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황금 새장 (3)
술탄 쉴레이만은 눈앞에 놓인 구리 구를 한 바퀴 돌려보았다.
“참으로 추악하구나.”
“송구하옵나이다.”
술탄의 단평에, 그 구를 만드는 일의 총책을 맡았던 뤼스템 파샤가 고개를 숙였다.
“그대를 꾸짖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만들라 지시한 자가 그대의 눈앞에 있으니.”
아름다움은 중요치 않으니, 동서방의 모든 지도를 총합하여 최대한 정확한 지구의 모습을 만들어 바치라는 지시.
이에 따라, 구면 위에 지도에 나온 대륙과 섬을 새기고, 그림이나 문양이 들어갈 자리가 남으면 그 자리에 지명을 써넣었다. 뤼스템 파샤 본인이 코스탄티니예의 도서관과 첩자들이 수집해온 서방 지도, 그리고 동방 사절단이 바친 - 실제로는 두둑한 노잣돈과 교환한 - 그들의 항해지도까지. 모두 종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이 지구의(地球儀)였다.
미관에 대한 배려는 한 점도 들어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장식으로 두기에는 너무 크고, 방 구석의 장식으로 삼기에는 너무 작았다. 지리와 무관한 장식은 단 하나, 서방인들이 인도양이라 부르는 바다 남쪽에 새겨진 샤하다(신앙고백) 한 줄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곳에도, 그림 대신 한없이 무미건조한 ‘밝혀지지 않음’이라는 문구만을 써넣었고, 그나마 세공하여 꾸밀 법한, 구를 고정하고 있는 틀에도 오직 위도를 표시하는 눈금만이 그어져 있었다.
“아름답지 못하여 쓸모가 없는 것을 이르러 장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 지구의는 장식이 아니다. 그러니 추악하다는 것이 어찌 흠이 되겠는가? 그저 이 세계의 모습이 그러할 뿐이거늘.”
마치 누더기처럼, 서방 사람들의 지식과 이 땅의 지식, 그리고 동방 사람들의 지식을 엮어 만든 지구의. 그 세계에는 중심이 없었고, 그들이 스스로 위대하다 여겨왔던 나라는 그것이 알-신(중국)이든 이 잘 보호받는 나라(오스만 투르크)든, 아니면 서방의 여러 나라들이든 자그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그 옛날 이교도 왕 이스칸데르(알렉산드로스)가 이 지구의를 보았더라면, 파르스 땅(페르시아)에 닿기도 전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가 세상의 끝으로 알고 있던 힌디스탄(인도)마저도, 지구 전체로 따지면 고작해야 이웃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지구의를 탓하겠지. 어찌 세상의 모습이 이와 같겠느냐, 이 기물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운운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만 머물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 된 세상에서 사소한 존재가 되느니, 차라리 쪼개진 하늘 아래의 술탄으로 남겠노라 하면서.
그대도 그렇지 않은가, 뤼스템 파사여?”
“술탄의 마음이 곧 저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품으신 바를 이 비천한 신하에게 말씀해 주신다면, 어찌 그것 외에 다른 뜻을 품겠습니까? 그것이 술탄을 보좌하는 디반(내각)의 우두머리로써 마땅한 일입니다.”
즉 쉴레이만이 뜻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 밝혀지지 않은 그림자에서는 자신의 뜻으로 일관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이 고집 많은 신하, 사사롭게는 아내 휘렘 술탄의 사위이기도 한 뤼스템 파샤를 지긋이 쳐다보며, 술탄은 웃었다.
수에즈 운하의 발상을 처음부터 좋게 보지 않았던 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서방과의 교역에 힘쓰느니 차라리 교역을 줄이고 국부를 늘리는 것이 옳다고 보는 뤼스템 파샤였다. 언제든 서방과의 관계를 끊고, 다시 한 번 이슬람의 영역을 늘리기 위해 원정을 감행할 수 있도록, 금고는 두둑하게, 교역은 저쪽이 이쪽에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하였으므로.
그러나 셰자데 셀림이 사절단을 이끌고, 그 동방인들과 함께 서쪽으로 떠난 뒤 코스탄티니예에는 놀라운 소식만이 전해졌다.
