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60화 (160/259)

48. 황금 새장 (2)

이름을 울루츠 알리(Uluç Ali)라 하는 해적 젊은이는, 알고 보니 그렇게 젊지도 않았고, 단순한 해적 나부랭이가 아니라 제법 잔뼈 굵은 선장이었다.

내심 그가 저의 또래쯤 되리라 여겼던 도키치로는, 울루츠 알리가 임 당수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저의 지위가 밝혀지면 몸값 흥정도 하기 전 어디 끌려가 사형당할까봐, 그사이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주름진 곳에는 슬쩍 검댕을 묻혔다던가.

그러나 그런 사실에 충격 받는 것은 도키치로 혼자뿐이었고, 나머지 일행은 울루츠 알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놀랄 뿐이었다.

“바예지트, 그 녀석이 이런 수까지 쓸 줄이야···”

“때마침 사모스 섬에서 관리 노릇하는 것을 때려치우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던 나는, 막 좋은 벌이를 찾아 알 자자이르(알제)의 거리를 전전하고 있었소. 그러던 중, 단순한 습격 의뢰라기에는 영 수상쩍은 제안을 받게 되었소.”

소년 시절, 나폴리 왕국의 어느 바닷가 어촌에 살다가 납치당한 울루츠 알리는, 그 이후로 뛰어난 항해술과 대담함 덕에 개종을 조건으로 자유를 얻고 나중에는 아예 배 한 척을 거느리는 선장까지 올랐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해적의 습격은 자신의 경쟁자나 적을 제거하는 데 있어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워낙 해적 많은 것으로 유명한 지중해다 보니 그 누구도 이를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배 위에 탄 사람을 사라지게 만들든, 아니면 배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든, 보수는 배 위에 실린 재물로 스스로 해결되니 이 또한 간편하였다.

그러나 울루츠 알리가 받은 제안은, 그러한 습격 의뢰 치곤 무언가 이상하였다.

“동방 사절단뿐 아니라 셰자데까지 타고 있는 배를 공격하라니, 말타 기사단 놈들 같은 미치광이들이 아닌 이상에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의뢰였지. 설령 성공하더라도 그 이후에 입막음을 당할 공산도 컸소. 그러니 뒷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중간에 잠시 딴길로 새어, 해적 노릇을 관두고 관직을 맡다가 돌아오는 바람에 아직 선장 정도로 머물고 있었지만, 울루츠 알리는 백해(지중해)의 모든 해군을 거느릴 권한과 알 자자이르의 베일레르베이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전설적인 해적 투르구트 레이스(Turgut Reis)와도 안면이 있을 만큼 제법 연줄이 좋았다.

그러므로 몇 번 수소문한 결과, 의뢰인이 누구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예지트?”

셀림의 물음은 탄식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셰자데 바예지트. 코스탄티니예의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해군을 동원하는 대신 몰래 해적들을 끌어들여야 할 사람이라면, 온 나라를 통틀어 딱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습격할 때는 언제고, 셀림이 앞으로 나서자 곧장 고개 숙이며 공손한 말투로 답변하는 울루츠 알리였다.

저를 대할 때와 셀림 대할 때가 다른 것을 고깝게 여긴 꺽정이가 몇 대 후려치니, 마침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예로써 대하게 되었다.

“그러면 증좌가 있느냐? 바예지트 그놈이 저의 형을 바다 위에서 쳐죽이라 하였다는 증좌 말이다.”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었습니다. 거기서 더 알려 했다가는 제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거기서 더 파헤치지 않고 대신 저만큼 대담한 다른 선장들을 모으는 데만 열중하기로 했지요.

그 수상쩍은 제의를 받은 이가 저 혼자만은 아니었기에, 금방 동료를 구하여 작은 선단 하나를 꾸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이 꼴이 났지만요.”

“대체 그가 무엇을 약속했기에, 아버지께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이런 짓에 나섰다는 말인가?”

