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48화 (148/259)

44. 와인, 마차, 테라스 (3)

조선국 도적들 사이에 전하는 여러 비책(秘策) 중 하나로 물귀신 둔갑술이 있었다.

예컨대 그냥 추포를 당하는 게 아니라 무슨 역적질에 연루되어 붙잡히게 된다면, 잘 풀려보았자 망나니 상봉이요 못 풀리면 소 다섯 마리와 대면할 터였다. 이왕 죽게 된 것, 평소 고깝던 양반님네 하나라도 더 붙잡고 저승길 동무로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고신(拷訊, 고문)을 당할 성싶으면 곧장 아무개 대감이 종친 모모군(某某君)을 추대하려 역당을 모았노라고 아무렇게나 나불댄 다음, 고개 빳빳하던 작자들이 굴비두름 되어 의금부로 향하는 것을 구경하며 며칠이나마 늘어난 명줄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이 유서 깊은 계책을 떠올린 꺽정이가 이탁오와 공모하여 흉흉한 술수를 부렸으니, 선인(先人)의 지혜를 알차게 이용하는 셈이었다.

비록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 같은 대귀족들이 음험한 역모보다는 당당한 반역을 선호하던 선조들에 비해 권모술수를 조금 더 다룰 수 있게 되었다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밑바닥 도적 출신의 흉계는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터무니없는 요구임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박박 갈며 레스코 관으로 찾아갈 수밖에.

“거 늦게도 오시는구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근면함을 덕으로 삼아야 하는 법이거늘.”

‘동방의 우환’이 이죽대며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고서는, 저의 앞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두 장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말했다.

“자, 두 사람 모두 서명하시오.”

종이 위에는, 멋들어진 초서(草書)로 - 알아보기에는 아주 고역이었다 - 저들의 ‘죄상’을 고백하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내용은 같으니 옆의 사람 것 훔쳐볼 것도 없소. 그냥 맨 아래에 두 분 이름만 써넣으면 된다오.”

“지금 우리에게 거짓 자백을 요구하는 것이오?”

기즈 공작이 먼저 발끈하였다. 허나 곧 프랑스 최고의 실권자가 될 예정인 기즈 공작이라지만, 상대는 대명천자조차 발 밑에 둔 바 있는 작자였으니 말만으로는 아무리 물어뜯으려 해도 이빨조차 듣지 않았다.

“이게 다 나라를 위한 일이오. 나라의 은혜를 받아 명문거족 반열에 들었으면, 때로는 이렇게 누명도 써주고 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그대들이 대비 마님의 수렴청정을 받아들이고, 뒤에서 군소리 따로 안 한다면 이 종잇장이 세상의 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오.”

반대로 그들이 ‘군소리’를 한다면, 저 종잇장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즈 가문이 선을 넘는다 싶으면, 곧 자신이 동방의 사절을 사주하여 앙리 2세를 해코지했다는 ‘자백’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요, 부르봉 집안은 자신들이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이 기회를 차마 놓치지 못하고 카트린과 어린 국왕의 손을 잡으려 할 것이다.

물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두 ‘자백서’가 보관될 금고 열쇠는 바로 카트린의 손에 쥐어질 것이었으므로.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끝내 참지 못하고 기즈 공작이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허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동양인의 뻔뻔한 얼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무사할 줄 알고말고. 내가 하는 짓이 얄미우면 뭐 어쩔 것이오? 난 그냥 배 타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면 그만이라오. 하다못해 저 포르투갈 사람들처럼 천하 방방곡곡에 저들 깃발 세워두고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 나라는 그것도 못하고 있지 않소?”

조금 더 차분한 성품을 지닌 덕에, 저의 정적이자 이 자리에서는 졸지에 우군이 된 기즈 공작보다는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던 부르봉 집안의 콩데 대공이 반론을 꺼냈다.

“비록 우리 두 집안이 앙숙이라고는 하지만, 신의 은총을 받아 대귀족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으며, 스스로 프랑스인이라 밝히는 데 하등 부끄러움이 없소이다.”