운하 하나를 위하여 숭고한 문과 두 셰자데 모두를 이용해먹은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그들은 서쪽에서 전쟁을 막고 나라를 세웠으며, 적과 아군의 분별을 무너뜨리고 옳고 그름을 흐뜨렸다.
일어나지 못하리라 여겨졌던 일들이, 오직 운하를 지을 사람과 운하를 거쳐 통상할 이들을 구한다는 목적 하나에 따라 이루어졌다. 셰자데 셀림, 코스탄티니예의 저택과 궁전의 깊은 곳에서는 주정뱅이 무골호인으로 알려져 있던 그는 이러한 소란 한가운데에서, 림 파샤(임꺽정)와 함께하였다.
하지만 뤼스템 파샤는 여전히 뜻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말씀 올리건대, 이 지구의를 추악하다고 부르는 이들, 삿된 것이라 매도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술탄의 의지 앞에서는 티끌보다도 가볍지만, 두 분 셰자데께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쉴레이만의 묵직한 말이, 뤼스템 파샤가 저의 분수 넘어서는 말 꺼내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러한 먼지와 티끌을 한 번에 소제할 수 있을 것인가? 끌어모아 진기한 귀물로 녹여낼 수 있을 것인가? 아예 먼지가 쌓이지 못하도록, 바람마저 바꿀 것인가? 전례 없는 여정에서 돌아온 나그네는, 과연 저의 집을 옛날의 집과 같이 여길 것인가?”
무거운 기대가 담긴 말. 술탄의 기대는 곧 시험과도 같았다.
술탄의 마음은, 운하를 세우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저 한두 사람이 떠드는 것을 넘어, 술탄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면 그 무게가 다를 터.
그러나 술탄은 운하가 가져올 이익만큼이나 그 위험 또한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익으로 사귄 이웃은, 언제든 더 많은 이익을 위하여 배신할 수 있었다. 막혔던 교역로를 뚫는 것만큼이나, 뚫린 교역로를 막는 것 역시 이익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쉴레이만이 아닌 다른 자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운하의 일로 말미암아 셰자데 셀림과 엮인 이후로, 쉴레이만은 바예지트가 대신 뤼스템 파샤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휘렘의 뜻이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데 있기도 하였으므로.
그러나 이제 셀림은 귀로에 올랐고, 잠시의 균형은 붕괴를 앞두고 있었다.
아마 백해(지중해)의 사략함대에 연통 넣는 것을 바예지트에게 권한 자는 뤼스템 본인일 테다. 그러나 쉴레이만이 아는 아들 바예지트라면, 사략함대를 이용해 그럴듯한 술수를 부리는 대신 셀림을 직접 치려 하였을 터.
하지만 이미 쉴레이만의 시험을 받는 것은 두 아들에서 하나로 줄어 있었으므로, 쉴레이만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못생긴 지구의 위의, 알 자자이르라 적힌 곳을 주시하면서.
임꺽정이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주었던 사흘 기한이 지났다. 알 자자이르(알제) 앞바다를 봉쇄한 구호기사단과 오스만 해군 곁에 제법 그럴듯한 해적 함대가 대열을 이루었다.
구호기사단과 오스만 해군이 나란히 있고, 둘이 화포를 주고받는 대신 그저 같은 바람과 물결에 두둥실 떠 있기만 한 것을 본 해적들은, 그제야 애써 저들의 배를 갈고 닦았다. 선창을 털어 노잡이 노예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그러고도 남은 게 있으면 주변의 해적들 중 저들 대신하여 윗분들께 잘 말씀해줄 선장에게 청탁을 넣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술탄. 언뜻 헤아려보아도 절반 정도도 채 못 모인 듯합니다.”
허나 동인도회사 소속 첫 번째 선장이 된 울루츠 알리 - 엘리자베스는 벌써 편하게 조반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 는 무엇이 영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저들 해적들이 이리 협조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미 그들 딴에는 큰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즉 반대쪽으로 결심을 내리거나, 아직 머뭇거리며 기회만 보고 있는 이들은 이곳에 모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이 절반을 넘겼다. 사흘 전 알 자자이르에서 ‘엘리자베트 술탄’의 상냥한 듯 살벌한 말을 듣고 흩어진 선장들 중에도, 셋 중 하나쯤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꺽정이는 그저 귀 후비고 있다가, 엉뚱한 대목에 대해 반문할 뿐이었다.