“해적들에게 약속할 보상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금은보화와 번듯한 관작. 그 두 가지지요. 허나 제가 이 일에 나선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둘로 나뉘어 다투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유지요···”

시나 황제의 대리인과 그 일행이 지중해로 넘어온 이래, 소문은 그 어느 떄보다도 빨리 돌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치는 곳마다 파란이 일어났으므로, 그 파란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하고 대응하는 것이 곧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헌데, 뭔가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베르베르 해안의 해적들은, 오히려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셰자데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희는 오로지 두 믿음 사이의 다툼이 있기에 이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고, 나아가 양측이 힘을 합쳐 수에즈에 운하를 뚫기에 이른다면, 베르베르 해안의 해적들은 그날로 종말을 맞게 되겠지요.”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의 쟁패가 벌어지는 지중해. 그곳에서 언제든 사략함대가 될 수 있는 해적은 군주들에게도 쓸모가 있었다.

해적들은 군주들의 비호 하에 마음껏 바닷길 지나는 배와 해안의 마을을 노략질했고, 그곳에서 얻는 재물과 노예는 곧 함대와 요새가 되었다.

“꼭 산의 짐승이 다해야만 사냥개를 삶는 것은 아니로군요. 그저 주인이 사냥에 마음을 끊기만 해도 자연스레 그리 되는 것을.”

이탁오가 혼잣말로 평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았다.

“그러므로 저희는 다툼을 불러일으켜야 했습니다. 해적들 중 정세를 읽는 이들은 다들 이것을 알고 있었고, 저는 이번 일로 해적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을 심산이었습니다.

다들 무엇이 필요한지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앞서 일을 벌여 모두의 인망을 얻는다면 그 옛날 하이르 앗 딘(하이레딘)과 그 형제들이 누렸던 것 그 이상의 위세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숙적 에스파냐를 방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오스만 투르크의 셰자데. (본인의 의사와는 별 상관 없이) 에우로파를 가로지르며 공존과 평화의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던 그가, 구호기사단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거나 적어도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면, 지중해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 것이다.

구호기사단의 광신적인 면모는 이슬람 세계에 - 다소 과장되어 -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소문을 들은 모든 오스만 투르크의 사람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일말의 의심 없이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다. 술탄 한 사람이 진실을 꿰뚫어본다 한들, 어찌 노도를 홀로 막아세우겠는가.

“잠깐, 앞서 네놈들이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하지 않았더냐? 그건 무슨 소리냐.”

“그것이···”

껄끄러운 주제인지 잠시 뜸 들이던 울루츠 알리는, 자신이 머뭇거렸다가는 눈앞의 거인이 어떤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의 재촉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투르구트 레이스를 비롯해 사략함대에서 이름 떨친 레이스(제독)들은, 바뀐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에 맞춰나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로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은 이들, 그리고 잃을 것 없는 신참들이 거기에 동조하고 있지요.”

‘지중해에 드리운 이슬람의 칼’ 등등, 온갖 호사스러운 별칭과 그에 맞는 권세를 누리고 있는 투르구트는, 붉은 수염 하이르 앗 딘의 후계자로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수장인 동시에 이 바다 위의 오스만 함대를 모두 거느리는 제독이었다.

그러나 해군 제독으로서의 투르구트가 쉴레이만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과 달리, 해적 대두령으로서의 그의 자리는 그리 탄탄하지는 못했다.

이는 투르구트 본인의 부족함 때문은 아니요, 본래 바르바리 해적이란 족속들이 그라나다의 옛 무슬림 귀족 집안부터 이베리아에서 쫓겨난 유대인, 곳곳에서 납치당했거나 아니면 그저 에스파냐를 괴롭히며 떼돈이나 벌고픈 마음에 바다로 나선 기독교인들까지 온갖 인간군상의 잡탕이기 때문이었다.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조차 명목상의 주군으로만 모시며, 저들끼리 제멋대로 사는 작자들이 어찌 그들 중 우두머리가 있다 하여 그 말을 듣겠는가.

“물론 저희들 중 몇몇은 그렇게 제대로 된 나라의 해군으로서 계속 대접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약탈을 하지 못한다면 함대를 유지할 비용은 어디서 구할 것이며, 노잡이 노예들은 어디서 구해오겠습니까.”