그 말대로, 카트린 왕비가 동양인 코우지오니스를 꼬드겨, 그로 하여금 국왕을 시해하게 하였노라고 두 사람이 함께 ‘폭로’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메디치 장사꾼’ 카트린을 좋게 보는 귀족들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이 또한 족히 가능한 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헌데 그렇게 대비 마님을 몰아내면 그 다음엔 뭘 하실 게요? 이왕 합심할 생각이라면, 굳이 대비 마님이나 어린 임금에 대항할 것도 없이 그냥 화해하고 나라의 신하로서 지내면 그만이지 않소? 그게 대비 마님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오.”

“우리 두 사람은 그대와 달리 결백하오. 이 자리에서 거짓 자백을 하기를 결연코 거부한다면 그대가 우리에게 무얼 할 수 있겠소?”

“내 죄를 묻기 위해 뭔 모임을 연다고 하던데, 그 자리에서 다 밝혀버리면 그만이지.”

‘밝힌다’ 함은 곧 터무니없는 거짓을 늘어놓겠다는 뜻일 터였다. 신앙을 두고 타협의 여지 없이 싸우는 듯하던 두 귀족 집안이, 사실은 그저 왕좌를 위해 공모하는 사이였다고 한다면, 어느 쪽에서든 좋은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두 가문과 더불어 프랑스 왕국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요, 눈앞의 동양인은 나몰라라 하며 저의 갈 길을 마저 갈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오랜 적들과 어쩌면 새로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탈리아 연맹만 미소를 짓게 될 터.

“젠장할! 좋소! 내 이놈의 종잇장에 서명을 하겠소이다! 나의 결백은 신께서 아시고 모든 프랑스가 알 터이니!”

결국 분기를 견디다 못한 기즈 공작이 먼저 서명을 하고, 뒤이어 콩데 대공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받아들이고는 서명을 남겼다.

“오늘 당한 모욕을 우리가 잊으리라 생각하지는 마시오. 비록 지금은 그대의 흉악함을 가볍게 여겼다가 이렇게 당하게 되었지만, 반드시 베푼 대로 돌아오게 될 터이니.”

“업보라! 불자들이 할 만한 말을 하시는구려. 역시 천주교라는 것도 우리네 동방에 있는 불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오. 아니면 그대가 소위 말하는 이단이거나.”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만하면 말을 섞지 않는 쪽이 더 낫다는 것을 두 귀족 모두 알 수 있었다. 결국 날카롭게 째려보기만 할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꺽정이의 두터운 낯가죽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두 장의 자백서가 꺽정이 손에서 카트린에게 넘어가고, 파리의 분위기는 며칠 전에 비하면 제법 차분해지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고, 그간의 뒤숭숭함을 주도하던 이들 역시 눈치껏 자제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그 대신, 새로 즉위할 어린 왕에 대한 조용한 기대와 불안 - 주로 후자가 우세했다 - 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그거 아십니까? 여기 프랑스에 용한 점쟁이가 하나 있는데, 그이가 글쎄, 임 당수 손에 국왕 봉변하는 것을 점 쳐서 미리 알았다지 뭡니까.”

레스코 관을 저의 안방처럼 쓰면서,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하고서는 과자 - 마카롱인가 마크롱인가 하는 이름이었는데 제법 맛이 좋았다 - 따위를 우적거리던 꺽정이를 찾아온 이탁오가 말했다.

“허. 아닌 게 아니라 용하군그래. 이 동네에는 <주역> 보는 사람도 없고, 산통 만지작거리는 이도 없던데.”

“대신 천문을 읽어 길흉을 점치는 법도는 있더군요. 떠나기 전에 그 노 아무개라는 서생에게 글 한 통 부칠 생각입니다.”

이탁오가 스리슬쩍 꺽정이 옆에 앉아, 그 전병인지 경단인지 싶은 것을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주방을 왔다갔다 하며 꺽정이에게 그 주전부리 가져다주고, 그러면서 또 저와 흑의군 것도 야무지게 챙기곤 하던 도키치로는 저의 몫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무슨 글 말이오?”

“이왕 이번 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자신의 점성술 비법이 바로 <주역>이고, 여기 나온 대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해석하니 길흉이 딱 들어맞더라. 이렇게 주변에 떠들어달라 청하렵니다.”

“맨입으로?”

“소생이 그리 야박해 보입니까, 당수. 당연히 대가도 제시했지요. 나중에 교역로가 트이게 되면 그이 앞으로 <주역> 옮긴 것을 보내주겠노라 약조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또 자기 이름으로 팔아서 제법 이득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비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오?”