“술탄?”
“엘리자베트 술탄의 상관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술탄이시지요.”
‘림 파샤’ 소리만 듣던 꺽정이에게 술탄은 또 색다른 이야기였다. 하기야, 조호르 그 조그만 동네 임금도 술탄을 칭하는데 꺽정이라고 못할 게 무엇이랴.
“뭐, 네가 무어라 부르든 네 마음이지. 그리고 애초에 여기 안 모일 만큼 눈치 없는 것들이라면, 데려가본들 도움은 아니 될 것이다.“
재수 없게도 알 자자이르에서 훨씬 서쪽이나 동쪽에 머물고 있던 배들은, 사흘 안에 오기는커녕 소식조차 듣지 못했을 터. 그러나 그들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나머지 놈들이야, 알아서 기어들어오든, 아니면 세상 바뀐 것 모르고 날뛰다가 잡혀 죽든 하겠지. 오히려 너희 일감이 될 것이니 호재라 여겨도 좋다.”
갑자기 사람이 늘어나며 회사 구색 갖추게 된 동인도 회사였다. 일감이야,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사람과 자재 나르는 일, 그 사람들 먹여살릴 곡식 나르는 일, 그리고 가운데서 딴짓 하는 자들을 살면서 영영 재미 볼 일 없도록 만들어주는 일 등, 널리고도 널렸으니 굶어죽을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릴 이유는 없겠습니다. 찾아올 만한 이들은 다 온 셈이니까요.”
울루츠 알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면 슬슬 움직여 볼까.”
“움직인다니요? 혹 어디로 향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것을 밝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 임금님 아들 되시는 셀림 나리 몫이다.”
그러고 보니 진작 나와야 할 셀림이 선실에서 고개를 내밀지 않고 있었다. 울루츠 알리는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곤, 여차하면 끌고 나올 기세로 선실로 향하는 꺽정이였다.
가는 길에 뭔가 예감이 들어서, 중간에 선창에 들이닥쳐 포도주 한 병을 노략질하고, 가는 길에 마주친 이탁오도 역관 노릇 좀 해 달라며 납치한 뒤, 셀림이 머무는 방문을 발칵 열었다.
“어인 일로 뜸을 들이고 계시오?”
술기운은 커녕 술냄새도 풍기지 않는 셀림이, 방 안에서 우두커니 바깥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겠소? 뻔하지.”
“뻔한 일인데 그러면 왜 이리 뭉그적대고 있소?”
“그야···”
이미 뒷일까지 모두 계획 세워놓은 꺽정이 패거리가, 정작 모아놓은 해적들에게 목적지 지시하는 것은 셀림에게 일임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방인이 해적 함대를 모아서 남의 나라 도성 앞으로 쳐들어가는 것과, 왕자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궁 앞으로 나아가 뭔가를 간곡히 간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서를 깊게 들여다보면, 정작 종묘사직에 더욱 큰 우환이 되는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였다. 당장 군호를 수양이라 하는 조선국 금상의 고조부와, 형제간의 우애로움이 후대에 길이 남은 그 고조부의 조부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더구나 그렇게 함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고국에 머물 때 뭣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어, 그저 금발이니 주정뱅이니 하는 별 의미 없는 별명이나 붙은 셀림이, 무언가 임금의 재목임을 백성들에게 - 그리고 그보다 중요하게는, 아버지 쉴레이만께 - 알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웃긴 게 뭔지 아시오? 우리가 코스탄티니예를 막 떠났을 무렵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더라면,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대 말에 따랐을 것이오.”
그때야, 별 생각 없이 그저 죽기 싫어서 바예지트 녀석과의 경쟁에 임하였다. 그러니 남이 저를 도와, 바예지트의 흉악한 술수를 드러내고 아버지께서 저를 다시 보게끔 만들 수 있는 수작을 두리고자 한다 하면 기꺼이 동참했을 터.
“사람이 초심(初心) 잃었구만.”
“아는 게 병이라는 속담이 동방에 있다 하지 않았소? 딱 그 격이라오.”