그제야 발렌시아에서, 그리고 그 뒤 배 위에서 그들끼리 논의하였던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로 닥쳐왔음을 깨달은 이탁오와 셀림, 엘리자베스 입에서 크게든 작게든 한탄이 흘러나왔다.

변화라는 것은, 이득 얻는 사람이 있다면 손해 보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요, 대개 변화로 이득 보는 자보다 해코지 입는 자들이 더 가열차게 팔 걷어붙이고 나서곤 했다.

이번에야, 저들이 꺽정이의 무위에 대해 알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든 덕에 잘 풀렸다지만, 아예 뿌리를 뽑지 않는 한 동일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비단 지중해서뿐 아니라 헝가리와 인도 등, 이슬람과 기독교가 맞부딪히는 모든 곳에서, 싸움이 그치면 먹고살 길 없어지는 이들이 그 길을 다시 뚫으려 안간힘을 쓰리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이 해적들의 발목을 붙잡아준 노잡이들만 우리가 약속한 대로 풀어주고, 서둘러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가야겠소. 아버지께 얼른 이 일을 고하고, 바예지트 그놈에게서 진상을 들어야···”

아무래도 본인의 명줄이 걸려있다 보니, 그러한 고민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셀림이 나머지 사람들을 붙잡고 말했다.

“그놈이 시켰다는 증좌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저 울루츠 알리라는 자가 이미 심증이 있다 하였으니 증인으로 내세운다면··· 아니지. 후···”

꺽정이 일행과 함께 다니며 권모술수라는 것의 본질 - 즉 남의 뒤통수를 때린 뒤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 을 어느 정도 깨달은 셀림이, 자신의 말이 성급하였음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한때 투르구트의 천거를 받아 사모스 섬의 관리 노릇도 했다지만, 울루츠 알리는 고작해야 해적 선장 하나다. 그런 자가, 셰자데가 다른 셰자데를 해치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한들 바예지트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쉴레이만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에 앞서, 그것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마치 어버이에게 일러바치면 만사 해결되리라 믿는 어린아이처럼 달려온 셀림 자신을 꾸짖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실망하는 눈빛은 이미 코스탄티니예에서 많이 보았으므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좋은 수가 없겠소? 비록 이번 일로 바예지트를 추궁하기는 어렵다지만,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오.”

“좋은 수를 내긴 해야지. 이런 기회가 왔는데, 누구든 하나 붙잡고 호구 잡아서 후려쳐야 하지 않겠소?”

여전히 굴비두름 신세로 무릎 꿇고 앉아, 그저 저들의 운명 어찌 될지 두려워하며 눈만 뒤룩거리고 있는 해적들을 보며 꺽정이가 말했다.

그리고 뭔가가 꺽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왕자님 아버지께서 내게 한 말씀이 있었소. 동방에서 한 일을 여기 서방에서도 하라고 하셨지, 흐흐.”

간만에 왕직 생각이 난 꺽정이가 웃었다.

“멍청한 도적놈들에게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직접 가르쳐줍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타 섬의 구호기사단과 트라블루스(트리폴리)의 투르구트 레이스는 각각 기묘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이름난 - 또는 악명 높은 - 코우지오니스가 나타나, 기사단장인지 태수인지 얼른 나오라고 악을 쓰고, 다른 한쪽에는 셰자데 셀림이 나타나 ‘너희 두목 나오라고 해라’라는 말을 셰자데 체통에 맞는 가장 점잖은 표현으로 에둘러 전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알 자자이르(알제) 앞바다에서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꺽정이와 셀림 모두, 말썽 부리는 해적들을 제압하러 가자고만 하였을 뿐, 누구와 손을 잡는지는 생략한 관계로, 멋모르고 찾아온 구호기사단 함대와 투르구트의 해군-해적 함대가 그대로 알 자자이르 항구를 앞에 두고 상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적이다! 전방에 적 함대 출현! 악마의 하수인 드라구트(Dragut, 투르구트)의 함대다!”

“적이다! 사악한 뱀의 섬(말타)에서 기어나온 구호기사단이다!”

