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인들 황새 못 되랴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곽순수(郭順壽) 위(爲) 절충장군(折衝將軍)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자(者). 가정(嘉靖) 35년(1556) 칠월 십일.”
하였으니, 이는 곧 봉산군수와 종성부사를 지낸 무관 곽순수에게 무산계(武散階) 중 가장 위인 정3품 절충장군을 제수하고 더불어 동래부사 직에 명한다는 뜻이었다.
동래부사란 어떤 자리인가. 눈앞에는 대마도요, 지척에는 경상좌수영이 있는 나라의 요지라. 금상 즉위하시고 현에서 도호부로 올린 뒤, 유독 그 자리에는 정3품 당상관만을 앉혔은즉, 대조선국 일흔다섯 도호부사 중의 으뜸이라 할 만하였다.
그뿐인가? 근세 천하제일이라 일컫는 내선(萊船) 나오는 선소(船所, 조선소)가 있고, 소위 자유왜(自由倭)라고도 하는 자유민주당의 왜상(倭商)들이 온갖 보화를 들고 왕래하며, 요새는 제물포로 직행하기에 조금 뜸해졌다지만 여전히 한 해에 한 번은 포로도갈인가 하는 서양 나라의 큰 배가 들리곤 하였다.
그러니 어찌 동래로 보임하기 위해 영남대로 따라 내려가는 곽순수 입에서 ‘어화 좋을세라’ 소리가 멎을 수 있겠는가.
한전법이 시행된 경기도의 난장판 전답을 지날 때도 흥겹고, 이미 알아서 한전법을 시행한 것과 다름없는 충주 고을 지날 때도 기쁘고, 월악산 기슭에 닿아 문경새재를 눈앞에 둔 지금도 마음 같아서는 날아갈 듯하였다.
허나 눈앞의 새재, 즉 조령은 하늘 나는 새조차 지나기 어렵다 하여 그 이름 붙었으니, 비행은 마음속에서만 하고 우선은 고갯길 넘을 채비를 해야 했다.
“힘껏 말 달리면 해 떨어지기 전 재 넘어 동화원(桐華院)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다.”
“아서게. 산속 해는 갑절로 빨리 지는 법이니, 재 넘기 전 안부역(安富驛)서 하룻밤 묵고 아침에 기운 차려서 넘어가는 게 낫네.”
곽순수 수행하는 젊은 군관 하나가 말하자마자, 그와 사이 좋지 않은 늙은 군관이 곧장 반박했다. 그러고 나서는, 상관의 눈치를 뒤늦게 보며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부사 영감, 어찌 하오리까?”
“흠···”
정3품 동래부사 행차 치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 조촐한 일행이었다. 비록 그 대신 사비를 내어 자신과 군관들의 철릭이며 군마며 - 특히 근래에는 여진 사람들이 좋은 말을 많이 팔곤 했다 - 그럴듯하게 장만하긴 했지만.
산길을 서둘러 넘으려다가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위엄도 떨칠 겸, 주변의 이목도 늘릴 겸, 역에 들려 내 동래부사 부임하는 사람이노라 떠들썩하게 알리고, 찰방 녀석에게 대접까지 받고, 다음날 아침에 역에 모인 길손들까지 마치 저의 군사인 양 대동하여 넘어가는 쪽이 더 나을 것이었다.
“먼길 오갈 때는 늙은 사람 말 듣는 게 낫지 않겠는가.”
곽순수가 잠시 고심하곤 늙은이 편을 들어주니, 나잇값 못하는 무관이 젊은 사람 앞에서 으쓱해하였다.
“거 보게. 부사 영감께서도 잘 알지 않으시는가. 내일모레가 추분이니 저 해 떨어질 때까지도 얼마 안 남았네.”
“추분이 그저께였는데 뭔 내일모레입니까.”
입 삐죽 나온 군관이 대놓고 상관 말에 반박하진 못하고, 괜히 소소한 대목만 트집잡아 투덜대는데, 어린놈 말대꾸에 늙은이도 끝내 좋게 받아넘기지 못했다.
“무어라?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관상감에 자리 하나 마련하기라도 했나 보지?”
“돈깨나 주고 산 <보산역편(保算曆片)>에 그리 실려있습디다.”
“<보산역편>? 그게 뭔가?”