그저 생각 없이 이리 부딪히고 저리 치닫는 듯한 림 파샤 일행이었지만, 그들의 언행 하나하나에 결코 가볍지 않은 속뜻이 담겨 있음을 셀림은 알았다. 아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절로서 보낸 한 해 동안, 그러한 앎은 깨달음이 되고, 고민이 되었다.
옛날 같았더라면, 어차피 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내든 그저 어디서 들은 남의 말 주워섬긴다는 눈빛을 받았을 터. 허나 지금 그러한 눈빛을 받는다면, 아니면 오히려 기껏 생각해낸 궁리가 참 얕고 형편없다는 눈빛으로 돌아온다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듯했다.
아들로서, 또 셰자데로서의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코스탄티니예의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온 자로서의 사명을 못다 이루고 실패하였다는 부끄러움에는 미치지 못할 터였다.
“이보쇼, 왕자님. 어차피 왕자님이 무슨 말씀을 꺼내시든, 어떻게 왕자님 행보를 해명하든 미워할 사람은 미워할 것이고 미덥잖게 여길 사람은 똑같이 의심할 게요. 심사숙고하고 백번 천번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때로는 그냥 들이받고 보는 쪽이 더 편하고 빠를 수도 있다오.
그리고 수틀리면 그냥 나랑 같이 동쪽으로 도망치면 되지, 뭐. 그렇게 되면 술 마실 때 누구 눈치볼 일도 없고 좋지 않겠소? 자, 이것 한 병 들이키고 얼른 나오쇼.”
꺽정이가 포도주 마개를 폭 뜯어내며, 병 째로 술을 권했다. 어처구니 없는 언변으로 남을 설득하려 할 때는, 술만큼 듬직한 연장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셀림은 결국, 그 인생의 즐거움이자 죄악의 원천 중 하나인 떫은 액체를 그대로 뱃속에 집어넣었다.
꺽정이는 알 리 없는 사정이었지만, 기사수도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술은 마시고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식수에 희석하여 먹거나 상처를 절개하기 전에 부상자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라, 셀림이 먹어본 것 중 가장 독하고 맛도 없었다.
그러나 곧장 식도 타고 올라오는 화기 사이로, 용기도 솟아올랐다.
그래, 눈앞의 무식쟁이 도적놈도 시류를 잘 타고 뛰어난 사람을 곁에 두어, 동방 황제의 대리인 노릇도 하고 온갖 난리 다 벌여놓고 멀쩡히 돌아다니지 않던가. 저라고 못할 것 무엇인가?
“에라이, 그래, 지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지. 그대 말이 맞소.”
벌떡 일어나, 꺽정이 따라 선실 밖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화기와 용기 다음에는 취기도 올라온 고로,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이르자 발걸음이 자유분방해지고 사람들 눈길 모이는 곳에 닿자 혀가 꼬였다.
“닻을 올려라! 목표는 코스탄티니예다!”
중간에 ‘끄억’ 하고 나온 트림이 위엄을 절반쯤 깎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 듣는 해적들에게는 오히려 제법 멋들어진 장면이었다..
만약 배 한두 척이 금각만으로 들어와, 셰자데 바예지트가 구호기사단을 사칭하여 셀림을 공격하라고 사주하였다는 고변을 하였더라면, 그들은 바로 내쫓기고 선장의 목은 톱카프 궁의 최신 장식품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수십 척 배에 나눠 탄 수천 명이 금각만을 가득 메우고 똑같은 주장을 펼치니, 같은 고변이라도 그 설득력이 달랐다. 결국 설득력도 힘(力)의 일종이었으므로.
“내 네가 떠나기 전, 제국이 어찌하여 제국인지를 너와 네 아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예, 아버지.”
그러므로 쉴레이만은, 바뀌지 않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바뀐 아들을 불러 친히 물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진실과 거짓을 결정하는 힘을 얻고자, 저 함대를 이끌고 찾아왔구나. 그러니 묻겠다. 너는 무엇을 보았고 또 무엇을 얻었기에, 저들을 하나로 묶어 이곳으로 돌아왔느냐?”
“말씀 올리겠습니다···”
위엄이 있는 아버지의 말과 달리, 아들의 말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제법 논리정연하던 듯하던 언변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타래가 풀려, 두서는 없어지고 결국 중언부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히려 셀림은 말을 아끼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서 말미암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쪽에서 온 이들과 함께 서쪽을 누비며 보고 겪었던 것을 말한다.
