털 박혔다는 말이지. 그 셀림인가 하는 뚱보···”
“나름 술탄 아들이오. 여기 없다지만 말은 좀 곱게 해주쇼.”
“흥, 술탄 아들이지 내 아들인가. 여하간 그 뚱보 젊은이도 자네 같은 이교도니까, 설령 투르크 술탄의 위세를 운운한다 한들 교황 성하의 마음은 못 돌릴 게야.”
어지간한 교황이라면, 베네치아와 같은 굵직한 도시들의 이해관계나 투르크 술탄의 체면 등등을 내세워 설득할 경우, 알아서 스스로 체통을 지키면서 마음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짚은 것처럼, 지금은 전혀 그럴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꺽정이와 이탁오가 겪어본 바로도 그러하였다.
“원래 사람의 완고한 성정은 한 번 굳으면 쉽게는 아니 고쳐진다오. 그러니 여간해서는 큰스님 굳은 심지도 못 비틀 것이오.”
“그래서, 도와주겠노라 말 꺼내자마자 이제는 못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소? 다 계책이 있소이다.”
“듣기로, 이 대성당을 축조하는 것이 교종(敎宗, 교황) 대인과 천주도 종단에 있어 실로 중대한 일이라고 하던데요.”
이탁오가 꺽정이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이 도시가 수난을 당한 이후로, 더욱 위엄 있고 아름답게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 여러 교황 분들의 숙원이었지.”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이 성당이 다 지어지지 못한다면 가장 손해 보는 쪽은 바로 교종 대인이 되십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니, 설마?”
“하다못해 집 한 채를 지어도 대목장(大木匠, 도편수)은 함부로 아니 대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 어르신은 실로 엄청난 일을 도맡고 계신데,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계시오? 내가 보기엔 아닌 듯한데.”
이어서 나오는 계책이라는 것이, 실로 고약한 이교도 무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바오로 4세의 안목이 웬일로 정확하다 할 만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듣는 사람은 교황이나 추기경이 아니라, 고약한 성미 비슷한 미켈란젤로였다.
“그러니까··· 내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공사를 멈출 것이라 협박을 한다? 그럴듯한 생각이지만 실제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군.”
“그건 그렇지. 이 나라에 대목장이 어르신 한 분만 계시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왕 악다구니 쓸 것이라면, 패거리를 모아야 하지 않겠소?”
“하! 패거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로마와 그 일대에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네. 자신이 모자란 줄 아는 모질이들, 그리고 그것도 모르는 더 심한 머저리들. 이렇게만 있지. 그러니까 이 나이 되도록 여기 매달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과연 고약한 노인네 소리를 듣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사이 미켈란젤로 노인네의 인망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를 들어 알고 있던 이탁오가, 명불허전임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더 넓게 보면 어쨌든 같은 편이잖소? 싫든 좋든 함께 가야지. 걱정은 마시오. 어르신께서 허락만 하시면, 주변 돌아다니며 설득하고 다니는 건 우리가 대신 하겠소.”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곧 허락을 하였다.
한편, 그동안 베네치아인들은 임 당수가 벌여놓은 사고를 뒷수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기껏 얻은 기회도 그대로 날려버릴 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단과 이교도를 미워하는 만큼 부정부패를 혐오하는 교황이었다. 베네치아가 지금까지 교황령에 영향력을 발휘할 때 주로 동원하던 것은 성직자들 사이의 인맥, 그리고 황금과 더 많은 황금. 이렇게 둘 뿐이었는데, 두 가지 모두 바오로 4세 마음을 돌리는 데는 신통치 않았다.
그 삼촌과는 달리 아주 황금에 관심이 많은 카라파 추기경에게 대신 뇌물을 바치고, 그것을 다른 사람 시켜 공개함으로써 교황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보다 극단적인 방안까지 슬슬 제시될 무렵.
그렇게 머리 싸매고 있던 로마 내 베네치아인들로 하여금 더 큰 두통을 겪게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황 성하를 지금 접견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어째서인가?”