늙은이가 무심결에 반문하니, 젊은이가 마침내 저의 아는 것 하나 나왔다고 좋아서 떠들었다.
“하여간 이래서 요즘 연로한 사람들 말을 도통 못 믿는다는 겁니다. 요새는 강산 바뀌는 데 십 년 기다릴 것도 없다 하잖습니까. 요새 도성 사람들 치고 절기 날짜 따질 때 <역편> 안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야 알 수 없는 내력이었지만, 그 <보산역편>이란 두어 해 전부터 도성에서 크게 유행한 <역편>을 더욱 개량하여 만들어낸 역서였다. 물론 민간에서 함부로 역서를 찍어낼 수는 없는 법이라, 눈 가리고 아웅하듯 그저 관상감 역서를 베낀 다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 것이라 하고 있었지만.
제법 이익이 나다 보니 사람도 더 붙어서, 관상감 관원들도 제법 여럿 끼어들었는데, 백의재상(白衣宰相) 소리 듣는 이지함으로 인해 졸지에 백의호판(白衣戶判) 소리 듣게 된 서림이 여기에 눈독을 들이면서 장사 규모가 훨씬 커졌다.
마침 민주당 무서운 줄 모르는 뜨내기들이 <공보>를 함부로 베껴 팔다가 잡히기도 하던 차였다. 그리하여 공회 통하여 법도를 하나 발의하기를, 사람이 서책을 쓴 다음 나라에 고하면 본 저자 허락 없이 그것을 베끼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몇 년 전 일본국 모리 씨에게 시비 걸었던 것을 떠올린 서림의 발상이었다.
이른바 존저술법(尊著述法)이라 하는 이 법 덕분에, <보산역편>은 베껴 파는 사람 없이 제법 좋은 값 - 즉 당하는 쪽에서 보면 눈 뜨고 코 베이는 듯한 값 - 으로 팔리고 있었다.
“시끄럽네. 본관 뜻은 변함없으니 그리들 알게나. 체통 떨어지게 뭔 짓들인지.”
그런 사정 알 바 아니었던 곽순수가 금방 두 군관 사이에 끼어들었으므로, 언쟁은 그대로 멎었다.
“저기 보게. 눈앞이 안부역일세. 행인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머쓱하니 고개 돌려 앞을 보던 늙은이 군관이,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그는 소싯적, 북변으로 흘러들기 전에 경상감영에서 아병(牙兵) 노릇하던 바 있었으므로 길잡이도 겸하고 있었는데, 분명 아직 안부역이 나오려면 십리길은 더 남았거늘 뻔히 눈앞에 제법 그럴듯한 마을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 보십시오. 벌써 안부역이라니, 동화원도 지척 아니겠습니까?”
“아니, 안부역은 본디 저리 번화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맞지 않습니다, 영감.”
풍경 수려한 것으로 유명한 무두리(水回里)는 지났으니, 삼십여 년 전 기억대로라면 이제 재를 넘기 전 지날 마을로는 안부역 역말만 남은 셈이었다.
헌데 눈앞에 나타난 마을은 족히 수십 호는 될 큰 동리에 번듯한 주막도 여럿 있고, 그러면서도 정작 역참 하나만은 없는 듯하니 이 무슨 도깨비 조화란 말인가.
곽순수와 그 일행 모두 두리번거리고 있는 차, 그제야 마을 초입에 앉아 있던 철릭 입은 사내가 일어나 군례 취하는 것이 보였다.
“주사도감(舟師都監) 군관으로 도제조 대감을 모시고 있는 이 아무개가 동래부사 영감을 뵙습니다.”
무반 중 당상관 옷차림 한 사람이 영남대로를 따라 내려온다면, 병사(兵使)나 수사(水使) 아닌 이상에야 동래부사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시골뜨기 토관(土官)이 아니고서야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하물며 이곳저곳 건드리고 다니는 주사도감 소속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따.
“도제조 대감을 모신다니, 실로 대단하군그래. 헌데 주사도감 사람이 이곳은 무슨 일인가?”