한쪽에서는 상냥하게 말과 주먹으로 함대를 이끌고 온 기사단의 라 발레트를 꺽정이가 타이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셀림이 다시 투르구트를 불러, 이번 일로 바예지트가 후계 구도에서 사라지게 되면 남은 셰자데는 자신뿐임을 염두에 두라며 타일렀다.

(그리고 라 발레트의 멱살이 잡히는 것을 본 기사단 단원 몇몇이 성미 못 이기고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시원한 지중해 바닷물에 그 뜨거운 머리를 식히게 되었다.)

그사이 알 자자이르의 해적들 역시 비상이 걸렸다.

“큰일이다! 당장 나서서 우리 편을 도와야 한다! 준비되는 대로 출항한다!”

“그런데 누가 우리 편입니까?”

“그야··· 투르구트 어르신 쪽 아니겠느냐?”

“하지만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투르구트 그 노망난 작자’가 언제고 우리를 토벌하러 올 지도 모른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구호기사단 놈들보단 낫겠지!”

“아니면 구호기사단 놈들보다 더 진심으로 우리를 때려잡으려 할 수도 있겠지요! 그쪽에서는 우리네 은신처가 어디인지, 아니, 하다못해 우리네 신상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번에는 구호기사단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해적들 사이에서 자중지란이 벌어진 것은 해적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리 미친 듯 지나간 지난 한 해 동안 세상이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바뀌었다 한들, 이렇게 알 자자이르 앞바다에서 구호기사단과 투르구트의 함대 양쪽이 미묘한 대치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허나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갈 뿐 아니라 매정하기까지 하였으므로, 해적들이 적과 아군을 분간하는 방도에 대하여 실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설득이 끝난 - 그리고 방금 전 바다에 빠진 기사단원들도 모두 건진 - 양측 함대는 일제히 알제 쪽으로 접근해, 항구를 봉쇄하였다.

“울루츠야.”

그 모습 보며 웃음 다 터뜨린 꺽정이가 넌지시 곁의 울루츠 알리를 불렀다.

“예, 레이스!”

“레이스가 아니라 당수라고요, 거 참.”

옆에 있던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꾸중하니, 바짝 긴장한 울루츠 알리가 또 한 번 말했다.

“죄송합니다, 술탄!”

“술탄? 그건 좀 좋은데.”

나름 당당하던 울루츠 알리는, 구호기사단에 보내겠다는 꺽정이 협박이 실제로 이루어져 배가 그대로 말타로 향하게 되자 곧장 그 당당함을 잃었다.

일반 포로도 아니요, 구호기사단을 사칭하며 귀빈을 해치려던 해적이라면서 그들을 말타 쪽에 넘길 경우, 다시는 살아서 바다로 나오지 못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저는 조반니 갈레니(Giovanni Galeni)라는 원 이름과 자신의 참된 신앙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는 둥, 오직 함께 붙잡힌 기독교도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거짓 개종을 했다는 둥, 안절부절못하는 울루츠 알리에게 슬쩍 접근한 엘리자베스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욱 솔깃한 제안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인도회사는 악명 높은 해적을 말단 직원으로 신규 채용하게 되었다. 나름 경력 있는 신입이니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 모시게 된 사장의 상전 노릇하는 사람이 생각보다도 엄청난 거물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시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황제 본인이라 하더라도, 오스만 투르크의 셰자데와 잉글랜드 여왕의 동생, 그리고 구호기사단의 2인자이자 조만간 단장이 라 발레트까지 저렇게 쉽게 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처음 마주하였을 때 칼 들이대려던 것도, 그리고 그 다음 대면했을 때 살려주십사 애걸하는 대신 같잖은 객기 부린 것도 사무치도록 후회될 수밖에.

“술탄이고 물탄이고, 얼른 하라는 대로나 해라, 이놈아.”

“옛! 알겠습니다!”