욕심. 세상의 규칙을 비틀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겠다는 그 집념을 말한다.
사람의 갈망, 그것의 이름이 정의이든, 아름다움이든, 아니면 권력이든, 신앙이 그것을 가로막으면 신앙이 잘못된 것이요, 법이 가로막는다면 법이 잘못된 것이라 부끄러움 없이 외칠 수 있는 것.
동쪽에서 온 이들은 저들이 기이한 축에 든다 했다. 그러나 서쪽에서는 그 불길이, 훨씬 잔잔할지언정 훨씬 넓게, 들판의 수풀 사이와 숲의 나뭇가지 사이에서 번지고 있었다.
잘 보호되는 나라에서는 그것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길이 마침내 온 대륙을 다 불태우고, 그 재 위에서 새로운 싹이 틀 때면, 어느새 이 제국은 묘목 하나라도 얻어보고자 간청하게 되리라.
“물론 제가 어리석어 그렇게 단정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잘 보호되는 나라 또한, 잠시 덜 보호되더라도 그 흐름에 함께해야만 했다. 무엇이 바뀌든, 그 바뀌는 것 중 좋은 것, 귀한 것,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제때 받아들이고, 나아가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앞으로의 세상, 하나로 엮일 세상은, 그렇지 못하면 뒤떨어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잔혹한 세상이기도 할 것이므로.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세상을 바라지 않는 이들도 있다. 불길이 번지기 전, 아예 그 가장자리의 수풀을 모두 베어버리거나, 물로 적셔버리자고 하는 이들도 있다. 너는 그들을 어찌 막을 심산이더냐?
당장 세상이 우리 복종하는 자들(무슬림)과 기독교 둘로 나뉘어 있기만을 바라는 이들은 어찌할 심산이냐? 그 싸움에서 쓰러진 자들의 시체를 뜯는 독수리와 매의 무리는 어찌할 것이냐?”
“모두 황금으로 된 새장에 가둘 것입니다. 그 새장은 아주 아름다울 것이므로, 그 어떤 맹금도 처음에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문이 열린다 한들 나오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셀림에게 말의 재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재능이 나랏일에 있어서는, 뜻과 마음이 맞지 않아 발휘되지 못하였을 뿐.
그러나 비로소, 지금에 이르러서야 재밌는 구절이 나왔다.
교역이 가져올 이익. 세상 모든 곳을 오가는 장인과 기술, 지식이 만들어낼 이익. 그것으로 세상을 다시 갈라놓으려는 자들을 묶어두고 침묵시키며, 종국에는 비록 미워하고 원한 품을지언정 옛날처럼 나뉘어 서로 알지 못하는 그런 세상은 생각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 원대한 발상이, 어쩌면 림 파샤와 그가 대표하는 세상과 함께 가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 쉴레이만의 늙은 눈은 그 먼 곳까지 꿰뚫어 보고, 동시에 그 이상은 침침하여 보지 못하였다.
“오늘의 만남은 이것으로 족하다. 다음에 찾아와 나와 정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향수를 뿌리고 오도록 하거라. 아니면 술을 끊던가. 그 죄악의 냄새는 참을 수 없구나.”
‘다음에 찾아올 때’라는, 한없이 가볍게 던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 셀림의 귀에도 닿았다.
“그래서, 나를 이제 어떻게 할 심산이오?”
마치 결백한 사람처럼, 자신의 영지 퀴타흐야에 머물고 있던 바예지트는, 한 발 늦게 소식을 듣고 급히 코스탄티니예로 상경하였다.
그리고 지금껏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겠다는 것처럼, 굳게 닫힌 것 같으면서도 쉽게 열리던 톱카프 궁의 문이, 이제는 철통처럼 빗장 걸린 채 미동도 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뤼스템 파샤, 그리고 어머니 휘렘 술탄을 통해 사정하고 또 사정해 보았지만, 이미 아버지의 마음이 기울었으니 구명(救命) 외에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답만이 돌아올 뿐.