곽순수가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눈빛과 말투에는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주사도감이 무엇하는 관아인가. 바로 하삼도(下三道, 경상•전라•충청)의 전선을 새로 구비하는 일을 주관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세간에서는 고작해야 배 만지는 일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대동법에 의거하여 전용할 전선과 개량하여 계속 쓸 전선을 나누고, 내선을 개량한 가칭 ‘어양선(禦洋船)’을 어느 수영과 수군진에 얼마나 배속할지 등등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문관들이나 세간의 말 많은 자들은 그저 잡색(雜色) 관아라 여기지만, 하삼도 모든 수사와 만호, 첨사들은 그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헌데 한양이나 동래에 있어야 할 주사도감 사람이 이곳 안부역 근방의 기묘한 마을 초입에 있으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은, 전선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목재가 얼마나 있는지 살피기 위해 일대의 산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씨 군관이 그 의아함을 읽고 답하니, 그럴듯한 이유라 의문이 금방 풀렸다.
“하면 일대 지리에도 밝겠군. 이 마을이 안부역 역말 맞는가?”
“여기는 안부역 역말이 아니라, 이언(속된 말, 俚言)으로 물안부(水安富)라 하는 곳입니다. 온정(溫井, 온천)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몰려들어 몇 년새 마을을 이루었지요.”
소위 온정이라는 것은 그저 몸에 조금 좋고, 물이 차갑지 않고 미적지근할 뿐이었다. 살갗에 생기는 온갖 고질이나 근골(筋骨)에 사무치는 풍습(風濕)을 덜어내는 데는 온정에서 목욕하는 것만한 처방이 없다지만, 땅에서 솟는 샘을 모아 사람이 몸 담글 수 있는 탕(湯)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제법 공이 많이 들었다.
더구나 이 문경새재 산골에서 함부로 몸을 담갔다가는 지나가는 범이 찾아와 ‘이것이 두발짐승들이 즐긴다는 그 수육이라는 것이로구나’ 하며 맛보고 갈 터였다.
그러므로 국초만 해도 제법 그럴듯한 촌락이 있었는데, 한 백여 년 전부터 고관대작 발걸음이 끊기니 알아서 흩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영남대로가 정비되고 온갖 상행 위하여 이 길 오가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장삿속 밝은 이들이, 이왕 안부역 역말에서 묵을 것이라면 차라리 온정 있는 이곳 물안부에서 하룻밤 묵으며 온정에서 여독 풀고 가시라며 여각(旅閣)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부사 영감 앞에서 밝히기는 무엇하지만, 저희 일행이 이곳 물안부에서 모이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근방에 오게 된 김에 이름난 온정 효험 보고도 싶거니와, 여흥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이곳 마을 초입에서 아랫사람들을 기다리던 중 영감을 뵙게 된 것입니다.“
무슨 여흥을 이르는가 물어볼 것도 없었다. 대개 저렇게 그럴듯한 여각이라면 고작 두어 해만에 나라의 으뜸가는 놀잇거리 겸 병폐로 자리잡은 투전놀음 판이 깔리기 마련이었으므로.
“흐흠, 부사 영감. 아닌 게 아니라 조촐한 행차로 이곳까지 급히 오느라 여독이 쌓이지 않으셨습니까.”
“실은 소관이 어젯밤에 용꿈을 꾸었는데···”
주사도감 군관의 말을 들은 곽순수 아래의 두 군관도 은근슬쩍 운을 떼었다. 하나는 삭신 쑤시는 늙은 몸을 온정에 담그고픈 마음이 동하고, 다른 하나는 투전판에서 저의 재물복 시험해보길 원하는 것이었다.
결국 귀 얇은 곽순수도 아랫사람들 말 따라, 내일 조금 더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안부역 역말 대신 이곳 물안부에서 조금 이르게 행장 풀기로 하였다. 어차피 사람들 모아 새재 넘을 것이라면, 오가는 인마가 더 많다는 이곳에서 모으는 쪽이 더 수월하기도 할 터.
더구나 제법 긴장하며 여기까지 내려와 심신이 다소 노곤해진 판에 투전놀음도, 온정도 모두 솔깃한 이야기였으므로, 곽순수는 은근 기대 품고 이씨 군관 따라 마을 안으로 향했다.
그 주사도감 이 아무개가 은근슬쩍 음험한 미소 지었다는 것도, 그가 기다린다는 동무 군관들은 사실 곽순수 일행보다 한 발 앞서 달려와 동래부사 행차가 거의 근접했노라 미리 귀띔해주었다는 것도 곽순수는 알지 못하였다.
“어, 거 시원타. 이것이 바로 신선놀음이로구나.”