“공부자께서도 평생 <주역> 공부를 원하시지 않았습니까. 호학(好學)하는 이들이 이곳 서방에도 늘어난다면, 좋다고 껄껄 웃으실지언정 노엽게는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선비라는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차라리 사서삼경을 다 가져와 팔지 그러시오? 그러고 보면 옛날에 의민당 벌이 중에도 서책이 제법 재미가 좋았더랬지.”

“하, 어째 생각하는 게 비슷합니다. 실은 사흘 전에 그 벌열가 사람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해주었더니 아주 좋아하며 듣습디다. 우리는 좋은 장사를 하고, 저쪽은 좋은 깨달음을 얻고.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 못마땅한 기색 사방으로 드러내며 레스코 관을 나서는 기즈 공작과 콩데 대공에게 이탁오가 다가가서는,

‘임금의 정사 어질지 못하다고 싫은 소리 하고 싶다면, 굳이 하늘의 도를 논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던 것이다.

그가 파악하기로, 진심으로 소위 구신당(신교)니 수구당(구교)이니 하며 목숨 걸고 싸우려는 자는 적고, 대개는 그저 곁에 있는 자를 괴롭히고 그의 지닌바 권세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명분 내세우는 자들이 더 많았다.

허나 정작 저의 욕심을 위하여 믿음을 운운하는 자들조차, 스스로 욕심 때문에 그러함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공맹의 도를 논하면서 저의 잇속만 차리는 공허하고도 우활한 대명 선비들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솔직하면, 오히려 이익을 위하여 서로 힘을 합하고 뜻을 같이할 수도 있는 법이련만, 그러지 못하고 계속 명분을 덧붙이고 그 위에 다시 명분을 덧붙이므로 삶보다 죽음을, 대화보다 다툼을 원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탁오는 어찌하면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인도(人道)를 논할 수 있는지, 그것을 두 사람에게 알려주고자 하였다. 우악스러운 임 당수조차 이 나라에 자신이 일으킨 어지러움을 깨닫고, 국론 하나로 합치는 데 보탬 되고자 하는데, 글 배운 선비인 자신이 가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별 마음 없는) 두 사람을 붙잡고 몇 구절 발췌하여 일러주었는데, 다들 크게 난처해하며 참 좋은 이야기지만 지금은 들을 겨를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라 둘러대었다.

(그러나 한 번 들은 것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기즈 공작과 콩데 대공 두 사람이 암만 귀를 씻는다 한들, 국왕 살해(regicide)와 일반적인 살인(meutre)의 분별에 관한 멩츠(맹자)의 논변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탁오는 두 사람을 콕 짚어 경서의 번역본을 헌정할 생각이었다. 에우로파에 남은 몇 달 동안 틈 나는 대로 끄적이고, 셀림이 데려온 투르크 관료들까지 동원하여 베끼고 다듬게끔 하면 못 이룰 것도 없었다.

어쨌든 분명 ‘들을 겨를이 없어’ 못 들을 뿐, 듣기 싫다고 하지는 않았던 두 사람이었다. 설령 그때 가서 딴소리 한다 한들, 식언(食言)은 예(禮)가 아니요, 공자께서도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 하셨으니, 가볍게 무시하면 그만일 테다. 오히려 두 대귀족이 곤란하게 여기는 책이라 하면 더욱 불티나게 팔리지 않겠는가.

“그 노씨 서생에게 그 원고를 보내어, 장차 수익을 나누자 할 생각입니다. 용한 점쟁이로 명성을 떨쳤다 하니 암만 거족 벌열이라 한들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또 과자 한 점을 더 집어먹는 이탁오였다. 그것을 안타깝게 보기만 하던 도키치로는, 이럴 게 아니라 아예 과자 만드는 장인을 하나 모시고 돌아가면 제법 좋은 장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열에 아홉은 궁중의 숙수일 텐데, 그렇다면 임 당수가 과부로 만들어버린 대비께 청해야 할 것이다. 임 당수를 잘 부추기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도키치로가 홀로 고민하던 차, 복도가 요란해지더니 곧 카트린 전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났다.

도키치로가 과자 부스러기를 치우고, 이어서 과자 쟁반도 슥 숨기자마자 - 괜히 책 잡힐 여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카트린이 방에 들어왔다.