그리고 그 구명의 열쇠가, 바로 운하의 일로 막 코스탄티니예가 시끄럽던 시절 영 불쾌한 연을 맺었던 동방 사절단의 림 파샤에게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깝고도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목숨줄은 붙이고 보아야 할 일. 그리하여 치욕을 감내하고 금각만을 메우고 있는 해적선들을 헤치고 림 파샤가 머무는 배에 올랐다.
“글쎄, 이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우리 손에 들어온 명줄이니.”
그리고 항복을 선언하고 저의 앞날 어찌될지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이러하였다.
“그러게 좀 우애롭게 지내시지 그러셨습니까.”
오스만 가문의 상속 법도를 뻔히 아는 ‘지아웃딘’이 옆에서 빈정거리고, 붉은 머릿결이 어머니 휘렘 술탄과 닮은 -그러나 미모는 전혀 닮지 않은 - 생면부지 여인이 곁에서 함께 웃었다.
“어머니로부터 이것을 받았소. 이것을 건네주면 살길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다 하던데···”
저의 주인에게 어떤 불행한 운명이 닥쳤음을 알면서도, 딱히 손쓸 길 없어 그대로 그 곁을 지키던 하인이 묵직한 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이야, 이거 물건인데.”
쉴레이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지구의의 복제본이었다. 술탄에게 진상된 물건이 오로지 진실만을 담도록 만들어져 일체의 장식이 없었으므로, 꺽정이가 받아본 지구의도 술탄의 기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모습에 대한 품평만은 술탄과 정 반대였지만.
좋다고 그것을 몇 번 빙빙 돌려보던 꺽정이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역시 곁에 있던 도키치로는, 왠지 저도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원래는 왕자님을 동쪽으로 데려가서 여기저기 써먹으려고 했소. 이미 그런 식으로 제법 장사의 이득을 많이 거두고 있었거든.”
“당수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셰자데 셀림이 손윗사람, 그러니까 적장자라서, 동방의 예법으로는 아무리 꾸며도 썩 좋은 이야깃거리가 나오진 않아 골머리를 썩히던 참이었습니다.”
예컨대 바예지트가 셀림의 형이었다면, 아우가 성덕(聖德)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겸양하여 왕위를 버리고 동쪽으로 왔노라 내세울 수도 있었다. 가운데서 글 쓰는 사람만 그리 주장하면 될 일이니, 바예지트의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허나 문제는, 한 번 들렸다 떠나면 그만인 꺽정이와 달리, 바예지트는 셀림이 후사 없이 요절하지 않는 한 아예 고국으로 못 돌아갈 몸이라는 데 있었다. 그사이 조선말이든 한문이든 익혀 저의 사정을 스스로 고할 수 있게 된다면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당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떠오르는 발상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당사자인 바예지트 앞에 두고, 방약무인(傍若無人) 뜻 그대로 바예지트의 운명을 가볍게 논하는 이탁오와 꺽정이였다.
“그렇소. 여기 보시오.”
꺽정이가 지구의를 슥 돌리다가, 한쪽 검지손가락으로 멈춰 세웠다. 손가락은 조선에서 동쪽, 거대한 바다 너머의 땅을 짚고 있었다.
“프랑스 그 나라에서 다소간 불행한 일이 있었던 뒤에, 그 나라의 권문세족 우두머리 두 사람을 불러다가 나라 안에서 아옹다옹 다투는 대신 나라 밖으로 나가서 힘을 쓰라고 한 적이 있었지 않소? 그런데 이렇게 보니, 그 ‘나라 밖’이라는 게 여간 넓은 게 아니군그래.”
이미 에스파냐 놈들이 한바탕 분탕질을 쳐서 거하게 먹어치웠다 하였는데, 그러고도 아직 그 남쪽에도, 북쪽에도 제법 땅이 남아 있었다. 마침 레가스피 그 자가 밝히기를, 류큐 앞바다에서 바닷길을 잘 타면 동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바닷길이라는 게 묘해서, 이미 한 번 사람이 다녀간 쪽으론 쉽게 오갈 수 있지만 인적 없는 쪽은 열이 가면 하나가 돌아올 지경이라 합디다. 에스파냐 사람들이야 이미 바다 오간지 오래되어 괜찮다지만, 우리는 조금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쪽에 굳이 우리네 귀한 사람을 보낼 이유가 있겠소? 듣자하니 에스파냐 사람들은 초행인 바닷길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먼저 들이밀었답디다.“
서쪽 인도와 동쪽 인도도 구분 못한 것으로 유명한 제노바 출신 크리스토발 콜론(콜롬버스) 이야기 듣고, 그것이 에스파냐의 통례(通禮)라 착각한 꺽정이였다. 저였다면 딱 그렇게 했을 터였으므로, 스스로 내린 결론에 일말의 의심을 품지 않았다.