이씨 군관은 제법 말솜씨와 수완이 있어, 여각 주인에게 어떻게 잘 이야기하여 본디 은 아니면 퇴계 선생의 지정고 은표(銀表) 내지 않으면 내어주지 않는 열탕(熱湯)을 얻어주었다. 곽순수도 물론 나름대로 은을 챙겨오긴 했지만, 솔직히 동래부사 자리 얻느라 제법 인정을 흩뿌렸기에 은 한 냥이 아쉬운 처지였다.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사람 번잡한 온탕(溫湯)과 달리, 길가에서 좀 벗어난 호젓한 곳에 있는 이곳 열탕의 물은, 본디 미지근한 온정 물을 모아 따로 장작 태워 데운 뒤 부어준 것이었다. 더 들어간 수공만큼이나 약효도 좋은 듯하여 절로 몸이 풀렸다.
“과연 사람들이 멀리서 와서 찾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은근슬쩍 곽순수와 함께 이 열탕에 자리 얻은 이씨 군관이 말했다.
그제야 이씨 군관의 벗은 몸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제법 무관으로 잔뼈 굵었노라 여기는 곽순수였건만, 눈앞의 사내는 이곳저곳에 상흔 있는 것이 저보다도 더 험하게 굴렀던 듯하였다.
“아, 소관이 번듯한 자리를 얻기 전에 방탕한 삶을 산 탓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달을 겨우 면한 정도지만, 그래도 무뢰한 시절에 비할 바는 못 되지요.”
곽순수 시선 닿는 것을 알아챈 이씨 군관이 저의 사연을 밝혔다.
“저희 같은 천출에게는 근래가 요순 시절까진 못 되어도 우탕(禹湯)의 때는 될 것입니다. 줄만 잘 서면 이렇게 꿈도 못 꾸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줄이라··· 자네는 도제조 대감의 덕을 본 모양이로군.”
“외람된 말씀인 줄은 알지만, 부사 영감께서도 도제조 대감의 덕은 다소간 받지 않으셨는지요? 근래 무반으로서 양명(揚名)하기에 도제조 대감만큼 좋은 연줄 베푸시는 분이 없으시니까요.”
나라가 도적떼에게 굴욕을 당하고 - 정작 그 도적떼 두목은 임금의 벗이 되었으니 기묘한 일이었지만 - 남쪽 바다와 북쪽 산속에서 모두 사정이 급변하면서, 조정은 병비(兵備)를 튼실히 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의민당이 작란하던 시절 무관이라는 자들은 대개 윤원형에게 줄 댄 자들이었는데, 그 윤원형이라는 줄이 툭 끊어졌으므로 다들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곤 했다. 손수 경군을 이끌고 재령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성황산성까지 함락시켰던 남치근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태롭다고들 하였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름만 민주당으로 갈아치운 옛 의민당은 순순히 금군 자리도 내려놓고, 흑의군 외에 따로 무슨 군영을 더 만들어 군권을 장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남치근은 겨우 연명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던 중 심통원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얻었다.
“하, 품계 오른 뒤에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네. 내 도제조 대감이 그 자리에 앉으시기 전 도성에서 몇 번 뵈었는데 말이지···”
“뜻이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로군요.”
“무어, 거칠게 말하면 그렇다네.”
조선국 무반이라면 대개는 임거정과 그 패거리의 난행을 보며 분하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싸움다운 싸움 몇 번 하지도 않고 관군을 꺾어버린 것이 원한의 한 근원이요, 조금 더 날것의 감정으로는 똑같이 칼밥 먹는 사이에 과거고 벼슬이고 다 무시하고 샛길로 빠진 근본 없는 도적놈과 그에 결탁한 자들이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갔다는 데 대한 질투가 있었다.
허나 봉산군수 노릇하며, 이름 떨치기 전의 임거정과 엮인 바 있던 곽순수는 그러한 무반에 들지 않았다.
“우리 사이 이야기지만, 무관이 욕심 과하면 아니 되네. 임꺽정 그이를 보게. 한낱 도적조차 제멋대로 날뛰는 듯하면서도 권세 욕심에는 선을 긋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곽순수는 임거정 무리가 막 결성되던 무렵부터 그들을 보아왔다. 그러니 남들은 모르는 민주당의 허실을 알 것이라고 여긴 남치근은, 막 종성부사직 내려놓고 한양으로 돌아온 곽순수를 불러 꼬드긴 바 있었다.