단단히 굳은 채, 쉽게 속마음 드러내지 않는 그 표정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였으나, 밝은 햇빛 덕분인지 속에 삭이고 있는 슬픔과 노여움이 아주 털끝만큼은 누그러진 듯하였다.

“그대가 이토록 음모에 능할 줄은 몰랐소.”

“하하, 과찬의 말씀이시오.”

은근히 비꼬는 말을 대놓고 칭찬으로 들으니 말 꺼낸 카트린만 살짝 민망해졌다. 더 비아냥거리거나 탓하려 했다가는 자신의 복장만 더 뒤집힐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본전도 못 건질 언쟁을 하는 대신 본론을 바로 꺼내었다.

“그대는 나와 우리 나라에 공을 세워주었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소이다.”

남편이 횡사하는 것을 눈앞에서 본 여인으로서 하는 말이자, 이 기회에 이 동방의 사절이라는 유용한 손패를 최대한 활용코자 하는 왕비로서의 말이기도 했다.

“기즈 집안과 부르봉 집안에 동시에 목줄을 채운 것은 물론 그대의 공이오. 허나 그 방법이 방법이었던 만큼, 원한도 남았소.

그들은 결코 나를, 그리고 내가 바라는 교회와 위그노 사이의 화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든 이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이익 취할 방도를 얻고자 할 것이외다.”

국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것은 결코 협박 한두 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에스파냐는 반드시 기즈 가문과 위그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할 것이요, 설령 외세의 개입이 없더라도 둘 사이의 평화는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프랑스라는 나라는 한동안은 반으로 쪼개지고 부채 문제로 쇠약해진 동쪽의 합스부르크와 서쪽의 압스부르고 상대로도 힘을 쓰기 어려울 것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려 애쓰기만 하다가 결국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지금 카트린 자신에게 쥐어진 수를 써서 자기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과가 따르는 방책을 마음대로 취하였으니, 마땅히 책임질 방편도 고심하고 있었으리라 믿소만. 이렇게 세 분이 모여서 무언가를 긴히 논의하고 계셨던 것도 혹 이 때문은 아닌가 싶구려.”

카트린이 넌지시 압박하는 말을 꺼내며 ‘세 분’이라 지칭하니, 그제야 꺽정이와 이탁오 둘의 눈이 저들 곁에 함께 앉아있는 도키치로에게 가서 닿았다. 마카롱을 치우다 보니 정작 저는 어딘가 구석으로 빠질 기회를 놓쳐, 엉거주춤 꺽정이 옆 의자에 앉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디 제게는 눈길이 오지 않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반대로 저에게 임 당수와 탁오 선생, 그리고 일국의 대비의 시선까지 닿게 되었으므로, 절로 그 맨들맨들한 이마에 땀이 서렸다.

꺽정이야 별 생각 없었지만, 지금껏 조용히 뒤에서 할 일만 하던 도키치로로서는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저 홀로 식은땀만 흘리다가, 질끈 눈 한 번 감았다 뜨고서는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도키치로 속마음 알 길 없는 꺽정이는, 전혀 고민 없이 그러라 승낙하였다. 이탁오 입을 거쳐 그 말 전해지자, 카트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비슷한 상황이 저의 고향이나 그 이웃 나라(쿠니)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무, 물론 이 나라 프랑스는 제 고향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크고 강대한 나라지만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오와리 그 작은 구석을 천하의 전부로 알고 살던 도키치로였지만,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종종 아시가루(足輕, 하급 병사)나 부마루(夫丸, 인부)로 차출되어 이곳저곳 싸움터를 오갔기 때문에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얼추 들어 아는 것이 있었다.

그저 혼자 생각하고 끝날 줄 알았던 마음속 궁리를,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 그래도 한 집안 안에 여러 분파가 갈려서 다투고, 하나로 모였다가도 다시 갈라져서 더욱 거세게 싸우는 것이 비슷하다 싶어 감히 이렇게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또 한 차례 말이 옮겨지고, 눈앞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동양인 - 이제 보니 생긴 것과 달리 제법 젊은 듯하였다 - 을 유심히 바라보던 카트린이 마침내 물었다.

“도키치로라 합니다.”

“그래, 도키치로 경. 그대의 생각을 말해보라.”

