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거운 (1)
재개될 트리엔트 공의회의 핵심 논제는, 이제 모두가 눈동자 굴리지 않고 똑바로, 또 진지하게 거론하게 된 신앙의 자유였다.
애초에 임꺽정이 로마에 닿자마자 신앙의 자유라는 말을 꺼낸 이유는, 첫째로 고아 종교재판소 날려먹은 것에 대한 죄값을 날로 먹기 위함이요, 둘째로 두 믿음 사이의 공존을 도모하여 운하를 파고 민주당 돈벌이에 써먹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우로파 땅의 복잡한 정세, 그러니까 동방의 우환이 오기 전부터 이미 제대로 곪아가고 있던 신교와 구교의 알력과 엮이게 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공존 문제는 오히려 곁가지가 되어버렸다.
공의회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굵직한 세력들은, 사실 이미 ‘장엄한 술탄’과 물밑에서든 물 위에서든 제법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신앙보다는 꼴보기 싫은 작자들(예컨대 합스부르크, 또는 압스부르고, 또는 에스파냐) 족치는 것이 중하다는 데 있어 진작에 국론이 합일된 프랑스 왕국은 대놓고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도 맺은 바 있었다.
그러니 성직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라면 모를까, 군주들 사이에서 이 문제는 그저 이론을 현실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슬림들 틈바귀에 거점 마련한 포르투갈만은 여기에 있어 할 말이 많았지만, 에우로파 군주들은 포르투갈이 말할 공간을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훨씬 중요한 것은, 어떻게 소위 프로테스탄트들을 끌어안을지에 있었다. 어디까지를 대화와 타협으로 교회의 품으로 안아야 할 ‘순량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어디서부터 바람직한 신앙인이라면 바로 횃불과 쇠스랑 들고 뛰쳐나와야 할 ‘악독한’ 이단으로 규정할 것인가?
‘필리오케(Filioque)’ 한 단어를 가지고 오백여 년을 다툰 신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았으므로, 공의회에 임하는 성직자들, 즉 세속 권력과 아주 긴밀한 사이인 이들은 재갈을 많이 준비해야 했다.
무엇이 옳으냐보다, 무엇이 어느 나라에 더 이익이 되느냐가 먼저 고려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재개된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교황이 아비뇽으로 납치당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에 대한 에우로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게 될 터였다. 새로 뜨게 된 눈은 감출 수 없고, 한 번 눈에 띈 티끌은 치우지 않을 수 없으므로.
“··· 그렇지만 어쨌든 그 누구도 운하를 파면서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이 어깨 맞대고 힘 합치는 것을 두고서는 딴소리 안 하게 되었다네. 그러니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노났다 할 만하지 않은가. 신교고 뭣이고, 지금까지 이탈리아를 괴롭혔던 외국 사람들의 골칫거리에 불과하니 말일세. 그러니 그치들 시끄러운 사이 우리는 얼른 운하를 파서 이득을 취해야지.”
울루츠 알리, 아니, ‘엘리자베트 술탄’의 해적선들이 아직 어디 안 가고 금각만(콘스탄티노플 앞바다)에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사가 바로 내일모레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첫삽을 뜨기 전 필요한 이런저런 준비들은 벌써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차하면 엘리자베스는 여기서 꺽정이네에게 고별하고, 얼른 선금부터 내놓으라며 (해적선 선단 이끌고) 이탈리아 도시들에 찾아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그들이 도착하기 전 이탈리아 연맹 측에서 사람을 보내, ‘숭고한 문’ 및 이쪽 실무자들과 협의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로마에 있어야 할 꺽정이 눈앞의 늙은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이곳 코스탄티니예에서 재회하리라 예상도 못한 노인네를 만나게 되니 은근 반가웠으나, 그 반가움은 배배 꼬인 꺽정이 심성으로 말미암아 영 퉁명스럽게 툭 튀어나갔다.
“헌데 그게 노인장이랑 무슨 상관이오? 말년에 갑자기 역마살이라도 붙었소?”
“이놈이 갈수록 못하는 말이 없네? 이 몸 어르신이 이래봬도 이탈리아 안에서 가장 이름난 건축가 아니더냐.”