더구나 비록 성질머리가 급하고 식견이 얕아 끝내 실패하였다지만, 어쨌든 왕자 노릇 할 만한 가르침은 받은 바예지트다. 어중이떠중이 뱃놈을 앞세우는 것보다야, 재주는 재주대로, 욕심은 욕심대로 갖춘 사람을 던져놓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팔자가 사나우면 그냥 가다가 죽든 가서 죽든 하겠지. 일신 운수가 그렇게까지 흉신악살 가득 껴 있지 않다면야 어떻게든 살 길 찾을 테고. 본인이 임금 되고 싶어서 형님까지 해치려던 녀석인데, 아예 그러지 말고 그 드넓은 땅에서 저의 나라 세워보라 하면 좋다고 따라오지 않겠소?”
물론 말이 저의 나라지, 실제로는 민주당의 것이 되겠지만.
“이제라도 다시 쉴레이만 어르신 뵙고, 앞으로도 죽이기는 뭣하고 살려두기는 더욱 뭣한 놈들 있으면 동쪽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소. 다 쓸 데가 있으니.”
그러나 바예지트의 눈에는, 림 파샤가 짚은 땅의 이름이 그대로 들어왔다. 마치 ‘칼리프의 땅’이라 예정된 것과 같은 그 땅의 이름, ‘칼리푸르니야(캘리포니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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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르의 알라우딘 샤를 시작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술탄’이라는 칭호는, 본디 ‘권위’ 또는 ‘권력’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퍼지면서 그 의미가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때로는 통치자의 호칭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지역 유력자가 아무나 자칭하는 칭호가 되기도, 또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의 호칭이 되기도 했지요.
원칙적으로 여성이 술탄의 자리에 오를 경우, 여성형인 ‘술타나’로 호칭해야 하지만, 작중 바르바리 해적들이 투르크 관료 및 셰자데 셀림 앞에서 사용하고 있는 오스만 투르크어는 현대 튀르키예어와 마찬가지로 성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휘렘 술탄’이나 ‘누르바누 술탄’처럼 ‘엘리자베트 술탄’이라는 표현도 가능하지요.
이전 화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언급되었던 것처럼, 셀림과 바예지트 두 왕자 사이의 갈등은 15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격화되었습니다. 그나마 둘을 통제할 수 있던 둘의 모후 휘렘 술탄은 1558년 사망했고, 이들의 싸움에 대한 쉴레이만의 인내심도 점차 바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형과 달리 성질이 불과 같았던 바예지트는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무마시키려는 아버지에게까지 반항하게 되었고, 결국 쉴레이만은 셀림을 후계자로 낙점,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를 셀림에게 붙여주게 됩니다.
그 결과 두 셰자데 간의 내전에서 바예지트는 셀림의 - 사실상 소콜루 메흐메트의 - 군대에 패해하였고, 오스만 투르크의 적국인 사파비조 이란으로 아들들과 함께 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파비조 이란의 샤 타흐마스프는 이미 망조가 깊게 든 셰자데를 보호해줄 생각이 없었고, 쉴레이만으로부터 몸값을 받은 뒤 바예지트와 그의 네 아들을 모두 살해하게 됩니다.
지명 캘리포니아가 16세기 초 에스파냐 소설가 몬탈보(Ordoñez de Montalvo)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19세기 중반 미국 역사가들에 의해 규명된 이후로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몬탈보가 그 이름(칼리포르니아)을 어디서 따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요. 개중 한 가지 유력한 설은, 칼리프라는 아랍어가 그대로 당시 에스파냐어에 차용되어, 지도자를 뜻하는 ‘칼리파(califa)’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어 여기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중세 기사도문학인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상향의 이름 ‘칼리페르네’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는데, 칼리페르네는 다시 ‘칼리프’나 페르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이상향 ‘카르이파른’에서 차용한 이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어원은 중동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