곧 한때는 명목상 오스만 술탄의 재가를 받은 사략선이었으나, 이제는 실질적으로 동인도 회사의 것이 된 울루츠 알리의 갤리선이 항구 향해 나아갔다. 해방과 짭짤한 보수를 약속했음에도 노잡이들 중 절반 이상이 몰타에서 내렸기에, 배는 영 속도를 내지 못했다.

울루츠 알리가 떠나자마자, 이번에는 셀림과 토르구트 레이스가 배 위에 올랐다.

“산타 페(Santa Fe) 호에 오른 것을 환영한다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이른 듯하군.”

“나한테 한 말이오?”

“흠흠, 그럴 리 있겠소.”

말타 섬에서, 이만큼 경치 좋은 섬을 빌려 쓰는 주제에 매년 매 한 마리가 바치는 세의 전부라니 너무 헐한 것 같다며, 카를 5세 이름을 대면서 저를 협박하였던 코우지오니스 모습이 눈앞에 선했던 라 발레트가 급히 헛기침을 했다.

(물론 굳이 따진다면,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무슬림 포로들도 그대로 풀어줄 것이라는 코우지오니스의 말에 먼저 이성을 잃고 발끈한 라 발레트 본인에게도 약간의 잘못은 있었다.)

방금 전에도, 어찌하여 저 저주받을 드라구트까지 이 일에 끌어들었냐며 언성 높였다가 강제로 언성 낮추어지지 않았던가.

“불편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귀빈을 모시고 있으니, 자제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이제 늙은이들의 원한은 뒤로 미루어둘 때도 된 듯하고.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말이오.”

토르구트 레이스가,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는 티를 내면서 라 발레트에게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네었다.

“그렇지. 그건 그렇지.”

“우리 잘 보호된 나라를 다스리는 술탄과 그 아들이신 셰자데, 그리고 ‘숭고한 문’으로부터의 선의를 보이고자, 우리 사략함대의 거점과 알려진 선장들의 신상을 모두 지도와 책으로 정리해서 가져 왔소.”

물론 거기 적힌 것이 전체는 아니요, 토르구트 본인을 따르는 해적들과 이미 정식으로 해군에 편입된 이들 및 그들의 거점을 지워져 있을 터였다. 허나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고맙소이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로군.”

지금까지 원수와 같이, 아니, 실제 원수로서 지중해 곳곳을 누비며 서로 싸우고 불태우며 사로잡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이들이, 장차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는 해적을 미리 진압한다는 명분에 이끌려 이렇게, 말 그대로 한 배를 타게 되었으니 실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그 명분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쪽은 이탈리아 연맹과 에스파냐 들먹이는 타고스 박사의 언변(협박)에, 다른 한쪽은 이번 일이 성공리에 끝나면 제국의 유일한 셰자데가 될 셀림의 지시에 각각 끌려나왔을 뿐이었으니.

“이대로 괜찮으시겠소?”

“하하, 웬일로 우리 ‘이교도’들을 다 걱정해주시오?”

“바닷바람 맞으며 늙다 보니 분수에 맞지 않는 걱정을 하는 골병이 들었소.”

“그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라오. 다만 우루바의 모자란 국가들과는 달리 우리 잘 보호되는 나라(오스만 투르크)는 해군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오. 그러니 어떻게든 살 길은 찾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보다, 그대들의 운명을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겠소? 오직 믿음만으로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섬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어지게 생겼으니.”

토르구트의 말은, 적어도 일부는 참이었다. 물론 눈앞의 항구를 비롯해 베르베르 해안 곳곳에 득시글거리는 해적들 모두가 그런 살 길을 찾지는 못하겠지만.

“말씀대로, 우리는 오로지 믿음에 따를 뿐이오. 신앙의 적이 이교도라면 무기를 들고, 신앙의 적이 역병이라면 의술을 베풀고, 신앙의 적이 가난이라면 곳간을 열 것이오.”

오랜 적들 사이의 만감 교차하고도 회한 남기는 대화. 그러나 떠나면 그만인 꺽정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자, 수다는 뒤로 미루시오. 저기 울루츠 놈이 해적 두목들을 죄다 불러모아 오고 있으니.”