그리고 곽순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남치근은 이준경을 비롯한 사림 신료들이 새롭게 군제를 정비하는 것에 편승하여 저의 세력을 몰래 늘리고 있었다. 대놓고 저의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선에서는 살짝 물러난, 그러나 무관들 사이에서는 입김 셀 수밖에 없는 자리만을 역임하며, 저의 편은 내세우고 그 밖의 사람은 억누르곤 했다.
그 결과, 유사시 힘 쓰는 자리에는 남치근의 사람들이 하나씩 채워졌고, 무관들은 스스로 남치근의 사람 되기를 자처하곤 하였다. 허나 겉으로 보기에, 남치근이 파당을 이루어 뭔가 수작을 부린다는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온 남치근의 품성이나 지재와는 걸맞지 않는 교묘한 수법이라, 곽순수는 남치근의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을 직감하였다.
(이렇게 누군가 하나를 내세워 뒤에서 잇속 차리는 짓은 이미 한 번 봉산군에서 겪어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무관을 내세워 힘을 모으는 자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은 쪽은 아닐 터였다.
“내 집안은 한미하고, 내 운수가 사나워 아직 후사도 보지 못하였네. 욕심을 부려서 잃을 것은 많고, 화 닥쳤을 때 스스로 보중할 길은 없으니, 언행과 교우를 경계해야지. 우리 사이 이야기지만, 도제조 대감께서는, 그, 청백리는 아니시지 않은가.”
그러므로 곽순수는 갖은 핑계를 대며 남치근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대신 다른 이들에게 고루 인정을 뿌려, 중요한 자리요 제법 돈벌이 되는 곳임에도 중앙으로부터는 거리가 있는 동래부사 자리를 얻었고. 또 남치근의 사람들에게 트집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동래로 부임하는 행차도 간소하게 하였다.
“제 윗사람 험담을 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만, 그, 욕심이 때로 과하실 때가 있으시기는 하지요.”
군관이 외려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네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로군.”
“그런데 풍문으로는, 도제조 대감께서 욱재(심통원) 대감과 그리 연이 깊으시다 하였습니다. 그만하면 어지간해서는 욕심으로 인해 화가 닥친다 해도 능히 모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관 험담에 맞장구치는 것을 넘어, 숫제 그 뒤의 속사정까지 남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니, 곽순수도 일면 경계하면서도 그만큼 입이 헐거워졌다.
“글쎄, 모를 일일세. 도제조 대감이 지금 파당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파당을 꾸리고 있으니, 이것이 자칫 잘못된 데 쓰이게 된다면···”
“허나 도제조 대감은 그런 차마 입에 못 담을 일을 하실 분은 아니십니다.”
“나도 그것은 아네. 하지만 그분 아래서 모사 노릇하는 누군가가 있는 건 분명한데, 그 모사가 바치는 것이 제갈무후의 계책인지, 아니면 사마중달(사마의)의 계책인지 알 수 없는 것일세.”
“허, 도제조 대감께서 어찌하여 부사 영감께서 한사코 함께하기를 거절하시는가 기이하게 여기셨다던데, 과연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고마우이.”
어째 군관 말투가 ‘선달 겨우 면한 사람’답지 않다 여겨졌기에, 곽순수는 조금씩 눈앞의 군관이 께름칙해졌다. 물 식었노라며 슬슬 일어나겠다고 핑계 대려던 차, 군관이 그 발을 잡았다.
“그러면 하나 여쭙겠습니다. 굳이 동래부사로 가시는 까닭은, 그곳이 인천 다음으로 민주당 당세 센 곳이기 때문은 아닌지요?”
“그 무슨 말인가?”
“부사 영감께서 일전에 봉산군수로 계시면서 의민당과 연 맺으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제법 아는 사정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의민당이 이름만 바꾸고 세력 더욱 떨친 것이 민주당이고요. 그러니 여차하면 동래에서 민주당에 의탁하여 한 몸 건사할 심산이다, 그런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 말이 지나치군그래!”
“끝내 아니라고는 말씀 못하시는군. 그대의 뜻은 내 잘 알겠소.”
갑자기 말투가 바뀌니, 곽순수는 몸 일으키려던 것을 일순 잊고야 말았다. 그사이 잽싸게 군관이 손을 들자, 열탕 곳곳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괴한들이 몸을 드러냈다.