“감사합니다!”

예상도 못한 ‘경’이라는 말이, 도키치로 심금을 울렸다. 제법 자신감 붙은 말투로, 이미 꺼낸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갈라져 싸우던 집안이 겨우 하나로 뭉치게 되면, 보통은 바로 온 힘을 모아 이웃 나라로 쳐들어가곤 했습니다. 공동의 적을 만들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여러 분파 안에 남아 있는 힘을 소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오, 그럴듯한데?”

별 기대 없이 듣던 임 당수가 찬동해주니, 마침내 도키치로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들어보시오, 마님. 실은 우리네가 여기 서방까지 온 데는 잇속 차리려는 심사가 있었다오.”

이어서 이탁오와 꺽정이가, 그들의 심원한 계책, 그러니까 말라카 동쪽에서 포르투갈 쫓아내고 장사 독점하려는 그 대계(大計)에 대해 털어놓았다.

“··· 그러니 그렇게 포르투갈 놈들이 쫓겨나서 힘을 잃게 되면, 그 자리에 누군가 들어오게 되지 않겠소? 동쪽에서야 우리가 그 자리를 채우겠지만, 나머지 땅들, 그러니까 아프리카니 아메리카니 하는 곳에는 별 관심은 없소.”

카를로스 앞에서 레가스피가 고한 바에 따르면 류큐 남쪽에서 바로 아메리카 서쪽까지 가는 항로도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말 들은 꺽정이는, 어쩌면 저들도 그쪽 어딘가에 그럴듯한 땅덩이 한 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꺽정이었지만, 거기까지 카트린에게 말해줄 의리까지는 없었다.

“내가 천하의 지도를 보니, 이곳 프랑스라는 나라는 지중해와도 면했지만 서쪽 큰 바다(大西洋)와도 맞닿았더이다. 그러면 그곳 통하여 포르투갈이 차지한 서쪽 땅들을 마님 나라 프랑스가 대신 차지할 수도 있지 않겠소?”

고작 마카롱 과자 부스러기 숨기다가 조선국 민주당과 프랑스가 천하를 반분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으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나라가 교황청 중재를 받아 지구를 반으로 나눈 것보다도 더욱 사소한 이유에서 말미암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구색 당기는 제안이기는 했으므로, 카트린도 진지하게 이를 숙고하게 되었다.

신대륙에서 막대한 부가 나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 역시 그간 가만 있지는 않아, 탐험가들을 후원하고 신대륙 곳곳에 거점 될 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카트린의 시부 프랑수아의 후원을 받은 이탈리아의 한 탐험가가, 아메리카 북쪽에서 제법 훌륭한 거점이 될 만한 섬을 발견하고 ‘누벨 앙굴렘(Nouvelle Angouleme, 뉴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니콜라 뒤랑(Nicholas Durand) 제독이 브라질나무 확보를 위한 거점으로 남반구의 프랑스(France Antartique, 리우데자네이루)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했다.

만약 눈앞의 동양인들 말마따나, 포르투갈의 재정을 지탱해준 동방무역이 끊기게 된다면, 그 빈틈을 프랑스가 노리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로군. 허나 나쁘지 않은 계책이라 판단되는구려. 기즈와 부르봉, 두 집안의 힘을 지구 곳곳에 흩뿌린다··· 진지하게 숙고해보도록 하겠소.

다만 내가 본디 그대들에게 청하고자 한 바가 따로 있었소이다. 코우지오니스 그대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오.”

동방 사절단에게 죄를 묻지 않고 프랑스를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대신 한 가지 더 일을 맡기려던 카트린이었다. 마침 그들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하였으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양측의 이해가 맞물리게 된 셈이었다.

“에스파냐와 저지대를 새로이 다스리게 된 필리프(펠리페 2세)에게는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계승권이 있소. 지금의 국왕 장(주앙)은 연로한 데다가, 후사는 거의 끊겨 손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필리프는 포르투갈을 노릴 것이오. 포르투갈의 군사력은 땅 위에서는 에스파냐에 비할 바가 되지 않으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성공할 수 있겠지. 그리 되면 동방의 그대들은 포르투갈뿐 아니라 에스파냐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소이다. 그러니 미리 그 힘을 빼놓을 방도를 강구해야 하지 않겠소?“

“힘을 빼놓는다? 우선 마님 말씀 마저 듣고 생각해보겠소.“

“앙글르테르(잉글랜드)의 정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이탁오가 꺽정이 대신 바로 답했다.