곧 산타 페 호에 토르구트보다도 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들이 줄줄이 올랐다. 물론 이쪽의 감정은 저쪽에도 그대로 공유되고 있었으므로, 다들 못마땅함을 온 얼굴과 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갑판 위에 임시로 만든 단상에,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을 대표하는 라 발레트와 토르구트가 올랐다. 몇몇 용기 있는 자들이 ‘우우’ 야유를 보냈고, 뒤에서 불쑥 나타난 거한에게 팔다리가 부러졌으며, 비명과 신음에 곧 야유는 묻혔다.

“어디 계속 불평해보아라. 손발 부러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허리를 그대로 접은 다음 네놈들 좋아하는 바다에 던져줄 테니.”

상냥하게 몸짓으로 그것을 설명해주었으므로, 셀림의 수행원들이 통역해주지 않아도 뜻이 전해졌다.

그리고는, 단상 위의 두 제독 사이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섰다.

“나는 임꺽정이라고 한다. 내가 이 머나먼 서쪽까지 와서 열심히 일을 벌이고 다니는데, 감히 그것을 눈꼴시게 여기는 괘씸한 것들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런 괘씸한 것들이 없어지도록 만든 다음 떠나갈 생각이다.”

그날 알 자자이르의 해적들은 선택지 세 가지를 받았다.

첫째는 이대로 죽는 것.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 저를 맨손 싸움으로 이기면 풀어주겠다고 꺽정이는덧붙여주었다. 물론 이 배 위에서 풀어주는 것이지, 그 다음에 알 자자이르를 포위한 함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둘째는 투르구트에게 투항하는 것. 평화가 잠시 지중해에 돌아왔다 한들 그것이 오래 갈 것이라곤 누구도 믿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도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 삼국은 힘 닿는 데까지 해군을 기르고 유지할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애초에 오스만 투르크가 사략함대를 운용하는 것이 그 재정만으로는 싸움을 오롯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점. 암만 코스탄티니예의 비제르(재상)들이 애쓴다 하더라도. 투르구트 휘하의 모든 이들이 나라의 군인이 될 기회를 잡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셋째는···

“동인도회사 사장 엘리자베스 튜더입니다. 반가워요.”

‘얼굴조차 가리지 않은 이교도 계집이 무엇하고 있느냐’라던가, ‘어디 세력가 첩으로 팔면 딱 짭짤하겠구나’ 하는 말이 잠시 몇몇 해적들 가슴에 맺혔다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 말을 밖으로 내었다가는, 그들 본인이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것임을 직감했으므로.

“우리 동인도 회사는 비록 신생 회사지만, 앞날은 아주 창창합니다. 알뿌리 굵은 튤립은 고작 꽃 한줄기로 끝나지만, 보잘것없는 도토리는 큰 참나무로 자라나는 법이지요. 그런 회사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히 여기세요.”

그러나 감사한 줄 모르는 자들이 많았다. 엘리자베스는 침묵을 웃음으로 받았다. 저쪽이야 부들대건 말건 알 바 아니었다.

“잘 아시겠지만, 여러분은 지금 임 당수와 동방 사절단,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로 셰자데 셀림을 해치려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무죄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사략함대’ 모두가 이 무도한 범죄에 가담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술탄께 충성을 맹세했으면서 그런 음모에 가담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파렴치하지 않나요? 억울하다면 스스로 나서서 결백을 증명하면 됩니다. 예컨대, 본인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다 맹세한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의 침묵에 해적들이 당황할 차례였다. 다른 선택지가 무언가 없을까 기대하던 이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무사히 빠져나와, 예전 같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약탈하는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던 것이다.

“이곳 알 자자이르가 우리들의 주된 거점이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 동료들도 많이 있소. 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심사숙고 끝에 거기에 생각이 닿은 해적 두목 하나가 목소리 높였다. 너무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방금 전 그들 앞에서 사람의 손발이 꺾이던 광경은 잊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 대신 다시 연단 위에 오른 꺽정이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아, 그 얘기를 깜빡할 뻔했군. 그놈들도 모두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누가 그들을 잡는다는 말이오? 그들이 작정하고 숨으면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그 어떤 군주도 잡을 수 없소.”