“지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소요(騷擾)가 발생한바, 성하께서는 그곳 현장에 직접 나아가셔서 수습에 힘쓰고 계신다더군요.”
“하필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니, 미심쩍군그래. 직접 가보아야겠네.”
주바티칸 대사뿐 아니라 이번 일에 여러모로 관계가 있는 지롤라모 자네 등등은 모두 문제의 대성당 공사 현장으로 향하였다.
지금쯤이면 황제 카를 역시 그의 빚을 두고 베네치아가 벌이려 하는 공작에 대해 어떻게든 눈치를 챘을 테니, 그들의 발목을 잡고자 뭔가 지저분한 수를 썼을 수도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바티카노 언덕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이, 아니, 이들이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
“자유 없이는 노동도 없다! 반쪽짜리 대성당을 원하는가?”
대성당 초입에 떡하니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바로 대성당 공사를 맡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미켈란젤로를 필두로 하는 예술가들이 한 무리요,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떨어지는 바 많은 큰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석공과 여타 기술자들이 또 한 무리였다.
그뿐 아니라, 교황령 일대에 머무는 다른 건축가와 화가들도 몇몇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대사님, 필시 누군가 손을 쓴 것입니다.”
“이 사람도 그렇게 보네.”
지롤라모 자네가 의심을 제기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인간적 매력과는 여러모로 동떨어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대체 어떻게 저토록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허나 그 옆에서 익숙한 작자들이 은근슬쩍 모습 드러냈으므로, 엉뚱한 데서 답을 얻게 되었다.
“뭐, 내가 좀 힘을 실어드리기는 했소. 저 미켈란젤로 어르신 인망이 좀 나빠야지.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었으니 망정이지, 혼자서 뭔가 하려고 했더라면 저 대웅전 다 짓는 게 더 빨랐을 게요.”
그게 어딜 봐서 임 당수 공이냐, 말 옮기랴, 논변 꾸며내랴 고생한 자신의 공이지, 그렇게 투덜대는 이탁오가 곧 꺽정이 말을 옮겨주었다.
물론 저기 모인 이들 중 대부분은, 처음 꺽정이와 이탁오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나타나자 바로 난색을 표하였다.
‘무어라? 대성당 공사를 관두고··· 그러니까···’
‘파업.’
‘그래, 그렇게 일을 관둔다니. 지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어차피 이대로라면, 지금의 교황 성하께서 계시는 한 우리네들은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소. 인체의 아름다움조차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 다음에는 뭘 또 검열하려 들겠소?’
쌓인 것 적지 않은 미켈란젤로가 앞장서서 불평하고,
‘대성당은 교황청, 나아가 교회 전체의 체통이 얽혀 있지요. 이것을 볼모로 삼고, 일대의 모든 예술가들과 공인들을 한데 묶는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탁오가 여러 기독교인과 무슬림들로부터 간악하다 비난받는 그 말재간으로 사람들 마음을 흔들었다.
‘더구나 미켈란젤로 이분의 명망은 어쨌든 엄청나지 않습니까? 평소에 그 그림자에 가려져 손해를 보시었으니, 이제는 그 덕도 좀 보아야지요.’
‘그 덕이라니? 우리가 그대들과 함께하여 무슨 덕을 볼 수 있겠소?’
‘여러분들은 과연 재능에 비해 합당한 대우를 받고 계신다고 여기십니까? 물론, 급료로만 따지면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은 받으시겠지요. 하지만 그뿐이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에우로파의 다른 그 어디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허나 그들의 대우보다도, 그들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부풀어오르는 자부심이 더 높았다. 그저 말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
그들은 고대의 예술과 그 뒤에 있는 철학을 섭렵하였다고 여겼다. 설령 까막눈을 겨우 면했다 하더라도, 위대한 고대인들의 삶과 미학을 두 손으로 재현하고 있으니, 여느 지식인들에 비해 그들이 못할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들 생각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대우로 보나, 지위로 보나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당장 ‘거룩한’ 미켈란젤로부터 그의 그림을 고치라는 압박을 받는 판에, 범상한 화가나 조각가, 석공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가끔, 그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경외하고 시기할 뿐.