“아니, 그런데 어르신이 지금 맡고 있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소. 로마에서 대웅전(성 베드로 대성당) 짓는 것이야, 내가 어르신 부추겨서 내팽개치라 하였으니 할 말은 없지만.”
“흥, 내 눈썰미와 재주를 필요로 하는 일감이 뻔히 있는데 한두 가지 일만 붙잡고 있는다면 그게 재능 낭비지. 조수 녀석들에게 맡겨도 될 일에 무엇하러 우직하게 붙어만 있는단 말이냐?”
예술 작품과 건축물만큼 유명하진 않아서 그렇지, 당대의 많은 이름 높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성벽과 해자를 비롯해 보다 실용적인 토목공사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는 미켈란젤로였다.
말만 거창하지, 생전에 첫 삽 뜨는 것이나 볼 수 있을까 싶던 클리스마(수에즈) 운하 건설이 탄탄대로 걸으며 앞으로 추진되고 있었으므로, 결코 로마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를 막아야 할 교황 바오로 4세도, 추락한 위신과 공의회 준비로 인해 도저히 그를 막지 못하였고, 그렇게 베네치아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배 타고 곧장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운하 건설 계획이랍시고 얘기 나오는 걸 보니, 내가 직접 오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그 정도요?”
“건축의 ‘A’ 자도 모르는 놈이 내놓은 발상인 게 틀림없다.”
그 말 나오기 무섭게, 미켈란젤로보다도 먼저 운하 사업에 관심 보였던 건축가 시난(Mimar Sinan)이 들어왔다.
“아, 어떻게 용케 찾아오긴 했군그래. 건축도 모르는 놈이 길치이기까지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반갑소. 이곳 코스탄티니예에서 부족하게나마 건축으로 이름을 알린 시난··· 아니, 잠깐, 무어라 하셨소?”
멀쩡한 저의 처소 내버려 두고 굳이 꺽정이 머무는 처소로 시난을 부른 것도 미켈란젤로요, 본인이 나타나자마자 시원한 욕지거리로 인사를 갈음하는 것도 미켈란젤로였다.
시난이 지은 모스크와 여러 다른 건축물들은, 이미 건축을 소명으로 삼으려는 모든 이들이 따라 배워야 할 귀감이라 칭송받고 있었다. 그처럼 이름 높고 나이도 지긋한 시난이었지만, 그런 그보다도 나이 많고 이름 더 높은 - 시난은 쉴레이만에게 대들지 못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교황 여럿과 드잡이질도 하지 않았던가 - 미켈란젤로였다.
“부오나로티 선생, 그대의 명성은 이곳에서도 자자하오. 그런 사람이니, 이 사람의 재주 부족하다 무어라 하는 것은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소. 하지만 신께 맹세코, 나는 나의 건축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소이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황당하고도 모욕 가득한 언사를 하는 것이오?”
미켈란젤로보다는 훨씬 성정 유순하고 인망도 좋은 시난이었지만, 장인으로서의 고집은 미켈란젤로 못지않았다.
“근거? 근거야 눈 있는 놈은 다 볼 수 있을 만큼 훤히 있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도면을 운하 계획이랍시고 만들었는가?”
운하 계획이 순풍을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난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후원을 받아, 현지에 사람을 보내 측량에 들어갔다.
그리고 금방 계획을 만들어내었는데, 과연 시난다운 솜씨라고 모두들 찬탄하였으나 미켈란젤로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작 운하 한 줄로 무엇을 하겠다고? 이 도면을 보아라!”
측량 결과,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정되고 있었다. 허나 문제는 바다 자체였다.
지중해와 홍해 모두 바람이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바다. 둘 사이에 운하를 뚫는다 한들, 바람의 힘에만 의지해서는 이곳을 자유롭게 오가긴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정작 그 너머 인도양을 오가는 데 있어서는, 갤리선보다는 카락이나 갈레온, 제벡(Xebec)이나 다우(Dhow) 선처럼 순수한 범선이 훨씬 적합하였다.