곽순수는 게 뉘 없느냐며 외치려 하였으나, 열탕에 들어온 괴한 중 하나가 득달같이 등 뒤로 달려들어 목을 우람한 팔로 틀어막았다.
“남치근 대감 댁에 찾아갔을 때, 그분 한 사람만 만난 게 아닐 테지. 결코 남치근 그자가 이 모든 일을 주동하고 있지 않으며 저의 욕심과 질투하는 마음으로 인해 오히려 쓰임을 당하고 있을 뿐임을 익히 보았겠지.”
그사이 괴한 하나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몸을 대충 닦고, 옷 걸친 ‘군관’이 이죽대었다.
“그대는 동래부사 자리 위하여 남치근의 사람을 제한 나머지에게 고루 인정을 찔러넣고, 마침내 교지 내려오니 그날부로 기다렸다는듯 도성을 떠났지.
그렇게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았더라면, 차라리 평복을 하고 동래로 향했어야 했을 게요. 행차 간소하게 한다면서 정작 수행하는 이들 군마며 철릭이며 요란하게 마련하여 내려오니, 사대문 나설 때부터 내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 뒤에 따라붙었소이다.”
그리고 곽순수는 저도 모르게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변론의 기회마저 발로 걷어찼다. 남치근을 경계하는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임꺽정과 민주당 이야기로 변죽을 울렸건만 역시 나라 바로잡는 일에 함께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사마중달 소리까지 듣는 광영을 얻었소. 허나 나는 사마의가 아니라, 두리손이라는 사람이외다.”
이름 밝힌 것이 신호였다. 곽순수의 목을 조르는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빠졌다.
전생에 임꺽정을 잡아 죽인 군관이, 이번에는 임꺽정으로 인하여 죽음 맞게 되었으니 묘한 일이었다.
“아직 모자라다.”
사람이 죽든 말든, 해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떠오른다. 서쪽으로 달아나는 어둠을 보며 혼잣말 남기는 두리손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형님?”
몇 남지 않은 문객 출신 부하가 물었다. 그자가 수락산에서의 그날 이후로 아직껏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눈치가 없어서 다른 놈들과 달리 두리손이 저들을 그저 쓰고 버리는 패로 여긴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니, 혼잣말이 왜 혼잣말인지 모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잣말이었다. 옷은 잘 처리하였느냐?”
“수락산에서 달아나다 실지로 호환 당한 놈이 일전에 하나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보았던 모양 그대로 만들어서 중턱에 널어놓았습니다.”
“그래, 잘했다. 너희는 우리에게 은 받은 무지렁이들이 범 보았다고 제대로 증언하는가 살피도록 해라. 나중에 한양에서 보자.”
“예, 형님.”
그렇게 아랫것들은 산길 따라 내려가고, 창귀조차 부럽다 아니할 얕은 무덤 하나와 두리손만 남았다.
당상관을 죽여 묻을 수 있는 도적이 이 땅에 얼마나 있었을까.
이 소식이 전해지면 남치근은 놀랄 것이다. 그저 이량 곁에 붙어 있는 자인줄 알았던 두리손이가 제법 수완 있는 사람임을, 그리고 여차하면 곽순수의 죽음이 저의 잘못으로 둔갑하여 제 등짝에 붙을 수도 있음을 깨달으리라.
그러나 그간 자신이 행하던 일, 군관들 모아 파벌 아닌 파벌 만드는 일이 모두 두리손의 은근한 부추김과 안배에 의한 것임은 꿈에도 알지 못할 테다. 오히려 그런 재주 지닌 자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을 심산으로, 더욱 열심히 늪에 빠져들 것이다.
“제법 대단하지 않은가?”
저 하늘에 임꺽정이 있는 것마냥 하는 혼잣말. 그러나 전혀 통쾌하지도, 무언가 이룬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서쪽 하늘에서 ‘그래, 네놈이 별 수 있겠느냐’ 하는 비웃음만 들려오는 듯.
‘내 무엇을 더 하여야 네놈의 그 비웃음을 앙갚음해줄 수 있겠는가.’