“에스파냐에서 왕위를 이은 펠리페의 아내가 다스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마리(메리) 그이가 부군을 사모하는 마음은 잘 알려져 있소.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었음에도 남편으로부터는 냉대만을 받고 있을 뿐이라지.

허나 내게, 그리고 프랑스에 더 중요한 점은, 두 사람 사이에서 후계자를 얻을 경우 그 후계자에게 앙글르테르뿐 아니라 저지대의 상속권이 넘어간다는 사실이오.

물론 앙글르테르는 에스파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적이지만, 강적과 그의 하수인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대등한 적 둘을 상대하는 것이 우리 프랑스에게는 더 유리한 판세라 할 수 있소. 그리고 이탈리아에 이어 저지대까지 상실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에스파냐는 두 날개가 모두 꺾이는 셈이지.“

이 자리에 이황이나 이이, 하다못해 이지함이라도 있었더라면 ‘군왕의 일을 인신(人臣, 남의 신하)이 어찌 논할 수 있으며, 남녀 간의 일을 외간 사람이 어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답이 나왔겠지만, 여기 있는 이씨 선비는 바로 이탁오였으므로, 거리낌 없이 그 말을 꺽정이에게 옮겨줄 뿐이었다.

“내가 필리프인가 펠리페인가 하는 그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작정하고 안사람은 피해 다니겠소. 마침 나라도 다르겠다, 갖은 수를 써서 합방만은 면하려 할 듯한데.”

“그대 말대로요.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국익 때문인지, 마리는 혼사를 치르고 지난 세 해 동안 필리프의 아이를 가지고자 노력해 왔소. 허나 회임했다는 소식이 두 번이나 전해졌지만, 두 번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지.

하지만 에소프(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늑대와 목동 이야기처럼, 거짓말도 하다 보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 않겠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아이를 구해와 자신의 아이로 속일 수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여느 여염집에서 아이 데려다 기르는 얘기도 아니요, 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지니는 후계자 이야기였다.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계책에, 꺽정이와 이탁오도 할 말을 잠시나마 잃었다.

“내 그대에게 마리 여왕 앞으로 가는 편지 한 통을 써서 주겠소. 바라건대 파리를 떠나면 바로 칼레(Calais)로 향해 주시오. 그곳에서 배를 타면 바로 런던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임금 한 사람을 죽인 꺽정이가, 이번에는 새로 임금 하나를 만드는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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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에 따르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과자 마카롱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피렌체에서 함께 데려온 요리사들을 통해 프랑스 궁중 디저트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의 마카롱은 현재와는 매우 다른 형태였지만, 1617년판 영국 디저트 요리책에 ‘프랑스 마카론(Macaroone)’ 조리법이 등장할 만큼 근세 유럽에 널리 퍼진 듯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형태의 마카롱이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인 18세기 말엽이었다고 합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어떻게든 신교와 구교 세력의 화해를 이끌어내려 노력하였고, 이를 위해 신교와 구교 아이들이 함께 파리 시내를 행진하게 하거나, 대중 앞에서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수장들이 화해의 키스(!)를 나누게 하는 등 각종 의례와 행사를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약 반 세기 가량 내전에 준하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영국이나 신성로마제국에 비해 비교적 빠르게 겪어야 할 진통을 모두 겪고 유럽 최강국으로 도약하는 근원이 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요.

위그노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가 놓치게 된 것 중 하나는 바로 식민지 경쟁에서의 우위였습니다. 작중 언급된 것처럼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 거점을 마련하려 노력하였고, 당시 염색약 원료를 비롯해 여러 용도로 쓰였던 귀중한 브라질나무 - 브라질 국명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 산지인 남미에 실제로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일례로 ‘남극의 프랑스’ 식민지도 정착민들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내분을 겪던 중 포르투갈 함대에 허무하게 함락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한 세대 뒤의 후발주자인 네덜란드, 그리고 잉글랜드와 경합할 수밖에 없었지요.

말미에 카트린이 언급하는 마리, 즉 메리 여왕의 상상임신 사건은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일어났고, 메리 여왕이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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