“그러니 운하의 폭은 줄이고, 대신 바람이 불리할 때면 양 옆에서 가축의 힘을 빌려 배를 움직일 수 있도록 운하를 두 줄로 파는 것이지! 그리고 폭이 줄어든 만큼 공사가 용이해질 테니, 이 어찌 좋지 않은가! 나중에 추가적인 공사를 할 때도 다른 한쪽으로 계속 통행할 수 있을 테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이오! 그렇게 하려면 가운데에 길게 생길 섬에도 사람과 가축을 두어야 할 텐데, 그 운영 비용은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오?”
“다리를 놓아야지! 건축가라는 놈이 그런 생각도 못하는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으리라 짐작하시오? 다리 짓는 일로 이름 떨친 나 시난이올시다! 어떤 다리를 짓더리도 돛대 높이보다 더 높게는 지을 수 없소! 이는 자명한 사실 아니오? 그대들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룸(로마)이 동쪽으로 옮겨온 뒤 건축의 기본을 잊은 모양이지?”
“흥! 이래 봬도 너희 술탄 할애비 때부터 이 일로 이름 날린 이 몸이다. 고작해야 그레코(그리스) 사람들 해놓은 것 베끼는 주제에 무슨 건축을 안다고, 쯧쯧··· 건축상의 많은 문제는 노력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법이거늘. 자, 이것을 보아라!”
이번에는 다리 도면을 꺼내는 미켈란젤로였다. 양쪽에서 다리를 내리는 형식의 거대한 도개교였다.
“허, 이것은···”
“어떤가,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여기 이 높은 탑이 운하 주요 구간에 대한 감시까지 겸하도록 하고···”
“흠, 의외로 괜찮은 생각이오···”
시난이 먼저 자존심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가로서의 자부심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래, 뭐, 그대의 계획에서도 쓸모 있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 것일세.”
그렇게 되니, 진중한 상대의 낯에 침을 마저 뱉을 수 없는 고로 미켈란젤로도 이 군인 출신 투르크 건축가를 인정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겉치레 언사라기에는 나름 진지한 어조였다.
물론, 갑자기 괴팍한 늙은이와 덜 괴팍한 늙은이가 저의 머무는 방에 뛰쳐들어와 도면이나 펼쳐보고 있으니, 꺽정이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 해서, 술이나 마시러 가자?”
암만 기다려도 두 늙은이의 진중한 대화는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운데서 통역하던 베네치아 측 수행원이 먼저 지쳐서 교대를 청하게 되었다.
그사이 두 늙은이는 아예 저들 아래서 일하는 조수들까지 데려와, 남의 유숙하는 집에서 회의를 벌이고 있었으니, 객지에서 이런 황당한 일을 겪을 줄 알았겠는가.
하여, 꺽정이는 자신이 저의 방에서 여독 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심산에, 가만 있던 일행들을 모두 대동하고서 셰자데 셀림의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어차피 여기서 왕자님과 헤어지면 적어도 십수 년은 재회할 일 없지 않겠소? 살아서 다시 못 본다 생각하고 코 비뚤어질 때까지 즐겨야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생소한 내용과 씨름하며 국정 현안에 관한 온갖 기록들을 읽고 있던 셀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꺽정이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저도 그런 버릇이 생겼다.)
금각만에서의 사소한 소동 이후로, 바예지트는 영지를 잃고 코스탄티니예 저택 - 한때 꺽정이가 신명나게 털었던 그곳 - 에 연금되다시피 했다. 뭣에 홀렸는지는 몰라도, 불만은 일언반구 꺼내지 않고 심지어 마지막 몸부림조차 치지 않으며, 그저 쉴레이만이 모아들인 서쪽 신대륙에 대한 서책과 지도들을 청하여 읽어내려가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고 했다.
셀림 역시 영지를 잃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미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형제 간의 다툼에 대한 처벌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처벌이라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쉴레이만조차, 그러한 조치를 발표한 뒤 바로 이튿날, 톱카프 궁에서 열리는 디반(내각) 회의에 셀림의 자리를 둘 것이라 선언하였다.
“곧 왕자님이 다스리던 고을에 머물던 식솔들도 모조리 상경한다 하지 않았소? 그때가 되면 술을 마시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마시게 될 텐데, 괜찮겠소? 술동무는 사라지고 안주인 마님 감시나 받겠지. 우리네 임금님도 그래서 사관보다 지밀상궁이 더 무섭다고 하던데.”