수락산에서 치욕을 당한 이후로 일 년. 고작해야 수락산에 숨어 심통원과 이량을 이용해먹던 데서 벗어나, 팔도에 손길을 뻗쳤다. 민주당의 그 ‘지상여장군(地上女將軍)’ 이씨 부인이나 이지함 같은 자들 역시, 뭔가 벌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한편으로는 한전법 앞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손해란 손해는 다 본 지방 군현의 사족들이 그에게 붙었다. 그 집안의 서얼들은, 자신들이 집안을 되살리고 문중의 주인이 되겠노라며 좋다고 전답을 처분해가며 각지에 세워지는 ‘시사(詩社)’에 이름을 올렸다.
금상과 조정의 재상들이 저들의 뜻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으면서, 소위 공회에서 떠드는 것은 들어준다며 불만 품는 거족 벌열의 사람들은 심통원과 이량을 따라 하나로 뭉쳤다.
또 다른 쪽에는 남치근을 내세워 모으고 있는 각지 관군의 대소 군관들이 있었다. 조정에서 군제를 바꾸어 병비를 튼실히 하면 할수록 그들의 세는 더 불어날 터.
그리고 두리손이 직접 손발로 부리고자 문객들 대신 모은 자들. 바뀌는 세상 속에서 설 자리 얻지 못하고 도태되는 자들. 싸구려 도사, 땡중, 세상 원망하는 자칭 선비 등등까지.
모두 두리손 한 사람이 있어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리손 자신을 보고 뭉쳤다기보다는, 그저 욕심. 저들 손에도 힘이 있으니 장차 나라 한 번 뒤엎어 민주당 도적놈들 누리는 것 같은 권세 얻고자 하는 작자들뿐.
두리손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재간 되는 사람 누구를 앉혀두어도 능히 모을 수 있는 패거리였다.
“그 임꺽정이가 그것을 모르고서 나를 내버려뒀을 리 없겠지. 이대로라면 필패일 뿐이다.
하면 내가 어찌해야 놈의 허를 찌르고, 나아가 놈을 꺾을 수 있겠는가? 수락산에서의 그날, 나를 놓아준 것을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허나 사람을 아무리 죽인들, 또 함께하는 무리를 아무리 많이 모은들, 그리하여 임꺽정과 민주당을 무너뜨려 먼지로 만든다 한들, 결코 그날 받은 비웃음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온갖 잡다한 패거리를 모아 민주당과 세를 겨룰 수는 있겠지만, 과연 임꺽정이 자신이 이리할 줄 모르고서 저를 놓아줬을까? 오히려 이 기회에 저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단칼에 쓸어 없애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놈을 넘어서야 한다. 그놈 하나를 죽이고 그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그와 그 패거리가 바라는 것, 그들이 노리는 큰 뜻, 그것을 찾아 거꾸로 뒤집어버려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임꺽정을 거꾸러뜨리는 것이 어려운가? 그가 스스로 높이 오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는 바를 향해, 눈앞의 모든 것을 뒤엎고 파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뿐.
임금을 인질로 잡았음에도 기한이 지나니 놓아주었고, 나중에는 기어이 그의 벗이 되었다. 조정에 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오르거나 저의 곁 사람을 세우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정은 사림에게 맡기고 엉뚱한 관아만 더 만들 뿐이었다.
높이 오른 자는 그가 밟고 선 기둥을 찍어 넘어뜨릴 수 있지만, 앞으로 달려나가는 자는 미리 그 길목을 찾아 막지 않는 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법이었다.
나지막한 혼잣말에는 메아리도 따르지 않고, 외로운 소나무도, 얕은 무덤도 대꾸하지 않았다. 허나 침묵 속에서 두리손은 이러한 답변을 들었다.
“그렇다면 임가 놈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간은 임꺽정 그자가 제멋대로 난행할 뿐이라 생각했다. 두리손은 그것을 불의라 여기며, 그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불살라, 잿더미 위에서 영웅 대접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임꺽정을 꺾지도 못할 것이요, 거기까지 내 아래 모인 잡것들을 이끌고 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빠져 있었을까. 아무리 찾아도 머릿속에서는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고, 시시각각 닭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마침내 모습을 다 드러낸 해는 물안부 마을을 밝히고, 마침내 간밤의 일이 알려졌는지 제법 소란이 일어나는 듯했다.
범이 온정에 몸 담군 당상관을 물어갔다 하면, 자연히 어느 쪽으로 물고 갔느냐 물음이 나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곽순수의 흔적을 찾는 이들이 조만간 여럿 달려오리라.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두리손의 발길은 한양 쪽이 아닌, 그 반대편 문경 쪽으로 향했다.