“너희가 잡아와야지, 뭔 소리냐.

사흘을 주겠다. 지금 당장 이곳 앞바다로 다들 튀어오라고 해라.”

“사흘이라니, 너무 촉박하오! 그 기한은 도저히 맞출 수 없소.”

“그럼 뭐, 맞는 거지. 대포알에 맞고, 주먹에 맞고, 원 없이 맞을 것이다.. 어차피 네놈들 알량한 거점은 여기 투르구트 어르신과 이미 줄 골라탄 너희 동무들이 다 불어서 알고 있다. 맞고 나오느냐, 그냥 나오느냐 차이 뿐이지.”

바예지트의 음모를 고발할 물증이 없다면, 대신 셀림의 힘을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반강제로 끌려온 함대가 코스탄티니예의 금각만 앞을 메운다면, 그 함대 이끄는 전직 해적들 속마음 알지 못하는 셀림의 아버지 쉴레이만도 셀림의 고발을 진실로 만들어줄 의향을 가지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 속내까지는 모르는 해적들은, 곧 저들의 본거지, 이제는 더 이상 본거지라 못 불리게 될 그곳으로 속절없이 쫓겨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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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구호기사단이라 불리는 성 요한 구호기사수도회는, 성전기사단과 더불어 역사 속에 실존했던 기사단으로 유명합니다. 실제로도 지난화에 언급된 로도스 전투, 그리고 뒤이은 몰타 전투 등에서 수십배는 우세한 병력을 동원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지요.

로도스 전투에서 명예롭게 후퇴했지만 어쨌든 패배한 구호기사단은 새 거점을 물색하고 다녔는데, 이때 카를 5세의 제안으로 몰타 섬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때 연공으로 매 한 마리를 받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오늘로 치면, 형식상의 계약을 맺으며 1달러를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후 1557년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아래에서 몰타 섬은 철저하게 요새화되고, 1565년 말타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승리에 만족하지 못한 라 발레트는 더욱 강력한 요새도시 건설을 추진했는데, 그가 첫 삽을 뜬 이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 발레타라 불리게 됩니다. 지금도 몰타의 수도로 남아 있지요.

이들은 작중에 서술된 것처럼 이슬람의 팽창에 맞서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으로 해적질을 했고, 기독교 세계가 전자에만 주목하며 열광한 반면 이슬람 세계는 후자에만 주목하며 이들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울루지 알리, 또는 유럽식으로 오키알리(Occhiali)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울루츠 알리는, 하이르 앗 딘과 투르구트의 뒤를 이어 지중해의 오스만 해군 및 사략함대를 이끄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다만 작중에서는 아직 선장들 중 조금 명망이 높은 정도입니다. 원 역사에서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 1560년대의 치열한 해전들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그의 커리어를 생각해서도 훗날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갈음하여 엘리자베스 휘하의 선장이 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중 서술된 것처럼, 베르베르인들이 거주하는 지역 해안을 거점으로 삼아 바르바리 해적이라 불리게 된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매우 다채로운 인적 구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할거하던 여러 지방 세력들 외에도 모로코와 서유럽, 발칸, 아나톨리아 등 여러 지역의 뱃사람들이 유입되어 해적으로 활동하곤 했지요. 특히 그들 중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은, 자신의 독특한 배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큰 명성/악명을 떨쳤습니다. 굵직한 인물만 열거해도, 모로코의 ‘해적 왕비’ 사이다 알 후라, 해적인 동시에 유대교 랍비였던 사무엘 팔라치, 대서양과 지중해 양쪽에서 활약한 영국인 잭 워드(또는 유수프 레이스), 북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네덜란드인 얀 얀손(무라트 레이스) 등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다채로운 바르바리 해적의 구성은, 그들이 17세기 이후에도 한동안 유럽 해군에게 압살당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럽 출신의 해적들은 에스파냐라는 공동의 적을 둔 사이인 영국과 네덜란드 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을 통해 발달한 항해술과 화포술을 어느 정도 들여올 수 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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