저의 임금 험담을 숨 쉬듯 자연스레 하는 꺽정이였다. 허나 셀림은 그것보다 ‘안주인 마님’, 즉 누르바누 이야기 나온 것에 뜨끔하여 그 험담을 마음에 깊게 두지 못하였다. 물론 누르바누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함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내가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운신의 폭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좋소. 좋아. 우리가 그래도 한 해 동안 이런 일 저런 일 같이 겪은 사이인데. 헌데 예전처럼 저택에서 마시기는 어렵소. 그, 아버지께서 술을 줄이라 하셔서.”
아버지 쉴레이만은 술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술에 취한 자가 눈에 띄면 붙잡아다 목에 녹인 납을 부어 넣는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주로 술꾼들 사이에서 전하는 소문이었다.)
물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셀림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으므로, 고작 술 좀 더 마신다고 큰 탈이야 나겠냐만, 아직 셀림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는 그만큼 무겁고 컸다.
“그러면 밖에 나가서 마시면 될 일이지. 우리나라에도 임금이 원래 종종 미복하고 돌아다니며 노니는 법도가 있다오. 나랑 함께 다니면 시정잡배가 건드릴 일도 없을 것이고. 듣자하니 여기서는 술집을 술집이라 못 부르고, 그 뭐라 한다더라?”
“셰르베트(과즙 음료) 가게라 한다더군요.”
이탁오가 슬쩍 덧붙여주었다.
“그래, 그곳. 여하간 그런 데 몰래 가서 한 잔씩 하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겠소? 이왕이면 내 이름으로 아예 주막을 통째로 세 내어버리지, 뭐. 이방인들이 왁자지껄 술 먹는다 하면 누구도 의심치 않을 테니.”
유난(그리스인) 사람들과 베네디크(베네치아) 사람들 사는 구역에 주로 많은 ‘셰르베트 가게’들 중에는 셀림이 종종 찾던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떤 가게 주인도 저의 집 단골이었던 주정뱅이 금발 사내가 ‘그’ 주정뱅이 금발 사내임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리라.
결국 꺽정이의 꼬드김에 셀림 마음 속의 작은 술고래가 동하여, 안팎에서 함께 셀림을 부추기게 되었다.
“자, 그러면 변복하고 바로 나서십시다. 사람 하나 보내서 내 이름으로 가게를 세 내고···”
그때, 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뜨끔한 셀림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보고서와 책들을 대충 정리한 뒤 들어오라 말했다. 이미 꺽정이와 그 패거리가 들어온 시점에서 방을 어떻게 정리하든 어지러워 보이리라는 데는 생각이 못 미쳤던 것이다.
“소콜루 메흐메트가 셰자데를 뵙습니다. 수에즈 운하와 관련하여 급히 고할 사안이 있어, 술탄께 아뢴 이후 윤허를 받아 바로 셰자데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흠흠, 무슨 사안이기에 그러시오?”
“미스르(이집트)의 디반(의회)에서, 운하 건설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무어라?”
미스르의 디반은, 맘루크들을 정복한 뒤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세워준 기관이었다. 어지간한 일들은 저들끼리 처결하되, 반란만은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디반에서 작정하고 반기를 들었으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영지에서 인력을 차출하거나 추가 조세를 제공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맘루크 출신 외즈데미르 파샤가, 모카 항에서 꺽정이에게 마지못해 밝혔던 것처럼, 수에즈 운하를 뚫든 말든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교역이 다시 흥성케 되는 것은 맘루크들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냥 좋은 일이 아니라, 어쩌면 알 카히라(카이로)와 이스칸다리야(알렉산드리아)가 코스탄티니예와 샴(다마스쿠스)을 제치고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란이, 코스탄티니예를 넘어 우루바(유럽) 전체를 휩쓸게 되자 슬슬 딴생각 품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 운하를 파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금과 인력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재정은 서방 국가들만으로도 충당할 수 있겠지만, 인력만은 현지에서 조달해야 할 터.