‘그러니 여기 미켈란젤로 어르신께서 여러분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제대로 신세를 지우셔야지요. 이분의 명망에 힘입어 여러분의 대우도 높일 수 있도록.’
‘그게 가하겠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 거두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꺽정이가 슬쩍 셀림과 저의 이름을 팔았다.
‘그러다가 여기서 쫓겨나면 동쪽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지. 내가 이래 봬도 우리 동네에선 제법 날리는 사람이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와 (그나마) 친하거나, 그 문하에 있거나, 아니면 지닌바 신중함에 비해 욕심이 많은 자들이 앞서 나왔다. 끝까지 동참하길 거부한 이들도, 만에 하나 미켈란젤로나 다른 이들의 일감이 저에게 대신 떨어질 경우 이를 받지 않겠노라고 서약을 하였다.
“··· 하여, 이리 된 것입니다. 대놓고 급료를 더 달라느니, 일하는 데 시시콜콜 간섭하지 말라느니 할 수는 없으니, 저렇게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유 운운하는 것이지요.”
“잠깐. 설마?”
이들이 교황 바오로 4세의 노여움을 산 이유가, 그 면전에서 믿음의 자유를 거론하기 때문 아니었던가?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자연스레 믿음의 자유도 생겨야겠지요. 말하는 것은 허락하면서 스스로 말한 바를 믿는 것은 불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큰스님 앞에서 거론한 이야기라든가 우리가 들고 온 하비에르 어르신 서신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하등 관련 없는 사정이오. 나는 그저 잘난 내 모습 후대에 길이길이 남기고 싶어서 미켈란젤로 어르신께 힘 좀 보태드렸을 뿐이외다.”
늘 그렇듯 뻔뻔할 만큼 태연한 모습을 한 꺽정이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래서, 저렇게 석공과 화가, 조각가 등등을 모두 모아서 북방의 길다(Gilda, 길드)나 피렌체의 아르테(Arte, 직능조합) 같은 것을 꾸리게 할 생각이시오?”
지롤라모 자네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모임을 어떻게 꾸리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다들 어르신처럼 저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라면 무슨 규약이네 예절이나 차리는 것은 원치 않을 듯합디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제멋대로 살고 싶어서 뭉치는 것 아니오? 미켈란젤로 어르신 성정을 감안하면, 보나마나 이렇게 저들 늠료(급료)나 대접에 관한 일 아니면 서로 건드리지 않는 그런 느슨한 모임으로 남겠지.”
그 말대로, 이 모임 - 당장 사람을 그리 가깝게 여기지 않는 미켈란젤로 본인부터 부담스러워하는 - 은 무슨 거창한 길드 같은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저 누구의 탄압도, 박대도 받지 않게끔 한다는 데 목적이 있을 뿐.
그러므로 이름도 ‘자유로운 석공들’이라고 할 뿐이었다.
(때마침 잉글랜드 여왕 메리와 카스티야 왕자 펠리페 사이의 혼약 공인과 관련된 뒷처리를 위해 로마에 와 있던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를 ‘프리메이슨(Free Masons)’이라고 옮겼다.)
여전히 할 말을 열심히 찾고 있는 베네치아 사람들 앞에서 이탁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는 한통속 아닙니까? 이 정도는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마침 저쪽에서 교황의 오른팔 카라파 추기경이 이쪽 베네치아 사람들을 노려보는 게 보였다. 저쪽에서 보기에는 정말로 동방 이교도들과 베네치아인들이 같은 편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때 베네치아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교도를 증오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유명한 바오로 4세의 입장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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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4세는 지난화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으로는 반대편에 있던 칼뱅을 연상케 하는 강경한 금욕주의자이자 도덕주의자였습니다.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 자선활동과 더불어 강력한 도덕적 엄숙주의를 주장했던 테아티노회의 공동 설립자이자, 교황령 종교재판 총책임자로 활동했던 바오로 4세는, 즉위한 이후 지난화에 언급된 유대인 게토 설치에 이어, 강력한 反이단 정책, 그리고 도덕적 금욕주의에 기반한 개혁정책을 펼쳤지요.