경주 고향으로 낙향한 이언적을 비롯하여, 이황과 조식 등의 근래 행보에 실망하거나 분노하여 낙향한 옛 사림 선비들이 영남에는 제법 있었다.
말투를 고치고 모습을 다듬은 뒤, 근래 세상을 다시 바로잡을 방도를 구하는 유학(幼學)이 가르침을 청한다 하면 그 누가 선뜻 사양하겠는가?
그저 욕심을 차리고자 모인 자들, 그것 외에는 결코 접점 없는 자들을 하나의 목표 향하여 끌고 나가려면, 뭔가를 내세워야 했다. 더 나아가, 그의 아래에 들어온 줄도 모르는 아랫사람들 외의 다른 이들까지 모두 끌어들일 수 있을 법한 그럴듯한 대의를 찾아야 했다.
임꺽정이 그러하였듯.
올해 조정은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이제 그 제도가 마침내 확정된 한전법을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에 먼저 시행하고, 그 뒤에 나머지 도로 확대하려 하였는데, 나머지 각 도에서 공회 통해 청원하기를, 저들 도에도 하루 빨리 한전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한 해라도 빨리 저의 논밭 얻을 수 있게 해달라 한 것이다.
그에 이어, 하필 올해 흉년이 들어, 작당하고 모내기를 한 삼남의 논들이 큰 해를 입고, 미곡의 값이 크게 오르는 일이 있었다.
널리 장시가 열린 덕에 모두 다 같이 굶주리는 일은 없겠지만, 대신 온 나라가 이제 은으로 굴러가게 되어은즉 지닌바 은이 많은 이들은 평년 또는 그 이상으로 배를 불리고, 시세를 타지 못한 이들은 상학의 법도에 따라 마구 오른 곡가(穀價)를 차마 대지 못해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 여느 미관말직 관원도 아니요, 정3품 동래부사가 호환을 당하였으니 이는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수령이 도적에게 봉변하는 것조차 예삿일이었던 몇 년 전에도, 당상관이 호환을 당하여 그 시신조차 수습치 못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주사도감 도제조 남치근이 상소를 올리기를, 이는 첫째로 근래 민풍(民風)이 어지러워져 아무 산속이나 함부로 개간하고 스스로 지킬 방도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로 병비가 아직도 부실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조정의 공론도 그 말이 옳다 여겼으므로, 곧 남치근의 상소를 취하여 내륙 고을의 방비를 늘리고, 이익에 눈먼 백성들이 스스로 호환이나 각종 재변을 당할 지경을 초래하지는 않는지 수령방백들이 휘하 군사를 내어 감시토록 하였다.
곽순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이들은, 그의 가족 몇몇, 그리고 그 사람 그래도 착했다며 함께 애도해주는 흑의군 고참 몇몇이 전부였다.
--- *** ---
작중 등장하는 안부역 인근의 온천은 곧 수안보 온천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안부역(발음 변화로 ‘안보’라고도 읽었던 듯합니다)과 그 북쪽의 무두리를 잇는 큰길의 애매한 중간쯤에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역이 있는 쪽을 큰안보(大安堡), 온천이 있는 쪽을 물안보(水安堡)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안보 온천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고, 세조 시기만 해도 권신 권람이 이용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시설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기록이 끊기는데, <용재총화>에는 ‘큰길가에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는 정도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모종의 이유로 인기가 쇠하고 시설 관리가 미흡해졌던 듯합니다.
이후 19세기 초에는 다시 질병 치료에 효능이 있는 샘으로 유명해져 외지인들이 드나들게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일본 온천업자들에 의해 근대적인 온천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온천이 1885년 개업한 이후 제대로 된 목욕탕이 완비된 것은 한참 뒤인 1916년의 일이라는 것을 보면, 1880년대 수안보온천의 명성은 1980년대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쳤던 듯합니다.
곽순수가 동래부사직과 함께 받은 절충장군 자리는 작중 서술된 대로 무산계 중 으뜸으로,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갈 경우 문산계(文散階)에 따라 벼슬을 내렸습니다. 원 역사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한 충무공 이순신에게 이후 가선대부, 정헌대부 같은 문산계 산직이 제수된 것도 이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