그리고 지금의 판세를 보면, 이미 거의 모든 군주와 국가들이 이 운하 사업에 달려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더 높은 값을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영지의 백성들을 일꾼으로 내주지 않겠노라 한다면, 저들이 어디서 사람을 데려오겠는가?‘
물론 데려오려면 데려올 수야 있을 테다. 잔지(Zanj, 동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데려오든, 아니면 어딘가에서 싼 값으로 부릴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찾아 끌고 오든, 아직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은 대체로 그리 귀하지 못하였고, 도처에 싸구려 일손이 널려 있었으므로. (심지어 많은 경우는 그런 일손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칼질 한두 번으로 끌고 올 수도 있었다.)
허나 공사에 필요한 만큼의 일손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겠는가? 그만한 물량을 단번에 확보하는 것은 여간 큰일이 아닐 터. 어떻게 해도 미스르 현지에서 사람을 차출하는 것보다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맘루크들은 작정하고 배짱을 부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멘의 베일레르베이 외즈데미르 파샤가 이 사실을 먼저 고해왔습니다. 모든 맘루크들이 그런 음험하고도 불순한 발상에 동참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는 오스만 조정에 충성하는 마음뿐 아니라, 간악한 림 파샤와 지아웃딘 알 시니를 상대하려 했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외즈데미르 파샤의 직감에 말미암은 것이기도 했다.
“외즈데미르 그자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잘 보호받는 나라에 충성을 바친 숙장(宿將)이라 들었소. 혹시 그가 이번 일을 어찌 해결할지에 대해 따로 제의한 바가 있었소?”
“맘루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원정을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맘루크들은 미스르에서 영지를 유지하며 무시 못할 세력으로 남아있었고, 비록 술탄의 예니체리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지만 아직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부려, 홍해와 그 인근의 땅을 완전히 평정하여 이슬람의 영역으로 확보한다. 기독교 국가들과의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 전비를 다른 쪽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 확보될 영토의 주된 이권과 세력은, 물론 최전선에 서는 맘루크들에게 갈 터. 즉 외즈데미르는 나름대로 오스만 투르크의 국익을 완전히 희생하지는 않으면서 저의 동류(同類)들을 만족시킬 방책을 제안한 것이다.
“문제는 그 ‘나가야 할 전비’가 사실 나가야 할 전비가 아니라는 데 있겠군.”
“영명한 말씀이십니다. 셰자데의 아버지이시자 저의 주군이신 술탄께서, 비야나(빈)를 재차 공격하는 대신 이미 확보한 땅을 굳히는 데만 치중하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때, 갑자기 꺽정이가 큰 소리 내며 끼어들었다.
“허어,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군! 당장 조처할 방도를 물색하겠소이다. 우리들이 왕자님을 도와 의논토록 하겠소.”
림 파샤의 ‘의논’이 대충 어떤 것인지 겪어보아 아는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군말 않고 물러났다.
그로부터 한참 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기독교인들이 사는 구역 한쪽의 제법 번듯한 술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림 파샤라고도 하는 코우지오니스가 아예 가게를 통째로 빌려, 이곳에서 만난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고 하였다.
소문은 떠들썩하게 났지만, 그 코우지오니스의 완력과 서쪽 땅에서의 믿지 못할 이야기들로 인해, 그런 소문난 잔치에 흔히 찾아올 법한 걸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미복한 채로 나온 셀림을 누가 보고 입을 함부로 놀릴 일은 없는 셈이었다.
“이게 ‘조처할 방도를 물색’하는 것이오?”
셀림이 짐짓 뚱한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냥 메흐메트 그 사람 떼어놓으려고 한 말이지.”
“큭큭. 내 그럴 줄 알았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합시다, 흐흐.”
꺽정이도 함께 웃었다.
흑의군 놈들도, 파리로 가는 길목에서 흥청망청 놀았던 것과 달리 잉글랜드나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는 숨죽이고 지냈으므로, 간만에 제멋대로 노는 판 만나 아주 신이 났다.
그 떠들썩한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셀림이 술잔 들며 말했다.
“그리울 게요. 그대도 그렇고, 지아웃딘 선생도 그렇고. 여기 재간둥이 도키치로도 그렇고.”
“술맛 떨어지는 소리 용케도 하는구려.”