여기에는 미사 헌금을 빙자한 뇌물 수수 근절, 여전히 음지에서 벌어지던 교황청 성직 매관매직 근절 등 현대의 관점에서도 합리적인 개혁도 있었지만, 구걸행위 금지나 각종 검열정책 도입 등 현대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탈리아인들의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조치도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재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입된 검열정책은, 최초의 교황청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 발행 - 당시 성직자들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하여,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1564년 보다 완화된 형태로 완성됩니다 - 과 같은 거시적인 것부터, 미켈란젤로의 예술활동에 대한 검열처럼 비교적 사소한 것까지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이처럼 강경한 개혁주의자였던 바오로 4세의 비극은, 그가 교회와 더불어 세속국가로서의 교황령을 다스리는 통치자이기도 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증오하는 에스파냐를 몰아내기 위해 바오로 4세는 어쩔 수 없이,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에 준하는 관계까지 맺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이교도와 한통속이라 할 수 있던 프랑스의 손을 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이자 그의 집안인 카라파 가문의 본거지이기도 한 나폴리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황제군의 역습으로 로마 인근에서 프랑스-교황령 연합군이 패퇴하고, 양국 사이에서의 무조건적 중립을 골자로 하는 굴욕적 평화조약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요. 또한 종교개혁 이슈에 대해 조금이라도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성직자들을 배척하는 그의 개혁노선은, 결국 주변의 유능한 인재들까지 몰아내어 바오로 4세 본인의 조카이자 매우 야심만만하고 부패한 인물이었던 카를로 카라파(Carlo Carafa)를 추기경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모순으로 이어졌지요.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바오로 4세는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에 묘사된 남녀의 나체에 문제를 제기했고, 미켈란젤로에게 등장인물들의 ‘주요 부위’ 위에 새로 덧칠을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지시를 묵살하자, 바오로 4세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연급 지급을 일시 중단하는 강경한 조치까지 취했지요. 그렇게 질질 끌던 <최후의 심판> 나체화 문제는, 결국 미켈란젤로 사망 직후인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의거하여 덧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 수정작업의 결과물이 지금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모습이지요.
작중 등장하는 예수의 성전 정화상은, 실재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다만 실제로 바오로 4세가 예수의 성전 정화를 묘사한 메달을 주조하였던 것을 감안했을 때, 바오로 4세 본인이 4대 복음서 모두에 언급되는 이 일화와 그것의 묘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길드 전통은 근세까지도 주요 도시들에 남아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길드의 목적은 근대의 노조와는 달리, 독점구조의 유지, 그리고 도제 제도를 통한 숙련노동 공급의 조절 등에 주안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길드들은 자격요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높은 교육을 받고 때로는 귀족의 자제이기도 했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대체로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다방면으로 교양을 쌓으면서 점차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게 되었던 르네상스 예술인들 본인도 도시의 기득권이지만 ‘고작’ 숙련공의 모임에 불과했던 길드의 일원이 되기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많은 천재들이 그러했듯 - 비록 후대에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 괴팍한 성미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교황의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크게 끌어올렸던 정치의 달인 율리오 2세를 상대로도 정면으로 들이박곤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가지 일화로, 딱히 예술에 대해 심미안은 없던 율리오 2세가 시스티나 경당의 벽화 작업을 두고 사사건건 참견하던 끝에 미켈란젤로를 지팡이로 한 대 툭 치자, 그날로 미켈란젤로는 짐을 싸고 피렌체로 돌아가버렸다고 합니다. 율리오 2세는 당연히 격분했지만, 그를 대체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주변의 설득을 못 이겨 결국 그간 체불되었던 임금을 일시불로 지급하면서 그를 회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미켈란젤로쯤 되는 사람도 임금 체불과 푸대접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주변에 예술의 가치를 아는 후원자가 없을 경우 자칫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 있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