“파리로 향하는 길에 보르도 포도주를 대접받은 이래로, 이곳에서 마시는 포도주가 썩 시원찮은 것을 알게 되었소. 이미 떨어진 술맛인데 좀 더 떨어져도 괜찮지, 뭐.”
어느새 술 들어가면 제법 능글맞은 소리도 하게 된 셀림이었다.
그렇게 술자리는 이어지고, 왁자지껄한 가운데 흑의군 녀석들 골려먹고 다니던 꺽정이는, 도키치로가 이곳 코스탄티니예에서 장인을 찾아가 손짓발짓 끝에 만들었다는 그 ‘멀리 보는 대롱’을 빼앗아 달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셀림 곁을 떠나 있다 돌아와보니, 어느새 셀림 옆에 이탁오와 엘리자베스가 앉아 정다운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 아닌가. 귀를 기울여보니 전혀 정답지 않은 얘기를 정답게 하고들 있었다.
“그나저나 맘루크들이 그렇게 말썽을 부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글쎄, 외즈데미르 그이가 제안한 남방 정벌은, 답은 답이지만 영 좋지 못한 답이오. 가장 뒤로 미루어놓고 대안을 고심해보아야겠지.”
“이래서 똑똑한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면 피곤하다니까. 거 이런 데서까지 딱딱한 얘기 해야겠소?”
꺽정이가 한 소리 했는데, 술자리 소리에 묻혔는지, 아니면 엘리자베스와 이탁오 모두 술자리의 들뜬 흥취에 거나하게 취하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남녀 사이의 그런 일이 두 목석 같은 남녀 사이에도 새싹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 그대로 묻히고야 말았다.
“파르스(페르시아) 땅 너머에 힌두스탄(북인도)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곳은 사람도 많고, 또 파르스를 견제하기 위해 종종 이 나라와도 사신을 주고받는다고 들었는데요.”
꺽정이만큼이나 눈치 없는 셀림이 끼어들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읽기로는 아직도 그 나라의 샤(Shah) 후마윤이 급사한 뒤에 찾아온 혼란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하였소. 그 어린 아들 악바르(Akbar)는 제법 재주가 있어 그 섭정 바이람 칸과 함께 수습에 힘쓰고 있다지만, 아직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라오.”
무갈이니 무굴이니 하는 그 나라는, 칭하기를 몽고의 말예가 세웠다 하였는데, 이미 먼 옛날 월지(月支) 국이 망하였다 다시 세워지기를 거듭하며 이곳저곳 옮겨다닌 사연은 옛 서적에도 잘 나와 있었으므로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한문으로 옮기면 남원(南元)쯤 되지 않겠는가 지레짐작하고 있는 이탁오였다. (이탁오가 대명 조정에 올린 글을 읽은, 장거정이 그것을 보고 이러다가 서쪽에서도 달단(韃靼, 타타르) 무리가 쳐들어오는 것 아니냐고 기겁하게 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도저히 세 사람 대화에 낄 엄두가 나지 않아, 도키치로나 더 괴롭히러 갈 심산으로 꺽정이는 발길을 돌렸다. 빼앗아온 이 재미있는 유리 대롱도 돌려주어야 했으니.
헌데 그냥 돌려주자니 아쉬워, 한 번 더 눈에 대고 거리를 구경했다. 그런데 멀찍이 골목에서, 딴에는 몰래 움직이려 애쓰는 듯한 인영 두엇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나름 공을 들였는지, 얼굴에도 먹칠을 한 듯, 드러난 살갗은 까무잡잡했다.
“야, 도키치로야.”
“아, 당수, 그 대롱 돌려주십쇼! 제가 얼마나 공 들여···”
“그래, 너도 봐라. 저기 저것들 보이냐?”
“고맙습니다··· 엇, 수상한 놈들 아닙니까? 남의 눈 피하면서 다가오는 게, 이 동네에도 시노비(닌자)가 있는 것일까요?”
“시노비고 사노비(私奴婢)고, 수상한 놈이면 잡고 봐야지. 네가 조금 더 지켜보고 있다가, 어째 심상찮다 싶으면 아직 덜 취한 애들 몇 데리고 가서 잡아오너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상한 놈’들이 꺽정이 앞으로 붙잡혀 왔다. 어지간히 눈치 없는 놈들이거나 절박한 놈들인 모양이었다.
“이보쇼, 왕자님, 정말로 높은 사람이 되셨나 보오. 이렇게 자객들도 찾아오는 걸 보니.”
꺽정이 말을 이탁오가 옮기는 것을 용케 들었는지, 붙잡혀 온 두 놈이 몸부림치며 무언가 외쳤다.
그리고 곧장 셀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놈들이 말하기를, 저들은 사절이고, 림 파샤라는 분을 찾아왔다는데요.”
“나를? 왜?”
“저들의 임금이 동방에서 찾아온 용사에게 간곡히 전하려는 말이 있답니다. 저들 나라를 구해달라 하는데요.”
꺽정이가 지금까지 백정이니 돈 뭐시기니 하는 말은 다 들어보았지만, ‘용사’라는 말은 처음 듣는 듯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저의 면전에서 좋은 말 해 주면 절로 기분 좋아지기 마련. 지금껏 걱정덩어리니 우환이니 소리 듣다가 ‘용사’ 소리 들으니 어째 이 두 잡놈 말을 듣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후예, 에티오피아의 네구스(황제) 갈라우데워스(Galawdewos)로부터의 구원 요청이 곧 코스탄티니예의 한 주점에서 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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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 2세가 주정뱅이로 소문이 났다는 사실, 즉 셀림 본인이 그러한 소문을 결코 좌시하지 않아 과격하게 탄압한다던가 하지 않았고, 또 민중도 그저 우스갯소리로 삼을 만한 가벼운 흠결 정도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음주에 관대했던 당대 풍토를 반영합니다. 1562년 쉴레이만이 금주령을 내리자,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던 유럽 외교관들과 코스탄티니예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금주령 철회를 요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이때 금주령 철폐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합스부르크 대사 부스베크는 기독교인들은 포도주를 주기적으로 마시지 않으면 병으로 죽는다는 괴담을 만들어 퍼뜨렸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한동안 오스만 측에 붙잡힌 기독교인 포로들은 식량은 몰라도 항상 술은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야사가 전합니다.)
이후에도 금주령은 술탄의 음주 취향에 따라 내려지고 번복되기를 거듭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기독교인들의 주류 판매는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관용 정책 덕분이기도 했지만, 금지된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을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부과하는 조세 수입이 제법 짭짤하였던 것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치하의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면서 제국 내의 포도주 생산도 늘어났고, 나중에는 아나톨리아와 크림 반도의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도 판매를 위한 (과연 판매만 했을까요?) 포도 재배 및 양조업이 흥성하게 됩니다 (Halenko, 2004. “Wine Production, Marketing and Consumption in the Ottoman Crimea, 1520-1542.”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47(4)). 당시 코스탄티니예 시민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주점에 가는 것을 에둘러 ‘셰르베트(과즙음료) 가게에 간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전에 지나가듯 언급된 오스만 투르크의 위대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전하는 말에 따르면 100세 가까이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도 어지간히 장수하여 90세를 눈앞에 두고 사망하였으니, 그 눈에는 아직 한참 저보다 기수(?)가 낮은 사람인 셈입니다.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부계 쪽으로는 티무르의 혈통을 이었고 모계 쪽으로는 황금씨족(칭기스 칸의 일족)의 피를 이었습니다. 몽골의 전통적인 셈법에 따르면 황금씨족의 일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몽골의 후예를 자처할 만하지요. 그는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남서쪽으로 진출하여, 아프간-파키스탄-북인도에 이르는 세력을 구축했고, 그 아들 후마윤은 파란만장한 삶을 거치며 이 햇병아리 제국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후마윤이 도서관 계단에서 실족하면서 허망한 죽음을 맞으며 흔들리는 듯하였던 무굴 제국은, 그 아들 악바르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인도 거의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지요. 다만 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후마윤 급사 이후 북인도에서 벌어진 치열한 싸움이 막 끝나가는 시점이고, 그마저도 아직 라지푸트 지방을 확보하지 못해 오스만 투르크와의 직접적인 교류도 어려운 상황입니다.